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출애굽기 9강 여호와는 모든 신보다 크시다 말씀/ 출애굽기 17장,18장 요절/ 출애굽기 18:10,11 “이드로가 이르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너희를 애굽 사람의 손에서와 바로의 손에서 건져내시고 백성을 애굽 사람의 손 아래에서 건지셨도다 이제 내가 알았도다 여호와는 모든 신보다 크시므로 이스라엘에게 교만하게 행하는 그들을 이기셨도다 하고”
지난 주 말씀은 홍해를 건너 광야 길을 가는 이스라엘에게 쓴 물을 단물로 바꾸어 마시게 하고 먹을 것이 없는 그들에게 만나와 메추라기를 공급하시며, 이스라엘을 시험하시고 훈련하사 말씀대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키우심을 배웠습니다. 오늘 말씀은 르비딤의 두 사건과 모세의 장인 이드로의 방문입니다. 17장은 르비딤에서 일어난 두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데 아주 대조적입니다. 하나는 극심한 목마름의 고통속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계신가 안 계신가 시험하며 다투는 내용이고, 다른 하나는 아멜렉과의 전쟁에서 하나님을 신뢰하고 동역하여 승리한 내용입니다. 18장은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찾아와 하나님을 찬송하고 이스라엘의 행정조직을 정비한 내용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이드로의 신앙고백가운데 나타나는 여호와 하나님이 누구신지 배우길 기도합니다.
17:1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신 광야에서 떠나 그 노정대로 행하여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 백성이 마실 물이 없는지라”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이동했습니다. 르비딤에 장막을 쳤습니다. 르비딤은 ‘원기회복’, ‘휴식처’란 뜻입니다. 자, 그런데 무슨 문제가 생겼습니까? 마실 물이 없었습니다. 아니,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이곳에 왔으면 물이 있어야 마땅한 것 아닙니까? 마라에서는 그래도 ‘쓴 물’이라도 있었는데, 휴식처란 이곳에는 물 한 방울 구경할 수 없다니~ 말이 됩니까? 뙤약볕을 하루 종일 걸어온 백성들이 얼마나 화가 났겠습니까?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되었다’ 성인들은 어떻게든 참아보겠는데, 애들이 고통스러워 칭얼거리며 혀가 입 천장에 달라붙고, 가축들은 이곳 저곳에서 픽픽 쓰려집니다. 아주 심각한 상황입니다. 백성들이 모세와 다투어 말합니다.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 책임지라는 것입니다.
이때 모세가 무엇을 지적합니까?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그들이 무엇을 시험합니까? 7절을 읽겠습니다. “그가 그 곳 이름을 맛사 또는 므리바라 불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음이요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하였음이더라” ‘여호와께서 정말 계셔? 안 계신 것 아냐? 안 계시니까 우리가 이렇게 고통을 당하는거 아닌가?’ 이랬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물질 문제가 심각해지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셔? 안 계신 것 아니야.’ 이렇게 시험하는 마음이 들잖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시험할 대상이 아닙니다. 시험은 의심과 불신에서 나온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진짜로 이스라엘 가운데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입니까? 분명 그들은 이날 아침에도 하늘에서 내려주신 만나를 거두어 먹었을 것입니다. 현재 그들 가운데 구름 기둥이 있는 것을 모두 다 보고 있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이 계신 것을 체험하며 살아가면서도 왜 그들은 하나님이 계신가 안 계신가? 시험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들이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 않고 하나님의 손만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 모세는 어떻게 합니까? 백성과 다투지 않고 하나님께 나아가 부르짖습니다. ‘저들이 금방이라도 돌을 던지겠나이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방향을 줍니다. “나일 강을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서 호렙산에 있는 그 반석 위에서 그 반석을 치라” 지금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물입니다. 그런데 반석을 치라 합니다. 반석에는 물이 없습니다. 돌덩어리입니다. 축축한 땅을 치라든지, 나무 밑을 치라든지 해야지 전혀 물기가 없는 화강암 덩어리를 치라고 합니다. 그것도 200만명의 사람과 수많은 가축이 마실 물을 낼려면 수도꼭지를 틀어서 쫄쫄쫄 나오는 정도가 아니라 폭포수처럼 쏟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방향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모세는 하나님 말씀에 순중하였습니다. 반석을 쳤습니다. 그러자 저수지의 둑이 터져 엄청난 양의 물이 쏟아지듯이 반석에서 폭포수가 쏟아졌습니다. 큰 개울이 되었습니다. “와~. 물이다. 물~” 그들은 정신없이 물을 떠서 벌컥벌컥 마셨습니다. 모든 목마름이 해갈되었습니다. 가축도 데려와 실컷 마시웠습니다. 그동안 못했던 목욕과 빨래까지 했습니다.
