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마태복음 5강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말씀/ 마태복음 4:12-25 요절/ 마태복음 4:19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지난 강의에서 예수님은 말씀으로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셨습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들인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명확히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은 첫째,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 둘째, 어떤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것, 셋째, 오직 하나님만을 경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날 이와 같은 분명한 삶의 자세를 가질 때 마귀의 시험을 이길 수 있습니다. 이 시대의 하나님의 아들들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고 첫 제자들을 부르심으로 메시야 공생애를 시작하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예수님이 가져오신 천국을 누리며, 또한 천국 복음 역사를 위해 예수님의 제자들로 귀히 쓰임 받기를 기도합니다.
12절입니다. "예수께서 요한이 잡혔음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온 이스라엘에 큰 회개 운동을 일으켰던 세례 요한이 당시 갈릴리 분봉왕이었던 헤롯 안티파스에게 잡혔습니다. 이는 헤롯이 그의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취한 것을 요한이 책망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헤롯 왕이여, 당신이 동생의 아내를 빼앗은 죄를 회개하시오!" 이 일로 요한은 투옥되었습니다. 헤롯의 생일날에 헤로디아의 딸이 춤을 추었는데, 그 대가로 요한은 결국 참수형을 당합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한이 그리스도가 아닌가 할 만큼 그에 대한 기대가 컸습니다. 희망의 등불이었습니다. (요5:35) 그러나 이런 세례 요한이 투옥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의로운 요한이 투옥되었을 때 구명 운동이라도 벌여야될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습니까? 예수님은 요한이 잡혔음을 들으시고 북쪽 지방인 갈릴리로 물러가셨습니다.
“물러가셨다”는 표현으로 인해 우리는 예수님이 위험을 피해 도피하셨다는 느낌을 갖기 쉽습니다. 그러나 NIV에는 “returned to Galilee”로, 갈릴리에서 유대로 오셨던 예수님이 다시 그곳으로 가신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요한의 잡힘을 비극적인 것으로 보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속 역사의 스케쥴 가운데 이제 요한의 시대가 끝나고 예수님 자신의 때가 온 것을 영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타임을 분별하시고 이제 메시야 사역을 시작하고자 적극적인 방향을 잡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메시야 사역을 사람들이 많은 예루살렘에서 시작할 수도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한적한 갈릴리에서 시작하고자 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일찍이 예언된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예언하였습니다. 15,16절입니다.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하였느니라."
갈릴리는 갈릴리 호수를 중심으로 한 이스라엘의 북쪽 지방을 말합니다. 이 지방은 원래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한 후에 아셀, 납달리, 스불론, 잇사갈 4개 지파에게 배분되었습니다. 이는 수도 예루살렘에서 먼 지역이었습니다.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은 지역이었습니다. 그래서 과거에 솔로몬 왕은 예루살렘 성전 건축을 위해 백향목, 잣나무, 금 등을 공급해 주었던 두로 왕 히람에게 그 보답으로 갈릴리의 성읍 20개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히람이 직접 와서 그 성읍들을 보고는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그 땅을 ‘가불’이라고 불렀습니다. (왕상 9:10–14) 가불이라는 것은 월급을 미리 받는 가불이 아니라 "이게 뭐냐? 별로다, 형편 없다"라는 뜻입니다. 그때에도 갈릴리는 멸시받는 지역이었습니다.
그 이후에도 그곳은 강대국들이 쳐들어올 때마다 제일 먼저 침략을 당했습니다. 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 헬라, 수리아에 의해 차례로 정복당했습니다. 포로 생활과 이민족의 이주가 되풀이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갈릴리는 혼혈 인종, 혼합 문화를 형성하였습니다. 그래서 유대 사람들은 그곳을 이방의 갈릴리라고 부르며 멸시했습니다. 그곳에서는 결코 선지자가 나오지 못할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요7:41,52) 그러나 이사야는 이렇게 멸시받는 갈릴리, 흑암에 앉은 것과 같은 이 지역 사람들에게 큰 빛이 임할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16절을 다시 한번 봅니다.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하였느니라." 깜깜한 땅에 있는 백성들이 큰 빛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배웁니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을 앞세우신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성자 하나님으로서 모든 지혜와 지식이 충만한 분이십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자기 생각대로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앞세우셨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고자, 즉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때를 분별하시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갈릴리로 가셨습니다. 말씀을 이루시는 예수님을 통해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우리는 무엇에 따라 살고 있습니까? 진학과 취업, 알바나 이사, 결혼 및 장래 방향을 무엇에 따라 결정합니까? 우리가 이런 실제적인 문제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신 예수님을 배워야겠습니다. 우리의 전 인생이 말씀에 적극적으로 순종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인생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예수님이 오심은 큰 빛이 임한 것과 같습니다. 멸시받던 이방의 갈릴리, 흑암 가운데 있던 백성들에게 큰 빛이 임했습니다. 깜깜한 어둠 가운데 있어 본 적이 있으신가요? 한 뼘 눈앞도 분간이 안되는 어둠, 그런 어둠 가운데서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손을 내밀어 더듬어 보는 일입니다.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의욕과 열정이 많아도 발휘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영적으로 흑암에 거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되어 있을 때 우리는 비록 육신의 눈을 뜨고 있지만 이 세상 권세자 마귀의 통치를 받습니다. 마귀의 통치라고 해서 뿔 달린 도깨비 같은 존재가 우리를 위협하며 지배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마귀는 공중 권세, 곧 하나님 없는 이 세상의 지배자입니다.
