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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3년 누가복음 40강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누가복음 23:50-24:53)2023-02-13 0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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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누가복음 제 40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말씀 / 누가복음 23:50-24:53

요절 / 누가복음 24:6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오늘 말씀은 누가복음 마지막 강의입니다. 내용적으로는 누가복음이 4 복음서 중에서 가장 긴데, 그동안 1장 처음부터 오늘 끝까지 배우도록 하신 하나님께 깊이 감사를 드립니다. 본문은 누가복음의 클라이맥스입니다. 복음의 완성부분이죠. 주님께서 우리에게 은혜 주셔서 이 말씀을 깊이 이해하고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에 굳게 세워주시길 기도합니다. 오늘 본문이 길기에 단락별로 포인트 있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죽으시고 묻히셨습니다.

50,51절입니다. "공회 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그들의 결의와 행사에 찬성하지 아니한 자라) 그는 유대인의 동네 아리마대 사람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지난 주 말씀에서 보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시체를 수습한 사람은 제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여인들도 아니었습니다. 공회 의원이었던 아리마대 요셉이었습니다. 마가복음15장을 보면 그가 총독에게 예수님의 시체를 요구합니다. 그때 빌라도는 예수님이 정말 죽었는지 백부장에게 확인을 합니다. 확인을 받고 나서 요셉에게 시체를 내어 줍니다(15:44,45). 또한 실제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직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요한복음 19장은 말합니다. 안식일 전에 시신들을 수습해 달라는 유대인들의 요청에 따라 군병들이 가서 십자가에 달린 사람들을 조사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못 박힌 두 사람은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숨을 쉬지 못하도록 그들의 다리를 꺾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보니 이미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다리를 꺾지 않고 무엇을 했습니까? 창으로 그의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그러자 그 몸에서 피와 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19:33,34).

 

예수님의 시신은 십자가에서 내려져 아리마대 요셉이 자신을 위해 파 두었던 무덤에 넣어졌습니다(27:6). 이 광경을 목격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55,56절과 같이 "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묻힌 것을 확인한 후 돌아가서 향품과 향유를 준비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무덤에 묻히신 이 사건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확실성을 말해줍니다. 그는 확실히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팩트이며 장사된 것도 팩트입니다.

 

둘째,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 부활의 증거 세 가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 빈 무덤입니다. 24 1-3절을 보면 여인들이 무덤에 갔을 때 예수님의 시체가 없었습니다. 무덤이 비어 있었습니다. 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부활을 부정하는 자들은 아래와 같은 가설들을 제시합니다.

 

1.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갔다' 예수님이 묻히신 시간은 금요일 저녁 6시쯤이었습니다. 주일 새벽까지는 약 36시간이 됩니다. 그 동안 제자들이 시신을 훔쳐 갔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사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우려한 일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하고 '그가 살아났다'고 헛소문을 퍼뜨리며 교세를 확장할 것을 두려워했습니다(27:62-66). 그래서 그들은 빌라도에게 청하여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했습니다. 빌라도는 경비병을 데려다가 무덤을 돌로 인봉하고 굳게 지키게 하였습니다(27:66). 그런데 보십시오. 2절을 보면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지고 예수님의 시체가 사라졌습니다. 이것이 제자들이 한 일일까요? 그렇게 볼 수 없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잡히실 때 모두 도망갔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실 때 근처에도 오지 못했습니다. 이런 그들이 도리어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로마 경비병들과 싸웠을까요? 그 무거운 돌을 굴려내고 예수님의 시신을 가지고 갔겠습니까? 11절 말씀을 보면 제자들은 오히려 무덤이 비었다는 여인들의 말을 들었을 때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않았습니다.

