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로마서 제 10 강 신자의 특권 말씀/ 로마서 8:1-17 요절/ 로마서 8: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로마서 8장은 이론 편의 마지막 장입니다. 이론 편의 마지막 장을 어떻게 섬길 것인지 잠시 고민이 되었습니다. 8장만 다룰 것인지, 아니면 로마서 전체의 흐름 속에서 8장을 조명할 것인지 고민하다가 후자를 선택했습니다. 이 점을 고려하시고 들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8장을 시작하기 전에 기억해야 할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1장에서 8장까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복음’이라는 사실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말입니다. 그렇지만 로마서를 한 장 한 장 읽다 보면 복음이라는 전체의 흐름 속에서 보지 못하고, 어느 순간 길을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1장~3장은 바울이 복음을 말하고 있다는 분명한 인식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후부터는 그 인식이 약해지기 시작합니다. 4장에서 갑자기 구약의 아브라함과 다윗이 등장해서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5장, 6장은 비슷한 말들이 반복되어,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7장에서는 알 듯 모를 듯 혼미한 상태가 되어 8장으로 넘어오면 ‘복음’이라는 흐름 속에서 로마서 이론 편 전체가 정리되기보다, 일반적인 성령론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입니다. 우리는 로마서를 읽을 때 3장까지만 복음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로마서 4장~8장까지는 복음을 영접한 이후의 삶을 다루기 때문에 또 다른 고차원인 원리를 말하는 것으로 오해하곤 합니다. 이런 오해는 자칫 거듭난 이후 영적인 방향을 잃어 버리거나 복음 외에 다른 그릇된 대안을 찾아 기웃거리게 만들 수 있습니다. 바울은 4장~8장을 통해 신자가 거듭난 이후 부딪치는 네 가지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첫 번째는 죄 사함의 확신 부족으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지 못하는 문제입니다. 두 번째는 죄와 타협함으로 영적 성장을 멈추는 문제입니다. 세 번째는 율법에 매여 의무감에 기초한 신앙 생활을 하는 문제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육신을 좇아 신앙 생활하는 문제입니다. 문제는 다르지만 바울이 제시하는 해법은 한 가지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입니다. 4장에서는 갑자기 아브라함과 다윗의 믿음을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바울이 진짜 말하고자 한 것은 24절입니다. “의로 여기심을 받은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곧 아브라함과 다윗이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은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5장에서는 우리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수 있는 근거가 바로 8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곧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확실하게 증명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의지해서 우리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6장에서는 죄와 타협할 수 없는 근거가 바로 4절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곧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으로써 이미 장례식을 치루었기 때문에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는 근본적으로 더 이상 죄에 거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과 연합하여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7장에서는 우리가 율법에서 자유할 수 있는 근거가 바로 4절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 곧 율법의 요구대로 예수님이 우리 대신 정죄 받고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율법에서 완전히 지유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새 남편이신 부활하신 예수님에게 가서 하나님을 위한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8장에서 다루는 나머지 한 가지 문제는 잠시 후에 살펴 보겠습니다. 이처럼 거듭난 후 부딪치는 문제가 4가지라면 거듭나기 전에는 2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죄인으로 발견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예수님이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음을 믿고 영접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이 두 가지도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물론 아주 쉽게 이루어지신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오랫동안 성경을 공부하고, 목자님들이 반복해서 죄 문제를 돕고 십자가 복음을 가르쳐 주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거듭난 이후도 마찬가지입니다. 성화의 과정에서 부딪치는 문제들을 극복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이 때 우리는 계속해서 복음을 붙들어야 합니다. 복음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문제를 극복할 수 있을까요? 잠시 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원점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습니다. 복음 외에는 답이 없습니다. 다른 방법이 있었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복음을 붙들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그는 복음에 감추어진 비밀들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복음의 놀라운 능력을 경험했습니다. 그는 십자가의 복음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했다고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그 복음의 놀라운 능력이 로마서를 통해 지금 우리의 손에 전해졌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성화의 과정에서 그 복음의 능력을 직접 경험하고 우리의 후배들에게 증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서론이 너무 길었습니다. 로마서 1장에서 8장까지가 복음을 말하는 것이라는 당연한 이야기를 너무나 길게 했습니다. 이제 사도 바울이 전하는 그 복음의 마지막 장 결론의 전반부를 살펴 보겠습니다.
1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1절은 7장의 결론이기도 하지만, 바울이 지금까지 말한 복음의 결론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정죄함이 없나니’ 라기보다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기 때문에 정죄함이 없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죄의 댓가와 율법의 요구를 다 지불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단도, 모세의 율법도, 사람도, 심지어 하나님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우리를 정죄하실 수 없습니다.
