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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16년 요한계시록 특공대 1강(계시록 1장)2017-03-14 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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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록 1장

1장 1절부터 8절은 프롤로그입니다. 이 부분은 단순한 인사말이 아니라 요한계시록 전체를 이해하는데 아주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1절을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함은 예수 그리스가 주도하는 계시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계시라는 의미입니다. 계시는 감춰졌던 것이 드러나 알려진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계시록을 영원히 풀지 못할 미스테리, 다빈치코드처럼 생각한다든지 온갖 억측만을 하며 무슨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서처럼 여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무수히 등장하는 구약적 그림과 상징 언어들을 건전한 이성과 성경적 상식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무조건 적용을 하려는 성급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올바른 해석이 전제가 되지 않으면 올바른 적용도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다시 돌아가서 계시의 주체자는 예수님입니다. 계시의 내용도 예수님이 핵심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말고 이만희나 문선명 등 다른 교주들을 가리킨다고 떠벌이는 사람이 있다면 1절 첫 소절서부터 위반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우린 22장까지 가면서 이 한 가지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계시록은 예수님이 주도하신 역사이며 예수님이 드러나는 성경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을 더 깊이 배우고 이해하고 그 분에 대한 믿음 속에서 관계성이 증진되지 않고 이상한 신비주의자가 되어버린다면 그것은 계시록을 잘못 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목자님들은 바로 대할 준비가 되셨습니까? 예수님을 더 깊이 만나는 특별새벽기도 요한계시록 특공대 시간이 되길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곧 예수님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천사들을 통해 요한에게 알게 하신 내용입니다.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이란 표현이 중요한데 이는 ‘반드시 되어져야만 하는 일들’이란 말입니다. ‘반드시’라는 말은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이 ‘사마리아로 통과하셔야 하겠는지라’ 말씀할 때의 그 must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 단어와 동일한 단어입니다. 그러면 반드시 되어져야만 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 나라의 도래입니다. 계시록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완성을 다루고 있습니다. 세상은 하나님 나라와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어제도 터키 이스탄불에서 IS에 의한 것으로 추정되는 테러로 1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11살 어린이가 아버지를 칼로 찔러 살해했습니다. 그 어디를 둘러봐도 하나님의 나라와 상관이 없이 세계는 흘러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반드시 완성됩니다. 그것이 반드시 속히 일어나리라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알려주신 일입니다. 

요한은 이를 알았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그는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합니다. 선지자는 자기 생각을 얘기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가 목격한 것을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전달하는 사람입니다. 선지자는 다른 말로 예언자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이 예언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사람들이 가장 오해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예언을 미래의 일을 말하는 것이라고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국어사전에 그렇게 나와 있고 예언이란 한자말도 그런 뜻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예언하는 자들은 다 돌로 쳐 죽이라고 했는데 어떻게 된 것입니까? 예언은 미래를 내다보고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번역의 한계요 외국어의 한계입니다. 성경에서 사용되는 예언이란 단어는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저장했다가 꺼내어 전하는 것입니다. 물론 미래에 관련된 말씀도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와 현재와 관련된 말씀도 있습니다. 19절이 예언에 대해 가장 잘 이해시키는 말씀입니다.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요한 계시록은 미래의 일만을 기록한 책이 아닙니다. 오히려 과거 이야기 그리고 현재 이야기가 더 많습니다. 굳이 미래의 이야기라 한다면 17장 이후의 내용이며 이는 전체의 20%도 안 됩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을 통해 미래의 일을 예언하려고 한다거나, 장차 일어날 일을 신탁을 받은 양 선견자처럼 말하는 것은 이단입니다. 우리는 다 예언자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나는 너희가 다 방언을 말하기를 원하지만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한다’고 하였습니다. 성경 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말씀과 메시지를 마음에 잘 담았다가 적절하게 드러내어 선포하는 은사가 있는 사람이 되길 원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시대 요한처럼 쓰임받는 진정한 예언자가 되길 기도합니다. 

