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여름수양회 주제2강
그의 나라 주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
말씀 / 누가복음 12:22-34
요절 / 누가복음 12:32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안녕하십니까? 어제 송명의 목자님의 저녁 2강 십자가 메시지와 찬양제, 소감발표를 통해서 은혜를 더하여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많은 목자님들의 기도와 헌신으로 2025년도 여름수양회를 은혜 가운데 마무리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여러분들께서 이번 수양회를 통해 말씀과 소감으로 예수님을 깊이 만나셨는데 저희가 이를 잘 간직하고 각자의 신앙으로 소중히 가꿔나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주일예배 말씀은 주제강의 2강으로 누가복음 12장 22-34절입니다. 이 본문은 교회를 좀 다녀보신 분들이라면 자주 들어본 아주 유명한 말씀이라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 제자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어떠한 관점과 세계관으로 살아가야 할지를 제시해 주십니다. 세상에 거대하게 흐르는 세속주의의 흐름에 몸을 맡길 것인가 아니면 이를 거슬러 예수님께서 제시해 주시는 진리의 길을 갈 것인가. 선택하기를 원하십니다. 이 시간 성령께서 우리 각자의 심령을 열어주시고 말씀이 가르치는 바에 우리의 마음이 순종하는 역사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누가복음 12장 1절을 보면 수만 명의 무리들이 예수님께 말씀을 듣고자 몰려온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주변에는 항상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오늘 본문 말씀은 무리와 구별된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께 몰려들면 그들을 섬기고 힘을 다해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제자들은 항상 밝은 얼굴로 눈에서는 반짝반짝 빛이 났습니다. 예수님의 치유의 역사가 있을 때면 제자들은 스승의 능력과 하나님의 역사로 인해 넘치는 자부심과 뿌듯한 마음으로 항상 성령이 충만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항상 스피릿이 좋은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사역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이면 제자들은 다들 생각에 잠긴 듯이 지친 발걸음 소리만 냈습니다. 병을 낫게 해줘서 감사하다고 받은 감자 몇 알과 포도주 1병으로 수십명의 제자무리들은 당장 그날 저녁 끼니를 걱정해야 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제자들은 직장도 버리고 가족도 버렸건만 그들은 항상 배가 고팠습니다. 제자들은 힘이 들 때마다 “지금은 이렇게 힘이 들지만 조금만 참으면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을 해방 시키고 왕으로 등극하실 거야” “그럼 나는 목수 출신이니까 국토부 장관을 시켜주시겠지?”라고 되뇌이며 힘든 현실을 감내하였습니다. 하지만 모인 헌금은 항상 모자랐고 끼니 챙겨 먹는 것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제자들은 무리를 섬기며 영적인 역사를 섬기는 기쁨이 있었지만 문득문득 자신의 미래에 대한 염려와 걱정에 휩싸이곤 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다함께 22절을 읽어주시겠습니다.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염려를 아시고는 그들에게 너희 목숨을 위하여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관심이 이 땅의 먹을거리, 입을거리에 대한 생존에 대한 관심에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원으로 옮겨지도록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형제님들께서 23절을 읽어주시겠습니다.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니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질서 입니다. 우리는 이 본질을 탐구하다 보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시며 온 우주와 이 지구 생태계를 창조하셨습니다. 해가 뜨고 지는 가운데 풀이 자라고 이를 먹고 사는 물고기와 동물들이 자랍니다. 이들은 서로가 먹고 먹히며 먹이사슬을 이루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바다속의 수천 조마리의 물고기들이 무엇을 어떻게 먹고사는지 다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 생태계는 이렇게 수천년을 조화롭게 유지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쉽게 납득 할 수 있는 예 3가지를 들어주십니다. 24절을 자매님들께서 읽어주시겠습니다.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까악, 까악~” 예수님께서는 때마침 제자들 옆을 날아가는 까마귀를 예로 드셨습니다. 유대 사회에서 까마귀는 부정한 짐승으로 취급되었습니다. 까마귀는 새카만 외모뿐 아니라 동물의 사체를 먹는 습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까마귀도 하나님께서 지으신 생물이기 때문에 그가 생명을 유지하도록 필요한 것을 공급하십니다. 까마귀는 밭에 나가서 씨앗을 심지도 않고 가을이 되어 곡식이 익어도 추수하지 않습니다. 곡식을 저장할 창고도 없습니다. 하지만 까마귀는 사계절 먹을것과 입을 것을 걱정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까마귀는 자신의 본능에 각인된 본연의 창조목적을 잘 수행하며 살아갑니다. 해충을 잡아먹고 로드킬 당한 동물들의 사체를 먹어서 청소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부정한 미물인 까마귀도 이렇게 먹이고 입히시는데 만물의 영장으로 지으신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더 각별한 관심과 사랑을 주시겠냐는 말씀입니다.
