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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5년 로마서 13강 시인하고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로마서 10:1-21)2025-02-09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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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로마서 제 13 강 

시인하고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 부제: 자기 의를 내려놓고 믿음의 말씀을 영접하자 -


말씀/ 로마서 10:1-21

요절/ 로마서 10: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저는 사실 메시지를 증거할 자격이 없는 자입니다. 오늘 메시지도 전하려고 하기 보다는 제 스스로 배우고자 하는 마음으로 즉, 제 스스로에게 전하고자 준비하였고, 다만, 제가 배운 것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제가 배운 것을 한 번 들어봐 주실래요? 예! 감사합니다.

로마는 인구가 약 100만명이나 되는, 당시로는 엄청난 대도시였습니다. 약 5만 여명의 유대인들이 로마에 거주하였습니다. 그 당시에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대도시로 인구가 집중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도 더욱 더 로마로 로마로 몰려 들었습니다. 로마제국은 제3대 황제인 칼리귤라를 이어, 제4대 황제인 클라우디우스가 재위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시위의 민족이었습니다. 칼리귤라 재위 때에도 칼리귤라를 신으로 숭배하려고 하자, 하나님 만이 유일하신 신이라면서 엄청난 반대시위를 하였습니다. 그 후에도 유대인들은 이런 저런 시위를 끊이지 않았습니다. 

고대역사가 수에톤에 의하면, AD 49년 경에 유대인과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 사이에 커다란 분쟁이 발생하였습니다. 분쟁이 얼마나 컸든지 로마황제 클라우디우스의 귀에 들어갔습니다. 클라우디우스는 모든 유대인들을 보고 “저 자들은 나라의 평화와 질서를 해치는 자로다!” 하면서 모든 유대인들이 로마를 떠나도록 황제의 칙령을 포고하였습니다. 이 내용에 대해서 행 18:2절에서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고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에 유대인들이 로마의 경제를 쥐락펴락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이 떠난 로마는 경제적으로 고꾸라졌습니다. 그래서, 클라우디우스를 이은 제5대 황제 네로는 클라우디우스 칙령을 취소하고, 유대인들을 원대복귀 시키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로마로 유대인들이 다시 돌아왔습니다. 

지금 로마교회에는 유대인들도 있었고, 이방인들도 있었습니다. 성도들 중에도 유대인 성도들과 이방인 성도들이 함께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서, 로마교회는 외적으로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는 로마교회 성도들을 핍박하였고, 내적으로는 유대인 출신의 성도들과 이방인 출신의 성도들이 서로 소통을 하지 않고 갈등을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롬13:6절에서는 권세에 대하여 바라보는 관점이나 세금을 납부하는 것과 관련하여서도 다툼이 있고, 14:15절에서는 먹는 음식을 두고서도 서로 다투는 내용이 나옵니다. 돼지고기를 부정하게 생각하는 유대인 성도와 이를 맛있게 먹는 이방인 성도들 사이에 다툼이 있는 등 로마교회는 내적 외적으로 총체적인 위기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도 바울은 로마교회의 성도들을 생각하고 복음의 체계를 세우는 서신서를 집필하였습니다. 복음의 체계를 잠깐 살펴볼까요? 주된 내용은 다음 세가지입니다: 첫째,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성도들이나 모두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습니다. 3:10절에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라고 선포합니다. 둘째,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3:24절은 말씀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셋째, 구원을 받은 성도들은 율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살아야 합니다. 8:11절은 말씀하십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사도 바울은 오늘 말씀을 통해서 로마교회의 성도들이 복음 안에서 하나님의 영의 인도함을 받으며 기쁨과 감사가 충만한 삶을 살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방향을 제시하였습니다. 2가지 방향이었습니다. 첫째는 자기 의를 내려 놓아라, 둘째는 믿음의 말씀을 배우고 전하라!

오늘 말씀을 통해서 사도 바울의 권면을 듣고, 우리 스스로와 우리 교회를 위하여 분명한 방향을 잡기를 기도합니다. 


제1장: 자기 의를 내려 놓아야 합니다(1-7절).


로마교회 내에서 성도들 사이에 유대인 성도와 이방인 성도 사이에 다툼이 있었습니다. 유대인 성도들은 율법들을 제시하면서 율법을 지키지 않는 이방인 성도들을 비판하였습니다. 교회 내에 분쟁이 있으면 얼마나 고통이 클까요? 우리 몸에 암이 생긴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다툼의 근본문제가 “자기 의”를 추구하는데 있다고 말씀합니다. 10장 2절과 3절을 보십시오: “10:2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10: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로마교회의 유대인 성도들은 하나님께 대한 열심이 있었습니다. 율법들을 열심히 지켰습니다. 금식하고, 기도하고, 모세오경을 외웠습니다. 그런데, 율법에 대한 이런 열심이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의를 세우려고 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서 “자기 의”에 대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기 의”란 무엇일까요? 말 그대로 ‘self-righteousness’ 즉, 자기가 올바르다는 뜻입니다. 인공지능인 ChatGPT에서는 자기의를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하는 태도로서, 사람이 자신의 행위를 근거로 의롭다고 여기는 것이라고 합니다. 자기 의란 자기가 죄인이 아니라 무엇인가 Somebody가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의를 세우는 것은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자기 의를 세우면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못합니다. 

