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출애굽기 14강
피로 세우는 언약
말씀/ 출애굽기 24:1-18 요절/ 출애굽기 24:8 “모세가 그 피를 가지고 백성에게 뿌리며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오늘 말씀의 제목은 ‘피로 세운 언약’ 입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시고 광야에서 돌보심으로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지난 3주에 걸쳐 십계명과 70개의 법조항을 알려주심으로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이 어떻게 사는 것인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고 신뢰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비로서 언약을 맺을 수 있게 단계에 이르게 됩니다. 이곳에 계신 모든 분들이 하나님을 계속하여 인격적으로 알아가고, 하나님과의 언약 가운데서 살아가는 복 된 인생 되시길 기도합니다.
1. 이스라엘의 고백을 기뻐 받으신 하나님
1, 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칠십 명과 함께 여호와께로 올라와 멀리서 경배하고 / 너 모세만 여호와께 가까이 나아오고 그들은 가까이 나아오지 말며 백성은 너와 함께 올라오지 말지니라.” 하나님은 모세에게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칠십 명과 함께 여호와께 올라오되 멀리서 경배하라 하십니다. 아론이 누구인가요? 모세의 형입니다. 나답과 아비후는 아론의 아들들입니다. 이들의 이름이 특별히 언급된 이유는 아론이 장차 온 백성을 대표하여 대제사장으로 임명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그의 두 아들은 제사장직에 임명되어 아론을 도와 제사 직무를 수행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택함을 받아 백성의 대표로 제사장 직분을 수행한다는 것은 매우 큰 특권입니다. 하지만 특권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릅니다. 그외에 백성의 대표인 70인의 장로가 여호와께 올라와 멀리서 경배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모세만 가까이 오게 하시고, 다른 이들은 멀리서 경배하라 하십니다. 백성들은 산에 오르지도 못하게 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시지만 동시에 거룩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죄인들이 함부로 가까이하다가는 자칫 생명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이 거리두기는 배척이 아니라 보호이며, 하나님을 바르게 알도록 훈련하는 과정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백성이 모세처럼 하나님께 가까이와서 섬기며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중보자 역할을 하는 제사장이 되길 소망하십니다. 그러나 아직은 아닙니다. 단계별로 이루어 가실 겁니다.
3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모세가 와서 여호와의 모든 말씀과 그 모든 율례를 백성에게 고하매, 그들이 한 소리로 응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명하신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모세는 재차 언약에 대한 의사를 백성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두번째 입니다. 그리고 이때 백성은 한 목소리로 대답합니다. “여호와께서 명하신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모세는 하나님께 들은 말씀과 율례를 백성들에게 전했습니다. 그 내용은 우리가 지난 3주 동안 배운 십계명과 70가지 규례입니다. 이 법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기 위해 꼭 지켜야 할 기준이었습니다. 모세는 언약식에 앞서, 백성에게 언약 내용을 읽어 줍니다. 그것은 단순한 전달이 아니라, 백성들의 자발적인 동의를 확인하는 절차였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는 일방적인 은혜의 언약을 맺으셨지만, 이스라엘 백성과는 쌍방의 언약을 맺고자 하셨습니다. 또한 그들이 억지나 두려움이 아닌, 자발적인 헌신으로 이 언약에 참여하길 원하셨습니다. 이에대한 백성들의 반응은 어떠해습니까? 3절 후반 부 여호와께서 명하신 부터 다시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명하신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사실 이들은 이미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처음 만났을 때 언약 조항도 모른 채 “여호와께서 명령하신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릅니다. 모세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다 들은 뒤에, “우리가 다 준행하겠습니다”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이것은 즉흥적인 감정이 아니라, 말씀을 이해하고 숙고한 끝에 내린 자발적인 결단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 전까지 법 없이 살던 노예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에게 엄격하고 수준 높은 법을 주십니다. 지키지 않으면 죽음에 이르는 조항도 있었고, 본능을 거스르는 명령도 많았습니다. 평생을 노예로 살아온 백성들이 따르기에는 쉽지 않은 기준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거부하거나 부담스러워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이걸 어떻게 다 지킵니까? 기준을 좀 낮춰 주세요”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기꺼이 “우리가 준행하겠습니다”라고 한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들은 지금까지 하나님과 함께 걸어오며,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몸소 경험하였습니다. 홍해를 가르시고, 만나를 먹이시고, 반석에서 물을 내신 그 하나님, 그분이 주시는 말씀이라면 두렵기보다는 신뢰할 수 있었고, 사랑 안에서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랑하는 연인이 “나 말고 다른 사람 만나면 죽을 줄 알아!”라고 말하면 그게 협박처럼 들릴까요? 오히려 사랑의 고백처럼 느껴질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반응도 그랬습니다. 마치 결혼을 앞둔 신랑과 신부의 마음 같았습니다. 결혼을 하면 더 이상 다른 사람과 연애할 수 없습니다. 결혼 서약은 독점적이고 헌신적인 관계를 뜻하죠. 하지만 결혼식 날, 주례자가 서약을 물을 때 “잠깐만요, 좀 생각해 볼게요”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가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기쁘게 대답합니다. 왜일까요? 사랑과 신뢰의 관계성 가운데 그렇게 고백하셨을 겁니다. 그뿐 아니라 이곳 계신 여러 목자님들이 세례 받으실 때, 이와 같은 고백을 하시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신뢰 가운데 그런 고백을 하신 줄로 믿습니다.