형제님들께서 25절을 읽어주시겠습니다. “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느냐” 예수님께서는 두 번째 예를 들어 주십니다. 염려라는 말뜻은 ‘생각할 념’과 ‘생각할 려’로 어떤 일이나 대상에 대해 마음을 써서 생각하고 걱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사용된 키라는 단어는 길이나 신장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목숨을 뜻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아무리 염려하면서 고도로 정신을 집중하고 염력과 텔레파시를 동원해도 손을 대지 않고는 이 A4지 한 장을 1cm도 옮길 수가 없습니다. 키가 크고 싶은 한 어린이가 잠자리에 들면서 “다리야 오늘 밤에는 2cm만 자라다오”라고 명령해도 우리 몸은 말을 듣지 않습니다. 이는 내 몸이 내 것이라 해도 하나님의 창조 질서상 발육의 문제는 자율신경계로 움직이기 때문에 내 마음대로 통제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나는 이 세상에 이왕 태어났으니 한 180세 정도 까지만 살다가 죽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어도 우리는 우리의 노화속도와 죽는 그 때와 시를 결정할 수가 없습니다.
이어서 자매님들께서 26절을 읽어주시겠습니다. “그런즉 가장 작은 일도 하지 못하면서 어찌 다른 일들을 염려하느냐” 우리의 생명을 주관하시는 것은 하나님께는 아주 작고 간단한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한계를 드러내심으로 하나님의 권능을 대조해서 드러내십니다. 우리가 염려하고 걱정한다고 해서 간단해 보이는 것 하나 바꿀 수가 없음을 일깨워 주십니다.
형제님들께서 27절을 읽어주시겠습니다.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큼 훌륭하지 못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이 백합화는 과연 어떤 꽃인가 논란이 있습니다만 보통 학자들은 아네모네로 불리우는 자주색 꽃으로 보고 있습니다. 자주색은 왕이 입는 옷을 상징하는 색으로 들에 무심하게 피어있는 이러한 꽃들조차도 가장 융성했던 솔로몬 왕실에서 최고의 장인들을 불러모아 지은 옷보다 귀하고 신비로운 자태를 뽐내고 있음을 상기시켜 주십니다. 자매님들께서 28절을 읽어주시겠습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나님께서는 짧은 시간 가장 아름답게 피어있다가 아궁이에 던져지는 이런 흔하디 흔한 들풀마저도 가장 고급원단과 아름다운 디자인으로 지으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생각하고 보니 그렇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귀한 존재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을 창조하시고 그분의 형상대로 우리를 지으셨습니다. (창1:27)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귀한 존재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지어졌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만물의 영장으로 하나님이 지으신 이 세계를 다스리며 청지기의 본분을 맡았습니다. 인간은 처음 지음을 받을 때는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며 창조 본연에 맞는 사명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같아지려고 하는 탐심의 죄를 짓고 그 본연의 자리에서 쫓겨난 후부터는 먹고사는 문제를 염려하는 존재로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죽을 때까지 수고하고 얼굴에 땀을 흘리지 않으면 생존의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세상은 점점 하나님 없이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사단은 사람들에게 속삭였습니다. “이번 달 씨 뿌리고 다음 달 잡초 뽑고 다다음달 수확하려면 시간이 없네~” “아 양털 깎고 풀 먹이고 울타리 보수하려면 시간이 없네~” 사람들은 더 많은 곡식과 더 많은 물질을 얻기 위해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들을 움켜쥐기 위해 노력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은 점점 소홀히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질서 속에서 하나님께서 먹이시고 입히신다는 믿음이 없어졌기 때문에 사단은 우리에게 자신의 몸뚱어리를 믿고 투쟁모드로 살아가야 한다고 속삭이고 있습니다. 