마귀가 다스리는 방식은 교묘합니다. 세상의 정치 제도를 통해 다스립니다. 인본적인 교육 시스템을 통해 다스립니다. SNS를 통해 영향을 미칩니다. 하나님 없는 문화와 예술을 통해 지배합니다. 그것이 어둠인지 모르는 가운데 우리는 어둠의 세력의 지배를 받습니다. 흑암에 거합니다.
이런 흑암에 거하는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갈 때 빛을 얻습니다. 예수님은 빛이십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요8:12b) 우리가 과거에 예수님을 알지 못했을 때, 밝은 태양빛 아래 있었을지라도 우리 내면은 몹시 어두웠습니다. 생각하는 것들이 어두웠고 말하는 바가 어두웠습니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큰 빛이 되셨을 때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어둠이 물러갔습니다.
오늘날도 어둠 가운데 있는 세상에 예수님은 큰 빛이 되십니다. 새 봄학기가 되어 캠퍼스에 활력이 넘칩니다. 그러나 학생들의 내면은 어둡습니다. 1학년 새내기도 벌써 취업 걱정을 합니다. 어떤 학생은 경영학과에 입학하였습니다. 전망이 좋은 유망학과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가는 길에 확신이 없습니다. 적성에 맞는 것인지도 확신이 안 듭니다. 벌써 자퇴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빛이 없는 곳에서는 그 무엇에도 확신을 가질 수 없습니다. 자기가 아무리 능력이 많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방향이 없으니 발휘가 되지 않습니다. 해결책이 무엇입니까? 큰 빛되신 예수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그때 어둠 가운데 "빛이 있으라" 하신 주님께서 그의 내면에 신적인 빛을 비추십니다. 그때 그는 밝히 봅니다. 자기 위치가 어딘지 알고, 어디로 가야할 지 압니다. 빛 아래에서 힘차게 달려가는 인생이 됩니다.
이 복음서를 쓰고 있는 마태는 과거에 돈이 많았지만 어둠 가운데 있었습니다. 이런 그의 인생에 한 음성이 들렸습니다. "나를 따르라!" 그 말씀은 그에게 구원의 빛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그의 구원자가 되셔서 그를 흑암에서 꺼내주셨습니다. 그를 지독한 이기심에서 치료하시고 성마태가 되도록 하셨습니다. 마태는 어둠에 있던 자기를 건지신 빛 되신 예수님의 은혜에 감격하여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문제는 자기의 인간 조건이 아닙니다. 그의 삶에 빛이 있느냐 없느냐입니다. 흑암 가운데 사는 인생들에게 큰 빛으로 오신 예수님께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날마다 더욱 이 빛을 받아들여 빛 가운데 행하기를 기도합니다.
17절입니다.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예수님이 전하신 최초의 메시지입니다. 이 메시지는 세례 요한이 전파한 것과 동일합니다. 그러나 내용 면에서는 약간 다릅니다. 세례 요한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할 때에는, 미래에 예수님이 오심으로 임할 천국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실 때에는 거의 현재적으로 임한 천국을 말합니다. 회개한 자에게 예수님이 즉시로 주시는 나라입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의 메시지는, 예수님이 천국의 왕으로서 이 땅에 오셨고, 이제부터 회개한 자들을 천국에 들여보내신다는 선포입니다. 회개가 무엇인가는 지난 3강 말씀에서 배웠습니다. 그동안 하나님의 뜻을 멸시하고, 나의 뜻과 나의 영광을 위해, 나 중심적으로 살아온 것을 뉘우치고, 나의 인생 방향을 하나님께 돌이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기로 결단하여 그의 통치를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해결해야 될 문제가 많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로마로부터 독립을 갈망하였습니다. 열혈당원들은 로마를 몰아내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쳤습니다. 이스라엘은 경제적으로도 곤궁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그러한 정치 경제 문제를 해결해 줄 메시야를 고대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의 그런 문제를 우선적으로 돕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첫 메시지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이었습니다.