특히, 유대인 성도들은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 탁월하였습니다. 율법들을 엄격하게 준수했습니다. 예를 들어 안식일법을 보면, 안식일에는 일을 해서는 안되는데, 이런 일에는 음식 장만을 해서도 아니되고, 글자도 두 글자 이상 쓰면 안되며, 등불을 켜거나 끄는 일도 하면 안되고, 길도 2㎞ 이상 걸으면 안되었습니다. 유대인 성도들은 이런 율법들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섬긴다면서 어찌 이런 율법들을 지키지 않을 수 있는가 반문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율법들을 한번 두번 또는 열번은 어떻게 지킬 수 있겠지만, 인간이 율법을 다 지킬 수는 없습니다. 율법은 그 자체로 올바른 방향이 되기는 하지만, 율법의 존재이유는 우리 인간의 연약함을 깨닫도록 함에 있습니다. 롬7:7은 말씀합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의 성도들 중에는 율법을 지키면서 “나는 저런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키는 의미를 잃어 버렸습니다. 율법의 정신은 사랑에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 의를 세우고자 율법을 지키는 생활을 할 때, 그 심령은 점점 더 차가와졌습니다. 신앙생활을 할수록 마음에 사랑이 넘쳐나는 것이 아니라, 미워하고 정죄하는 마음이 자랐습니다. 지키지 못할 율법을 다 지키는 것처럼 보이려고 하니, 삶이 위선적으로 변하였습니다. 

 

그러면, 자기 의를 세우지 말고 무엇을 하여야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세워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우리가 담당하여야 할 모든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의 마침이 되십니다. 

자기 의를 세우는 것은 예수님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내 스스로의 힘으로 의롭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외적인 행위를 통해서 자기를 높이면 결국 그리스도를 낮추게 됩니다. 6절과 7절을 보십시오: “10:6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10:7 혹은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자기 의를 세우는 사람은 결국 그리스도와 올바른 관계를 맺기 어렵습니다.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는 말은 자기가 하나님이 되어서 그리스도가 필요없다고 하는 것이고,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 하는 말은 자기가 자기 죄에 대해서 온전한 대가를 치를 수 있으므로 그리스도가 필요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의와 관련하여 누가복음 18장에서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두 사람 중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였습니다. 바리새인은 율법을 지키는 자의 대명사입니다. 세리는 더러운 죄인의 대명사입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이에 반하여, 세리는 하나님께서 계신 성전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 멀리 섰습니다.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였습니다. 다만 가슴을 치며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예수님은 이 두사람 중에 누가 의롭다 하심을 받았는지 말씀하셨습니다: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사도 바울은 로마성도들이 자기 의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덧입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의 죄를 진실되게 고백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요한일서 1장 8절로 9절은 말씀합니다: “1:8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요일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여기서 우리는 진지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 깊숙한 곳에는 신앙생활을 통해서, “나는 그래도 저 사람보다는 깨끗해!”, “조금이나마 더 깨끗해!” 라고 주장하고픈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 깊숙한 곳에는, “그래도 나는 무엇인가 내 스스로 구원받을 가치가 있는 존재야!”, 왜냐하면, “나는 새벽기도도 하고, 나는 때로는 모임에도 참석하고, 때로는 불쌍한 이웃도 도와주고, 나는 주일에 예배도 참석하고!” 우리 마음을 보면, 우리의 행위들을 통해서 의를 얻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결국 자기 의를 세우는 것입니다. 앞에서 본 바리새인과 같이 이런 생활을 하는 나는, 그렇지 못한 다른 사람보다는 무엇인가 째끔 더 나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고, 조금씩 ‘자기 의’를 쌓기 시작합니다. 자기의를 쌓게 되면, 신앙생활의 기쁨이 사라집니다. 심령이 메마르게 됩니다. 위선적으로 변합니다. 타인을 의식하고 타인의 눈치를 보게 됩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의지하는 의입니다. 우리 스스로는 전적으로 부패하여 조금도 선한 것이 나올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전적으로 죄악되고 부패하였으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만이 우리 죄를 사할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도 외칩니다: 하나님, 하나님~!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죄인의 죄악을 생각할 때,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조차 없습니다. 다만, 죄인의 죄악을 감추어 주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주시옵소서! 

