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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6년 마태복음6강 행복한 사람들(마태복음 5:1-16)2026-04-13 0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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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마태복음 6강


행복한 사람들


말씀/ 마태복음 5:1-16

요절/ 마태복음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마태복음에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5개의 강화(講話,설교)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중에 첫째 강화가 5~7장인데, 이를 산상수훈(山上垂訓)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교훈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으로 그 주제는 '천국'입니다. 오늘 5장 전반부 말씀은 산상수훈의 서론인데 유명한 8복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가르쳐 주시는 행복론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시고 첫 번째 주시는 교훈이 바로 행복한 사람이 되는 길이라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 제자의 삶은 고행을 하듯 인상을 쓰면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제자의 삶은 행복한 사람들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제목도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첫 사람 아담은 마귀의 시험에 넘어가 행복을 상실하였습니다. 실락원에 사는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마귀의 유혹대로 떡을 추구합니다. 세상의 명예와 영광을 추구합니다. 이런 세상에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참 행복의 길이 무엇인가 가르쳐주십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 행복한 사람이 되는 비결을 배우길 기도합니다.


5:1입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지난 주 말씀에서 예수님은 첫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예수님의 부름을 받은 첫 제자들이 누구였죠? 시몬과 안드레,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입니다. 서로 형제 간이고, 모두 어부 출신들입니다. 예수님은 이들과 함께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많은 백성들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러자 수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입을 열어 가르쳐 산상수훈 말씀을 주십니다. 


3절부터 12절까지는 여덟 가지의 축복된 삶, 곧 ‘팔복’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는 여덟 개의 개별적인 축복된 삶에 대한 말씀이기도 하지만, 제자들이 덧입게 되는 예수님의 성품을 의미합니다. 그러한 예수님의 성품을 덧입은 사람이 복된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첫째,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습니다. 3절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요? 물론 경제적인 가난, 그 자체가 복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구약에서 보면 물질적인 축복이 하나님이 주신 복이라 믿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위시해서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부요한 삶을 살았습니다. 신약에서도 하나님은 우리의 물질적 필요를 풍성히 채워주시는 분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빌4:19) 3절에서 '가난하다'는 것은 "심령이 가난한"것을 말합니다. (poor in spirit). 물론 누가복음 6:20에 보면 그냥 "가난한 자가 복이 있나니"라는 표현이 나오긴 합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의 이 말씀의 문맥은, 물질적인 풍요로움으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부자들과(6:24), 가난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비교하여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문맥에서 보면, 누가복음의 ‘가난한 자’도 자기에게 의지할 것이 없어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심령이 가난한 자를 뜻하는 것입니다. 3절의 '가난'은 원어로 "프토코이"인데 절대적 빈곤을 말합니다. 완전히 파산 상태가 된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영적으로 철저히 빈곤하여 오직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는 사람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자기에게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압니다. 자기에게 의지할 것이 없으니 겸손합니다. 어찌하든 영적인 은혜를 얻고자 하나님의 도움을 구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좋은 것으로 자기를 채우고자 갈급합니다. 진리의 말씀을 꿀과 같이 달게 받습니다. 예배의 자리로 나아갑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은혜를 구합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배웁니다. 한 가지라도 은혜를 얻거나 배우면 기뻐합니다. 감사해합니다. 반면에 심령이 부요한 사람은 어떠합니까? 내가 많이 갖고 있다, 나에게 의지할 것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를 믿습니다. 자기 지식을 자랑합니다. 자기의 능력과 재물을 믿습니다. 누가복음 12장에 나오는 부자가 그런 사람입니다. 한 부자가 그의 밭에 소출이 풍성하였습니다. 그는 행복한 고민에 빠졌습니다.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아, 이렇게 해야겠구나!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그리고 내가 내 영혼에게 이렇게 말해야지 "내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그는 마음이 부요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 재물을 의지했습니다. 이런 그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는 25살에 비텐베르크 대학 교수가 되었고, 29살에 신학 박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독일 뿐 아니라 유럽 전체의 저명한 신학자였습니다. 지난 1,000년간 인류 역사에 가장 위대한 영향을 끼친 사람이 바로 마틴 루터라고까지 합니다. 그는 영적으로도 아주 성숙한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죽을 때 남긴 두 마디는 이것입니다. “Wir sind Bettler. Hoc est verum.” “우리는 거지다. 이것이 진실이다.” 그토록 위대한 사람도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아무것도 아닌, 완전히 파탄된 자임을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우리 중에도 나이가 들어도 계속하여 겸손하게 배우는 분들이 있습니다. 자신에게는 아무 것도 없다고 여기는 심령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천국이 있습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자기가 자기를 다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다스리고 성령이 그를 다스립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과 평강을 누립니다. 진리 가운데 사는 담대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으로 충만합니다. 사람이 불행한 것은 소유가 적어서가 아닙니다. 마귀가 그 마음을 통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심령이 가난한 자는 세상이 어떻게 변해도 하나님이 그 심령을 다스리기에 항상 은혜가 충만합니다. 그는 천국을 소유한 자로 항상 행복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둘째,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4절입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여기서 '애통'은 원어로 "펜둔테스"인데, 죽은 사람에 대한 애도, 또는 자신과 타인의 죄에 대해 탄식하는 아픔을 말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우리의 허물과 죄를 깨닫습니다. “그렇게 말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런 행동을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후회합니다. 마음이 아픕니다. 반복하여 행하는 죄로 인해 애통한 마음이 듭니다. 그 애통한 마음을 갖고 하나님께 나아가 회개합니다. 이때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신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그 예수님이 나의 허물과 죄를 대신 담당해 주셨음을 믿게 하십니다. 자기에 대한 정죄를 멈추고 하나님의 사랑을 붙들게 하십니다. 이때 우리 마음에 하늘의 위로가 넘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전쟁에서 승승장구하였습니다. 백향목 왕궁에서 지내며 모든 부와 권력의 정점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그는 밧세바를 범하는 죄를 지었습니다. 양심의 가책이 있었지만, 왕은 자기 신하의 아내도 취할 수 있다고 자기를 가스라이팅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자기 죄를 숨겼을 때 그는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시32:3,4) 이런 그가 자신의 죄를 애통히 회개하였을 때 그의 죄를 용서하시고 위로하시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시32:1) 