사단은 “나태박살”이라는 동기부여 채널을 만들어서 나태하고 노력하지 않는 자는 도태 되어도 싸다는 동기부여 영상을 유튜브에 퍼트렸습니다. 사람들은 그 채널에 열광했습니다. 사단은 실버버튼, 골드버튼을 받아서 개봉 VLOG도 찍었습니다. 그렇게 이 사회는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눈에 보이는 것, 손에 잡히는 것을 당장 확보하는 것만이 최고로 여겨지는 물질주의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물질주의적인 세속화는 2천년 전 예수님 당시에도 있었지만 산업과 자본과 재화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현대에는 이러한 현상이 더욱더 가속화되고 있습니다. 독일에서 활동하는 한국계 철학자 한병철은 이러한 현대사회를 “피로사회”로 지칭했습니다. 예전에는 귀족이 백성을 착취하고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했는데 이제는 외부의 착취는 없어지고 자기가 자기를 착취하는 시대가 되었다고 진단했습니다. 사람들은 무한 경쟁속에 남들보다 앞서야 한다는 시대의 당위성 앞에 인간성을 잃고 스스로를 착취하는 것도 모른 채 열심히 하지 못한 자기 자신을 탓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사단에 속고 있는 제자들에게 창조질서 속 인간의 본연의 지위를 회복하도록 하십니다. 창조 시의 그 아름다운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성을 회복하도록 하십니다.
다함께 29-30절을 읽어주시겠습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나님께서 바로 우리의 아버지인 것을 상기시키십니다. 부모는 자녀를 낳고 자녀의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알아서 공급해줍니다. 아이가 갓 태어났을 때 부모는 자녀의 울음소리만 듣고도 배가 고픈지 소변을 보았는지 알아채고 아기의 필요를 해결해줍니다. 또 유기농 야채로 정성껏 이유식을 만들어 먹입니다. 먹을 것, 입을 것뿐 아니라 아이가 심심하지는 않을까 장난감을 사주고 시간을 함께 하며 즐거워 하고 아이의 행복을 기원합니다. 인간들도 자녀들에게 이렇게 할진대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인 것을 기억하면 저희는 더 이상 생존의 걱정과 염려에 매여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질문하실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생각하면서 살아왔는데요...?” “그런데 왜 이 염려가 없어지지 않는 것일까요?” 우리나라는 이제 세계적으로도 잘 사는 나라로 간주되어 어지간하면 못 먹고 못 입어서 죽는 경우는 매우 드믑니다. 다만 사회 각 분야에 고도의 분업화가 이루어져서 모든 사람은 각 분야의 전문가가 되지 않으면 이 사회에서 살아남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항상 능력의 부족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치열한 경쟁에 노출되어 끊임없이 배우고 성장하지 않으면 살아남기가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항상 자신의 능력 이상의 퍼포먼스를 요구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염려하게 됩니다. 이 염려는 사람들의 믿음을 잃게 합니다. 믿음이 없으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기 어려워집니다. “그래! 나는 하나님의 자녀지!” 생각하다가도 내일모레로 다가온 중간고사를 생각하면 금방 믿음을 잃어버립니다. 달성하지 못한 영업실적을 생각하면 곧 믿음을 잃어버립니다.
빕립보서 4:6-7절은 말씀합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그것은 바로 저희의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는 것입니다. 감사함은 언제 가능합니까? 겸손할 때 가능합니다. 우리를 둘러싼 걷잡을 수 없는 염려를 물리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무기는 감사함입니다. 나를 여기까지 인도하시고 먹이시고 입히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 우리는 과거에 하나님께서 그러하셨던 것처럼 미래의 하나님도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입히시고 먹이시며 인도하실 것을 충분히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다시 걱정을 물리치고 믿음을 덧입고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켜 세상을 이길 힘을 얻게 됩니다.
