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메세지

제목2026년 마태복음7강 너희도 온전하라(마태복음 5:17-48)2026-04-20 14:55
작성자

2026년 마태복음 7강


너희도 온전하라


말씀 / 마태복음 5:17-48

요절 / 마태복음 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늘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말씀하십니다. 와우, 하늘 아버지를요? 제가요? ‘하늘 아버지의 온전하심’은 인간이 도달하기에 불가능한 목표처럼 여겨집니다. 그래서 이 말씀이 부담스럽게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명령만은 아닙니다. 독수리가 자기 새끼에게 땅에 떨어진 부스러기를 쪼아먹는 비둘기가 아닌 하늘을 날며 사냥하는 독수리로서의 삶을 기대하듯 예수님은 하늘 아버지의 자녀들로 새롭게 태어난 이들이 하늘 아버지의 온전하심을 향해 자라도록 기대와 소망 가운데 부르시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하늘 아버지의 온전하심이 무엇인지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어떻게 그 분의 온전하심처럼 우리가 온전한 삶을 살 수 있는지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 율법을 완전하게 하려 오신 예수님(17~20)


17절을 보십시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율법과 선지자”는 구약 성경 전체를 가리킵니다. “폐한다”는 말은 완전히 없애거나 무너뜨린다는 의미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이 손을 씻지 않고 식사하시고(눅 11:38), 죄인들과 어울리시며,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 모습을 보고 율법을 무시하거나 폐하려는 분으로 오해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율법을 왜곡한 자들이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이라고 보셨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영도 천사도 없고, 죽은 자의 부활도 없다며, 영적인 세계를 부인하며 율법을 제한했고, 바리새인들은 문자에만 집착하여 그 본래의 뜻을 흐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구약 성경을 완전하게 하려 오셨다는 말씀의 의미는 예수님 자신이 '구약의 완성'이시라는 것입니다. 율법과 선지자는 곧 구약을 뜻하며 초점은 장차 오실 메시야 입니다. 특히 "완전하게 함" 이라는 단어는 내용을 충만히 채우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율법이라는 형식 안에 내용을 채우신다는 것입니다. 율법과 선지자는 준비적이요 예언적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불완전하고 부분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성취시키심으로 그 뜻을 완전케 하십니다. 구약의 수많은 율법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완벽히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구약 성경이 말하는 모든 말씀은 예수님의 인격과 삶, 그의 가르침을 통하여 근본적으로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품과 사역은 율법이 의도하고 목적하는 그 완전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율법을 완전하게 하시는 예수님은 율법을 어떻게 여기셨나요? 18절을 보십시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일점일획’은 가장 작은 문자 요소를 의미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작은 부분까지도 모두 의미 있고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큰 원리뿐 아니라 세밀한 부분까지도 하나님의 뜻으로 존중하셨습니다.


19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지만, 그 믿음은 반드시 삶의 순종으로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지 말고, 삶으로 살아내며 또한 가르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20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당시 서기관들은 율법에 능통한 학자들이었고,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철저히 지키며 하나님의 뜻을 삶의 중심에 두려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열심과 헌신은 결코 가볍게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보다 더 나은 의가 있어야 천국에 들어간다고 하십니다. 이는 더 많은 규례를 지키라는 뜻이 아니라, 의의 차원이 달라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바리새인의 의가 외적인 순종에 머물렀다면, 예수남의 제자의 의는 하나님을 향한 내면의 사랑과 경외에서 시작되는 하나님 중심의 의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이러한 의를 이루며 살 수 있습니까? 우리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한계와 연약함을 인정하고 예수님의 은혜를 의지할 때, 성령께서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소원을 주십니다. 날마다 회개하며 하나님께 나아갈 때, 그 마음이 변화되어 참된 의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구약의 에스겔 선지자는 율법을 완전케 하시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신약의 하늘 아버지의 자녀들이 장차 어떤 삶을 살게 될지 에스겔서 36장 26, 27절에서 예언하였습니다. 우리말 성경 번역으로 보겠습니다. “26 내가 너희에게 새로운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로운 영을 줄 것이다. 내가 너희 육신으로부터 돌과 같이 굳은 마음을 없애고 너희에게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다. 27 그리고 내가 내 성령을 너희 안에 주어서 너희로 하여금 내 법령을 따르며 내 규례를 지키고 행하게 만들 것이다.” 우리가 이 놀라운 약속의 말씀을 붙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2. 제자들의 도덕률(21~32)


