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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5년 출애굽기 12강 백성 앞에 세우는 법규 (1)(출애굽기 20:22-22:20)2025-06-09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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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출애굽기 12강 

백성 앞에 세우는 법규 (1)


말씀/ 출애굽기 20:22-22:20

요절/ 출애굽기 21:1,2 “네가 백성 앞에 세울 법규는 이러하니라. 네가 히브리 종을 사면 그는 여섯 해 동안 섬길 것이요 일곱째 해에는 몸값을 물지 않고 나가 자유인이 될 것이며”


지난 주 십계명 말씀을 배웠습니다. 오늘 말씀부터 23장까지는 언약서 내용입니다. 그 양이 많아 두 번에 걸쳐 말씀을 전합니다. 십계명과 언약서를 합하여 (모세)율법이라고 부릅니다. 십계명이 율법의 총론이라면 언약서는 각론입니다. 십계명은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셨다면, 언약서는 모세가 하나님께 듣고서 백성들에게 간접적으로 전달한 내용입니다. 24장에 가면, 모세가 언약서를 쓴 내용을 백성들 앞에서 낭독하고 ‘이대로 지키겠느냐’ 묻고, 백성들은 ‘지키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이스라엘 양쪽에 짐승의 피를 뿌리고 언약식을 거행합니다. 이렇게 하여 모세의 중재로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언약이 체결되는데, 이것을 ‘모세 언약’이라 합니다. 성경은 ‘언약’으로 되어 있습니다. 구약(옛언약)과 신약(새언약)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성경에는 7가지 언약이 나옵니다. 인간이 범죄하기 전에 주신 창조 언약, 타락 후에 주신 6개의 구속 언약입니다. 6개는 아담 언약, 노아 언약, 아브라함 언약, 모세 언약, 다윗 언약, 예레미야와 에스겔이 말한 새 언약입니다. 이 모든 언약들은 점진적으로 발전해 가며 상호 연결성을 갖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이 됩니다. 이러한 기본적인 언약의 흐름 가운데서 출애굽기를 살펴보길 추천합니다. 


오늘 말씀은 십계명을 주신 후 그 구체적인 내용인 언약서를 주시는데, 하나님의 백성들이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의 역할을 하기 위한 삶의 지침서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기대와 소망이 법규 가운데 어떻게 나타나 있는지 배우길 기도합니다.


