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4강
시험받으신 하나님의 아들
본문: 마태복음 4:1-11 요절: 마태복음 4:10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오늘 말씀에서는 예수님이 메시야로서 사역을 감당하시기 전 시험을 받으시는 내용입니다. 지난 말씀에서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지만 죄인처럼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더 나아가 예수님은 오늘 말씀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십니다. 우리가 이 시간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의 의미를 잘 깨닫기를 기도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 각자가 삶 가운데 받는 시험에서 능히 승리할 수 있는 힘과 지혜를 덧입기를 기도합니다.
1. 시험받으신 하나님의 아들
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에서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기뻐하는 자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선포되었습니다. 이제 공생애가 시작되는 순간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장면은 우리가 기대하는 모습과 다릅니다. 성령께서 예수님을 사역의 현장이 아니라 광야로 이끄십니다. 그것도 마귀에게 시험을 받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장면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성령께서 인도하시면 더 안전하고 평탄한 길로 가야 할 것 같은데, 왜 시험의 자리로 이끄시는 것일까요? 우리는 종종 성령의 인도하심을 ‘문제가 없는 상태’로 이해하지만, 오늘 본문은 그렇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성령은 때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시험의 자리로도 인도하십니다. 예수님은 그 인도하심에 아무런 저항 없이 순종하십니다. 죄 없으신 분이 죄인들과 함께 세례를 받으신 것도 하나님의 뜻이었고, 시험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이라면 어떤 자리든 기꺼이 들어가시는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시험을 받으셔야 했을까요? 이것은 단순히 개인적인 시험이 아니라, 구속사적인 의미를 가진 사건입니다.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실패했고,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실패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자리에서 순종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실패의 역사를 다시 시작하는 자리에서 서십니다. 참 아담으로, 참 이스라엘로,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길을 걸으십니다. 그리고 그 자리는 동시에 우리를 대신하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연약하여 넘어질 수밖에 없는 우리를 대신하여, 예수님이 시험의 자리에 서신 것입니다.
2절을 읽겠습니다.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여기서 또 하나 중요한 특징이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시험을 가장 좋은 상태에서 받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가장 연약한 상태에서 시험을 받으십니다. 우리는 중요한 일을 앞두고 컨디션을 끌어올리려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40일 금식이라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 시험을 맞이하십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일부러 가장 낮고 연약한 자리까지 내려가신 것입니다. 하루만 금식해도 힘든 우리가 감당하기 어려운 상태, 육체적으로 완전히 쇠약해진 상황에서 시험을 받으십니다. 장소도 광야입니다. 결핍과 고독의 자리입니다. 시험하는 존재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마귀입니다. 아담은 풍요 속에서 실패했지만, 예수님은 결핍 속에서 순종하십니다. 이 대비는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대표로서, 가장 불리한 조건 속에서도 하나님께 순종하는 길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마귀’라는 존재를 분명히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은 마귀를 단순한 상징이나 개념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인격적 존재로 말씀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대적하며 사람들을 미혹하는 자입니다. 또한 그를 따르는 악한 영들, 곧 귀신들이 존재합니다. 사람들은 종종 귀신을 죽은 사람의 영혼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죽은 후 하나님 앞에 서게 되며, 심판을 받게 됩니다. 반면 마귀와 악한 영들은 지금도 살아 역사하며 사람들을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합니다. 예수님은 그를 ‘세상 임금’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이는 그가 하나님과 동등하다는 뜻이 아니라, 타락한 세상 속에서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그는 이미 패배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해 그의 운명은 결정되었습니다. 지금의 활동은 패배한 존재의 마지막 발악에 가깝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사람들을 무너뜨릴까요? 사도 요한은 그 방식을 세 가지로 정리합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입니다. 이것은 새로운 방식이 아닙니다. 창세기 3장에서 이미 등장합니다. 하와는 선악과를 보며 먹음직스럽고, 보암직스럽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여겼습니다. 마귀의 유혹은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는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이 패턴은 지금도 동일합니다. 시대는 변했지만, 마귀의 전략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의 실패 속에서도 소망을 주셨습니다.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그 약속이 실제 역사 속에서 펼쳐지는 장면입니다. 여자의 후손이신 예수님과 뱀인 마귀가 광야에서 마주합니다. 이 사건은 단순한 시험 장면이 아니라, 구속사의 중요한 대결입니다. 예수님은 마귀가 제시하는 모든 방식—욕망과 자랑의 길—을 거절하십니다. 대신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길을 선택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방식입니다. 예수님은 이 승리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기초를 놓으십니다. 그리고 그 나라의 백성들을 부르십니다. 그 백성은 단지 신분만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삶의 방식이 바뀐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미 승리하신 그리스도의 승리에 참여한 사람들입니다. 그렇기에 마귀가 여전히 활동하고 있지만, 그 권세 아래 굴복할 필요가 없습니다. 믿음으로 대적할 때, 우리는 실제로 승리를 경험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2. 기록된 말씀으로 승리하신 예수님