 예수님은 20절 말씀을 제자들이 잘 알아듣도록, 의로운 삶에 대하여 구체적인 예를 가르쳐주십니다. 21, 22절을 보십시오. "21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하나님께서는 옛 사람 곧 이스라엘 조상들에게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것은 십계명 중 여섯째 계명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계명에 따라 살인한 자를 각 고을의 일곱 장로로 구성된 지방 재판소에서 재판을 받게하고 사형에 처하였습니다(신16:18, 출21:12, 레24:17). 그런데 예수님은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라고 하심으로 신적인 권위를 가지고 이 계명의 근본정신을 가르쳐주십니다.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이스라엘 사람들은 형제를 대하여 분노하거나, '라가‘ (멍청한 자) 라고 말하며 정신적인 모욕을 주거나, 더 나아가서 '미련한 놈' 이라고 그 사람의 인격에 대한 욕을 하는 것은 살인죄와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마음속의 죄는 죄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살인의 내적 동기가 되는 미움까지도 살인죄와 동일하다고 하십니다. ‘라가’는 오늘 날로치면 ‘무지성’, ‘노생각’ 정도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기성세대들이 보기에 젊은세대가 생각이 없어 보일 수 있습니다. 아내가 볼 때, 남편은 생각이 없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너무 생각이 많아 생각이 없어 보이거나, 내가 이해하지 못할 따름입니다. 그런데 내가 볼 때 생각이 없어 보이고, 부족해 보인다고 ‘라가'라고 하는 것을 주님께서는 심판을 받을 일이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나의 기준과 잣대로 함부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고, 존중하며 사랑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살인의 동기는 마음의 노여움에서 시작합니다. 마음의 노여움은 욕설로 발전이 됩니다. 그러다가 결국 살인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비록 행위로는 살인을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마음으로 분노하고 말로 욕한 것은 살인한 것과 마찬가지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살인을 하지 않는 한 의롭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마음의 미움이나 분노도 살인죄처럼 심각한 죄인 것을 알고 회개해야합니다. 그럼으로써 바리새인보다 더 풍성하고 우수한 의를 소유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기준으로는 형제를 미워하고 욕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볼 때 예수님의 율법 수준이 얼마나 높은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높은 수준의 표준을 깨닫는 자는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어야 합니다. 또한 그러한 높은 수준을 지키는 것도 우리들의 힘으로는 불가능하고 오직 성령의 도우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마음의 숨은 죄를 고백하고 죄사함 받는 것입니다. 그러할 때 성령께서 우리를 예수님이 말씀하신 높은 수준의 도덕률에 능히 이르게 도와주십니다.