우리나라도 정치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많습니다. 중동 전쟁으로 인해 물가가 올라가고 경기 침체가 오지 않을까 염려합니다. 혹시 제3차 대전이 일어나지는 않을까 불안해합니다. AI 발전으로 청년들의 취업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해 줄 메시야를 갈망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시대에 다시 오셔도 동일한 말씀을 선포하실 것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이를 볼 때 우리가 무엇을 하든, 어디에 있든, 우리가 할 일은 천국 복음을 전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회개하고 예수님을 왕으로 모셔 천국을 누리도록 섬기는 일입니다. 우리가 이 영적인 방향을 분명히 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회개하도록 돕고 천국 백성이 되게 하는 일에 힘쓰기를 기도합니다.
18절입니다.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예수님은 갈릴리 해변을 다니시다가 두 어부가 그물 던지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들은 시몬과 안드레였습니다. 그들은 열심히 자기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부르십니다. 19절입니다.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나를 따라오라!"가 무슨 의미일까요? 예수님의 제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매일 고기잡이에 종사하는 그들에게 이제 고기잡이를 중단하고 예수님을 배우는 제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부르시면서 주신 약속이 무엇입니까?"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I will make you fishers of men.” 어부들에게 “사람을 낚는 어부”라는 말처럼 그 의미가 더 선명하게 들리는 표현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는 그들을 죽음의 바다에 있는 사람들을 구원하여 천국 백성이 되게 하는 영적 어부들로 만들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시몬과 안드레는 매일 바다에 나가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고기잡이를 마치면 그물을 씻고 집에 들어가 쉬었습니다. 그들의 일과는 단순하였습니다. 한 마디로 생존을 위한 삶이었습니다. 떡만으로 사는 인생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나를 따르라" 이는 생존을 위한 삶, 떡이 없으면 죽을 것 같은 두려움의 늪에 빠져 있는 그들을 끌어내는 구원의 줄이었습니다. 그들이 이 말씀을 붙들었을 때, 그 말씀이 생명줄이 되어 마귀의 시험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를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물론 예수님의 부르심은 거역할 수 없는 신적인 은혜의 부르심입니다. (Irreisbale calling) 그러나 무엇보다 그들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때문이었습니다.
시몬과 안드레가 어부의 인생을 살면서 그들을 가장 피곤하게 한 것은 고기를 적게 잡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고기는 많이 잡는 날도 있었고 적게 잡는 날도 있었습니다. 그런 것은 반복되는 일상이었습니다. 그들을 정말 지치게 한 것은 인생의 무의미였습니다. 매일마다 매주마다 반복되는 일상이었습니다. 전도서 1:8a은 말합니다.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사람의 영혼은 결코 그저 먹고 사는 일상으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전3:11b) 영원히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며 영원히 가치 있는 일을 하는 것을 사모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창조된 것이 인간입니다. 이것이 채워지지 않는한, 사람은 결코 만족할 수 없습니다.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시몬과 안드레는 예수님의 이 약속의 말씀에서 소망을 발견하였습니다. 그 부르심에 응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도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창12:1,2) 아브라함은 현실적으로는 믿을 수 없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믿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말씀에 자기 인생을 걸었습니다. 두려움 없이 말씀을 믿고 나아갔습니다. 바로 이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기독교는 그저 예수 믿고 도덕적으로 좀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약속의 말씀을 믿고 나의 인생을 결단하는 것입니다. 밧줄을 믿고 번지 점프를 하듯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나를 던지는 것입니다. 시몬과 안드레는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신 약속의 말씀을 믿고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면 “사람을 낚는 어부”는 어떤 사람입니까? 사람을 낚는 어부란 사망의 바다에서 죽어가는 생명을 건져 천국으로 옮기는 일을 하는 자입니다. 죄로 인해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아야 할 인생을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인도하는 자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 그로 인한 지옥 형벌에 대해 잘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죄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영원한 지옥 불에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죽어가는 사람을 구원하는 일은 얼마나 중대하고 시급한 일입니까? 요즘에 길거리를 다니다 보면 앰블런스가 사이렌을 울리며 달려가는 모습을 종종 봅니다. 그들은 심정지가 온 환자를 구급차 안에서도 필사적으로 CPR을 시킵니다. 병원 응급실에 도착하자마자 대기 중인 의료팀에 의해 즉각 진료를 받습니다. 의료진들은 촌각을 다투며 생명을 살리고자 온 힘을 다합니다.
