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메세지

제목2026년 부활절 특강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마태복음 28:1-20)2026-04-06 01:37
작성자

2026년 부활절 특강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


말씀/ 마태복음 28:1-20

요절/ 19,20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Happy Easter! 인류역사에서 세상을 바꾼 사건들이 많이 있습니다. 전쟁이 역사를 바꾸기도 하고, 혁명이 시대를 바꾸기도 하고, 어떤 기술이나 전염병이 세상을 페러다임 쉬프트 시키기도 합니다. 그러나 단 하나의 사건, 한 무덤에서 일어난 사건이 세상을 완전히 바꾸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부활 사건입니다. 

지난 주 우리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고, 장사되었고, 무덤에 묻히셨습니다.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그물도 버리고, 배도 버리고,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들은 이제 어떻게 됩니까? 무얼해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함께 ‘사람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신 그 약속도 죽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한 예수님의 약속도 부활하였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만나 다시 사명을 회복시키십니다. 부활의 이 아침에, 우리가 부활의 확실성과 예수님의 유언적인 명령(지상사명)을 배우길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습니다. 두 여인이 무덤을 향하여 가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 다른 한 사람은 다른 마리아입니다. 특히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 들렸다가 예수님의 치유 사역으로 온전함을 받았고, 주님을 따르면서 물질로 섬겼던 여인입니다. 무덤을 향하는 이들의 발걸음이 무거웠습니다. 사흘 전, 이들이 사랑하고 따르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처형되었습니다. 이 과정을 그들이 다 지켜보았습니다.(27:56) 뿐만 아니라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예수님이 장사되는 것도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 보았습니다.(27:61) 그들의 마음속에는 오직 한 가지 생각만 가득했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셨다” 그들의 마지막 최선은 예수님의 시체에 향품을 발라주는 것이었습니다.


무덤에 가까이 갔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주의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왔습니다. 무덤을 막고 있던 거대한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습니다. 그 모습은 번개처럼 빛났고 옷은 눈처럼 희었습니다. 무덤을 지키던 군인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를 무서워하며, 떨며, 죽은 자처럼 쓰러졌습니다. 무서워하였다는 것은 죽을까 봐 그런 것이죠. 떨었다는 것은 그들 내면에 큰 지진이 일어났음을 알려줍니다. 또한 그들은 살았으나 죽은 자처럼 되었습니다. 아이러니한 장면입니다. 죽어 있어야 할 예수님은 살아나셨고, 살아 있는 군인들은 죽은 자가 된 것입니다. 


이때 천사가 떨고 있는 여자들에게 말합니다. “무서워하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를 찾는 줄을 내가 안다” 여인들은 십자가에서 못 박히신 예수님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럴 때 슬프고 절망적이며 미래 희망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그들의 기대가 물거품처럼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의지의 대상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소망도 실패로 돌아간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천사가 전하는 소식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역전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그 놀라운 구체적 내용이 무엇입니까? 6절을 읽겠습니다.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여기서 중요한 말이 있습니다. ‘말씀하시던대로’. 예수님은 이미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이 예루살렘에서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날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도 여자들도 그 말씀을 마음에 두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고 살아나셨습니다. 인류 역사상 죽었던 사람이 부활한 경우는 없습니다. 잠시 기절했다가 살아난 경우는 있습니다. 죽은 나사로가 예수님의 말씀 권세로 살아난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결국 죽었습니다. 하지만 사망권세를 깨고 영광스러운 몸, 썩지 않고 쇠하지 않는 불멸의 몸으로 부활한 것은 예수님이 처음입니다. 이제 죽음 권세가 더 이상 왕 노릇하지 못하는 시대가 열렸습니다. 죽음 앞에서 무서워 떨며 죄와 사망의 종 노릇하던 인생들에게 예수님의 부활 소식이 얼마나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까? 이것을 믿으십니까? 아멘. 예수님이 하신 말씀대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또한 예수님의 말씀이 신뢰할 수 있는 진리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예수님의 약속하신 말씀도 살아났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이를 우리는 굳게 믿고 붙들길 기도합니다.  