바울은 이제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의 깊은 곳으로 안내합니다. 2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생명의 성령의 법’ 밑줄 쫙 별표 다섯 개입니다. 로마서 결론의 핵심 키워드이고 사도 바울이 증거하는 복음의 능력의 원동력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가 법이라고 표현한 것은 변할 수 없는 원칙과도 같기 때문입니다. 죄와 사망의 법은 7장에서 이미 설명했습니다. 죄가 기회를 틈타고 내 안에 들어와 나를 죄의 법 아래로 끌고 가서 결국 사망에 이르게 한다는 것입니다. 율법이 우리를 철통같이 감시해도 그렇게 될 확률은 100%입니다. 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있습니다. 생명을 주는 성령의 법이라는 뜻입니다. 그 성령의 법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우리에게 동일하게 적용 됩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생명을 공급하실 뿐 아니라, 계속해서 생명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이 확률도 100%입니다.
율법도 본래 우리를 생명의 길로 인도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실패했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3a절입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우리의 육신이 연약했기 때문입니다. 코치는 국대 출신인데, 선수는 국민 약골이었던 것입니다. 7장에서 바울은 그 선수의 실체가 사망의 몸이었음을 뒤늦게 발견하고 또 한 번 깊이 절망했습니다.
이런 사망의 몸을 가진 우리를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생명의 길로 인도하실 수 있는 것입니까? 3b,4절입니다.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은 육신을 개선하고자 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망의 몸인 줄 아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기상천외한 방법을 선택하셨습니다. 죄에 넘어지는 우리의 육신과 동일한 모양을 영이신 자기 아들에게 입히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를 그 아들에게 뒤집어 씌우셨습니다. 죄 값으로 아들의 육신이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게 하셨습니다. 이로서 육신을 완전히 제거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아들을 영접한 우리도 더 이상 육신을 따라 행하지 않고 영을 따라 행하도록 하셨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셨습니다. 여기서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바울이 지금 새로운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십자가의 복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3장에서부터 4장, 5장, 6장, 7장, 8장에 이르기까지 동일하게 복음을 말하지만, 그 깊이는 분명히 다릅니다. 바울은 복음에 담긴 영적인 비밀 곧 하나님의 의도와 마음을 깨달았고,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의지해서 모든 성화의 과정을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이 이제까지 증거한 복음에 의하면 육신은 더 이상 의지할 대상이 못됩니다. 하나님도 포기하신 것이 육신입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더 이상 육신을 좇을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을 따라 행해야 합니다. 이미 육신에 대한 답은 나왔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육신 문제를 13절까지 계속해서 언급합니다. 왜냐하면 신앙 성장 과정에서 늘 부딪치는 실제적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육신은 6장에서 언급한 죄와는 성격이 다릅니다. 죄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육신은 말 그대로 영이 아닌 그저 육에 속한 모든 것입니다. 그냥 이 몸입니다. 우리가 영만 있다면 별로 신경 쓸 일이 없는데, 몸이 있기 때문에 신경 써줘야 할 것이 많습니다. 음식을 먹여 줘야 합니다. 잠도 재워 줘야 합니다. 옷도 입혀 줘야 합니다. 아무 거나 입히면 안 됩니다. 유행과 계절과 상황에 맞게 옷을 고르고 또 골라줘야 합니다. 음식도 아무 거나 먹이면 안 됩니다. 입에 맞는 음식을 줘야 합니다. 맛있다고 계속 같은 음식만 주면 불평합니다. 우리 몸의 혀와 입만 챙겨서는 안 됩니다. 눈도 만족시켜 줘야 합니다. 같은 동네만 매일 보여주면 지겨워 합니다. 여행 가서 콧바람도 쐬어주고 새로운 경치도 보여 줘야 합니다. 오늘날은 인터넷에 볼 거리가 많아 눈이 비교적 즐겁습니다. 새로운 정보, 새로운 컨텐츠를 보느라 하루 24시간이 부족합니다. 이것들 외에도 건강을 위해 적절한 운동을 시켜줘야 하고, 경쟁에서 밀리지 않도록 공부도 시켜줘야 하고, 외롭지 않도록 사람도 만나줘야 하고, 먹고 살기 위해 돈도 벌어야 하고, 결혼도 해야 하고, 노후 준비도 해야 하고, 몸이 고장 나면 병원 가서 수리도 해야 하고, 그야말로 육신을 챙기기 위해 할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런 것들이 분명 죄는 아닙니다. 그냥 육신에 속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육신을 따라 행할 때 결국 하나님과 멀어진다는 것입니다. 멀어지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고 원수가 됩니다. 바울은 성화의 과정에서 부딪치는 이 ‘육신’의 문제, 더 나아가 ‘세상’ 또는 ‘세속화’의 문제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차라리 죄 문제나 율법의 문제는 고통스럽기 때문에 십자가 앞에 나아가는 영적인 씨름이라도 합니다. 그러나 죄와 율법에서 자유함을 얻은 신자들이 결코 정죄함을 받지 않으면서 마음 편하게 육신을 따라 세속화되어 가는 이 문제는 성화의 과정에서 부딪치는 마지막 단계의 어려움입니다.