 

2.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훔쳐갔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 시신을 훔쳐가서 얻을 이득이 하나도 없습니다. 도리어 제자들이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주장하면 낭패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의 시체가 오랫동안 무덤에 확실히 있어야 그 추종자들의 세력을 단단히 틀어막을 수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갈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3. '예수님이 거의 죽음에 이르렀지만 실제는 죽지 않았다’. 무덤에 있던 36시간 동안 빠르게 회복되어 무덤을 뚫고 빠져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다는 것을 위에서 살펴보았습니다. 그는 십자가에서 옆구리에 창에 찔렸고 그의 죽음을 확인한 병사들이 시체를 내어 주었습니다.

 

이상을 볼 때, 빈 무덤을 설명할 길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기독교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선포하는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를 부정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증거는 그의 시체를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지난 2천년 동안 아무도 그의 시체를 보이지 못했습니다. 아무도 납득할 만한 다른 설명을 제시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빈 무덤은 예수님이 부활하심을 확실히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눈으로 볼 수 있고 확인할 수 있는 역사적인 증거입니다.

 

첫째 증거는 빈 무덤이고, 이제 둘째 증거는 수많은 부활의 증인들입니다. 무덤에 간 여인들은 빈 무덤을 두 눈으로 보았습니다. 천사들로부터 직접 예수님 부활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5,6절입니다.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8-10절을 보면 천사의 증언을 들은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 또 그들과 함께 한 다른 여자들이었습니다. 적어도 다섯 사람 이상이었습니다. 나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친히 나타나십니다. 승천하시기 전 40일 동안 계시면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십니다. 나중에 핍박자 바울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변화됩니다. 바울은 자기가 고린도전서를 쓸 당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이 500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수많은 증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소심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 순교도 마다하지 않는 담대한 증인들이 되었습니다. 제자들의 이러한 변화는 다른 것으로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셋째 증거는 예수님 자신이 하셨던 말씀과 성경의 예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죽임을 당하되 사흘 만에 부활하실 것을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16:21). 예수님의 부활은 구약에도 예언된 일입니다. 구약의 특정한 예언 구절들도 있지만 (16:10, 26:19, 12:2) 구약성경 전체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요나서 전체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의 예언입니다. 창세기의 요셉의 애굽의 총리로서 화려한 재기도 예수님의 부활을 상징합니다. 부활은 하나님의 복음의 완성을 위해 필연적으로 일어날 일이었습니다. 지난 2천년의 인류 역사를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기독교는 세상 역사에 이토록 엄청난 영향을 끼치지 못했을 것입니다. 도리어 이단으로 취급되어 오래 전에 지구상에서 사라졌을 것입니다. 빈 무덤, 변화된 제자들, 예언의 말씀과 인류 역사 자체, 그 외에도 수많은 증거가 있습니다. 이러한 확실한 부활의 증거 앞에 우리는 어떤 사람들이 되어야겠습니까?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증거는 너무나 확실합니다. 믿음 없음이 문제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첫째,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음으로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해지고 영원한 생명을 얻은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둘째, 예수님을 부활하게 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큰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 살리신 부활의 능력입니다.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죽을 몸도 살리실 것입니다(8:11). 우리는 이러한 부활의 믿음과 소망으로 살아가야합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부활의 믿음이 실제적인 능력으로 나타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셋째,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여러 사람들을 만나셨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극적이고 아름다운 장면은 바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를 만나주신 사건입니다. 13,14절입니다. "그 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여기의 두 사람은 열한 사도에는 들지 않았지만 그들과 같이 있던 제자들이었습니다(9). 그 중 하나의 이름은 "글로바"였고 다른 하나는 알 수 없습니다. 그들은 여인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알린 "그 날" 즉 주일에 사도들과 함께 예루살렘에서 그 소식을 직접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여인들의 이야기를 그렇게까지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분명 놀랐지만, 도저히 믿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계획대로 아마도 그들의 고향인 엠마오로 향하게 된 것입니다. 엠마오는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곳에 있었습니다. 10km입니다.

