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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6년 마태복음8강 은밀한 중에 보시는 나의 아버지(마태복음 6:1-18)2026-04-27 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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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마태복음 8강


은밀한 중에 보시는 나의 아버지


말씀/ 마태복음 6:1-18

요절/ 마태복음 6:6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마태복음 5~7장은 마태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5개 강화 중, 첫 번째 것으로 산상수훈입니다. 5장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8복에 대해 가르쳐 주시고는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하셨습니다. (5:20) 예수님은 이후 구체적으로 제자들의 “더 나은 의”가 무엇인지 가르쳐 주십니다. 본문은 “더 나은 의” 중 하나인 은밀하게 의를 행하는 것에 대한 말씀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겉모습은 경건하게 보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것 같은데 실상은 자기 영광을 구하였습니다. 구제, 기도, 금식을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의 위선을 경계하시며 제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이런 일을 은밀하게 행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 앞에서 은밀한 신앙생활을 하는 자세를 배우길 기도합니다. 


1절입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1절은 오늘 본문의 전제가 됨과 동시에 또한 결론에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신앙생활은 만유를 주관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보이시지 않으나 모든 것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말씀대로 행하는 삶, “코람데오” (Coram Deo)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의를 행합니다. 왜 그럴까요? 이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인정이나 상은 금방 오는 것 같지 않고, 또 즉각적으로 경험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은 바로 바로 옵니다. 사람은 사회적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성 가운데 자신이 귀중한 존재로 여김받고 또 사랑과 존경을 받으면 기분이 좋습니다. 행복을 느낍니다. 그래서 그러한 행복을 얻고자 자기도 모르게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고자 의를 행하게 됩니다. 


1절을 다시 한번 봅시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예수님은 “주의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주의하지 않으면 그렇게 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지 않고 사람 앞에서 할 때의 문제점이 무엇입니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합니다.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도 힘이 됩니다. 행복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잠시 뿐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의 칭찬은 바람과 같이 사라집니다. 나를 칭찬해 준 그 사람들도 사라집니다. 여러분 중에 자기 할아버지의 아버지의 이름을 아시는 분 있나요? 100년만 지나면 지금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이 세상을 떠납니다. 다 잊혀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상은 참되고 영원한 상입니다. 우리가 사는 동안 이땅에서의 하나님의 상은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은혜를 누리는 것입니다.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에 계신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옵니다. (약1:17) 마귀는 자기가 좋은 것을 줄 것처럼 우리를 유혹합니다. 세상의 반짝거리는 것들이 우리에게 좋은 것을 줄 것처럼 유혹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 외에는 우리에게 좋은 것을 줄 자가 결코 없습니다. 모든 좋은 것은 오직 하나님께로만 나옵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을 굳게 믿고 섬기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구체적으로 구제, 기도, 금식을 하나님 앞에서 행하도록 말씀하십니다. 2절입니다.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요즘에도 누가 자기 자랑할 때 "나팔 불고 있네"라는 말을 씁니다. 예수님 당시에 실용적인 차원에서 나팔을 불었습니다. 즉, 빵이나 옷 등, 구호품을 나누어줄 때 시장 한복판이나 거리에서 불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빨리 와서 구호품을 가져가라고 알리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평상시에 이웃을 구제하지는 않고, 나팔을 불며 구제하는 행사를 할 때만 구호품을 갖고 나왔습니다. 나눠주는 곳 제일 앞에서 큰 나팔을 불어댔습니다. "나를 좀 알아줘! 바로 나야 나!"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자기 상을 이미 받았다고 하십니다. 그들은 사람의 칭찬을 받은 것으로 끝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실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구제할 때 어떻게 하라고 하십니까? 3,4절입니다.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우리의 양손은 서로 긴밀히 동역합니다. 한 손으로 무슨 일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특히 구제를 할 때, 두 손으로 구호품을 들어야 하기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기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그만큼 철저하게 은밀히 행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주시는 진짜 상을 받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말씀을 영접하지만 실제로 나의 선행을 다른 사람이 모르면 어쩐지 아쉽습니다. 그래서 가까운 친구에게 조용히 "내가 너에게만 말하는 건데.." 하면서 말합니다. 결국 그 사실이 사람들의 입에 돌고 돕니다. 의도하지 않았다고 말은 하지만 여하튼 기분은 좋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주일 아침에 일찍 교회에 나와보니 화장실에 밤새 불이 켜져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목사님은 "아니, 누가 이렇게 밤에 불을 끄지 않고 갔지?"합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집사님이 말합니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엇저녁에 혼자서 교회 청소를 늦게까지 다 하고 나서는 화장실 등을 끄고 간다는 것을 깜빡했네요." 그는 사실 일부러 등을 켜 놓고 간 것이었습니다. 남이 알아주지 않는 선행을 하기는 결코 쉽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이 다 아신다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의를 행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은밀하게 구제를 해야 합니다. 아무도 안 보는 것 같지만 하나님은 모든 은밀한 것을 다 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아버지께서 보시고 가장 좋은 상으로 갚아 주십니다. 하나님의 상은 언제나 영적인 것이고 물질적인 것은 아니다는 아닙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조카 롯에게 좋은 땅을 양보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를 부요하게 하셨습니다. 사병 318명을 데리고 있을 정도로 부요하였습니다. (창14:14) 이삭도 하나님 앞에서 살았을 때 그러했습니다. (창26:13) 기근 중에도 100배의 소출을 얻었습니다. 영적이나 육적이나 만복의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잠11:24는 말합니다.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이 비록 사람들이 모르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사는 더 나은 의를 행하도록 하셨습니다. 


