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로마서 제 8 강
너희 지체를 하나님께 드리라
말씀/ 롬6:1-23 요절/ 12,13절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지난 주 로마서 5장에서 우리는 ‘이신칭의’의 결과 하나님과 화평하게 되었음을 배웠습니다. ‘하나님과 화평케 되었다’ 이 말은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그의 진노에서 벗어나 그의 은혜 안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 결과로 나타나는 대표적인 것이 무엇입니까?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며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서도 즐거워합니다. “너는 왜 항상 웃니~ 슬퍼도 눈물나도~ 남들은 모를거야. 왠지 좋아~. 항상 좋아~” 이것이 바로 거듭난 자의 특징입니다.
오늘 말씀은 칭의의 구원을 받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내용입니다. 이것을 성화(Saintification)라고 합니다. 구원에는 3단계가 있습니다. 칭의, 성화, 영화입니다(구원의 3단계 설명). 6장에서 8장까지가 성화에 관한 내용입니다. 특히 오늘 말씀을 통해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새 피조물인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하고 배우는 시간이 되길 기도합니다.
1절부터 4절까지 읽겠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먼저, 그리스도인과 죄와의 관계를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는 성경원칙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잘못 오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첫 번째는, 예수님이 우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해 주셨으니 우리는 부담없이 죄를 지어도 된다는 생각입니다. 죄의 형벌이 사라졌으니 이제 죄에 대해 전혀 신경쓰지 않고 죄 속에서 사는 사람의 자세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이러한 죄의 늪에 빠져 헤매며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행실을 보고서 기독교를 평가절하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두 번째는, 의도적으로 죄를 지음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많이 깨달을 수 있다는 사고방식입니다. 이것은 사탄의 사주를 받은 궤변론자들의 장난에 놀아나고 있는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로마서3장에서도 이미 언급했습니다. ‘악을 통해 하나님의 선을 이루자’는 궤변에 대해 바울이 ‘그들은 정죄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습니다. 기독교 역사상 이런 궤변을 펼친 사람이 여럿 있었습니다. ‘악의 천재’라고 악명이 높았던 러시아의 수도사 라스푸틴(Rasputin)은 죄와 회개를 거듭하는 경험을 통하여 구원의 교리를 배울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는 죄를 가장 많이 짓는 자가 용서를 가장 많이 체험하고, 계속 범죄하는 자는 회개할 때마다 보통 사람들보다 더 많이 하나님의 사죄와 은총을 체험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오늘날도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이 이런 잘못된 유혹에 빠져 있는지 모릅니다. 세상에서 방황하고 숱한 죄를 지은 사람이 회개하고 예수 믿으면 더 많은 갈채와 각광을 받게 되는데, 이럴 때마다 평범한 죄인들 또는 일찍부터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살고 있는 사람들은 유혹을 받기 쉽습니다. 이것은 “큰 죄를 짓거나 방황하다가 다시 주님 품으로 돌아오면 더 큰 믿음을 갖거나 더 온전한 믿음에 이를 수 있다. 그러니 죄를 짓고 방탕한 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이는 사단의 교묘한 속임수 인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돌아온 탕자 비유’에서 탕자가 돌아왔을 때 그의 아버지가 기뻐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집에 있는 큰 아들보다 방탕하며 인생을 낭비하고 돌아온 작은 아들을 더 사랑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다만 작은 아들이 죽음의 위기를 넘기고 무사히 돌아왔기 때문에 기뻐한 것입니다(눅15:32).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도 큰아들처럼 아버지의 자비에 대해 오해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절대로 죄를 더 많이 짓는다고 하나님의 사랑을 더 깊이 체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율법이 없을 때는 죄가 죄인줄 몰랐습니다. 그러다가 율법이 들어왔고, 율법을 통해 나를 보니 나의 죄들이 속속 드러납니다. 마치 내가 건강한 줄 알았는데 건강검진을 해보니 내 몸 여러 곳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아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비추자 이사야는 ‘나는 입술이 부정한 자다’ 고백했고, 베드로는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 하였고,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탄식했습니다. 율법이 우리의 죄를 속속들이 드러내게 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찾게 하였고,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말미암아 씻음 받을 때 그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다고 5장에서 바울이 말한 것입니다. 그런 뜻으로 말한 것이지, 죄를 더 지음으로 더 큰 은혜를 받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받아야 할 만큼 엄청난 죄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가 일단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자녀가 되었으면 이제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고 거룩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기록되었으니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어서는 안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2절을 보십시오.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었다’, ‘더 이상 죄에 거할 수 없다’고 합니다. “000목자님~,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죄에 대해 반응을 합니까? 안합니까?” 반응을 안합니다. 여러분이 무덤앞에 가서 시체에게 모욕을 줘보십시오. 시체가 반응합니까? 전혀 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죄에 대해 죽은 우리가 죄에 대해 반응하지 않는 것이 마땅합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을 때 점차 나의 죄성이, 나의 분노와 미움이, 나의 욕망과 유혹이 죽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접근하는 것은 올바른 생각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죄에 대해 죽었습니다. 죄와는 아무 상관도 없으며, 더 이상 죄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언제 죽었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장사되었을 때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죽고 장사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실 때 우리도 함께 새 생명가운데 행하게 하셨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 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 새롭게 창조된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어떤 원리에 의해 이루어진 것입니까? 연합의 원리에 의해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고, 부활하신 사건은 바로 그리스도와 연합한 우리의 사건이요, ‘나의 사건’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그 은혜의 사건 때 함께 죄에 대해 완전히 죽었습니다. 더 이상 죄와 관련이 없습니다. 죄와 사망이 우리에게 더 이상 왕노릇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오해하지는 마십시요. 내가 죄에 대해 죽은 것이지, 죄가 죽은 것은 아닙니다. 죄는 아직 살아서 역사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죄에 대해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을 알려줍니다. 그것은 ‘죄에 대해 나는 죽었다’는 진리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고전10:13절은 말합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강담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우리가 믿음으로 승리의 확신을 가질 때 죄와 사망이 더 이상 왕노릇하지 못합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죄의 고리가 끊어졌고 그 분이 주시는 은혜의 선물인 의 안에서 새 생명, 영생으로 연결된 새로운 고리가 생겼습니다. 이를 믿읍시다.