3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마태는 마귀를 ‘시험하는 자’라고 부릅니다. 마귀는 예수님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질문이 아니라, 예수님의 정체성을 흔드는 시험이었습니다. 세례 때 하나님께서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라고 분명히 선포하셨습니다. 그런데 마귀는 그 정체성을 정면으로 부정하기보다, 조건문으로 교묘하게 흔듭니다. “네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그 능력을 증명해 보라”는 것입니다. 마귀는 예수님의 정체성을 전제하면서도, 그것을 왜곡된 방식으로 사용하도록 유혹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그 능력을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신의 필요를 위해 먼저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제네시스 GV90이 아무리 좋아도 살 수 없는 사람에게는 유혹이 되지 않습니다. 유혹은 내가 할 수 있고, 가질 수 있는 것일 때 성립합니다. 마귀는 예수님이 돌을 떡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 능력을 자신의 배고픔을 해결하는 데 사용하라고 부추긴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현실적인 유혹입니다. 하나님의 뜻보다 자신의 필요를 먼저 채우라는 유혹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마귀의 제안을 받아들여 돌을 떡으로 만드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마귀는 그 능력을 계속해서 자기 필요를 위해 사용하도록 유혹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필요를 채우는 데 집중하는 메시아로 오해받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이것은 단순히 떡을 부정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무엇이 먼저인가에 대한 선언입니다. 우리의 삶을 결정하는 것은 눈앞의 필요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의 필요를 앞세워 하나님의 뜻을 뒤로 미루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을 먼저 두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신실하게 돌보시는 분이십니다. 출애굽 광야에서도 하나님은 환경이 다 갖춰진 뒤에 말씀을 주신 것이 아니라, 말씀에 순종하며 나아가는 백성에게 일용할 양식을 공급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필요가 아니라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훗날 제자들에게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 말씀은 우리가 먹고사는 문제에 매몰되지 않도록 주신 안심의 약속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은 쉽게 본질보다 ‘더해지는 것’에 끌립니다. 포켓몬 빵 열풍 때를 떠올려 보십시오. 아이들은 스티커를 얻기 위해 빵은 버리고 스티커만 챙기곤 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가 가장 귀하기에 그것을 먼저 구하면 나머지는 더해 주시겠다는 것인데, 우리는 때로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사실은 다른 것을 더 간절히 원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원하는 것을 얻고 나면, 정작 하나님 나라의 가치는 뒤로 밀려나 버리곤 합니다. 이것이 바로 본질과 비본질이 뒤바뀐 모습입니다.
대한민국의 현대사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잘 보여줍니다. 1980년대 초 우리나라의 1인당 소득은 약 1~2천 달러 수준이었지만, 지금은 3만 달러를 훌쩍 넘었습니다. 수출 규모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성장했습니다. 우리는 과거보다 훨씬 풍요로운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깊은 공허와 불안, 정신적인 어려움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경제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경제만으로는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인간의 문제는 단순한 결핍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데서 오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평생 사람들의 즉각적인 필요만 채우는 메시아로 머무르지 않으시고, 궁극적인 구원을 이루시는 길을 걸으셨습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오해와 비난을 받으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조차 “자신도 구원하지 못하느냐”는 조롱을 들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 길을 끝까지 가신 이유는, 우리에게 잠시의 풍요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몸과 피를 내어주심으로 우리에게 가장 귀한 것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마귀는 오늘도 우리의 시선을 현실 문제에만 묶어 두어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극한의 굶주림 속에서도 말씀을 먼저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도, 어떤 상황 속에서도 말씀을 먼저 붙들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단순히 버티는 삶이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영원한 생명의 풍성함을 누리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마태복음 4장 5절과 6절에서 마귀는 장소를 성전 꼭대기로 옮깁니다. 이것이 실제 이동이었는지, 환상이었는지는 다양하게 해석되지만 중요한 것은 그 방식이 아니라 시험의 내용입니다. 앞서 예수님이 말씀을 붙드시는 것을 본 마귀는 이번에는 성경을 인용하며 다가옵니다. 시편 91편을 인용하며 말합니다.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시리니…” 그러나 마귀는 이 말씀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문맥을 제거하여 왜곡합니다. 시편 91편에는 “네 모든 길에서”라는 전제가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의 모든 여정 가운데서 보호하신다는 약속이지, 하나님을 시험하기 위해 일부러 위험에 뛰어들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신뢰의 대상이지 시험의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정말 나를 지키시는지 확인하기 위해 굳이 위험을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속에서, 그분의 보호하심은 하나님이 정하신 방식으로 경험하게 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모든 길’은 하나님을 거처로 삼고 그분의 통치 아래 머무는 자의 삶 전체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 약속은 하나님을 떠난 길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시편 1편의 말씀처럼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지만, 악인의 길은 망하게 됩니다.
이러한 마귀의 간교한 제안에 예수님은 무엇이라 하십니까? 7절을 다 함께 읽겠습니다.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예수님은 단호히 말씀하셨습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난 가운데 하나님을 의심하며 시험했지만, 참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고 온전히 신뢰하셨습니다.