20장 22-26절까지는 여호와를 어떻게 섬겨야 하는가? 하나님과의 관계의 법, 종교의식 법을 말씀하십니다. 아까 모세 언약에 대해 말했는데요, ‘모세 언약’에는 크게 두 가지 범주로 나눌수 있습니다. 하나는 율법 언약 (십계명+언약서), 또 다른 하나는 장막(성막)언약입니다. 장막 언약에 관해서는 출25장부터 40장까지 나옵니다. 출애굽기의 많은 부분을 차지합니다. 성막은 어떻게 만들고 재료는 무엇이고, 제사장 옷은 어떻게 만들어 입고 제사장의 역할이 무엇이고 제사 드릴 때 어떻게 드려야 하는가 등등, 장황하게 머리 아픈 내용들이 세세하게 나옵니다. 그러면 우리는 보통 스킵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장막 언약에 관한 부분이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는 것이 무얼 의미하겠습니까? 중요하다는거겠죠. 율법 언약은 언약백성의 삶을 말한다면 장막 언약은 ‘하나님의 임재’를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 참으로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운데 하나님이 임재하셔야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 아래서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33장을 보면, 모세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시내산에 올라가 있을 때, 이스라엘 백성이 더디 옴을 보고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이것이 하나님이다’하며 그 앞에서 뛰놀고 축제를 벌입니다. 이때 하나님은 진노하사 ‘내가 너희를 가나안 땅에 이르게 하겠지만, 나는 너희와 함께 가지 않겠어’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모세는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면 우리를 이곳에서 올려보내지 마옵소서’ 합니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 없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잘 먹고 잘 살아보았자,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가 외형적인 풍요를 누리고 교회에 성도들로 가득 채워질 정도로 성장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지 아니하시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22-26절은 그들 가운데 하나님께서 임재하기 위해서 그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내용입니다. 22절은 그들이 이미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했다고 합니다. ‘내가 하늘로부터 너희에게 말하는 것을 너희 스스로 보았다.’ 앞으로가 중요합니다. 20장 23절을 읽겠습니다. “너희는 나를 비겨서 은으로나 금으로나 너희를 위하여 신상을 만들지 말고” 하나님을 다른 무엇으로도 대체하거나 시각화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사람들이 신상을 만들고 그것을 은이나 금으로 아름답게 꾸미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너희를 위하여’라는 말에 답이 있습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위해 예배를 드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자기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예배를 드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나의 소원, 나의 욕망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나의 욕망을 이루어줄 다른 신을 찾게 됩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나의 만족을 위해서 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의 지시대로’ 예배드려야 합니다. 예수님은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기독교는 보이는 형상을 섬기는 종교가 아닙니다. 자기를 위한 종교도 아닙니다. 말씀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신앙하는 종교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말씀의 종교’, ‘책의 종교’, ‘듣는 종교’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제단을 쌓을 때 흙으로 쌓은 토단이나 다듬지 않은 돌로 제단을 만들라고 합니다. 인간의 노력이나 공로가 들어가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상태인 제단에서 제사를 드리라고 합니다. 이는 하나님께만 집중토록 하기 위함입니다. 제물은 양과 소로 번제와 화목제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거룩하신 하나님과 함께 하기 위해서는 희생제물이 필요합니다. 또한 층계로 제단에 오르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체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하체는 수치와 부끄러움의 상징입니다. 당시 가나안 사람들이 알몸으로 제사를 드리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노엽게 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여 수치심으로 인해 숨어 있을 때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들에게 가죽 옷을 만들어 입혀서 그들의 수치를 가리워 주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예배드리러 나아올 때 죄악된 모습 그대로 나오면 안됩니다. 먼저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피로 가리움을 받아야 합니다.


21장부터는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의 법, 사회 규범입니다.

1절을 읽겠습니다. “네가 백성 앞에 세울 법규는 이러하니라” 법규는 히브리어로 ‘미쉬파트’로 ‘판결’, ‘율례’, ‘공의’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공의가 실현되길 바라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첫 법규가 무엇입니까? 종에 관한 법규입니다. 1-6절은 히브리 남종에 관한 법규고, 7-11절은 여종에 관한 법규입니다. 


다함께 2절을 읽겠습니다. “네가 히브리 종을 사면 그는 여섯 해 동안 섬길 것이요 일곱째 해에는 몸값을 물지 않고 나가 자유인이 될 것이며” ‘네가 히브리 종을 사면’. 이 말에서 한가지 의문이 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자유인으로 살도록 하기위해 출애굽시키셨는데, 왜 히브리 사람을 종으로 살 수 있게 하셨는가?입니다. 애시당초 ‘너희는 히브리 사람을 종으로 삼지 말라’ 이렇게 해야 맞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쳇gtp에게 물어보고 자료를 찾아보았습니다. 성경은 ‘노예제도를 만들어라’ 혹은 ‘노예제도가 선하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노예제도는 고대 근동에서 존재하는 ‘사회적 현실’이었습니다. 당시의 경제는 토지와 노동력에 의존하던 시대였습니다. 이스라엘이 처음 가나안 땅에 정착할 때는 각자가 자기 몫의 토지를 분배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힘이 세고 열심히 일한 사람, 그리고 농작물의 특징을 잘 알고 머리를 잘 써서 일한 사람은 소출을 많이 거두고 부가 축적되었을 것입니다. 남의 땅까지 사서 거부가 된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몸이 허약하거나 장애가 있거나 병이 든 경우, 또는 게으름을 피우다가 제대로 경작을 못해 충분한 소출을 얻지 못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땅을 담보로 내 놓고 양식을 꾸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빚을 못갚아 땅도 팔고, 자식도 종으로 팔고 자기 몸도 종으로 파는 경우가 있었을 것입니다. 부자가 된 사람은 더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니 종을 사야 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노예제도는 경제와 생존의 일부였습니다. 요즈음으로 치면, 사채 시장이 존재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먹고 살아야 하는데 돈이 없습니다. 또 급전이 필요한데 은행에서는 신용이 안 좋아 돈을 빌릴수가 없습니다. 어쩔 수 없이 고금리 사채라도 빌려야 하는데, 정부에서 고금리 사채가 나쁘다고 다 없애버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더 큰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정부는 법정 최고 이자 한도를 정해서 사채를 허용하는 것 아닙니까? 마찬가지로 토지와 노동력을 기반으로 하는 고대 근동 시대에 노예제도를 갑자기 폐지하면 사회가 무너질 수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 빚진 사람은 살 길이 없어 생명을 끊을 수도 있습니다. 가장 소중한 것이 사람의 생명입니다. 종이 될지언정 생명을 보존하기 위한 불가피한 방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제한을 둡니다. 어떻게요? 6년만 종으로 일하고 7년째 되는 해에는 자유인이 되게 하셨습니다. 빚 때문에 완전히 파산할 수 밖에 없는 인생들을 일곱째 해가 되면 새롭게 시작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참으로 은혜의 법입니다. 하나님의 법은 히브리 사람이 일시적으로 종이 되어도 본질적으로 자유인이라고 하십니다. 