다함께 31-32절을 읽어주시겠습니다. “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염려와 근심을 금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그의 나라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의 나라를 구한다? 천국을 구한다는 것인가요? 그의 나라를 구한다는 것은 지금 힘들어도 참으면서 우리가 언젠가 가게 될 먼 훗날의 천국을 바라면서 참고 지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천국은 구름 뚫고 올라가서 도착하는 공간적인 개념보다는 오히려 시간적인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회개하여 말씀을 영접하고 그 말씀이 살아 역사할 때 우리의 내면이 바로 천국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내 영혼이 은총입어 중한죄짐 벗고 보니 슬픔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받고 주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 주의얼굴 뵙기전에 멀리뵈던 하늘나라 내맘속에 이뤄지니 날로날로 가깝도다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받고 주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 높은산이 거친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주예수 모신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받고 주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아멘!” 하나님의 나라는 회개한 우리 심령에 현재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출애굽기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노예로 박해를 받을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맺으신 언약을 기억하시고 그들을 광야로 이끌어 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성막을 짓도록 하시고 친히 그 가운데 거하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구태여 죄 많은 인간들 사이에 성막을 치도록 하시고 거기 계시겠다고 하셨을까요? 이는 노예생활로 찌들어 앞뒤 분간도 못하던 연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임마누엘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계시면 그곳이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성막에 임재하심으로 이스라엘 진영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셨습니다. 요한복음 1:14절은 말씀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우리의 내면 가운데 예수그리스도가 임재하시면 우리가 바로 성전이고 성막이요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그의 나라가 됩니다. 요한복음 6:27-29절은 말씀합니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그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예수님께서는 명확하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보내신 이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의 내면 가운데 성령이 임재하시고 우리는 더 이상 죄의 낙을 사랑하지 않고 기쁨으로 기꺼이 거룩함을 사모하게 됩니다.
6.25를 배경으로 한 영화 “고지전”을 보면 낮에는 미군의 화력지원에 힘입어 한국군이 고지를 점령하고 밤에는 북한군이 밀고 올라와 고지를 점령하여 낮에는 한국군이, 밤에는 북한군으로 고지의 주인이 바뀌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도 그러합니다. 수양회를 통해 집중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찬양을 하다보면 영적인 상태가 좋아집니다. 그러나 수양회에서 내려가는 날로 수양회 참석하느라 못 본 밀린 넷플릭스 드라마와 예능을 보다 보면 어느새 영적인 상태가 허물어지고 믿음이 떨어집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하나님 나라를 사단에게 빼앗기지 않고 잘 간직하고 관리할 수 있을까요?
다행히도 바울 사도께서 그 해법을 알려줍니다. 로마서 10장14절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우리는 수시로 말씀과 기도로 나아가야 합니다. 왕도가 없습니다. 매일매일 일용할양식과 매주 주일 말씀, 계절마다 수양회 말씀, 금요기도모임과 요회기도모임을 통해 말씀과 기도로 나아가야 합니다. 듣기만 해서는 안되고 말씀을 쓰고 적용해야 합니다. “아니, 일도 해야하고, 공부도 해야하고 요즘같은 경쟁 시대에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말씀과 기도에 그렇게 많은 시간을 들이나요?” 여러분 제가 한가지 충격적인 사실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대한민국 국민들의 평균 유튜브 시청시간이 얼마나 되는 줄 아시나요? 하루 평균 2시간을 듣는다고 합니다. 소리만 듣는 것이 아니라 영상까지 복합적으로 시청함으로서 우리의 마음과 정신을 빼앗아 갑니다. 3살 아이부터 70대 노인까지 모두가 빠져있습니다. 이렇게 온 마음과 정성을 들여 매일같이 유튜브를 시청하게 되면 말씀이 우리 안에 역사할 틈을 얻지 못하게 됩니다. 마음 밭이 돌밭이 되어 말씀의 씨앗이 뿌려졌다가 금방 햇빛에 타버리게 됩니다. 저희가 유튜브 시청시간을 줄이고 저희의 마음 밭을 기름지게 하여 말씀이 우리 가운데 역사하여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예수님을 모시고 하나님 나라를 소유한 사람들은 어떻게 변화됩니까? 