 

22-24절을 보면 주님의 부활에 대한 그들의 불신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아나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또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이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 이들의 표현을 잘 들여다보면 '예수님의 부활은 도저히 믿을 수 없어…'라는 마음의 소리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천사를 통해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분명히 말씀하셨고 여러 여인들이 이를 확실히 들었다. 베드로와 요한도 확인했다!" 이렇게 분명히 말하지 않습니다. 부정적으로 말합니다. "여자들이 시체는 못 봤는데천사를 봤다고 하더라" "베드로와 요한도 무덤에 가서 여인들의 말을 확인했는데 결론은 예수는 보지 못했다"입니다. 결국은 주님의 부활을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왜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을까요? 그 답은 17b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은 슬픈 빛을 띠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슬픔으로 가득 찼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슬픔에 빠져 걸어가면서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입니다. "어떻게 그분이 그렇게 돌아가실 수 있지? 그분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시고 나사로도 살리지 않으셨는가? 그분 말고 정말 메시아가 또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분은 정말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가 아니었단 말인가?" 그들은 예수님께 많은 기대를 하였지만 이제 그들의 꿈은 산산조각 나버렸습니다. 허탈함과 슬픔을 가득 안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다가가서 "너희가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았느냐?"고 물으셨고(17), 두 제자 중 하나인 글로바가 이렇게 되물었습니다. "당신이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도 요즘 거기서 된 일을 혼자만 알지 못하느냐"(18)

 

그들은 말합니다.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이거늘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일어난 지가 사흘째요"(18-21)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라면 자기 백성을 구원하셔야 하는데, 이렇게 자기 백성의 손에 죽어버리다니! 예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할 자가 아니었다는 말인가? 하지만 그분의 말씀과 행하신 일에 하나님의 능력이 분명히 나타나지 않았는가? 이 일을 설명할 길이 전혀 없었습니다. 어떻게 이 일을 이해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엄청난 혼란과 슬픔이 제자들의 마음을 가득 채웠습니다. 이런 그들은 여인들의 이야기를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그럴 때가 있습니다. 주님이 정말 살아계시는가 의심이 들 때가 있습니다. 주님이 살아계신다면, 왜 나에게 이런 일을 허락하시는 걸까? 왜 내가 처한 이 상황에서 고통 받는 것을 그냥 지켜만 보고 계신 걸까? 정말 살아계신다면, 왜 내가 그토록 간절하게 바라는 것을, 이기적인 이유로 구하는 것도 아닌데 주지 않으시는 걸까? 우리도 때로는 주님이 살아계신다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그것을 믿기가 힘듭니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혼란과 슬픔은 너무나 크고 현실적이기 때문입니다.

 

서산에 해가 지고 있을 때, 그들의 주님께 대한 믿음도 점점 더 어두워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두 제자를 예수님은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마치 탕자를 영접하기 위해 먼 거리에서 그를 향해 달려갔던 아버지처럼, 믿음을 잃고 떠나가는 그들을 붙잡기 위해 뒤를 따라 걸어오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홀연히 그러나 자연스럽게 나타나 그들과 동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을을 지나쳐 계속 가려고 하셨고, 제자들은 강권하여 예수님을 집으로 모셨습니다(28,29).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유하며 음식을 잡수셨고 떡을 가져다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셨습니다(30). 바로 그때 그들의 눈이 밝아져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그 순간 예수님은 그들에게 보이지 않고 사라졌습니다(31).

 

그때 두 제자는 어떻게 말했습니까? 32절입니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그들은 "봤지? 예수님 맞지? 정말 그분은 살아계시구나! 그분을 보고 나니 이제야 마음이 뜨거워진다! 이제야 믿음이 생긴다!" 그렇게 말했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이 흥분하며 서로에게 외친 말은 다음과 같습니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32)? 그들의 마음에 가득 차 있던 혼란과 슬픔을 모두 걷어내고, 그들의 마음을 뜨겁게 만든 건, 다름 아닌 예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풀어 주실 때에, 그들의 오해가 말씀으로 바로잡혔을 그때! 그들의 상황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해가 되었을 때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 믿음으로 인해 마음이 뜨거워진 것입니다.