3-6절까지는 가정을 이룬 종이 일곱째 되는 해에 나갈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만일 종이 단신으로 왔으면 단신으로 나가고, 가정을 이루어서 왔으면 아내도 같이 나가도록 하였습니다. 이것은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만일 상전이 그에게 아내를 주어 그의 아내가 아들이나 딸을 낳았으면, 그의 아내와 자식들은 상전에게 속한 것이 된다고 합니다. 그는 7년이 되어 나갈 때 단신으로 나가야 합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가족 간에 생이별을 하게 하는 비정한 율례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비하신 하나님께서 이런 율례를 만든 이유가 무엇일까요? 종이 정당한 노동을 치르고 제 칠년에 자유함을 얻을 권리가 있다면, 주인도 자신이 준 여종과 그의 자식에 대한 자신의 소유권을 주장할 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냉정하지만 하나님은 이런 율례를 만들어 분쟁의 소지를 차단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부자와 가난한 자, 다스리는자와 다스림을 받는 자라는 이유만으로 한 편만을 편애하지 않습니다. 양자의 권리에 대해 아주 공평하게 처리하십니다. 세상은 어떻습니까? 이해 관계가 엇갈릴 때 상대편의 입장을 고려하기보다 먼저 자신의 입장과 권리를 보장 받는데 최대의 관심을 기울입니다. 특히 노동자와 고용주간에 분쟁에서 더욱 그렇습니다. 우리는 나의 입장과 권리뿐 아니라 상대의 입장과 권리도 인정하고 보장하는데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만약 종이 6년이 지난 후에도 자기 아내와 자식과 함께 살고자 한다면 어떻게 하라고 합니까? 스스로 주인에게 청하여 재판장에게로 가 문설주 앞에서 송곳으로 귀를 뚫고 영원히 주인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여기 계신 결혼하신 형제 목자님들에게 제가 물어보겠습니다. 여러분이 이 남종의 입장이라면, 나가서 자유인이 되겠습니까? 아니면 그냥 종으로 남겠습니까? 자유인이 되면 내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새 장가도 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내와 자식과 함께 하면 평생 종으로 살아야 합니다. 어느 쪽을 선택하겠습니까? 아내와 자식에 대한 애틋한 사랑이 없이는 평생 종으로 살고자 하기 쉽지 않을 것입니다. 또 주인에 대한 신뢰도 굉장히 중요하겠죠. 여기에 실은 ‘복음’이 담겨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지만 사랑하는 자기 백성들과 함께 하기 위해서 하늘의 영광스런 보좌를 버리고 천한 종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의 참 남편이 되기 위해서 송곳으로 귀를 뚫리는 아픔 정도가 아니라, 십자가에서 손과 발에 못이 박이고 옆구리가 창에 찔리는 고통을 받으시고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또 영원한 생명을 얻은 것은 이런 예수님의 사랑과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합니다. 우리는 이 사랑에 감격하여 항상 예수님을 사랑하고 나의 삶을 그 분께 드려야 합니다.