사도 바울도 딤전1:15절에서 외치고 있습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우리 모두, 내가 죄인 중의 괴수! 내가 죄인 중의 괴수!라고 외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제2장: 믿음의 말씀을 배우고 전해야 합니다(8절~21절)


로마 교회 내부적으로 유대인 성도와 이방인 성도들 사이에 갈등이 많았습니다. 율법을 지키지 못하면서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느냐! 면서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었습니다. 또한 사회적인 이슈와 관련하여서도 의견이 대립되었습니다. 로마에 세금을 납부하여야 하는가 또는 네로 황제의 폭정에 대해서 저항을 하여야 하는가 등과 관련하여 갈등이 많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갈등과 관련하여 방향을 제시합니다. 8절을 보십시오: “10:8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사실 갈등 상황에 대해서 아무리 대화를 해도 해결이 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특히, 사회적 이슈나 정치적 사안과 관련하여서는 대화를 할수록 상대방과의 갈등의 골이 깊다는 것만 확인하게 될 뿐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안에 있어서 중요하게 여기는 Point 즉, 지점이 각자마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인공지능으로 따지면, 입력층에 있어서 가중치를 주는 요인들이 다른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가중치의 값은 보이지도 않고, 표현되기도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대화를 해도 가중치가 조정되지 않는 한 서로 간에 접점을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이런 갈등양상은 로마교회나 지금 교회나 변함이 없으며, 앞으로의 교회에서도 동일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갈등상황에 놓인 로마교회에 대해서 믿음의 말씀이 입에 있고 마음에 있다고 합니다. 즉, 로마교회에게 믿음의 말씀을 배우도록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면서 구원의 기쁨을 충만히 누리기 위해서는 믿음의 말씀을 배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의 말씀을 배우는 다양한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는 것입니다. 

당시 로마사회에서는 로마황제를 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는 것은 엄청난 용기가 필요합니다. 잘못하면 반역죄로 고발당하고 감옥에 수감될 수도 있었습니다. 주로 시인하는 것은 주인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받드는 것입니다. 시인하는 것은 소리를 내어서 고백하는 것입니다. 시인하고 고백하는 것이 믿음의 말씀을 배우는 하나의 과정입니다.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는 것의 대표적인 행위가 찬송을 하는 것입니다: “주 하나님 독생자 아낌없이 우리를 위해 보내주셨네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신 주 내 모든 죄를 대속하셨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둘째는 마음으로 믿는 것입니다. 

이는 마음 속으로 영접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 깊이 영접하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믿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요? ‘묵상’을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묵상한다는 것은 곰곰히 생각도 하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기 위해서는 마음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글로 써 보는 것입니다. 우리 모임이 소감을 쓰는 것을 권면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마음의 세계는 참으로 깊고 놀랍습니다. 마음의 세계는 의식을 넘어 깊이 무의식의 세계까지 나아가는 것입니다. 성 어거스틴은 그의 고백록 제1권 제7장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아! 하나님 제가 갓난 아이였을 때 저의 몸은 잘 움직일 수도 없어서 죄를 짓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순수하였던 것은 아닙니다. 저의 마음은 시기심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저는 엄마의 젖을 다른 아이가 빠는 것을 보고, 분노를 하고 있었습니다. 엄마 젖을 빨지 못하도록 손으로 막고 싶었습니다. 설령, 엄마의 젖이 흘러 넘쳐서 버려지는 한이 있더라도.” “엄마 젖이 남아돌아 버려지는 한이 있더라도!” 어린 아이일 때도 우리의 마음 깊숙한 곳에는 시커먼 죄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조용하게 앉아서 우리의 마음 속을 찬찬히 들여다 보고, 마음 속에 있는 것들을 하나씩 하나씩 말씀 앞으로 가져오는 것으로부터 믿음은 시작합니다. 마음의 더러운 것들이 빠져 나오고 나면,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마15:18절로 19절은 말씀합니다: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15:19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우리의 마음의 더러운 것들을 회개하면 하나님의 말씀의 인도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말씀이 주는 의미를 깨닫고, 감격에 넘치게 됩니다. 우리가 회개함으로 하나님 주시는 은혜를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셋째는 배운 믿음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13절로 15절을 보십시오: “10: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10:14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10: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전파하는 것이 곧 믿음의 말씀을 배우는 길입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도록 인도하고자 할 때, 우선 나 스스로 배우게 됩니다. 또한 믿음의 말씀을 전파하는 것은 생명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니는 자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말씀을 전파하는 자들은 그 발조차 아름답습니다. 


결론입니다: 

당시 로마교회는 내적 외적으로 많은 어려움에 처해 있었습니다. 이런 로마교회를 향해서 사도 바울은 두가지 방향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자기의를 내려 놓고, 둘째는 믿음의 말씀을 배우고 전하도록 권면합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도 또한 우리 개인적으로 커다란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자기의를 내려놓고 믿음의 말씀을 배우고 전하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사도 바울의 권면을 영접하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앞에서 우리의 죄를 회개하기를 기도합니다. 캠퍼스 양무리들과 우리 주위의 만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널리 전하기를 기도합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기쁨과 감격을 누리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