또한 천사는 ‘예수님이 누우셨던 곳을 보라’고 합니다. 빈 무덤은 예수님의 부활의 실제적 증거합니다. 사람들은 돌로 막고, 인봉을 하고, 군인들을 세워 지켰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부활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인간의 노력도, 사단의 방해도, 그 어떤 권세도 예수님의 부활을 막지 못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부활 신앙이 없을 때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운명적인 생각, 슬픈 생각, 두려움, 절망적인 생각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중한 병에 걸리거나, 경제적 어려움이 닥치거나, 예기치 못한 사고를 당할 때, 변화되지 않는 자신의 모습을 볼 때, 남과 비교하여 뒤처져 있다고 생각될 때 무기력하게 됩니다. 자포자기하는 심정이 듭니다. 우울증에 시달리게 됩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거기에 머물러 있지 말라” 십자가에서 끝날 인생이 아니라, 부활로 다시 시작되는 인생을 살라 하십니다. 


7절을 보겠습니다. 천사는 여자들에게 사명을 줍니다. 그 사명은 두가지입니다. 첫째, 제자들에게 빨리 가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전하고, 둘째, 예수님이 먼저 갈릴리로 가서 그들을 만날 것임을 알리라는 것입니다. 이에 여자들이 무덤을 떠나 제자들을 향해 달려갑니다. 이 여자들의 마음에는 무서움과 큰 기쁨이라는 두 가지 감정이 섞여 있었습니다. 왜 무섭습니까? 죽은 자가 살아났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면서도 동시에 무서운 일입니다. 자연법칙을 거스르기 때문입니다. 또한 ‘큰 기쁨’이 있습니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예수님이 다시 사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죽음을 맞이하여 이 세상을 떠날 때 이와 동일한 감정을 경험할 것입니다. 죽는다는 것이 무섭습니다. 또한 천국에 입성하니 기쁩니다.  


여자들 앞에 더 놀라운 일이 펼쳐졌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평안하냐?’ 이 말은 헬라어로 ‘카이레테(χαίρετε)’인데, ‘기쁨가운데 있으라’는 의미를 담은 인사입니다. 무서움의 감정이 채 가시지 않은 여자들에게 예수님은 자신의 부활의 확실함을 보이시고 큰 기쁨을 선물로 주십니다. 여자들은 예수님께 나아가 그의 발을 붙잡았습니다. 여러분, 부활하신 예수님은 영으로 부활하신 것이 아닙니다. 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발을 붙잡을 수 있었습니다. 여인들은 예수님의 발을 붙들고 놔주지 않고자 합니다. 의지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경배합니다. 그들은 죽음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경배하였습니다. 


10절을 읽겠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을 ‘내 형제들’이라고 부르십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도망쳤던 자들, 부인했던 자들, 실패했던 자들을 나의 형제라고 부르십니다. 왜 입니까? 예수님의 부활로 새로운 관계가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15:20-22). 예수님은 둘째 아담, 새 인류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참 아들이신데,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십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가족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부활하였듯이 우리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여자들에게 무슨 사명을 주나요? 제자들에게 갈릴리로 가라고 하십니다. 천사가 여인들에게 말한 것을 재차 반복합니다. 그만큼 갈릴리로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이 현재 십자가에 달리시고 묻히시고 부활한 예루살렘에서 만나면 좋지 않을까요? 이스라엘의 수도이며,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에서 만나자고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갈릴리로 제자들을 소집하는 걸까요? 갈릴리는 예수님의 사역의 시작점입니다. 처음 제자들을 부르신 곳입니다. “나를 따라오라 내가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약속했던 곳입니다. 3년간 대부분의 시간을 동고동락했던 곳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후 지금 제자들의 마음은 어떠할까요? “실패했다. 끝났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런 그들을 다시 갈릴리로 불러 모으십니다.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처럼 부활은 끝난 이야기를 다시 시작하게 하는 능력입니다. 또한 갈릴리는 어떻게 부릅니까? ‘이방의 갈릴리’입니다. 다양한 민족이 섞여 사는 이곳에서 예수님은 이스라엘을 넘어 모든 민족을 향해 나아가는 출발지로 삼고자 하십니다. 예수님은 더 큰 그림을 그리고 계십니다. 


한편 다른 이야기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무덤을 지키던 군인들이 종교지도자들에게 가서 무덤에서 일어난 일들을 보고했습니다. 그들은 지진도 보았고, 천사도 보았고, 빈 무덤도 보았습니다. 그런데 종교 지도자들은 진리를 받아들이기보다 군인들에게 돈을 주어 가짜 뉴스를 만들어 퍼뜨렸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시체를 훔쳐 갔어” 자, 이 말에 어페가 있지 않습니까? 이 말대로라면 지키던 군인들은 직무유기입니다. 사형감입니다. 그런데도 아무 처벌을 받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큰 돈을 받았습니다. 이들의 거짓 소문은 오히려 무덤이 비어있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부활을 간접 증거하고 있습니다.