여종의 경우에는 어떻게 하라고 합니까? 남종과 다릅니다(7). 결혼을 목적으로 여종으로 팔리는 경우 일곱째 해가 되어도 나가지 못합니다.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아내나 며느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주인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몸 값을 받고 돌려보내야 합니다. 이방인에게 팔아서는 안됩니다. 상황에 따라서는 몸값을 내지 않아도 자유롭게 해야 합니다. 


종의 법규를 가장 먼저 말한 데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당시 세상 법에서는 왕, 귀족 혹은 평민에 관한 것을 가장 먼저 기술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공동체는 종의 권리를 가장 먼저 말합니다. 그만큼 약자와 소외된 자를 신경쓰고 배려한다는 것입니다. 당시 한번 종은 영원한 종이었습니다. 그런데 일정 기간이 지나면 속박으로부터 자유를 보장합니다. 아주 파격적입니다. 우리 모두는 죄의 종이었습니다. 그런데 주의 은혜로 말미암아 죄에서 자유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나에게 잘못한 사람이 있다면, 어느 시점에서는 다 용서해야 합니다. 우리는 일만 달란트 빚진 자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다 탕감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게 물질적인 빚을 진 사람이 있다면 어느 시점에서는 자유케 해 주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아들 딸로서 자유인입니다. 


12-17절은 두 번째 법규로 사형에 처해야 하는 경우입니다. 

사람을 쳐죽인 사람은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 물론 여러 상황을 참작해야 합니다(12-13). 사람이 이웃을 고의로 죽였으면 즉결 처분해야 합니다(14). 부모를 때리는 아들딸이 있으면 그도 죽여야 합니다(15). 부모는 하나님의 대리자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납치하면 그도 죽여야 합니다(16). 자기 어머니나 아버지를 저주하는 자식도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17).


‘사람을 죽인 사람을 죽여야 한다.’라는 말씀을 통해 우리가 무엇을 배울 수 있나요? 사람의 존엄성과 신성함을 배웁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사람을 함부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창9:6은 말합니다.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 사람의 생명을 함부로 여긴 사람은 그 생명으로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18절부터는 사람에게 상해를 입힌 경우 합당한 배상을 하라 합니다. 

사람이 서로 싸우다가 다쳤으면 치료비를 부담해야 합니다(18-19). 사람이 종을 쳐서 당장에 죽으면 반드시 형벌을 받아야 하지만, 즉시 죽지 않으면 벌을 면합니다(20-21). 사람이 싸우다가 임신한 여인을 낙태하게 하고 다른 사고가 없으면 벌금을 내야 합니다(22). 그러나 다른 해가 있다면,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덴 것은 덴 것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리므로 갚아야 합니다(23-25). 주인이 종의 눈이나 이를 쳐서 상하게 하면 그 종을 자유롭게 놓아주어야 합니다(26-27). 


여기에는 어떤 뜻이 있을까요? 공정한 보복의 원칙을 제시합니다. 자의적인 사적 보복을 억제하고 공적인 법 원리에 따라 처벌하도록 한 것입니다. 보통 사람은 자기가 피해 본 것보다 더 많이 되갚아 주려고 합니다. 그러면 보복의 악순환이 일어나죠,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손해를 입은 만큼만 가해자에게 갚으라는 뜻입니다. 당시 세상의 법인 함무라비 법전에도 ‘동해보복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상류계급이 피해자일 경우에만 동해 보복법이 적용되었습니다. 만약 가해자가 상류층이고 피해자가 하류층이면 금전으로 보상할 수도 있었고, 자신의 종을 시켜 대리 처벌을 받게 할 수도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강자를 위한 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율법은 경제적, 사회적 신분의 차이를 뛰어넘어 공평하게 적용이 되었습니다. 힘있는 자도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강자의 폭력을 예방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21장 28절부터 22장 17절까지는 이웃의 소유에 관한 법규입니다.