신약은 이 사건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고린도전서 10장 4절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그 반석은 그리스도입니다. 나일 강을 심판했던 그 지팡이로 그 반석이신 예수님을 쳤다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상징합니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그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요19:34) 십자가에서 쏟으신 예수님의 피와 물이 그를 믿는 자에게 참된 음료가 되었습니다. 반석에서 나오는 이 물은 그리스도가 보내주실 ‘성령’을 의미합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요7:37,38),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3,1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5) 우리 인간이 마셔야 할 참된 음료는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는 물입니다. 그 물을 마실 때 인간의 근본 문제인 목마름이 해갈됩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에 대해 무엇을 배웁니까? 반석에서 물을 내시는 하나님은 불가능이 없으십니다. 하나님께서 물을 주실 수 있는가 없는가 시험하지 말고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4:19) 주위에 보이는 것은 반석 밖에 없을지라도 ‘반석을 쳐서라도 물이 나온다’는 믿음을 가져야겠습니다. 하나님은 분명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믿는 제자들에게 사명을 주시면서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분명 우리와 항상 함께 하지만 우리가 물이 없어 죽을 지경과 같은 그런 상황에 놓일 수도 있습니다. 신약에 보면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갈 때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하였지만 풍랑이 일고 배에 물이 차고 침몰할 위험까지 가지 않았습니까? 이처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가 말씀을 따라 사는데도 고난이 닥칠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이것을 허락하시는가? 우리의 믿음을 연단시키시고 성장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복음을 가슴으로 깨달아 알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스라엘이 르비딤에서 물을 마시고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어떤 일이 생깁니까? 8절을 읽겠습니다. “그 때에 아말렉이 와서 이스라엘과 르비딤에서 싸우니라” 아멜렉은 에서의 후손으로서 ‘호전적인’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민24:20절에서는 ‘민족들의 으뜸’이라고 나옵니다. 요즈음 표현으로 하면 ‘전쟁의 신’과 같은 족속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였습니다(신25:17,18) 그들은 이스라엘이 행군하다가 뒤쳐진 사람들을 공격하였습니다. 아주 비열합니다.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명령합니다. “아말렉과 싸우라.” 여호수아 이름이 처음 등장합니다. 여호수아는 순종하여 군대를 소집하여 싸우러 갑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스라엘은 지금까지 전쟁을 해 본 경험이 없습니다. 또 변변한 무기도 없습니다. 농기구나 몽둥이 정도나 있었을까요? 그들은 제대로 무장도 안된 상태에서 나가서 싸워야 했습니다. 얼마나 두려웠을까요? 본문을 보면, 성경은 여호수아가 싸운 장면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모세가 산꼭대기로 가서 지팡이를 손에 붙잡고 하늘을 향해 든 장면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아론과 훌이 함께 갑니다. 훌도 처음 등장하는데, 역사가 요세푸스는 모세의 누나 미리암의 남편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들과 함께 산에 올라갔는데 모세가 손을 들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졌습니다. 손이 무엇을 상징합니까? 힘을 상징합니다. ‘손을 위로 하나님께 들었다’ 이 말은 ‘하나님을 붙든다’,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뜻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붙들고 의지하는 믿음으로 기도를 드렸습니다. 싸움은 산 아래 여호수아가 싸우는데, 정작 승패는 산 위에서 납니다. 모세가 손을 올리면 이기고, 내려오면 졌습니다. 모세의 팔이 피곤하여 내려올 때 아론과 훌이 어떻게 합니까?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고 모세를 그 위에 앉게 하고 모세의 양쪽 손을 붙잡았습니다. 모세의 들린 손이 내려오지 않자 마침내 아말렉을 쳐서 무찔렀습니다.
어떤 신학자는 이 상황을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여호수아가 싸우는 전쟁은 이길려고 하는 전쟁이 아니었다. 이김을 나타내는 전쟁이었다” 여호수아가 전쟁의 승패를 만든 것이 아닙니다. 산 위 모세에 의해 승패가 결정되었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하시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미 이겼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싸우는 싸움은 이미 이겨놓은 싸움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이 없으니까 질 것 같고 두렵고 그런데, 사실은 예수님께서 다 이겨 놓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지상에서 싸우는 영적인 싸움은 이미 이겨 놓은 싸움을 싸우고 있음을 명심하고, 승리의 확신 가운데 담대히 영적 싸움을 싸우길 기도합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들리라고 하십니다. 여호수아는 아래에서 싸움에 열중하느라 산 위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잘 모릅니다. 그래서 자기나 이스라엘이 잘 싸워서 이긴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여호수아야~, 너 참 잘 싸웠어. 그런데 네가 잘 싸워서 이긴 것이 아니라 저 위에서 모세가 기도하고 아론과 홀이 동역하여 이긴거야. 근본적으로 하나님께서 친히 싸우셔서 이긴거야~” 이것을 알도록 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가나안 정복 전쟁을 치를 여호수아가 새겨들어야 할 말입니다. 이뿐이겠습니까? 치열한 영적 전쟁을 치르고 있는 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들어야 할 ‘싸움에서 이기는 방법, 모세 병법’입니다. 그 내용은 첫째, 여호수아의 칼날로 무찔렀다. 즉 말씀으로 마귀를 대적하라. 둘째, 기도로 싸우라. 셋째, 동역하라. 넷째, 하나님께서 이기게 하신다.