사실 이스라엘의 이와 같은 고백이 제대로 된 고백이었나 의심이 가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후 언약식을 치른지 두 달도 안 되어 금송아지를 숭배합니다. 이후에도 40년 동안 끊임없이 하나님을 시험합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될 걸 모르시지 않았을거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순간 그들의 고백을 믿어주시고, 언약을 체결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들의 고백을 들으시고, ‘못 믿겠는데, 좀 더 지켜봐야 겠는데, 지난 번 광야에서 원망하는거 보니 얼마 못가겠던데…’ 하지 않으시고, 이 고백을 언약을 맺기에 충분한 고백으로 받아주시고 언약을 맺으십니다. 예수님도 베드로가 여전히 세속적 야망을 품고 있었고 곧 실족할 것도 아셨지만,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라는 고백을 받아 주시고, 그의 인생을 그 고백 위에 세워 주셨습니다. 베드로가 나중에 예수님을 3번 부인할 것을 아시면서도 그가 회개하고 초대교회의 반석이 될 것을 믿어주셨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새 언약에 참여하고 있다고 하지만 과연 우리가 본문의 이스라엘보다 더 낫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우리 역시 언약 후에도 많은 죄와 허물을 범하고 있지 않나요? 그럼에도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의 고백을 있는 그대로 받아 주십니다. 어린 자녀를 둔 목자님들 그렇지 않나요? 철 없는 아이들이 만들어 준 어버이날 편지에 담긴 감사와 사랑 고백을 의심없이 받으셨을 겁니다. 우리의 작은 결단과 사랑 고백도 기뻐 받아 주시고, 믿어 주시고, 실패하고 넘어져도 일으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 찬양드립니다.
2. 피로 세운 언약
4~6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모세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고 이른 아침에 일어나 산 아래에 제단을 쌓고 이스라엘 열두 지파대로 열두 기둥을 세우고 / 이스라엘 자손의 청년들을 보내어 여호와께 소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게 하고 / 모세가 피를 가지고 반은 여러 양푼에 담고 반은 제단에 뿌리고” 모세는백성들의 고백을 듣고, 언약식을 준비합니다. 그런데 이 언약은 단순히 말로만 하는 약속이 아닙니다. 이 언약의 특징은 무엇보다 피로 언약을 세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출애굽부터 지금까지, 아니 조상들과 언약을 맺을 때부터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세우는 이 날을 고대하셨습니다. 400년을 넘게 준비해 오신 겁니다. 그러니 얼마나 기쁜 날입니까? 그런데 이런 기쁘고 축제 같은 날에, 왜 그렇게 무섭고도 두려운 방식으로 언약을 맺으시는 걸까요? 그만큼 이 언약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언약을 체결하다’ 라는 말은 직역하면 ‘언약을 자르다’로 번역됩니다. 고대에는 언약을 맺을 때 짐승을 둘로 쪼개고(두 손을 모았다가 떼는 제스처) 그 사이를 지나가며(가운데를 지르는 손 동작), “이 약속을 어기면 이 짐승처럼 되겠다’는 각오로 서약했습니다.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을 때 이 방식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 약속을 신실하게 지킨 결과가 현재 시내산에 모여 있는 200만이나 되는 아브라함의 자손들입니다. 하나님이 당시 아브라함과 언약을 세우실 때 하나님을 상징하는 횃불의 형상이 나타나셔서 쪼개진 제물 사이로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이때 아브라함은 제물 사이로 지나가지 않았습니다. 즉 이때 언약은 쌍방의 언약이 아닌 하나님이 이렇게 하실 것을 조건 없이 약속하시는 일방적인 언약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할 일은 하나님이 이렇게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실 것을 믿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하신 이 언약을 다 이루시고, 이제 200만명이나 되는 아브라함의 자손들과 새롭게 언약을 체결하고자 하십니다.