이상은 구제에 대한 말씀이었는데 5절은 기도에 대한 말씀입니다.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5) 당시 경건한 유대인들은 하루 3번 기도했습니다. 시편55:17은 말합니다.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내가 근심하여 탄식하리니 여호와께서 내 소리를 들으시리로다." 이런 전통에 따라 다니엘도 하루 세 번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였습니다. 집에서 기도해도 되는데 기도 시간만 되면 일부러 회당이나 큰 거리로 나왔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에서 두 팔을 들고 큰 소리로 기도했습니다. 사람들이 "아, 저분은 참으로 기도를 많이 하는 경건한 사람이구나" 하는 말을 듣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기도하라고 하십니까? 6절입니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여기서 '골방'은 나 홀로 방입니다. 아무도 없는 고요한 가운데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있는 장소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나와의 개인적인 대화입니다. 여기에는 어떤 제 삼의 요소가 개입되어서는 안됩니다. 세상은 간데 없고 오직 주님과 나만이 있는 방, 바로 여기서 기도하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은밀한 가운데 갚아 주십니다. 


예수님은 기도에 관한 주의 사항을 한 가지 더 말씀하십니다. 7절입니다.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이방신을 섬기는 사람들은 기도가 깁니다. 남묘호랑게교에서는 남묘호랑게교, 남묘호랑게교.. 하며 천 번을 외우면 병이 고쳐진다고 합니다. 대순진리교는 10만원 내고 1,000번 절을 하면 액을 면할 수 있다고 합니다. 구약성경 열왕기상 18장을 보면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들과 기도의 싸움을 합니다. 바알 선지자들은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주문을 반복하여 외치며 한나절을 기도했습니다. 그래도 기도 응답이 없자 춤을 추었습니다. 그래도 안 되자 자기 몸을 쳐 피를 흘려가며 난리를 폈습니다. 뭔가 길게 기도하는 것이 이방인들의 기도의 특징입니다. 이들은 중언부언합니다. 한 말을 또 하고 한 말을 또 합니다. 조금 지루하니까 비슷한 말로 바꾸어 합니다. 하여간 길게 기도합니다. 그래야 자기들의 신이 기도를 들어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신자들도 길게 기도합니다. 물론 기도를 길게 하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확신이 들 때까지 기도하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예수님도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 마음에 확신이 들기까지 세 번 동일한 기도 제목으로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기도를 길게 많이 해야 하나님이 그 정성을 봐서라도 응답해줄 것이라고 생각하여 의미없는 말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8절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신다고요? 그러면 우리가 구태여 기도하지 않아도 되는 것 아닌가요? 하나님이 알아서 주시면 되지 않나요? 물론 우리가 요구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십니다. 우리가 매일을 살아가면서 기도하지 않았는데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잠을 잘 자고 아침에 일어나서 보고 듣고 먹고 마시며 움직이는 것 자체가 모두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는 숨 쉬는 것, 보는 것, 말하는 것, 걸어가는 것.. 모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런 것에 장애가 있는 분들에게는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소원이요 기적입니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다 아시고 이런 기적적인 삶을 살게 하십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나의 특별한 니드에 대해 하나님께 구체적으로 기도할 때 그 기도에 응답하심으로 우리와 사랑의 관계성을 굳게 하십니다. 