다시 3절로 돌아가서 누가 복이 있다고 말하였습니까?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지키는 자입니다. 당시에 모든 사람이 읽을 수 없었습니다. 글자를 모르는 것도 있지만 성경이 두루마리로서 교회에 한 권만 있기에 한 사람만이 낭독할 수 있었습니다. 나머지는 다 듣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낭독하면 가만히 듣는 것입니다. 왜 듣냐 하면 지키기 위해 듣는 것입니다. 우리 말 성경에는 듣는 자와 지키는 자를 구별해서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원어로 보면 ‘지키기 위해 듣는’ 이런 식으로 나옵니다. 듣는 것은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듣는 것과 지키는 것을 따로 구별하는 것이 유대인들 사고방식에선 없었습니다. 듣는 데 안 지킨다는 것은 듣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마치 믿음이 있는데 행함이 없으면 믿음이 없는 것이라고 야고보서에서 말한 것과 같습니다. 들음과 믿음은 반드시 실천을 포함시키는 단어입니다. 우리가 이 시간 듣습니다. 우린 정보를 취하려고 듣는 것이 아닙니다. 지식적 과시를 위해 듣는 것이 아닙니다. 우린 지키려고, 요한처럼 예언자요 증거자로 살고자 듣는 것입니다. 

4절을 보십시오.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한다고 말합니다. 이 말이 요한계시록에 대한 해석을 독단주의에 빠지지 않게 해주는 아주 중요한 단서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앞에서 보아온 것처럼 계시서이며 예언서입니다. 이런 면에서는 구약의 다니엘서와 같습니다. 사실 요한계시록은 다니엘서와 내용이 비슷한 부분이 많고 거기서 인용한 말씀도 많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서는 편지는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은 편지입니다. 편지는 발신자와 수신자가 있고 발신자와 수신자는 서로 아는 사이이며 관계성이 있고 서로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는 사이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편지라는 장르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요한이 무슨 말을 하는지 수신자들은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그가 사용하는 말, 상징, 숫자 등을 다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144,000이 무슨 뜻인지 이해합니다. 666이 무슨 말인지도 압니다. 그것을 신비스러운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은 우리이지 그들이 아닙니다. 그때 가서 자세히 이야기하겠지만 전에 666을 바코드로 이해한 적도 있고 몸에 심는 어떤 칩이라며 요즘은 베리칩이란 말이 신자들 사이에서 많이 돌고 있습니다. 그것이 절대로 될 수 없는 이유는 편지의 발신자와 수신자가 바코드나 베리칩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시대에 살고 있었던 사람들이란 점입니다. 2000년 후에 생겨날 베리칩을 생각하며 편지한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들이 지금 겪고 있는 문제를 위해 편지를 한 것이지 2천년 후에 살아갈 우리를 위해 편지를 한 것이 아닙니다. 이 상식적인 이야기를 너무나 간과하는 일이 벌어져 많은 오해와 이단을 낳고 있습니다. 

수신자는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성경을 공부하면서 항상 생각했던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의 1차 독자가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쓰인 그 시대 상황과 동떨어져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시대의 배경, 그리고 수신자들이 처했던 상황을 알아야 본문을 바로 해석하게 되고 해석이 바로 되어야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나에게 바로 적용이 되는 것입니다. 바른 해석 없이 바른 적용 없습니다.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가 당면한 어려움이 있기에 요한은 편지를 한 것입니다. 그들은 크게 두 가지의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로마의 핍박과 동족인 유대교인들의 핍박이었습니다. 85년에 얌니아 신조가 만들어지면서 기독교인들은 그 전보다 더 심한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강요되는 황제숭배 속에서 내일을 알 수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일제 강점기 때 신사참배보다 더 심해서 황제를 숭배하지 않으면 바로 죽음이었습니다. 살려면 황제를 신으로 숭배해야 했습니다. 팍스 로마나는 영원할 것 같았고 로마제국은 결코 무너질 것 같지 않았습니다. 마치 일제 강점기 때 친일을 한 사람들에게 왜 친일을 했냐고 물었을 때 그들의 입에서 나온 한결같은 말이 있었습니다. “일본이 망할지 몰랐어. 일본이 망할 것을 알았다면 친일을 했겠느냐”입니다. 사실 로마는 일본처럼 빨리 망하지 않습니다. 그 후로도 500년을 더 갔을 정도로 짱짱했습니다. 현실이 이러한데 피부에 와 닿는 도움을 주지 않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그 믿음을 지킬 수 있을까요? 이런 절박한 생사의 갈림길에 놓인 그들에게 똑같이 밧모섬 깊은 땅 속 감옥에서 생사를 드나드는 요한이 쓰는 편지입니다. 우린 그 절박함과 괴로움을 안고 편지를 한 줄 한 줄 써 내려갔을 요한과 또 한 줄 한 줄 눈물을 흘리며 읽고 들었을 일곱 교회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요한계시록을 다빈치코드나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서가 아닌 성경으로 보게 됩니다. 