육신의 생명을 살리고자 이렇게 애를 쓰는데 영적인 생명을 살리는 것은 얼마나 더 귀합니까? 죽어가는 한 영혼을 영원한 천국에 들이는 이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결단코 없습니다. 영혼 구원의 절박성을 절감한 영국의 한 전도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런던 시내가 깨어진 유리로 덮여 있다 해도 그 위를 무릎으로 기어다니면서라도 천국 복음을 전하겠다." 누구든지 회개하고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는 자는 천국에 들어갑니다. 봄학기 캠퍼스에 복음을 모르는 수많은 학생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들을 영적인 눈으로 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에게 영혼 구원에 대한 절박함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고 하신 일은 바로 제자를 부르신 일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선포하실 때, 어떤 놀라운 일을 기대했을지도 모릅니다. 하늘로부터 열두 군단의 천사들을 내려오게 하실 것을 기대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기적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를 부르시고 제자 공동체를 이루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이 땅에 천국이 임하게 하시는 방식이었습니다. 이 땅에 이루어지는 천국은 제자들을 불러 제자 공동체를 만드심으로 시작됩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를 볼 때 많은 일을 하신 것 같지만 결국 열두 명의 제자를 키우는 데 모든 힘을 다 쏟으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가서 모든 민족에게 가서 제자를 삼으라는 사명을 주십니다. 이들을 통해서 복음이 온 천하 만민에게 전파됩니다. 사람을 키우는 일, 제자를 삼는 일이 이 땅에 천국을 이루는 일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우리 스스로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되게 하셔야 합니다. “I will make fishers of men“. ”make“는 사역동사인데 히브리 원어로 창세기에 나오는 ‘창조’(바라 בָּרָא)입니다. 완전히 다른 피조물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의 제자요 제자 삼는 자가 된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었던 우리가 어떻게 다른 사람을 예수님의 제자로 삼을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따를 때 예수님이 우리를 그런 존재로 만들어 주십니다. 우리가 대리석이라면 예수님은 조각가이십니다. 조각가가 원석을 자르고, 다듬어서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 듯, 예수님은 우리를 사람을 낚는 어부로 만드십니다.
이를 위해 우리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한두 번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일생동안 예수님을 마음으로 따르며 그를 배우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일생 동안 예수님을 잘 따른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그는 고린도 성도들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고전11:1) 우리에게도 일생 동안 예수님을 따르며 배울 수 있는 놀라운 은혜와 특권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배우는 삶은 언제나 신선하고 다니나믹한 삶입니다. 세상 떠날 때까지 예수님의 아름다운 성품을 본받는 가장 행복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나의 인생에 가장 귀한 열매를 맺는 아름다운 삶입니다.
예전에 어느 시니어 선교사님들이 하시는 대화를 들었습니다. ”지난 세월 돌아보니 오로지 양들을 섬기는 삶을 살았네요. 양이 뭐라고... 양 때문에 울고 웃고 살았네요. 그래도 양들 섬기는 것이 제일 보람되는 일 아니겠어요?“ 예, 그렇습니다. 양 가지고 비교 경쟁하는 것을 비판하는 분도 있지만, 그래도 양치는 삶이 정말 보람된 일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일입니다. 영원한 불 심판에 떨어질 한 생명을 구원하여 그에게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얻게 해 주는 것처럼 고귀하고 위대하고 아름다운 일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너무나 아름답고 귀한 인생의 열매가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빌4:1)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살전2:19) 우리가 생명을 구하는 사명, 예수님의 제자를 삼는 사명의 귀중함을 날마다 감사하며 이 일에 충성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대한 시몬과 안드레의 반응이 어떠하였습니까? 20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그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즉각적으로 응답하였습니다. 그물은 어부에게 생명과도 같은 재산입니다. 그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22절을 보면 야고보와 요한도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23절입니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예수님은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시며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또한 백성 중에 모든 병든 자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그들을 치유해주셨습니다. 24절도 예수님의 치유 사역을 말씀합니다. 병든 사람은 병든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병든 사람의 소원은 단 하나입니다. 병에서 낫는 것입니다. 병든 자에게는 병에서 낫는 것이 천국을 누리는 것입니다.
육체가 건강하다는 것은 힘이 넘치고 기분이 상쾌한 상태를 말합니다. 영적 건강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으로 건강할 때 성령이 충만하고 힘이 넘칩니다. 그 마음이 하늘의 기쁨과 평강이 넘칩니다. 마귀의 다스림을 받을 때 사람은 망가집니다. 고장이 납니다. 영육간에 피폐해집니다. 이런 세상에 예수님은 치유의 역사를 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를 때 우리에게 영육간의 강건함도 주시고 천국을 누리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말씀 사역과 치유 사역을 통해 사람들로 하여금 실제적인 천국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이 진정한 메시야임을 드러내셨습니다 .
결론적으로, 예수님이 첫 번째 전한 메시지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이었습니다. 하나님 역사의 핵심적인 사역은 ‘회개’와 ‘천국’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이 천국을 주시기 위해 처음부터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들에게 영혼을 구원하는 자가 되는 인생 방향을 주셨습니다.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이 말씀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주시는 축복된 말씀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이 말씀을 영접하고 마음을 다해 예수님을 따르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잘 배우는 가운데 사람 낚는 어부들로 귀하게 쓰임 받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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