15,16절을 읽겠습니다. “모세가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고 이르되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과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 하였더라” 여기서 ‘여호와 닛시’는 ‘여호와는 나의 깃발’이란 뜻입니다. 옛날 전쟁에서는 깃발을 중심으로 싸웠습니다. 깃발을 따라 전진도 하고 후퇴도 하고 좌로도 가고 우로도 갑니다. 깃발을 보면 힘이 납니다. 용기가 납니다. 깃발은 그 부대의 장수가 누군지, 어떤 부대인지를 알려줍니다. 고대에서 가장 강력한 부대는 철기군이었습니다. 철기군의 깃발을 보면,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 떨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 닛시, 여호와가 깃발이 되었습니다. 세계 최강 애굽 병거와 싸우셔서 홍해에 수장시킨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사령관이 되어 아말렉과 싸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아무리 부족하고 아멜렉이 아무리 강해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대장이 되어 친히 싸워주셨고 승리케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가운데 분명 함께 하셨음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하나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친히 맹세하십니다. “여호와가 아말렉과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여기서 아말렉은 하나님과 교회를 대적하는 모든 악한 세력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택한 백성들을 위하여 대적하는 모든 원수들과 대대로 싸우시겠다고 하십니다. 이 얼마나 힘이 되고 든든한 약속입니까? 여호와 닛시의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셔서 우리의 대적들과 친히 싸우십니다.
8장은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모세를 방문한 내용입니다. 이드로는 미디안 제사장입니다. 그는 미디안의 수호신을 섬기는 제사장으로서 당시의 모든 근동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다신론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다신론적 세계관은 모든 나라마다 각각 그들을 지켜 주는 수호신이 하나씩 있어서 그 신의 능력에 따라 그 나라와 민족의 역량과 운명이 결정된다는 생각입니다. 이드로가 모세와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모세를 찾아왔습니다. 모세의 아내와 두 아들 게르솜, 엘리에셀을 데리고 왔습니다. 출애굽기 4장에 보면, ‘피 남편’ 사건이 나옵니다. 모세의 아들이 할례를 하지 않아서 노중에서 여호와께서 모세를 죽이려 합니다. 그때 모세의 아내 십보라가 아들의 표피를 베어 모세의 발 아래 둠으로 남편의 목숨을 건집니다. 그 사건 이후 아내와 두 아들은 장인에게 돌려 보낸 것으로 봅니다. 아무튼 장인이 헤어졌던 모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왔습ㄴ다. 모세는 나가서 공손하게 장인을 맞아 절하고 입 맞추고 문안하고 함께 장막에 들어갑니다. 그는 200만명이나 되는 민족의 수장으로서 권세가 있었지만 자기 장인에게 깍듯이 대합니다. 이방인 제사장이라고 무시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신앙의 연륜이 쌓일수록 어깨에 힘이 들어가거나 남을 가르치려고 하기 쉽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예절을 잘 지키고, 어른을 공경하고, 기본적인 관계성을 잘 맺고자 해야 합니다.
제가 치대를 졸업하고 군의관 훈련을 받기 위해 영천의 삼사관학교에 들어갔습니다. 그곳에서 교육을 받는데 군목, 군신부, 군스님이 돌아가면서 2시간씩 강의를 했습니다. 저는 나이지긋한 스님의 강의를 들으면서 큰 감명을 받아 지금도 그 내용을 잊지를 못합니다. 삼사관학교에는 기독교, 천주교, 절이 한 종교시설 건물로 나란히 붙어 있습니다. 새로 부임한 젊은 군목이 스님께 인사차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젊은 군목이 공손한 자세로 ‘잘 부탁드립니다’ 했습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 젊은 군목이 스님을 보면서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스님을 보니 부처님을 뵈는 것 같습니다” 이 말에 기분이 좋아진 스님이 이렇게 대답했답니다. “목사님을 보니 예수님을 보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이 강의를 들으면서 아무리 불신자이고,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무시하지 않고 겸손한 자세로 잘 듣고, 존중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특히 우리가 나이든 사람을 대할 때 존경과 예의로 대해야겠습니다.