8절과 9절에서 마귀는 마지막으로 예수님을 지극히 높은 산으로 데려가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주겠다.” 마귀의 이 말은 교묘합니다. 그는 마치 모든 권세가 자기에게 있는 것처럼 말합니다. 실제로 마귀는 타락한 세상 가운데 일정한 권세를 행사하고 있지만, 궁극적인 주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아담의 범죄 이후 인간은 죄와 사탄의 영향 아래 놓이게 되었고, 세상은 왜곡된 상태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죄를 해결하시고, 사탄의 권세를 깨뜨리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말합니다. “그 길 가지 않아도 된다. 고난 없이 영광을 얻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사탄의 유혹입니다. 십자가 없는 승리, 고난 없는 영광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의 삶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사람들은 더 빨리 성공하고, 더 쉽게 얻기 위해 타협의 유혹을 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방식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과하여 영광에 이르게 하십니다. 십자가 없는 영광은 결국 가짜일 뿐입니다. 사탄은 우리에게 세상의 영광을 줄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우리를 얽매이게 하고 무너뜨립니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는 자는 어떤 권력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자유와 권세를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 파렴치한 제안에 대해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예수님은 더 이상 상대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귀를 완전히 물리치셨습니다. 첫 사람 아담은 유혹 앞에서 무너졌지만, 두 번째 아담으로 오신 예수님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으셨습니다. 결국 기세등등하던 마귀는 더 이상 대적하지 못하고 떠나갔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 세상 어디에서도 배울 수 없는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엿보게 됩니다. 마귀의 시험은 특히 우리가 연약하고,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 서 있을 때 더 강하게 찾아옵니다. 고3 수험생활, 편입, 취업, 결혼과 같은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들이 바로 영적 전쟁의 최전방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역시 생사의 갈림길과 같은 상황에서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이때 “당장 급한 현실 문제부터 해결하고 나중에 신앙생활을 잘하겠다”는 생각이 들 때, 우리는 이미 첫 번째 시험의 유혹에 기울어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기보다 하나님을 믿을 만한 분이지 시험하고자 한다면 두 번째 시험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또 세상의 부와 명예를 얻기 위해 타협하려 한다면, 세 번째 시험의 유혹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시험의 때는 나의 영적 상태가 드러나는 순간이지만, 동시에 내 삶의 방향을 바로잡을 수 있는 중요한 기회이기도 합니다. 이때 어떤 선택을 하느냐가 앞으로의 인생을 결정짓기 때문입니다.
혹시 지금 인생의 중요한 갈림길에 서 계십니까? 그렇다면 더욱 깨어 기도하십시오. 지금이 시험의 때일 수 있으며, 특별히 우리가 연약해지기 쉬운 순간입니다. 만약 과거의 시험에서 타협하고 넘어졌다면, 너무 낙심하지 마십시오. 우리 주님은 다시 일어설 기회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다만 내가 마귀의 제안을 받아들였음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겸손히 회개해야 합니다. 이를 외면한다면 불신과 원망의 굴레에 계속 묶일 위험이 있습니다. 반대로 시험을 이겨내고 믿음을 지키셨습니까? 그렇다면 자만하지 마십시오. 마귀는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는 말씀처럼, 우리는 매 순간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승리하셨음에도 십자가의 순간까지 유혹을 받으셨던 것처럼, 과거의 승리가 오늘과 내일의 승리를 자동으로 보장해 주지는 않습니다.
마귀를 이길 수 있는 길은 기록된 말씀을 붙드는 것입니다. 거짓은 오직 진리로만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성경을 읽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마귀는 말씀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문맥을 왜곡하고 일부만 취하여 진리를 흐립니다. 아담도 이 방식에 속아 넘어갔습니다. 역사 속에서도 잘못된 해석으로 인해 많은 오해가 생기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대할 때 자의적이고 참신한 해석에 빠지기보다, 성경 전체의 흐름과 교회의 건강한 해석 전통 속에서 겸손히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말씀의 바른 맥락 안에 머무는 것, 그것이 우리를 지키는 길입니다.
인생의 진정한 승리는 연봉을 높이거나 세상적 성공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마귀의 시험 가운데서도 끝까지 하나님의 자녀로서 믿음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당장의 현실문제와 눈앞의 필요를 채워주는 떡만을 추구하는 삶이아니라,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을 시험하려 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며 살아가길 기도합니다. 고난과 십자가 없이 영광을 주겠다는 달콤한 유혹을 물리치고, 힘들더라도 십자가와 고난을 통과하신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런 한해 성경읽기와 가르치기를 통해 우리 안에 말씀의 은혜가 풍성하여 마귀의 그 어떤 시험도 능히 이겨내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기도합니다. 더 나아가 말씀을 몰라 방황하고 마귀의 꾐에 빠져 고통하는 양들과 자녀들을 하나님이 주신 말씀으로 도와 살리는 한 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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