한 목자님의 목자님의 딸은 약대에 다니고 있습니다. 다른 과보다 등록금이 비싸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딸은 아무 염려 없이 학교를 잘 다닙니다. 등록금 고지서가 나오면 아빠에게 그냥 패스합니다. 딸의 요청이 오자마자 아빠는 그동안 준비했던 등록금을 기쁨으로 보내줍니다. 이를 통해 딸은 아빠를 의존하여 사랑의 도움을 받고, 아빠는 딸을 도와준 일로 인해 기쁨을 누립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를 다 아시는데 기도하기를 원하시는 것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기도는 단순히 무엇을 얻기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설득해서 무엇을 얻어내는 기술은 더욱 아닙니다.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여 구하고,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에게 주심으로 하나님 아버지와 사랑의 관계성을 깊이 맺는 방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행복한 교제의 수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만 진실 되게 하나님 아버지를 믿고 단순히 아뢰면 됩니다. 


예수님은 이제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범적인 기도를 할 수 있도록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십니다. 9-13절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하나님을 위한 기도 제목 3가지, 우리를 위한 기도 제목 3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위한 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것,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위한 것은, 일용할 양식, 죄사함, 시험에 들지 않게 해주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셨기에 이 주기도문 순서에 따라 기도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좋은 기도 습관이라고 생각됩니다. 무엇보다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신 것은 우리의 모든 구체적인 기도 제목들을 통해 하나님을 위한 기도제목들이 성취되길 기원하라는 것입니다. 곧 우리의 모든 기도제목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여러가지 많은 기도제목이 있지만, 무엇보다 가장 기본적인 기도 제목, 곧 일용할 양식, 죄사함, 시험에 들지 않게 해주시기를 구하며 그것으로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주기도문의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예전에 우리나라의 어머니들은 촛불을 켜놓고 정한수를 한 그릇 떠 놓고 빌었습니다. 조상신에게 빌었습니다. 때로는 고목나무 앞에서 빌었습니다. 기도를 할 때는 누구에게 기도하는 가가 가장 중요합니다. 자기가 누구에게 기도하는 가를 분명히 하지 않고는 그 어떤 기도를 한다 해도 진정한 기도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대상은 누구입니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입니다. 여기서 "하늘에 계신"이라는 말은 저 높이 보이는 하늘이라는 제한된 공간에 떠 계신 분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늘에 계신”이라는 말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과 구별되어 존재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즉, 초월적인 (transcendant)분이라는 것입니다. (God exists beyond time and space.)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과 다르시고 그 권능이 무한하시며 무소 부재하신 분이십니다. 우주에서 이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곳은 전혀 없습니다. 우리 안에도 계십니다. 


그런데 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아버지는 어떤 분이십니까? 아버지는 가정의 필요를 공급해주고 가족을 모든 위험에서 보호합니다. 자녀들을 사랑하며 섬세하게 양육하는 분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허공에 쏘아 올리듯 소리를 낼 것이 아닙니다. 말도 하지 못하는 우상에게 기도하듯이 해서는 안 됩니다. 전능하신 창조주이시며 우리를 사랑하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의 모든 내용보다 그러한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깊은 신뢰와 애정 가운데 드리는 기도의 자세가 더욱 중요합니다. 이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 만이 아니고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주기도문 전체에 '나'라는 단어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모두 '우리'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시고 우리로 그 구성원이 되게 하신 교회공동체가 얼마나 귀한 가를 알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만을 위해가 아니라 언제나 우리 교회 공동체를 위해 구하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위해 우리가 드릴 첫 번째 기도 제목이 무엇입니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름은 전인격을 가리킵니다. 우리의 첫 번째 기도 제목은 하나님이 자신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거룩, 사랑, 자비, 공의, 아름다움.. 그중 가장 탁월한 속성이 거룩입니다. 유대인들은 가장 크게 강조할 때는 같은 말을 반복하였습니다. 성경에 두 번 반복되는 하나님의 성품은 많이 나오지만 유일하게 세 번 반복된 성품이 있습니다. 거룩입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사6:3)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계4:8)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라는 기도 제목은 우리가 하나님을 더욱 거룩하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본래부터 거룩하신 분으로 사람이 그의 거룩함을 더하거나 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기도제목은 거룩하신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 특히 모든 인생들로 부터 거룩히 여김을 받도록 하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모든 인생들이 하나님을 거룩한 존재로 경배하게 되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가 영광을 받기 위해 구제하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자의 첫째 기도 제목은 하나님이 거룩히 여김을 받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도록 하시는 삶은 어떤 것일까요? 이는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가 하나님께 늘 감사하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가 실제적인 삶에서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거룩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한 개인의 삶, 그러한 제자 공동체의 삶을 통해 세상에 좋은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통해 영광 받듯이, 하나님은 제자공동체를 통해 세상에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하나님을 위한 두 번째 기도 제목은 무엇입니까? 10a입니다. "나라가 임하시오며" 여기서 나라는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를 의미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괴로운 세상 어서 빨리 하늘나라에 가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는 천국에 빨리 가게 해 달라고 기도할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 하나님이 통치가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합니다. 그리고 그 일에 힘써야 합니다. 예수님의 재림으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히 이루어질 때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로부터 거룩히 여김을 받게 됩니다. 