10,11절을 읽겠습니다.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예수님이 죽으실 때 죄에 대해 단번에 죽으셨습니다.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에 대하여 살아계십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예수님을 믿고 구주로 영접할 때 그때 한 번의 죽음으로 족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입니다. 여기서 ‘여길지어다’ 이 말은 본래 ‘계산한다’는 회계학 용어인데, ‘실제인 것으로 믿고 의지적으로 그렇게 행동하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5:1)고 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자기를 믿는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1,32)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요8:36)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주님께서 주신 이 약속을 현재 누리면서 살고 있습니까? 여기에 대한 대답이 바로 현재 내가 얼마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살아가고 있는지를 말해 준다 하겠습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예수님을 믿으면 세례(침례)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세례와 예수님을 믿는 것을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당시에 믿는 자가 세례를 안 받거나, 또는 믿지 않는 자가 세례를 받는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대부분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을 하자마자 세례를 받았습니다.(행2:42,8:36) 세례의 의미는 그들이 물속에 잠길 때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었고, 물에서 올라올 때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음을 알리는 의식이었습니다. 세례의 또 다른 의미는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박아 죽었고, 더 이상 죄의 종노릇하지 않게되었다는 고백이었습니다. 마치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서 험한 노예생활에서 벗어난 것과 같이 죄에게서 벗어났음을 의미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이제 더 이상 죄를 지으면 안됩니다. 죄에 대하여 죽었고, 죄와의 관계가 일체 끊어졌습니다. 더 이상 죄와 죽음의 세력이 우리를 지배 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노예근성이 남아 있는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의 의미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마치 광야에서 방황하던 이스라엘 백성이 앞으로 들어갈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사모하기보다 옛날 노예 생활을 하던 애굽을 그리워하며 되돌아가려고 했던 것과 같습니다. 오늘날의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자신에게 일어난 그리스도와의 연합된 사건의 깊은 영적 의미를 모른채 다시 죄의 노예가 되려고 합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비슷한 경우를 역사속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미국 남북전쟁 당시 링컨대통령이 ‘흑인 노예’ 해방을 선언했습니다. 이때 어떤 흑인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다시 옛 주인에게 돌아가 노예로 살게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합니다. 그들이 다시 노예가 되고자 했던 것은 자유인으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죄의 노예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 이유는 의롭게 살게 하려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에 대하여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자유를 달라고 부르짖습니다. 가정에서 자녀들이 ‘내게 자유를 주세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 놔두세요.’ 교회내에서도 자율권을 주라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어느정도 필요한 부분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자유의 의미는 ‘~으로부터의 자유’보다는 ‘~로 가는 자유’가 중요합니다. 몹쓸 주인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얻게 된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더 지독하고 몹쓸 노예 상태로 빠진다면 자유의 의미가 없어지게 됩니다. 주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셨던 것처럼, 더러운 귀신이 어떤 사람에게서 나갔다가 그 사람이 집안 단속을 안하자 더 악한 일곱 귀신이 들어와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나빠진 것과 같습니다.(마12:43-45) ‘죄로부터 자유’도 중요하지만 ‘의를 향해 가는 자유’는 더 중요합니다.