 

그들이 길 위에서 있었던 장면을 다시 자세히 살펴봅시다. 그들이 예수님의 죽음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토로했을 때, 예수님은 이렇게 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25,26) 여기서 '미련하다'는 것은 멍청하다는 경멸의 표현이 아니라, '생각과 이해가 부족하다'는 책망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선지자를 통해 너희에게 분명히 말씀하신 것을 너희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구나, 말씀대로라면 그리스도가 마땅히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강해 설교를 시작하셨습니다.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여주셨습니다. 곧 구약성경에 기록된 그리스도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을 자세히 풀어 설명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그들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뜻대로 죽으시고 제 삼일에 부활하셔야 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이해가 되자 믿음이 생겼습니다. 믿음이 생기자 혼란이 사라지고 슬픔이 걷혔습니다. 그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서로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32)" 물론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시 본 것도 그들에게 큰 기쁨을 주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먼저 이해할 수 없었던 그리스도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말씀을 통해 확실히 알고 믿어야 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간절히 원하는 것을 주시기도하고, 내가 처한 위기를 극복하게도 하십니다.  이러한 체험들을 통해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증거를 확실히 보여주시면 한 방에 믿음이 생기고 마음이 불타오를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걸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그런 식으로 자라지 않습니다. 우리에겐 말씀이 필요합니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합니다(8:28). 내가 원하는 것을 주지 않으시는 것 같은 환경에서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하신 말씀이 필요합니다(6:32). 우리는 하나님이 보이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믿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11:1). 그리고 이 믿음은 오직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납니다(10:17). 말씀을 이해함과 영접함이 믿음의 뿌리입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말씀을 잘 풀어 가르치는 것의 중요성을 보게 됩니다. 좋은 성경공부란 어떤 공부일까요? 또한 좋은 설교란 어떤 설교일까요? 이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풀어 잘 가르치는 공부와 설교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말씀을 잘 가르치고 잘 배우는 것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것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는 동안 살아계신 하나님이 잘 느껴지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믿음이 연약해지고 혼란과 슬픔이 마음을 채워나갈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불타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게 하는 힘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우리가 늘 말씀으로 믿음을 세우며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이 뜨거운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넷째,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이제 두 제자는 무엇을 했습니까? 33절을 보면 그들은 "곧 그때로 일어"났습니다. 즉각적인 반응이었습니다. 믿음을 포기한 채로 고향으로 돌아가 자리 잡을 계획이었었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왜 죽으시고 부활하셔야 했는지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분명한 뜻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엠마오로 갈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즉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마 가는 길은 느리고 무거웠을 테지만 돌아오는 길은 빠르고 가벼웠을 것입니다. 엠마오에서 돌아온 두 제자는 열한 제자에게 자신들이 만난 예수님을 증거하였습니다. 그런데 36절을 보십시오.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 예수님은 친히 그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의심하는 그들을 위해 구운 생선 한 토막을 잡수시며 부활의 확실함을 증거하셨습니다. 그리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통해 성경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 가르침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이는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 일에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46,47). 예루살렘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곳입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생명의 문을 여신 곳입니다. 이곳에서 회개의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됩니다. 모든 인간들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사건 앞에 설 때에 비로소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습니다. 자신의 인생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은 후에는 부활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고 하십니다. 당시 예수님의 증인이 된다는 것은 매우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 믿는 자들은 출교를 시키고, 사회에서 매장시켰습니다. 죽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런 모든 핍박을 각오하고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를 전파하는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사명은 인간의 힘과 능력으로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그들에게 축복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리셨습니다. 제자들은 승천하시는 예수님께 경배했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을 하나님과 같은 존재로 영접하고 경배한 것입니다. 그 후 제자들은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슬픔과 좌절 그리고 두려움에 빠져 있던 제자들이 변했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사명을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패배자가 아니라 승리자요,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힘찬 첫걸음을 내딛게 되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사망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모든 인생들을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구원해 주실 그리스도이십니다. 모든 인생들의 찬양과 경배를 받으실 분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배움으로 믿음을 덧입고 마음이 뜨거워지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을 뜨거운 마음으로 전하는 증인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