세 번째 기도 제목은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입니다. 여기서 '뜻'은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땅을 제외한 하나님의 영역에서는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이제 이 세상에서 그 뜻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는 것이 무엇을 말합니까?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온 세상에 퍼져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주기도문은 예수님의 세계 선교 명령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섬기는 캠퍼스와 더 나아가 모든 족속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지키게 할 때 세상 사람들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열심히 복음을 전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우리 자신을 위한 세 가지 기도 제목을 가르쳐 주십니다. 11절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 자신을 위한 첫 번째 기도는 그날 하루 먹을 양식에 관한 것입니다. 오늘날 냉장고를 열면 음식이 있고 동네 슈퍼에만 가도 먹을 것이 쌓여있습니다. 매일 먹을 양식을 위해 기도하는 것에 절박함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북한 주민을 생각해 보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하루 벌어 하루 살았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위한 기도는 참으로 간절하고 절박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매일 먹을 수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신 것을 진심으로 감사하며 먹어야합니다. 또한 우리가 구할 것은 일용할 양식이지 주용할 양식이나 월용할 양식이 아닙니다. 현대인들은 노후양식 때문에 걱정이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단지 오늘 필요한 양식을 구하기 원하십니다. 물질이 너무 풍요하면 배가 불러서 하나님을 잊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그날 그날 공급해 주시는 것을 감사하고 그날 그날 주님을 위한 삶을 충성되이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를 위한 두 번째 기도제목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보시고 무조건적으로 죄사함을 주십니다. 구원의 은혜를 베푸십니다. 이는 죄에 대한 근본적 사죄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그 외의 일반적 사죄 곧 우리가 생활하면서 짓는 죄들에 대해서는 우리가 먼저 남의 죄를 용서해야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누구에 대해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무엇보다 자기에게 심각한 문제가 됩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생명력이 우리에게 흐르지 않습니다. 영적으로 무기력해집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일만 달란트 빚을 탕감을 받은 자와 같습니다. 형제의 나에 대한 죄는 그에 비하면 백 데나리온 빚진 것에 불과합니다. 백 데나리온은 일만 달란트에 비하면 60만분에 1에 해당됩니다. 그 정도 작은 죄를 지었는데 그것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실로 우리가 얼마나 큰 죄를 사함 받았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형제의 죄를 용서해 주는 것이 마땅합니다.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마 18:23-28)


우리를 위한 세 번째 기도제목은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입니다. 우리는 사탄의 시험에 늘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는 잘 모르지만 매일 매일 하나님의 보호하심 가운데 살고 있는 것입니다. 사탄의 유혹에 쉽게 넘어질 수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를 깊이 자각한 사람은 이 기도를 간절히 드립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주기도문의 마지막은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도록 하는 송영입니다.


14,15절입니다.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예수님은 왜 주기도문을 가르쳐주신 후, 12절에서 이미 말씀하신 바 있는 이 말씀을 왜 다시 하시는 것일까요? 이는 제자 공동체에서 이 문제가 가장 심각하기 때문입니다. 신자도 죄인이기에 서로 부딪칩니다. 상처를 주고 받으며 미움이 생깁니다. 용서하지 못합니다. 사탄은 그 미움을 통해 교회공동체를 무너뜨립니다. 앞에서 미움은 살인과 같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를 기억하고 언제든지 용서하기를 힘써야겠습니다. 


16~18절은 은밀한 금식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우리에게 어떤 특별한 기도 제목이 있을 때 금식기도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자기가 금식하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일부러 슬픈 기색을 하고 또 얼굴을 흉하게 해서 사람들이 알아주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이런 때도 상을 이미 다 받았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금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 사람들이 전혀 모르게 하라고 하십니다. 은밀한 중에 하나님 앞에서 하라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제자들의 더 나은 의는 사람들이 알아주는 의가 아니라 하나님이 알아주시는 의입니다. 제자들의 더 나은 의는 은밀함 속에서 자랍니다. 우리가 은밀함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더 알아가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기쁨을 누리게 하시며 하나님의 상을 바라고 사는 참된 제자들이 되게 해주시길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