일곱 교회에게 편지한다는 것은 이 편지가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를 위한 것임을 의미합니다. 내가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야지 하며 개인의 영성이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운명을 같이 할 것인가, 우리가 이 종말의 때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런 공동체의식을 갖고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식을 가지면 내 주위를 둘러보게 될 것입니다. 나도 잘 해야 하지만 우리가 같이 잘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질 것이며 나만을 위한 기도가 전체 공동체를 위한 기도로 변할 것입니다. 저는 가끔 자신과 자신의 가족만을 위한 기도제목에서 떠나지 못하는 분들의 기도를 접할 때 서글픕니다. 요한은 감옥에서도 일곱 교회를 생각하는데 우린 왜 내 가정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할까요? 
요한은 일곱 교회에게 무엇을 바라보도록 합니까? 미래에 펼쳐질 일을 바라보도록 할까요? 하늘나라를 바라보도록 할까요? 가장 먼저 예수님을 바라보도록 하며 이는 계시록 내내 계속되는 내용입니다.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이십니다. 그에겐 보좌가 있습니다. 이는 통치권을 상징합니다. 그 보좌 앞에는 세상을 관장하는 일곱 영, 일곱 천사가 있습니다. 그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부활하신 분이시며 임금들의 머리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셨습니다. 이 하나님께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7절을 보십시오. ‘볼지어다’는 ‘여러분이여 여길 주목해보세요’하는 말입니다. 힘들고 어렵지만 여길 보십시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십니다. 구름은 구약 성막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권능과 왕권을 갖고 오십니다. ‘오신다’는 것은 미래적으로만 올 것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현재형인데 지금도 오신 분이십니다. 모든 사람이 그를 봅니다. 찌른 자도 봅니다. 그리고 애곡합니다. 자신의 잘못 때문에 울고, 마지막 결국이 어떠한지 보면서 안타까워 울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인간들끼리 이 종교가 옳다 저 신앙이 옳다 내가 옳다 네가 틀리다며 옥신각신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심으로 모든 시비와 선악에 대해서 교통정리가 됩니다. 

그는 알파요 오메가이십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십니다. 역사의 주관자이십니다.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라는 말이 또 한 번 등장하는데 이는 구약의 여호와의 이름의 뜻과 통합니다.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9절부터는 서론입니다. 본격적인 편지의 시작입니다. 성령에 감동되고 큰 음성을 듣고 이 편지를 일곱 교회에 쓰게 되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큰 음성으로 편지를 쓰도록 돕고 있는 분이 누구입니까? 역시 예수님이십니다. 그에 대한 요한의 묘사는 그 당시 그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묘사였을 것입니다. 그는 그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처럼 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가장 중심이 되는 예수님의 모습은 일곱 촛대 사이를 거니시고 오른 손에 일곱 별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일곱 교회와 일곱 교회를 인도하는 지도자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쓰라고 하시는 내용은 일곱 교회에 관련된 내용입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사실을 하나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요한계시록은 일곱 교회에 관련된 내용이지 세상의 끝 날에 관련해서 세계 도처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알려주고자 하는 서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교회에 있습니다. 그들이 어떠한 상태에 있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떤 일을 만날 것이며 어떤 길을 가야 하는지 거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일곱 교회는 그 시대의 대표 교회이면서 동시에 이 시대 우리가 속한 신앙공동체를 대변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내일, 모레 그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장을 정리하겠습니다. 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낸 책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 하나님이 알려주시는 일을 기록한 책입니다. 아시아 일곱 교회와 소통하며 그 상황 속에서 읽혀야 하는 책입니다. 읽고 들어서 지키기 위해 기록된 책입니다. 구름을 타고 오시는 예수님의 관심은 그 오른손에 들린 일곱 교회에 있습니다. 그의 피로 죄에서 해방된 우리가 어떤 삶의 현장에 있으며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22번의 특공대를 통해 깨닫고 순종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