당시에는 소를 많이 키웠는데, 그 소가 사람을 죽이면 그 소를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 소 임자가 고의로 소를 통해 다른 사람을 죽이려 했다면, 그 임자를 죽이거나 목숨값을 내야 합니다(28-32). 사람이 구덩이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여 짐승이 빠져 죽으면 그 구덩이 주인이 보상해야 합니다(33-34). 소가 다른 소를 죽이면 살아 있는 소를 팔아 서로 나눠야 합니다(35-36). 사람이 소나 양을 도둑질하면 소는 다섯 배, 양은 네 배로 갚아야 합니다. 도둑이 밤에 들어오는 것을 보고 쳐 죽이면 죄가 없지만, 해 돋은 후에는 배상해야 합니다(22:1-4).


사람이 포도원에서 짐승을 먹이다가 그 짐승이 남의 밭에서 먹으면 배상해야 합니다(5). 불이 나서 곡식이나 밭을 태우면 배상해야 합니다(6). 사람이 돈이나 물품을 이웃에게 맡겨 보관했는데, 도둑을 맞을 수 있습니다. 그때 도둑을 잡으면 그 도둑이 갑절을 배상해야 합니다. 도둑을 잡지 못하면, 사실관계에 따라서 배상 책임을 져야 합니다(7-9). 가축을 보관했는데, 도둑을 맞으면 배상해야 합니다. 하지만 짐승에게 찢겼으면 배상하지 않습니다(10-13). 이웃에게 빌려온 것이 있는데, 주인 없이 상하거나 죽으면 배상해야 합니다(14-15). 이웃의 소유물을 내 것처럼 소중하게 관리해야 합니다.


그 외에도 사람이 약혼하지 않은 처녀를 꾀어 동침했으면 아내로 삼아야 합니다(16-17). 무당은 살려두지 말아야 합니다(18). 짐승과 행음하는 사람도 죽여야 합니다(19). 여호와 외에 다른 신에게 제사하는 사람도 멸해야 합니다(20). 


이상에서 볼 때, 많은 사례들을 구체적인 법규로 제정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법규를 주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십니다. 어떤 조건에 관계없이 누구나 평등한 귀한 존재로 보십니다. 자유로운 존재가 되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우리가 세상의 법이 아니라 더 높은 차원인 하나님의 법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 세상 속에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하길 기대하십니다. 


독일의 신학자 바르트(Karl Barth, 1886-1968)는 “기독교가 고백적 기독교에서 문화적 기독교로 전락하면 그 생명력을 잃고 세상으로 굴러떨어진다.”고 경고했습니다. ‘고백적 기독교’란 ‘말씀을 삶의 법규로 삼고 사는 교회’를 말합니다. ‘문화적 기독교’란 ‘기독교를 문화적으로 즐기는 형식적 교회’를 말합니다. 교회가 큰 건물과 오래 전통을 자랑한다 해도, 문화적 기독교로 변하면 생명력과 영향력이 없습니다. 즉 내일이 없습니다. 유럽교회가 생명력과 영향력을 잃고 세계의 중심에서 멀어진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한국 교회도 그 전철을 밟아가고 있지는 않는가? 생각이 되어 안타깝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법규로 삼아, 수직적으로는 하나님을 섬기고, 수평적으로는 동역자를 소중히 여기고 배려하길 바랍니다. 우리 모임이 캠퍼스에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하는 생명력과 영향력 있는 공동체로 자라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입니다. 우리에게 법규를 주신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십니다. 사람의 생명을 존중하고, 자유롭게 하며, 다른 사람의 소유를 소중히 여기며, 궁극적으로 자기 몸처럼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우리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법규의 사상에 입각하여 하나님의 공의를 실천하고자 힘쓰는 자가 되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