일반적으로 조약은 구두로 낭독한 뒤 협상을 거쳐 문서로 기록하고, 다시 낭독하여 내용을 확정한 후 보관하는 절차를 따릅니다. 모세도 이와 비슷하게, 먼저 하나님의 법규를 구두로 전한 후, 백성의 동의를 얻자 이를 기록합니다. 이렇게 해서 성문화된 ‘언약서’(Book of the Covenant)가 탄생합니다. 이어서 모세는 이른 아침에 산 아래 단을 쌓고,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상징하는 열두 기둥을 세웁니다. 그리고 청년들에게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게 합니다. 이때는 아직 제사장이 세워지기 전이었기에, 청년들이 제사 집행을 담당한 것으로 보입니다. 번제는 속죄와 헌신을 의미하고, 화목제는 식사가 포함된 제사로서 하나님과의 교제와 화해를 상징합니다. 결혼식의 피로연 같은 겁니다. 제사를 드린 후, 모세는 짐승의 피를 반으로 나눠 먼저 단에 뿌립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 언약에 신실하게 동참하신다는 뜻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진리 그 자체이시고, 거짓이 없으신 분이기에 피로 서약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피를 통해 하나님이 이 언약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시는지를 보여주십니다. 이 언약식은 단순히 백성에게 순종을 강요하는 일방적인 계약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피를 통해 먼저 언약에 헌신하시겠다는 사랑의 선언입니다. 이어지는 7절에서, 모세는 기록된 언약서를 다시 백성에게 낭독합니다. 7절을 읽겠습니다. “언약서를 가져다가 백성에게 낭독하여 듣게 하니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이는 세 번째로 동의를 묻는 절차입니다(19:8; 24:3 ). 신랑 되신 하나님께서 먼저 언약에 동의하셨고, 이제 신부가 될 이스라엘에게도 결혼 서약과 같은 결단을 다시 요청한 것입니다. 백성은 이번에도 응답합니다.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왜? 세 번이나 물었을까요? 신약에서 예수님을 3번 부인한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3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시는 장면이 떠오릅니다. 그들은 출애굽 후 어려움이 닥칠 때 마다 원망과 불평, 불신의 말을 내뱉고는 하였습니다. 출애굽 후 홍해 앞에 섰을 때, 신 광야에서 양식이 떨어져 힘들었을 때, 르비딤에서 물이 없어 목말랐음 때 그들은 원망과 불신의 말을 내밷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시내산에서 구원과 인도하심의 은혜를 새롭게 돌아보며 믿음의 결단과 고백을 하도록 도우십니다. 이를 통해 지난 날의 불신을 회개하고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성 가운데,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기겠다는 깊은 결단을 하도록 도우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8절에서 모세는 나머지 절반의 피를 백성에게 뿌리며 선포합니다. 8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모세가 그 피를 가지고 백성에게 뿌리며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이 순간, 언약은 확정되었고, 효력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백성과 왜 피로 언약을 세우시는 걸까요? 우리는 보통 계약할 때 서명을 하거나 도장을 찍고, 중요한 약속이면 반지나 선물을 주고받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과의 언약을 짐승의 피, 그것도 가장 값비싼 소의 피로 확정하셨습니다. 이것은 이 약속이 목숨 걸고 지켜야 할 진짜 중요한 약속이라는 걸 보여주신 것입니다. 피는 곧 생명을 뜻합니다. 피로 언약을 맺는다는 건 “이 약속, 내 목숨 걸고 지키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은 그런 무게감 있는 약속이었습니다. 그냥 해볼까 식이 아니라, 전심을 다해 책임지고 따르겠다는 약속이었던 겁니다. 신명기 6장 5절에서 하나님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해 나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이건 일방적인 요구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먼저 피로 맹세하시면서 “내가 너를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하겠노라”고 선언하시는 겁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도 그런 사랑의 응답을 기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언약을 피로 세우신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피 없이는 언약을 세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피 때문에 불가능했던 관계가 가능해졌습니다. 가까이 할 수 없었던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 많은 백성이 피로 인해 함께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피가 넘을 수 없던 장벽을 무너뜨렸습니다. 피가 하나님의 거룩함과 백성의 죄 사이를 잇는 다리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피로 세운 언약의 은혜요 능력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완성될 새 언약의 그림자이기도 합니다.