바울은 육신이 하나님도 포기하신 대상임을 상기시킨 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영과는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설명합니다. 5~8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할 수 밖에 없습니다. 육신을 따르면서 영의 일을 생각한다거나, 영을 따르면서 육신의 일을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육신의 생각은 아무리 그럴듯해 보여도 마지막이 사망입니다. 마태복음 16장에 베드로의 신앙 고백이 나옵니다. 베드로는 신앙고백을 한 후 예수님이 고난 받고 죽으신다는 말을 듣고 크게 놀라 예수님을 강하게 만류했습니다. 어찌보면 제자로서의 당연한 행동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를 향해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가리켜 사탄이라고까지 말하신 이유는 생각하는 바가 하나님의 관점이 아니라, 그저 사람의 관점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베드로의 사랑과 의리는 인간적으로 볼 때 감동적이고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생각 속에는 하나님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대한 관심과 고려가 1도 없습니다. 그저 아름답고 감동적이기만 한 인간적인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않습니다. 굴복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더 더욱 불가능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다시 율법적인 씨름이라도 해야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9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율법적인 씨름을 할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영을 향해 눈을 돌려야 합니다. 이 영은 복음을 영접한 모든 사람에게 이미 주셨습니다. 만약 내 속을 아무리 뒤져봐도 그 영을 찾을 수 없다면 아직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닐 가능성이 큽니다. 분명히 복음을 믿고 영접했음에도, 그 영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조차 감이 오지 않는다면 하나님께 다시 한 번 믿음의 고백을 드리고 약속하신 성령을 보내주시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보내주실 때까지 잠잠히 믿음으로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성령을 주실 것입니다. 성령을 받으셨다면 우리가 이제 주목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입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한 걸음 한 걸음 따라가다 보면 내 안에서 생명이 살아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10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실 때 육의 소원은 서서히 약해져서 죽은 것 같이 됩니다. 반면 죽은 것 같던 영적 생명은 살아납니다. 이 영을 지속적으로 따를 때 어떤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까? 11절입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그렇습니다. 우리의 육신은 사망의 몸이라서 도저히 변화되지 않을 것 같지만,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바로 그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 우리의 죽을 몸도 능히 살려 내십니다. 국민 약골과도 같은 우리가 튼튼한 영적 국가대표 선수가 될 수 있습니다.
12,13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우리는 이미 하나님과 예수님께 육신의 생명을 빚 졌습니다. 우리 몸이 십자가에 달렸어야 했는데, 예수님이 친히 육신을 입으시고 대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로 인해 우리의 몸은 수명을 다하거나,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사용 기한이 연장 되었습니다. 온라인 게임에서 특정 이벤트가 발생할 때마다 나오는 안내 멘트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띵~ 사용기간이 연장되었습니다.’ 한마디로 우리는 덤으로 얻은 육신입니다. 덤으로 살고 있는 이 기간 우리는 빚진 자인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닙니다.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삽니다. 이 말이 조금 헷갈릴 수 있습니다. 육신을 제어하는 어떤 율법적인 행동을 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육적인 상태와 무관하게 오직 영에 관심을 두고 영에 집중하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하면 몸의 소원과 행실은 자연히 죽게 됩니다. 이 원리를 설명할 때 검은 고양이, 흰 고양이 예를 많이 듭니다. 검은 고양이가 육신이고, 흰 고양이가 영입니다. 우리는 고양이 두 마리의 상태에 따라 영향을 받습니다. 검은 고양이가 강하면 우리가 육의 지배를 받는 것이고, 흰 고양이가 강하면 우리가 영의 지배하는 것입니다. 율법적인 씨름은 육의 소욕을 제어하기 위해서 검은 고양이를 두들겨 패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두들겨 패도 고양이가 약해지지 않습니다. 귀신같이 일어나서 나를 지배합니다. 반면 바울이 제시한 영적인 씨름은 검은 고양이가 어떤 상태이든지 신경쓰지 말고, 흰 고양이에게 가서 먹이를 주라는 것입니다. 흰 고양이 부양책을 쓰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지금은 약해도 흰 고양이가 점점 커지고 힘이 강해지기 때문에, 어느 순간부터는 우리가 자연스럽게 영적인 지배를 받게 됩니다. 그 사이에 검은 고양이는 먹은 것이 없어서 힘을 잃고 말라 죽어갑니다. 만약 이런 씨름, 곧 흰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어서 힘을 키우는 것을 나 혼자만의 힘으로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자가 발전이 가능한 것입니다. 말씀을 묵상하고 암송하면 흰 고양이가 커집니다. 기도하고 찬양하고, 전도하고, 하나님의 일을 할 때 흰 고양이가 쑥쑥 자랍니다. 혼자의 힘으로 흰 고양이에게 먹이를 줄 힘이 없다면 외부 발전법이라도 이용해야 합니다. 그것은 흰 고양이에게 밥을 줄 수 있는 영적인 모임에 적극 참여하는 것입니다. 국민대 길냥이 돌보는 동아리에 참여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해 없으시기 바랍니다. 또는 목자님에게 연락해서 상담도 하고 기도 지원도 받고 말씀 공급도 받아야 합니다. 이런 방법으로 내 안에 죽어가는 흰 고양이를 살려 내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자가 해야 할 영적인 씨름입니다.