바울은 다른 서신에서, 그리스도인은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갈3:27), 혹은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 그 지체가 되었다(고전12:13)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위치상으로나 법적으로 자유를 얻었고, 자유인입니다. 죄가 성도들에게 왕노릇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실제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죄로부터 자유롭게 살아갑니까? 12,13절을 다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우리의 영혼은 구원을 받았는데, 우리의 몸은 아직 온전히 구원을 받지 못한 상태입니다. 12절을 보면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라고 합니다. 이 말은 우리 몸에서 죄를 짓게 하는 욕구가 일어남을 말해줍니다. 만약 우리가 몸이 원하는대로 행하도록 내버려둔다면 어떻게 될까요? 죄에 대해 죽은 우리 영혼이 도전을 받게 됩니다. 우리는 죄에 대해 죽었지만 죄는 죽지 않고 살아있습니다. 죄가 사망선고를 받는 날이 영화가 이루어지는 날입니다. 하지만 아직 그때가 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우리가 죄의 유혹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화의 단계에서 우리는 죄와 싸워야 합니다. 죄와 싸워 이기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첫째,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아야 합니다. 마틴루터는 “새가 머리 위로 지나갈 수는 있으나 머리에 앉게 하지는 말라”고 했습니다. 죄의 소욕이 내 마음에 둥지를 틀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이것을 소극적 대응이라고 한다면, 두 번째로 적극적 대응은 우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 지체에는 눈도 있고, 귀도 있고, 입도 있고, 손도 있고, 발도 있고 다양한 것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몸은 중립적입니다. 몸 자체는 선도 악도 아닙니다. 우리 지체가 어느 것에게 복종하느냐에 따라 의의 무기도 될 수 있고, 불의의 무기도 될 수 있습니다. 당시 대표적인 무기는 칼입니다. 칼이 강도의 손에 들리면 사람을 해치는 흉기가 됩니다. 반면 병사에게 들려있으면 나라를 지켜주고, 요리사의 손에 들리면 맛있는 요리가 만들어집니다. 요즈음 세프가 인기가 많습니다. (샤샤샤~) 이번에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흑백요리사’를 보셨나요? 저는 준우승한 에드워드리 세프에게서 감명과 큰 도전을 받았습니다. “부두라는 한 재료를 가지고서 어떻게 저렇게 다양한 창작요리를 만들 수 있지. 야~, 대단하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나도 생명의 말씀을 다양하게 요리하여 양들을 먹인다면 이보다 더 멋있는 일이 어디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였습니다. 우리 몸이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낸다면, ‘저 사람 보면 예수님을 보는 것 같아’ 이러면 얼마나 뿌듯하겠습니까? ‘저 사람 입에서는 생명의 말씀이 나온다’ 그런 말을 들는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제가 우리 몸의 지체들을 열거했는데요. 그 중에서도 어떤 지체가 가장 중요할까요? ‘마음’입니다. 유대인들은 마음을 지체로 보고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잠언에서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3)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항상 어떤 마음, 어떤 생각을 하는지가 중요합니다. 빌4:8에서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생각들이 우리 마음에 꽉 차 있으면, 우리의 말과 행동에서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려지게 됩니다. 다윗은 항상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써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쓰임 받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어떻습니까? 그는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을까?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를 증거할까?” “나는 죽고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 있다” 이런 생각을 할 때 그가 백발이 휘날릴때까지, 순교하기까지 주의 역사에 의의 무기로 쓰임 받았습니다. 저와 여기 모인 무두가 다 이처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쓰임받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죄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상태라고 이미 말했습니다. 그럼에도, 계속하여 죄 속에 거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 몸이 죄의 병기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법적으로는 자유인이지만 실제로는 노예 노릇을 하는 꼴이 됩니다. 종은 반드시 주인의 명령에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 은혜에 감격하여 자발적으로 종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유인의 의지로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소중한 새 생명 같은 자유를 행사해야 합니다.
16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됩니다. 우리는 두 주인을 동시에 섬길 수 없습니다.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거나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릅니다.
17,18절을 읽겠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사도 바울은 감격에 겨워 하나님께 감사 찬송을 합니다. 언듯 생각할 때, 복음을 받아들이고 마음으로 순종한 그들에게 감사를 표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니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주고 도움을 준 목자에게 감사를 표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로마성도들이 죄의 종에서 의에게 종이 되도록 한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하셨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 주었으나 오직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 이 일을 이루셨습니다. 이것을 성령의 견인(Attraction)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도와 잘 성장했다고 해서 우쭐거릴 것이 아닙니다. 다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철저하게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 그래서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와같은 자세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이어서 바울은 다른 종류의 두 가지의 자유에 대해서 말합니다. 하나는, 죄에서 해방되어 의에 이르는 자유입니다. 그 결과의 열매는 영생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의에 대하여 자유함을 누리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죄와 깊은 관계를 맺어 의와 아무 상관이 없고 죄의 영향력 아래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20). 그 결과의 열매는 말하기도 부끄러운 ‘사망’입니다(21).
우리 거듭난 신자는 하나님께 부름을 받아 죄로부터 자유를 얻고 의로 살아가는 자유를 얻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죄로부터 자유함을 얻은 사람이 다시 죄로 돌아가 사는 자유를 누리고자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것이야말로 개가 그 토하였던 것으로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워 버린 꼴이 됩니다.(벧후2:22)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과 장사와 부활을 거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하나님 나라의 시민입니다. 지금 우리는 하늘에 앉아있습니다. 더 이상 죄 왕국의 법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법보다 훨씬 더 높은 하나님 나라의 은혜의 법 아래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좋은 것들을 많이 받았습니다. 우리의 시간과 돈, 성품, 재능, 그 밖의 다른 모든 것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를 통해 자유가 주어졌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무엇을 위해 투자하겠습니까? 그 선택은 나의 몫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는데 사용되기를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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