3. 피로세운 언약으로 하나님과 가까워진 백성들
9~1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모세와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칠십 인이 올라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보니 그의 발 아래에는 청옥을 편 듯하고 하늘 같이 청명하더라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들의 존귀한 자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셨고 그들은 하나님을 뵙고 먹고 마셨더라.” 언약식 이후,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관계는 놀랍도록 달라졌습니다. 언약식 전에 하나님이 시내산에 임하셨을 때, 산은 우레와 번개, 빽빽한 구름과 나팔소리로 가득했고, 백성들은 두려움에 떨었습니다(출 19:16). 그러나 언약 체결 후, 모세와 아론, 나답, 아비후, 그리고 70인의 장로가 산에 올라가 하나님을 뵙게 됩니다. “하나님을 보았다”는 말이 두 번이나 반복되고, 그럼에도 그들은 죽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그들을 ‘이스라엘 자손의 존귀한 자들’이라 부르시며 손대지 않으셨습니다. 손을 대지 않았다는 건 적대 행위나 심판을 의미합니다. 이 변화의 이유는 분명합니다. 피로 맺은 언약 때문입니다. 언약이 체결되자, 하나님은 그들을 다른 눈으로 보시고, 가까이 하시는 관계로 바꾸신 것입니다. 같이 식사한다는 건, 가족처럼 친밀한 관계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멀리 계신 두려운 존재가 아니라, 함께 하시고, 교제하시는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10절 후반부는 우리말 성경에서는 “하늘처럼 맑은 사파이어로 된 바닥 같은 것이 깔려 있었다”라고 묘사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장소의 아름다움과 평화로운 분위기를 상징합니다. 이전의 두려운 불, 어두운 구름과는 대조적인 이미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변하셨다는 건 아닙니다. 그 피가, 피로세운 언약이 이들의 존재를 변화시킨 것입니다. 피로 세운 언약은 이처럼 놀라운 효력이 있습니다.
12~17절은 하나님이 언약식 이후 모세와 백성에게 주시는 방향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산 위로 올라가 40일 밤낮을 머물며 하나님의 계시를 받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함께 살기 위한 준비, 즉 성막에 관한 계시를 주시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기록하신 율법의 돌판을 주신 것도 의미심장합니다. 앞서 모세가 기록했던 법규와 달리,이번엔 하나님이 친히 쓰셔서 주십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 언약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셨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표현입니다.
결혼식만큼 중요한 건, 그 이후 함께 사는 삶입니다.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 백성은 하나님의 계명과 율례를 끊임없이 배우고 순종해야 했습니다. 한 번 들었다고 다 아는 것이 아닙니다. 순종하는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더 깊이 알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꾸준히 성경공부를 하는 이유는, 단순히 전도나 제자 양성 때문이 아닌, 하나님과 함께 사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입니다.