또한 우리는 이 시대의 악을 볼 때 마음이 아픕니다. 우크라이나 전쟁, 중동 전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늘도 죽어가고 있습니다. 과부와 고아들이 수없이 많이 생깁니다. 이 세상이 언제 다시는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총을 들지 않을 때가 올 것인가!  탄식이 나옵니다. 우리가 이러한 탄식을 갖고 기도할 때 하나님은 장차 임할 나라의 소망을 보게 하십니다. 장차 그 나라가 오면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기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아기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입니다. 그 어느 곳에도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그 나라가 올 것입니다. (사11:7,8) 이러한 소망으로 우리의 마음을 위로해 주십니다.


셋째, 온유한 자가 복이 있습니다. 5절입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우리가 고전13장 사랑장에서 배웠듯이 온유는 부드럽고 따스한 마음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온유는 억압과 고통 가운데에서도 인내하며 적극적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온유한 자는 약한 자가 아니라 강한 자입니다. 자기 분노를 억누를 수 있는 사람, 자기를 이기는 강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가장 온유한 분이십니다. 고난 가운데고 잠잠하셨고 묵묵히 수욕을 감당하셨습니다. 자기를 모욕한 자를 품고 사랑하시고 자기 목숨을 대신 내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마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갈 때 예수님이 우리를 온유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저는 온유한 사람이라고 하면 지금은 미국에 계신 남아브라함 선교사님이 생각이 납니다. 이 분은 원래 성품도 온유하신데, 영적인 열매를 맺어 더욱 온유한 분이 되셨습니다. 그분의 눈은 언제나 초승달 같고 말하는 자세는 마치 수줍은 신부와 같습니다. 저는 그분만 생각하면 입가에 미소가 생깁니다. 


그런데 온유해서는 이 험한 세상에서 제대로 살아남기도 힘들게 보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려면 강하고 사나워져야 될거 같습니다. 그래서 흔히 그러지 않습니까? 자기 아이가 밖에서 다른 애로부터 맞고 들어오면 "그래 잘 했다, 그냥 져 줘라" 합니까? "왜, 맞고만 오냐? 너도 싸워야지! 한 대 맞으면 두 대 때려" 합니다.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온유한 자가 아니라 사나운 사람이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26장을 보면, 그랄 목자들은 이삭이 판 우물을 뺏었습니다. 이스라엘 광야 지대에서 우물은 생명과 같이 귀중한 것입니다. 누가 그런 우물을 빼앗고자 할 때 격렬하게 싸우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이삭은 '에섹' 우물을 양보했고, '싯나' 우물을 양보했습니다. 온유함으로 양보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에게 마침내 넓은 땅에 있는 '르호봇' 우물을 얻게 하셨습니다. 그가 땅을 얻은 것입니다. 무엇보다 "온유한 자가 땅을 얻게 된다"는 말씀은 시편 37:11절에서 나온 말씀입니다.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 이 시편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차지할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런 문맥으로 보면 온유한 자가 얻게 될 땅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나라를 온유한 자에게 주십니다. 