8절을 보겠습니다. “모세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바로와 애굽 사람에게 행하신 모든 일과 길에서 그들이 당한 모든 고난과 여호와께서 그들을 구원하신 일을 다 그 장인에게 말하매” 애굽에 열 가지 재앙을 내리신 일, 출애굽 시키신 일, 고난 중에 홍해를 가르시고 육지같이 건너게 하시고 애굽군대를 수장시킨 일, 광야를 건널 때 하늘에서 만나를 내리시고 반석에서 물을 내신 일, 방금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승리케 하신 일등.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을 감동적으로 증거했습니다.
이에 이드로도 기뻐하며 여호와를 찬송합니다. 10,11절을 읽겠습니다. “이드로가 이르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너희를 애굽 사람의 손에서와 바로의 손에서 건져내시고 백성을 애굽 사람의 손 아래에서 건지셨도다 이제 내가 알았도다 여호와는 모든 신보다 크시므로 이스라엘에게 교만하게 행하는 그들을 이기셨도다 하고” 11절 ‘이제 알았도다’ 이드로가 이제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동안은 피상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알았는데, 진짜 알게 되고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모든 신보다 크시므로 이스라엘에게 교만하게 행하는 그들을 이기셨도다’ ‘여호와는 모든 신보다 크시다’는 이 고백은 여호와가 참 신이며 가장 위대한 신이라는 말입니다. 그의 이 고백이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이유는 그가 여호와를 믿는 최초의 이방 개종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미디안 제사장으로 지도자급 인사였습니다. 범신론자였습니다. 이랬던 그가 여호와를 만났습니다. 번제물과 희생제물들을 하나님께 가져와서 제사를 드립니다. 이 행동은 그가 여호와를 믿는다는 믿음의 표시입니다. 그리고 아론과 이스라엘 모든 장로들과 함께 하나님 앞에서 떡을 먹습니다. 식탁 교제를 나눈다는 것은 이스라엘과 친밀한 관계, 가족 관계가 되었음을 알립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구원하신 이유는 이스라엘만을 구원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출애굽 시킬 때 출9:16절에서 ‘내 이름이 온 천하에 전파되게 하려 하였음이라’고 하셨습니다. 많은 이방인들이 이스라엘 공동체에 들어오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최종 목적입니다. 그 첫 사람이 이드로입니다. 그는 참으로 겸손합니다. 복음을 듣고서 믿었고 여호와를 찬양하였습니다. 애굽의 바로왕은 어떻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열 가지 재앙을 당하고서도 회개하지 않았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아는 것 같은데 조금만 어려움이 닥치면 불평합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공급하심과 수많은 기적을 체험하고서도 ‘하나님이 계신가 안 계신가’ 시험하였쟎습니까? 민수기에 보면 열 번이나 하나님을 시험했다고 나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해서 꼭 믿음이 좋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기적이나 신비한 체험을 많이 경험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믿음이 성장하지 않습니다. 반면 이드로는 어떠한가? ‘이제 내가 알았도다’ 꼭 경험하지 않아도 마음을 겸손하게 하여 잘 들으면 믿음이 생기고 알게 됩니다. 예수님도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본고로 믿느냐 보지 않고 믿는 자는 복되도다” 복음을 듣고서 믿는 그 사람이 복됩니다. 우리가 말씀을 잘 듣고 믿고 여호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기를 기도합니다.
13절부터는 이드로가 모세가 혼자 이스라엘을 재판하는 것을 보고서 제안한 내용입니다. “혼자 다 하지 말고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을 세워 일을 분담하라” 이에 모세는 겸손히 제안을 수용합니다. 이후 이드로는 자기 땅으로 갑니다. 미디안 선교사로 파송된 것입니다. 딤전2:4,5절은 말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하나님은 만민이 구원 얻길 바라십니다. 현재 종로 2부에서 함께 예배보고 있는 나이지리아에서 온 프리빌리지 목자와 우간다에서 온 에스더 자매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만민 구속역사를 생각할 때 이 두 분은 참으로 귀한 분들입니다. 이곳 한국에 있는 동안 여호와 신앙을 든든히 하고 장차 나이지리아와 우간다로 파송되어 여호와를 증거하는 선교사로 쓰임 받길 기도합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시고 우리와 늘 함께 하시는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시험하지 맙시다. 서로 다투지 맙시다. 여호와 신앙으로 똘똘 뭉치고 동역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이겨놓으신 영적 싸움을 힘써 싸웁시다. 우리의 눈을 열어 세계를 바라보고 우리의 마음을 넓혀 세계를 품고 하나님의 영광을 만천하에 증거하는 일에 힘쓰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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