14~17절에서는 바울이 이처럼 성령을 따라 행하는 신자의 특권 두 가지를 말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특권을 누립니다. 14,15절을 보겠습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우리는 본래 사망의 몸으로 고통하다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영원한 불못에 들어갈 자들이었습니다. 이런 우리를 복음으로 구원해 주신 것만 해도 무한 감사한 일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은 이런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로까지 높여 주셨습니다. 이런 신분의 변화는 사실 우리가 복음을 영접하는 순간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처럼 엄청난 축복을 로마서 앞 장에서는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영의 인도함을 받으며 살 때 비로서 명실상부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특권을 누릴 수 있음을 말하고자 한 것 같습니다. 아들의 가장 큰 특권은 아버지와의 친밀한 대화입니다. 영의 인도함을 받는 신자는 더 이상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않습니다. 무서워하는 종의 영이라고 표현한 것은 사단에게 한 번 사로 잡히면 빠져 나올 수가 없기 때문이니다. 잠시 죄를 허용했을 뿐인데, 사단은 그 기회를 이용해서 우리를 종으로 삼고 사망에 이르기까지 끌고 다닙니다. 아주 무서운 영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더 이상 그런 영을 받지 않습니다. 대신 양자의 영을 받습니다. 그래서 친밀하게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이 영의 도움을 받아 우리는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기도할 수 있고 또 기도의 응답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가고, 하나님의 동역자로까지 성장합니다.
영의 인도함을 받는 신자가 누리는 두 번째 특권은 상속권입니다. 16,17절을 읽겠습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예수님은 태초 이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모든 것을 상속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느 모로 보나 자격 불충분입니다. 우리가 기여한 것이 별로 없습니다. 양자로 삼아 주신 것만 해도 감지덕지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를 상속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마25:34절을 보겠습니다.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우리가 상속 받을 새 하늘과 새 땅의 모습은 요한계시록21,22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 곳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장차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는다면, 이 땅에서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고난 받은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아파트 하나를 분양 받아도 실제 입주하는 그 날까지 기다려야 하고, 중도금 내기 위해 씀씀이를 줄여야 하는 고난을 기쁨으로 감당합니다. 우리는 이미 새 하늘과 새 땅에 입주할 수 있는 분양권을 받았습니다. 내 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있다면 분양권을 받은 것으로 확신하시면 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받아야 할 고난이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그것은 십자가 부활의 복음을 끝까지 붙드는 것입니다. 빠른 속도로 세속화되어 가는 이 세상에서 변함없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며 성령을 따라 행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과 같이 아직 복음을 모르는 영혼들에게 나아가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힘써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장차 받을 영광을 소망하며 이 땅에서의 작은 고난을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하니다.
결론입니다. 우리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분양권도 받았습니다. 각자의 신앙 성장 단계가 다를 것입니다. 아직 로마서 1,2장 상태인 있는 분도 계실 것이고, 3장을 경험하고 있는 분도 계실 것이고, 4,5,6,7,8장의 과정을 지나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현재 어느 단계에 있든지 분명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에 모든 문제의 답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을 발견하고, 일생 그 영을 따라 행하며,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특권을 풍성히 누리는 축복된 삶을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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