4. 그리스도의 피로세운 새 언약
오늘 본문은 구약 곧 옛 언약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오늘 날 샌 언약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구약과 신약은 전혀 다른 이야기가 아닙니다. 구약의 주제를 한 마디로 하면 장차 오실 그리스도입니다. 즉 하나님이 옛 언약을 주셨다가 실패하여 새 언약을 다시 만드신게 아니라 하나님은 처음부터 새 언약을 주고자 하셨고, 새 언약을 준비하는 과정이 옛 언약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약을 통해 신약을 더 잘 알게 되고, 신약을 알게 될 때 구약을 더 잘 알게 됩니다. 시내산 언약은 완전하신 하나님과 불완전한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맺어진 언약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기준은 높고 완벽하지만 이스라엘은 그 수준에 이를 수 없었기에 언제 깨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불안한 상태였습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역사상 수없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기고, 다른 신들을 섬겼습니다. 혹은 겉보기엔 하나님을 잘 섬기는 듯 했으나 실제 삶속에서는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며 정의와 공의를 져버렸습니다. 반면, 새 언약은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 맺어진 언약입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완전한 사람으로서 하나님과 백성 간의 완전한 중보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자기 아들이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게 하심으로 시내산 언약을 배반한 자기 백성의 죄값을 치르게 하셨습니다(히 9:15). 그래서 예수님이 율법을 폐하신 것이 아니요 완성하셨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은 영원히 깨어지지 않는 새 언약을 자신의 피로 세우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으셨다면, 우리는 뭔가요? 우리는 아무 상관 없는 건가요? 아닙니다. 우리는 바로 새 언약의 수혜자입니다. 우리는 그 언약의 혜택을 전부 다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백성이긴 했으나 감히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 신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친히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 나라의 기업을 얻는 자들이 되었고, 예수님이 이루신 새 언약의 효력을 모두 누리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이해하기 쉽도록 예를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저는 2012년부터 2019년까지 나이지리아에서 선교사로 살다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때 한국에 들어오는데 필요한 건 여권과 비행기 티켓이었습니다. 이때 아이들을 위한 비행기 표는 누가 샀을까요? 네 부모가 샀겠죠. 아이들은 뭐 했을까요? 그냥 저희 손 붙잡고 비행기 타면 됐어요. 아이들이 얼마나 착한지, 얼마나 잘생겼는지는, 얼마나 공부를 잘 하는지 아무 상관 없습니다. 그저 저의 자녀라는 이유만으로, 제가 지불한 값으로 안전하게 한국에 도착한 거예요. 언약의 수혜자라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예수님이 다 하셨어요. 우리가 천국자녀가 되기 위한 값도 치르시고, 길도 만드셨고, 보증도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듣고 믿고 따라가면 되는 겁니다. 내가 뭘 해서가 아니라, 내가 누구의 자녀인지가 중요한 거예요.
그러면 새 언약을 누리게 된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셨을 때 처럼 하나님이 하시겠다고 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하겠다 하셨습니다.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 삼아주겠다 하신 겁니다. 또 예수 믿는 우리가 이미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을 믿는 겁니다. 이를 믿을 때, 우리는 그에 걸맞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또 예수님의 피로 세운 새 언약의 효력을 믿는 겁니다. 소의 피로 세운 옛 언약도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을 가깝게 해 주는 놀라운 능력 있었습니다. 그러나 분명 한계가 있었습니다. 언약식 후에 70인의 장로들만 하나님과 함께 식사할 수 있었습니다. 백성들은 여전히 산 아래 있었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민족이 아닌 우리 이방인들은 어디 있었죠? 너무 멀어 언급도 안 되었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의 효력은 옛 언약과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새 언약은 이방인이던 우리 조차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가게 합니다. 새 언약은 이방인이던 우리가 죄사함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 성령 하나님이 우리 안에 내주하게 만듭니다. 하나님 앞에서 먹고 마시는 것도 엄청난 특권인데, 하나님이 우리 안에 들어와 함께 사십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들어오신 하나님이 기쁨과 감사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살게 하십니다. 이것이 오늘 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진 새 언약의 효력입니다. 신실하신 하나님, 놀라운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결론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의 언약식을 귀하게 여기시고 크게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배웠습니다. 또한 피로 세운 언약에는 하나님과 멀었던 자들을 가깝게 하는 놀라운 효력이 있음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이 역시 하나님이 계획하고 계셨던 새 언약의 그림자이며, 하나님은 하나님의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심으로 새 언약을 완성하셨습니다. 옛 언약도 이처럼 귀하게 여기고 기뻐하신 하나님이신데, 새 언약은 얼마나 더 기뻐하셨겠습니까? 예수님은 유월절에 제자들과 새 언약식을 앞두고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고 하셨습니다(눅22:15). 우리는 스스로의 방법이나 노력으로 하나님과 결코 가까워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찾아오시고 만들어 놓으신 방편으로 하나님께 가까월질 수 있습니다. 똑 같은 피로 세워진 언약지만 옛 언약과 달리 새 언약의 상징은 포도주 즉 기쁨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비결, 기쁨 넘치는 신앙생활의 비결은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시는 것을 나도 귀하게 여기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나도 함께 기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귀하게 여기시고 가장 기뻐하시는 새 언약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이미 받으신 분들은 이를 처음 받았을 때처럼 예수님의 피로 세운 새 언약을 귀하게 여기시고, 기뻐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아직 언약에 들어오시지 않은 분들은, 기대하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초청에 응하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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