넷째,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습니다. 6절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주리다"는 것은 배가 몹시 고프다는 것입니다. 배가 몹시 고프면 어떠합니까? 시장이 반찬이라고 뭐든지 맛이 있습니다. 예전에 제가 나흘을 금식해 보았는데, 정말 먹기만 하면 아무 소원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음식에 주린 것처럼 "의에 주리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성을 맺기에 갈급함을 말합니다.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멀어질 때 행복하지 않습니다. 성어거스틴이 말한 바와 같이 사람들 안에는 하나님 만이 채우실 공간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세상적인 욕구에 주리고 목마른 것 같지만 사실은 그런 것 때문이 아닙니다. 사람이 양식이 없어서 주린 것이 아니요 물이 없어서 갈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얻지 못한 주림이요 기갈입니다. (암8:11-13) 우리가 자신의 영적인 주림과 갈함을 진실되게 인정하고 주님께 나아올 때 하나님께서는 하늘 양식과 영생의 생명수로 충만히 채워주십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참 만족과 자유, 평화와 행복을 누리게 하시며 장차 영원한 천국을 선물로 주십니다. 그곳에서 배부름, 곧 완벽한 영혼의 만족을 누리게 하십니다.


다섯째,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7절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여기서 긍휼히 여긴다는 것은 고통과 시련을 당하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는 것을 말합니다. 더 나아가 그들의 상황에 깊히 동참하여 나를 희생하여서라도 고난을 같이 감당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외적인 형편이 우리보다 못한 사람에 대해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갖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인간적인 관점으로 불쌍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불쌍한 사람들에 대해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세상에서 잘 사는 사람들을 보면 우리가 불쌍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좋은 집, 좋은 차, 아무런 부족함이 없게 보이는 삶으로 인해 하나님을 찾지 않는 사람들이 더욱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며 긍휼히 여겨야 합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임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모든 은혜를 공급받게 됩니다. 


여섯째,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습니다. 8절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것은 마음이 깨끗한 것, 순수한 것입니다. 두 마음을 품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사는 삶입니다. 창세기의 요셉은 마음이 청결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려서부터 하나님이 주시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는 옥중에서도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해몽으로 관원장들을 섬겼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계시로 바로를 섬겼고 애굽과 이스라엘을 기근에서 구하였습니다. 다니엘도 그 내면이 청결하여 하나님을 본 사람이었습니다. 느브갓네살의 꿈을 말하였고 해석을 해주었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늘 하나님을 보며, 하나님의 나라를 누립니다. 그 마음에 하늘의 기쁨이 넘칩니다. 물론 이 땅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눈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볼 뿐입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눈부신 광채 속에 계시는 하나님을 직접 눈으로 보게 될 것입니다. 요즘에 미세먼지가 많이 낍니다. 하늘이 잘 안 보입니다. 영적인 미세먼지는 죄입니다. 우리 마음에 죄가 끼면 영적 시야가 뿌옇게 됩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보혈은 우리 내면의 모든 더러운 죄를 양털같이 깨끗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피를 덧입어 늘 회개하는 생활을 할 때 우리는 마음이 청결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보며 살며 하나님을 소유합니다. 하나님을 누립니다. 그 성품이 하나님과 같이 되어갑니다. 이것이 큰 복입니다.


일곱째,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9절입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여기서 화평은 히브리어로 ‘샬롬’인데 이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성 회복으로 인한 화평을 의미합니다. 인류역사상 완벽한 화평의 실현자는 예수님이십니다. 엡2:14는 말합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예수님은 십자가 대속으로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화평케 하셨습니다. 우리 신자는 세상에 보내어진 화평의 사도들입니다. 신자로서 화평하게 한다는 것은 단순히 개인이나 집단 간의 분쟁을 완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같이 자기희생을 통하여, 사람들을 하나님과 화평케하는 일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습니다. 


여덟째,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습니다. 10절입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신자들도 자기 죄 때문에 욕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것은 복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와 복음을 위해 살기 때문에 박해를 받는 경우는 복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주어지는 복이 무엇입니까? "천국이 그들의 것입니다." 세상에서 우리는 때때로 믿음으로 살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나 가족들과 가치관의 충돌이 생깁니다. 이로 인하여 박해를 받습니다. 그러할 때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으로 인하여 박해를 받을 때 우리에게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상이 예비되어 있습니다. 그 상이 무엇입니까? "천국"입니다. 