마침내 제자들이 갈릴리에 도착합니다. 예수님께서 지시하신 산에 올라갑니다. 거기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제자들 또한 예수님을 보고 경배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놀랍게도 이렇게 기록합니다.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이 있더라” 참 솔직합니다. 예수님을 직접 보고 경배하면서도 완전히 확신하지 못합니다. ‘죽은 자가 살아났다’ 이해가 잘 안됩니다. 또한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이 예수님인 것 같기는 한데, 이전과 차이가 나는 영광스런 모습입니다. 왠지 낯설고 충격적입니다. 이해의 과정으로 볼 수 있습니다. 시간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이런 제자들의 마음이 공감이 됩니다. 우리에게도 믿음과 의심이 공존합니다. 주님 앞에 나아갈 때 온전한 믿음을 가지고 나아가면 좋으련만, 회당장 야이로처럼 의심을 가질 때가 많습니다. “나의 믿음 없음을 불쌍히 여기사 나를 도와주소서”하면서 나아갈 때도 있습니다. 어쩌면 의심하면서도 나아가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직도 제자들은 불완전합니다. 연약합니다. 두려움이 있습니다. 의심합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제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일을 맡기고자 합니다. 확신이 완벽해질 때까지 미루거나 취소하지 않습니다. ‘의심속에서도 순종하라’며 제자들을 부르시고 사명을 주십니다. 이것이 주님의 방식입니다. 왜냐? 주님이 주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쭈빗거리는 그들에게 다가가셔서 말씀하십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예수님은 온 우주의 통치자요 주권자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왕권을 선포하십니다. 마태복음 4장에서 마귀는 예수님을 시험하여 자기에게 절하면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다 주겠다고 유혹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만 하나님을 경배하며 그를 섬기라’하시며 마귀를 쫓아버리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십자가 순종과 부활의 승리를 통해 약속된 메시야 왕으로 즉위하셨습니다. 마귀가 약속했던 그 통치 영역보다 훨씬 더 큰 우주적인 권세, ‘모든’ 권세를 얻으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통제를 벗어난 권세는 없습니다. 마귀는 지금까지 죽음의 세력을 잡고 사람들을 괴롭혔습니다(히2:14). 그러나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죽음의 세력까지 정복하셨습니다. 이 권세에 기초하여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명을 주십니다. 


19,20절을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의 핵심은 “그러므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입니다. 여러분들도 잘 아시다시피 제자 삼는 사역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본문은 ‘그러므로’로 시작합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 모든 민족과 모든 영역의 통치권을 가지신 예수님의 통치로 말미암아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갈릴리 젊은이들에게 자기를 따라오면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어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이방 땅으로 가지 말고 이스라엘에게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전도 여행을 보내시어 풍성한 전도 열매를 맺게 하셨습니다. 이 사역이 십자가 사건으로 중단되었습니다. 여기에서 파생된 여러 가지 일들로 제자들의 내면에 큰 데미지가 입혀졌습니다. 이런 그들을 예수님은 다시 사명으로 회복시키십니다. 그리고 그들의 지경을 넓힙니다. ‘모든 민족’을 마음에 품고 이제는 열방으로 나가야 합니다. 단지 복음 선포 수준이 아니라, 이제는 듣는 사람들을 제자로 만들어야 합니다.  제자양성가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하셨던 일을 이제 그들이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왜 ‘제자 양성’이 중요합니까? 제자 양성은 사람이 고안해 낸 방식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방식이며, 예수님의 방식이며 교회의 본질적 사명입니다. 하나님은 창조 명령으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으로 온 땅에 충만해지기를 고대하셨습니다. 그러나 바벨탑 사건 이후 온 인류가 육체가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한탄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한 사람을 택하시고, 그를 믿음의 사람으로 키우셨습니다. 그리고 이삭과 야곱을 이어 이스라엘이라는 믿음의 공동체를 만드시고, 세계에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라 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이 땅에 있으시면서 3년의 공생애 기간 열두 제자를 양육하는데 집중하셨습니다. 십자가를 통한 인류구원, 제자양성. 이 두 가지가 핵심 사역이었습니다. 사도바울도 사랑하는 영적 아들 디모데에게 유언적으로 쓴 서신서에서 “네게 부탁한 것을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딤후2:2)고 하였습니다. ‘제자 양성을 통한 세계 선교’ 이것이 성경의 원리입니다. 우리 UBF 역사도 1961년 광주 대인동에서 캠퍼스 성경공부로부터 시작하였고 ‘캠퍼스 제자양성’을 핵심 사역으로 하였습니다. 그 결과 현재 한국에 80여 지부가 개척되었고, 90개국 1500여명의 선교사를 파송한 공동체로 성장하였습니다. 우리가 복음 선포로만 그쳤다면 이것이 가능했겠습니까? ‘제자 양성’. 당장의 결과가 보이지 않지만, 느리게 보이지만 ‘성서한국, 세계선교’를 이루는 가장 확실한 성경적 방법입니다. 종로 2부 UBF도 이것을 믿고 차근차근 제자 양성의 기틀을 놓고 단계별로 앞으로 나아가길 기도합니다. 특별히 5월 17일에 있는 WMC에서 그동안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이루신 제자 양성의 열매를 보고, 캠퍼스와 세계 선교의 열정을 다시 회복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제자 양성의 실제적 방법, 삼 단계를 알려주십니다.