  형제를 미워하였거나 욕한 것으로 인하여 형제의 원망들을 만한 것이 있을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23, 24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는 것은 중요하지만, 예수님은 그것보다 형제와의 화목을 먼저 하라고 하십니다. 예배 중이라도 잘못이 생각나면 즉시 가서 용서를 구하고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잘못을 알면서도 화목하지 않는 예배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바리새인들은 예물을 통해 의를 쌓으려 했지만, 하나님은 예물보다 관계의 회복을 더 중요하게 보십니다. 주기도문처럼 먼저 용서와 화목을 이루어야 하나님과의 관계도 바로 세워집니다. 또한 관계를 방치하면 더 큰 문제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바리새인보다 더 높은 수준의 도덕률을 갖도록 다른 예를 드십니다. 27절을 보십시오.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간음하지 말라는 것은 십계명중 제7계명입니다. 구약에 보면 간음한 자는 그 남녀를 반드시 죽이도록 하였습니다(레20:10). 당시 사람들은 행위로 간음죄를 짓지 않는 이상 마음의 음욕은 죄가 아니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간음은 음욕이 통제되지 않아 결국 행위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음욕도 간음죄라고 하십니다. 마음의 미움이 살인인 것처럼 마음의 음욕이 곧 간음인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볼 때 예수님의 제자들은 참으로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더 수준이 높고 우월해야 함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도 사람들은 행위로 간음죄를 짓지 않으면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각종 SNS 나 유튜브나 네플릿스를 통하여 음란한 내용들을 별 문제 없이 받아들입니다. 눈으로 들어온 것으로 인해 음욕이 발동이 되어도 별 문제의식을 안 갖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음욕이 자라도록 놔두면 결국 정욕죄에 빠지게 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마음의 음욕조차도 용납하지 않음으로 절대적인 순결을 지키도록 하십니다. 사람들은 생각은 자유라고 합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아무 생각이나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무슨 생각을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육신적인 생각의 결국은 죄와 사망이요 영적인 생각을 할 때 그 결국은 생명과 평안입니다 (롬 8:6)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할 때 우리가 육신적인 이 시대에 마음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피나는 영적 투쟁을 해야 되는지 볼 수 있습니다. 공중에서 나는 새가 오물을 떨어뜨리면 우리 머리에 떨어질 수 있습니다. 공중의 오물이 우리에게 떨어지는 것 자체를 막을 수는 없습니다. 단지 그럴 때 "아 더러워" 하며 빨리 씻어내 버리면 됩니다. 그런데 오물을 닦지 않고 그 냄새나 느낌을 즐기는 것이 문제입니다. 정욕죄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가 의도하지 않았는데 정욕의 유혹이 마음에 꽂힐 수 있습니다. 그때 그것을 마음에 품어 즐기기 말고 바로 떨쳐 버려야 합니다. 정욕의 세력은 특히 눈을 통해 많이 들어옵니다. 눈을 통해 들어오는 정욕의 세력을 이기기 위해 우리 눈을 예수님께 고정을 시켜야합니다. (히 12:2) 소극적으로 정욕죄를 짓지 않고자 해서는 정욕의 유혹을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주님께 드릴 때 정욕이 우리를 사로잡을 틈을 주지 않게 됩니다. 그러할 때 우리 내면을 예수님께 대한 순수한 사랑과 열정으로 채울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은 정욕죄에 대하여 얼마나 엄격하십니까? 29, 30절을 보십시오.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한다면 이 세상에 두 눈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두 팔을 가진 사람도 없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눈을 빼버리고 팔을 찍어 내 버릴 각오를 할 정도로 피흘리기까지 정욕죄와 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의 눈을 통하여 정욕죄에 빠지게 하는 환경이 있다면 그러한 환경을 잘라 버려야 합니다. 음란한 그림을 뜯어버려야 합니다. 나로 죄에 빠지게 하는 앱이 있다면 유료결재를 했어도 삭제해야 합니다. 나의 오른 팔을 잡고 끌고 가서 정욕죄에 빠지게 하는 친구가 있다면, 그런 친구와의 관계를 단호하게 끊어야합니다. 그러함으로서 잠깐의 고통을 느끼는 것이 지옥에 던져져 영원히 고통하는 것보다 훨씬 유익합니다.


 31, 32 절을 보십시오.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려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이 말씀은 간음 교훈의 연장으로, 예수님은 이혼 문제를 통해 가정 안의 죄를 다루십니다. 모세의 이혼증서는 여성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였지만, 당시 사람들은 이를 확대 해석하여 사소한 이유로도 이혼을 정당화했습니다. 특히 힐렐파는 일상적인 문제까지 이혼 사유로 삼으며 쉽게 아내를 내쫓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음행 외의 이유로 이혼하는 것은 간음과 같은 문제라고 하시며, 결혼의 거룩함과 책임을 분명히 하십니다.


이상을 볼 때 예수님의 제자의 도덕률은 행위로 나타난 죄를 안 짓는 수준이 아니라 마음의 동기, 그 마음의 중심에서부터 죄를 짓지 않고자 투쟁하는 것임을 보게 됩니다.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의 결과입니다. 우리가 마음의 숨은 죄를 초기에 발견하고 회개하며 죄사함을 받아야겠습니다. 그럴 때 성령께서 우리의 내면의 죄를 태우시고 날마다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하십니다. 순결한 새벽이슬 같은 청년들로 이 시대의 죄악과 싸우게 하십니다. 우리의 마음에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살고자 하는 거룩한 열정을 충만히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저희들이 그러한 삶을 살도록 은혜주시길 기도합니다.