팔복이 여러가지 복된 제자의 내면성에 대하여 말씀하는데, 팔복 중 처음의 것인 3절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와 10절,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를 보면 처음과 끝 성품에 대한 약속이 동일합니다.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천국"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두번 째부터 일곱 번째 까지의 약속, 곧 "위로", "땅"," 배부름", "하나님을 봄", "하나님의 아들" 등도 결국 모두 천국을 의미하는 것임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주시는 상은 “천국”입니다. 모든 행복이 흘러나오는 원천이 “천국”입니다. 우리가 천국을 소망하고 믿음으로 누릴 때 이 땅에도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천국을 주고자 간절히 원하십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투자해서라도 반드시 천국을 얻고 누리길 원하십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바랄 것이 결국 천국? 에게, 겨우 천국?" 겨우 천국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천국의 고귀함, 그 엄청난 축복을 인간의 언어로 다 표현하실 수 없으셔서 다만 우리에게 천국을 약속하시고 믿으라고 하십니다. 이 한 가지를 소망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를 정말로 믿고 소망하는 자들의 심령에 성령의 역사로 인하여 천국을 누리는 삶을 살게 하십니다. 천국은 미래에 우리가 들어갈 나라이지만, 지금부터 이 땅에서 누리는 나라입니다. 신앙생활은 현재형으로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과거에 어땠다가 아닙니다. 현재적으로 오늘도 내일도 주와 함께 살며 천국을 누리는 삶입니다. 그 어디나 하늘나라를 경험하는 삶, 그것이 행복한 삶입니다. 


위에 말씀드린 팔복은 세상을 사는 우리 신자들의 삶의 기준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가치 기준에 따라 살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복된 기준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심령이 늘 가난하여 주님의 말씀을 겸손히 받고, 자신의 죄를 애통히 여기며,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성을 맺고자 애써야 합니다. 하나님의 의가 이 땅에 실현되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세속에서 자신을 지켜 청결한 마음을 유지해야합니다. 평화가 없는 세상에 화평케 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다가 받는 박해, 예수님을 따르다가 받는 박해를 기쁘게 받아야 합니다. 이와 같이 높은 천국의 도덕률을 따라 사는 자는 복됩니다. 


물론 이러한 기준은 우리가 볼 때 너무 높게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간절히 기도하며 그러한 삶을 살고자 투쟁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이 법도에 따라 사는 사람들로 변화시켜 가십니다. 우리는 세상 가치관을 따라 허무한 인생을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저희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예수님의 제자로 삼으로 가장 행복한 삶을 살게 하시는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주의 성령께서 연약한 저희를 도우사 날마다 더 복된 삶을 살게 도와주시길 기도합니다.


지금까지의 말씀이 복된 신자의 내면성이라고 한다면, 13~16절은 신자의 세상에서의 복된 직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자의 직분은 한 마디로 ‘소금과 빛’입니다. 


13절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2절까지 3인칭으로 말씀하신 예수님이 13절부터는 "너희는.." 하시며 2인칭으로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에게 직접적으로 방향을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십니다. 어부들에게 소금이라고 하면 그들에게 즉각 연상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생선을 소금에 절이는 것이었습니다. 소금이라는 말이 원어로 '할스', 어부는 '할리유스'인데 같은 어원에서 나온 말입니다. 당시에는 냉장고가 없었기 때문에 물고기를 소금에 절여 오래 보관하는 것이 필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실 때, 소금의 여러 역할 중에서도 특히 방부제의 역할을 의미하신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세상의 소금입니다. 적은 양으로도 사람들이 사는 맛을 향상시키고, 사회의 부패를 막습니다. 그런데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소금을 치려고 했던 사람은 맛을 보고는 "아이, 이거 하나도 짜지 않네. 이게 무슨 소금이야" 하면서 밖에 던져 버립니다. 그러면 다만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밟힐 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그 영향력이 잘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짠맛을 유지할 때 세상의 부패를 막는 역할을 합니다. 제자들이 짠맛을 유지한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을 말할까요? 앞에서 언급한 팔복의 원칙에 따른 삶을 사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하고, 죄를 애통하게 여기며, 온유하고, 의에 주리고, 마음이 청결하고, 화평케 하며, 의를 추구하는 삶을 살 때 이 사회에 소금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또한 세상을 비추는 빛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16절입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팔복의 정신에 따라 사는 제자의 삶은 착한 행실로 나타납니다. 세상 사람들도 보고 감동받는 삶으로 나타납니다. 어두운 세상에 우리가 빛을 사람들 앞에 억지로 비출 필요는 없습니다. 보여주기 위해 착한 행실을 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팔복의 정신을 따라 살 때 자연적으로 어둠 가운데 빛이 드러나듯이 드러납니다. 착한 행실을 한다고 나팔을 불지 않아도 착한 행실로 드러납니다. 그래서 그런 제자들의 삶을 보고 사람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팔복의 성품을 갖고 계신 분으로 우리가 예수님을 잘 따르며 배울 때 우리를 팔복을 누리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그런 사람이 세상의 소금과 빛입니다. 팔복은 또한 각각의 계명으로 우리가 지키고자 힘써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팔복의 사람으로 성장하는 것이 예수님이 우리 안에 그의 성품을 이루시는 방식입니다. 팔복은 상승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첫 단계가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 단계에 들어가면 상승단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부요한 마음, 높은 마음을 내려놓고 참으로 영적으로 가진 것이 없는 자인 것을 알고 겸손히 예수님을 배우는 복된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