첫째, ‘가라“. 찾아가는 것입니다. 제자 양성은 사람을 찾아가는데로부터 시작합니다.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고 다가가 그 사람과 관계성을 맺고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둘째, 성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어야 합니다. 세례는 자신이 죄인인 것을 고백하고 예수를 구주로 고백한 사람에게 주는 공적 예식이며, 신앙 공동체에 담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날 때 비로소 그때부터 영적 성장을 이룰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제자양성해야 하는가? 신자를 하는 것입니다. 비신자는 제자양성의 대상이 아닙니다. 이런 사람은 복음을 알고 거듭나도록 도와야 합니다.


셋째, 예수님이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치고 지키게 해야 합니다. 단지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삶으로 살아내도록 하는 것입니다. 제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배우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삶의 방식을 따라 가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현재 어느 단계에 있습니까? 비신자입니까? 그렇다면 복음을 깊이 알아야 합니다. 거듭나야 합니다. 신자입니까? 제자로 성장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모든 가르치심, 성경 말씀을 배우고, 순종하여 삶 속에서 체험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제자입니까? 그렇다면 제자 양성가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써 다른 사람에게 본을 보이고, 다른 성도를 가르치고 지키도록 훈련시키는 일에 동참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놀라운 약속을 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임마누엘‘을 약속하셨습니다. 제자 양성의 사명을 감당하는 자에게 예수님은 함께 하십니다. 어떤 날에도 어떤 상황속에서도 결코 떠나지 않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께서 이러한 약속을 하셨기 때문에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는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현재 종로2부는 제자 양성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청년 대학생들에게 부탁드립니다. 영적 기본 생활을 잘 감당하십시요. 일용할 양식 먹기와 기도, 일대일 성경공부, 소감 쓰기를 꾸준히 하십시오. 이것을 잘 감당할 때 영적 기본기가 튼튼해집니다. 다음으로 말씀에 순종하는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한 발 더 나아가 다른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에 동참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일, 나의 마음과 삶의 중심에 그리스도가 있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예수님의 제자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목자님들에게 말씀드립니다. 후배들에게 본이 되고자 힘씁시다. 제자 양성을 위해 각자의 은사를 발휘하여 서로 협력하고 좋은 동역자가 되기를 힘씁시다. 특별히 결혼한 젊은 목자님들은 장차 청년 대학생들을 가르치고 섬길 수 있도록 영적인 스피릿과 역량을 끌어올리고 주를 위하여 댓가를 지불하고, 헌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제자 양성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많은 시간과 과정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가르침과 본을 보이는 삶, 그리고 반복과 실패와 훈련, 이 과정을 거치면서 조금씩 조금씩 성장해 가며 결실을 맺게 됩니다. 조급해 하면 안됩니다. 우리가 제자 양성의 과정을 잘 이해하고 우리에게 맞게 잘 적용하여 실천하길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종로2부 가운데 제자들이 만들어지게 하시고, 제자 양성가가 세워지게 하시길 기도합니다. 


결론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말씀하신던 대로 죽음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의 말씀이 항상 진리이며 살아있다는 것을 증거합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께서 부활의 이 아침, 우리를 갈릴리로 부르십니다. 실패한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라고 하십니다.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 주님의 명령을 우리 마음에 품고 순종하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