3. 너희도 온전하라(33~48)


 33~37절은 맹세에 대한 주님의 교훈입니다. 32절을 보십시오.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한 맹세는 반드시 지켜야 했지만, 당시 사람들은 하늘이나 땅을 걸고 형식적으로 맹세하며 이를 가볍게 여겼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고 하시며 맹세 자체보다 정직한 삶과 말의 진실성을 강조하십니다. 우리가 항상 진실하다면 맹세로 강조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늘이나 땅으로도 맹세하지 말라고 하시며, 단순하고 정직한 말을 하라고 하십니다. 37절을 보십시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38-42절은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는 교훈입니다. 38절을 보십시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이 말씀은 원래 법정의 공정한 판결 기준이었지만, 사람들은 이를 개인적인 복수로 오해했습니다. 예수님은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고 하시며 보복을 금하십니다.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라”고 하시며 보복이 아니라 적극적인 사랑으로 반응하라고 하십니다.


40절을 보십시오.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율법에서도 보호받던 겉옷까지 내어주라는 것은 보복 대신 자발적 내려놓음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권리를 지키려 하지만, 그것으로는 상대의 탐욕을 바꿀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더 근본적인 해결로 사랑을 제시하십니다. 보복이 아니라 사랑이 사람을 변화시키기 때문입니다.


41절을 보십시오.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억지로 부역을 시키던 상황에서도 예수님은 불평이나 보복이 아니라 자발적인 섬김을 말씀하십니다. 이는 악에 맞서는 방식 자체를 바꾸라는 것입니다. 선으로 악을 이길 때 진정한 승리가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심판을 하나님께 맡기고 사랑으로 반응해야 합니다.


  무저항의 정신을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43~48절에서는 적극적인 사랑에 대하여 가르쳐 주십니다. 43절을 보십시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은 레위기 19장 18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에 유대인들은 "네 원수를 미워하라" 라는 나름대로의 유전을 만들어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레위기서 19장 18절 말씀의 근본정신을 드러내시며 유대인들의 유전의 그릇된 점을 정정하십니다. 44절을 보십시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구약에 나타난 사랑은 희생을 감수하며 원수에게까지 미치는 풍성한 사랑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은 나에 대한 상대방의 어떤 향기로운 조건을 발견하고서 반응하는 감정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어떤 사람이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랑은 오히려 상대방이 나에게 대적하는 요소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나타나는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할 수 없는 사랑, 곧 상대방이 원수 되는 그 점에서 끊어지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원수임에도 사랑하는 사랑, 이것이 사랑의 핵심입니다.


46 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오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당시 세리와 같은 죄인들도 자기에게 잘해주는 사람은 사랑했습니다. 이러한 사랑은 본능적인 것으로, 누구나 할 수 있는 수준의 사랑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는 그보다 더 나아가 원수까지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져야 합니다. 47절을 보십시오.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자기 사람에게만 잘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도 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는 복수 대신 선으로 악을 이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요절 말씀인 48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이 말씀은 사랑에 있어서 온전하라는 말씀도 되고 5장 전체의 결론으로서 온전하라는 말씀도 됩니다. 여기서 '온전'하다는 단어는 "텔레이오스"로 희생 동물이 흠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율법이 지향하는 바는 하나님의 온전하심 그 자체입니다. 예수님은 율법과 선지자들을 완전케 하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본 받아야 할 것이 아버지의 온전하심입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로 온전해야 합니까? “하늘에 계시는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해야 합니다. 이 말씀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온전하라고 하신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 신자들은 하나님의 온전하심에 도달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하고 투쟁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대개 사람들은 상대적인 의에 만족합니다. 나는 저 사람보다는 의롭다는 교만한 생각을 하면 그 때부터 영적인 성장을 멈추게 됩니다. 우리 모임에서 비교적 나는 믿음이 좋은 사람이다, 나만큼 충성한 사람이 어디 있는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면 영적인 안일과 게으름에 빠져서 더 이상 성장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함에 이르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바울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그리스도와 같이 부활의 영광에 이르고자 했습니다(빌 3:10,11).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빌 3:12,13a) 바울은 그리스도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함에 이르고자 하는 적극적인 자세가 있었습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이 말씀이 저희들의 모든 삶의 표준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일생동안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께서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해지고자 하는 부단한 영적 투쟁을 감당하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무엇보다 하나님의 사랑, 이 진정한 사랑을 깨닫고 소유하기를 기도합니다. 이 사랑은 십자가에 나타난 예수님의 대속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마음에 사랑이 폭포수처럼 솟아나기까지 원수를 위해 기도합시다.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께서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해지고자 하는 부단한 영적 투쟁을 감당하기를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들이 모두 예수님의 사랑의 사도들로 성장하도록 축복해 주시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