우리는 성경에서 삭개오라는 인물을 통해 이러한 뚜렷한 변화의 역사를 알 수 있습니다. 삭개오는 세리장으로 부정한 재물을 많이 쌓은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만난 후 자기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다른 사람의 재물을 속여 빼앗은 경우가 있다면 4배를 갚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는 사실상 자기 전 재산을 정리하겠다는 선언을 한 셈입니다. 그것이 왜 가능했습니까? 그것은 바로 그가 배척 받고 외면 받던 삶에서 예수님의 전적인 수용과 사랑 앞에 무너지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기쁨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내면 가운데 공의와 거룩함을 사모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그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기쁜 마음으로 자기가 일평생 집착해왔던 물질로부터 참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여기 또 한 사람의 변화의 증거가 더 있습니다. 바로 시몬 베드로입니다. 그는 베테랑 어부로 밤이 새도록 물고기를 잡고자 시도했지만 빈 그물만 낚아 올려 낙심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라는 말씀을 듣고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순종하여 그물이 찢어질 정도의 수확을 얻었습니다. 베드로가 자신의 감각과 경험을 믿고 일할 때 낙심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그토록 물고기 잡기를 원했어도 얻지 못했으나 예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순종했을 때 전무후무한 수확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물고기를 잡고 못 잡고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물고기에 집착하던 베드로를 인격적으로 만나주신 예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이 역사 앞에 베드로와 그의 동업자 야곱과 요한은 그토록 집착하던 물고기와 모든 배와 어구들을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물고기 잡던 어부에서 사람을 낚는 어부로 인류구원 역사에 크게 쓰임받게 되었습니다! 아멘.
다함께 33-34절을 읽어주시겠습니다.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 곧 하늘에 둔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둑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 구체적으로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소유를 팔아서 구제하여 낡아지지 않는 배낭을 만들라고 하십니다. 당시 유목민에게 배낭은 몸에 두르고 다니는 전대를 의미했습니다. 당시에는 은행의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전대에 돈을 넣어두면 항상 강도의 습격과 분실의 우려가 있었습니다. 또한 전대의 재질은 주로 양털(Wool)과 마(Linen)가 사용되어서 많이 사용하면 마모되어 닳기도 하고 좀 벌레에 쏠려 구멍이 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다니다가 구멍이 나면 돈이 흘러버리기 일쑤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불완전한 배낭에 보물을 넣어 두고 거기에 마음을 두도록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 ‘Bank of Heaven’에 쌓아두도록 하십니다. 거기는 도둑이 들일도 없고 분실의 위험도 없습니다. 우리의 소유란 꼭 통장잔고 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물질과 시간, 우리의 지식, 노력 등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자원과 에너지를 말합니다. 우리의 이 소중한 보물을 팔아서 그의 나라가 임하도록 역사를 섬기고 우리의 마음을 그곳에 둘 때 하나님께서는 그 역사를 축복하십니다. 마13:44은 말씀합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밭에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는 것을 안 사람은 자기 재산을 다 팔아 그것을 기쁨으로 사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소유를 팔아 하늘나라에 두라고 하신 것은 막강한 돈의 영향력이 지배하고 있는 세상을 거스르도록 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주식을 사면 그 기업이 실적을 냈다는 뉴스에 일희일비하고 아파트를 사면 그 아파트가 올랐나 떨어졌나를 계속해서 쳐다보게 됩니다. 우리가 우리의 보물을 하나님께 드릴 때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게 될 것입니다. 그분의 생명 구속 역사에 쓰임 받기를 자원할 것입니다. 이 땅의 연약한 전대에 물질을 넣어두고 구멍날까 도둑맞을까 전전긍긍하기보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우리의 보물을 맡겨둘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의 나라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저에게도 호시탐탐 하나님 나라를 주고자 하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잠시 잠깐의 말씀의 은혜는 사모했지만 그에 걸맞는 순종은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아니 내가 학생 때부터 보니까 영적인 투쟁을 너무 오바스럽게 열심히 한 친구들은 금방 지쳐서 다들 나가 떨어지더라...’ ‘나는 절대로 영적으로 무리하지 말고 가늘고 길게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게 생각을 하니 영적인 부담이 없었습니다. 기나긴 인생길에 처음부터 너무 영적으로 무리하다가 넘어지는 것은 오히려 미련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니 목자님들이 말씀하시는 권면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기를 잘하였습니다. 일하기도 시간이 모자르고 납품일은 다가오는데 어떻게 매일같이 양식 보고 매주마다 소감 쓰고 절기마다 수양회를 다 참석할 수 있는가. 저는 자기만의 영적인 게이지가 있어서 어느정도 차면 더 담을 수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는 따지고 보면 제가 그렇게까지 시급하게 모니터링 할 필요도 없는 정치소식 유튜브에 쓸데없이 과몰입을 하고 낮에는 집중력있게 일하지 못하고 산만한 상태에서 시간을 허비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여러 가지 건축 인허가와 심의를 통과시키기 위해 노심초사 마음을 쓰고 바쁘게 돌아가고 있는 현장에 내 스케쥴을 맞추어 대응하다 보니 낮에는 항상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야근을 하게 되고 아침에 출근이 늦어서 다시 야근을 반복하는 악순환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업무 능률은 떨어져 갔고 가정을 잘 돌볼 수 없었습니다. 당장 그때그때 납품 해야하는 많은 양의 도면과 서류에 눌려있었고 클라이언트에겐 ‘아 일이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걱정 마세요’라고 보고를 했지만 전화를 끊고 나면 부랴부랴 준비하느라 바빴습니다. 그러던 차에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이번 여름수양회 말씀강사를 하도록 방향을 주셨습니다. 7/11이 수양회인데 저는 7/8까지 중요한 건축심의를 준비해야 했기 때문에 도저히 말씀에 집중하여 준비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읽어보고 읽어봐도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잘 안 되었습니다. 마치 예수님께 나온 니고데모가 거듭남의 의미를 모태에서 2번 나는 것입니까 하고 묻는 모습과 같았습니다. 낮에는 일에 밀려 전혀 준비를 할 수 없었고 한자도 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급기야 ‘왜 나를 시켜서 이렇게 수양회를 망치는 것인가...’ 하는 원망의 마음이 들었습니다. 겨우 건축심의를 마치고 무기력한 모습으로 나타난 저에게 하나님께서는 큰 말씀의 세례를 부어주셨습니다. 아무리 읽어보고 살펴봐도 피상적으로만 보이던 말씀이 트레이너 목자님들과 토론하고 밤을 새워 진지하게 묵상할 때 내면에 말씀으로 인한 기쁨과 은혜를 부어주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의 나라 주시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제가 처한 상황은 인간적인 눈으로 보기에 이번 수양회 말씀강사를 맡는 것이 무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제가 말씀을 준비하면서 말씀에 흠뻑 빠져서 말씀으로 힘을 얻기를 원하셨습니다. 그의 나라 주기를 간절히 원하셨습니다! 제가 이제부터 사단에게 저의 마음의 고지, 영적인 고지를 내어주지 않기 위해 한가지 결단을 하고자 합니다. 야근을 줄이고 아침시간에 일용할 양식과 기도의 실험을 해보고자 합니다. 가늘고 길게 가야하니까 무리하지 말고 일단 1년을 도전해보고자 합니다. 제가 1년 동안 일용할양식 말씀과 기도의 투쟁을 해보니까 이렇게 달라지더라!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니까 이렇게 달라지더라! 하나님께서 이렇게 기뻐하시더라! 여러분께 감사의 고백을 나눌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분을 잃어버리고 버려진 고아와 같은 심정으로 눈에 보이는 것을 움켜쥐고자 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사단이 공중권세를 잡고 미디어를 통해 끊임없는 자기 노력과 내 보물을 세속에 재투자하게 함으로 내 나라 내 땅을 공고하게 쌓도록 우리를 속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그의 나라(His Kingdom)와 그의 의를 구해야 합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은 내가 주인이 아닌 하나님의 절대적인 왕권이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우리의 마음은 자칫 전자의 “그의 나라를 구하라”보다 후자의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는 말씀에 솔깃해지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탐심과 물질에 휘둘리지 않고 말씀이신 예수님을 마음에 모심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루도록 명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보내어 주십니다. 그의 나라 주기를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이 진리를 깨닫는 가운데 신앙의 우선순위, 삶의 우선순위를 잘 정립하고 그의 나라를 구하는 가운데 더불어 이런 것들까지도 더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한마디 :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의 나라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