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시록 2장
2,3장은 서론입니다. 4장부터가 본론입니다. 그러나 1장 3절에서 말씀한 것처럼 듣고 지켜야 할 내용의 핵심은 이 서론 부분에 있습니다. 본론에 가서는 일곱 교회에게 어떻게 하라고 명하시는 것이 없습니다. 이 일곱 교회는 요한이 담당했거나 섬겼던 교회라는 설도 있습니다. 특별히 그들에게 애착을 갖고 편지합니다. 그들에게 주시는 주님의 메시지가 어떠합니까?
첫째 에베소 교회에 주는 메시지. 에베소교회는 예루살렘, 안디옥 교회와 함께 3대교회이며 소아시아에서 가장 큰 교회였습니다. 우린 에베소 교회가 친숙합니다. 바울이 두란노 서원에서 3년 반동안 말씀을 강론하며 제자들을 세운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에베소교회는 많은 걸출한 지도자들의 손길이 머문 교회입니다. 디모데, 요한이 시무했었다고 보여지고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도 있었다고 기독교 전승은 전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많은 손님들, 시니어 선배들이 머물던 곳이고 많은 기도지원을 받은 곳입니다. 저는 에베소 교회를 생각할 때 종로센터가 생각이 납니다. 전요한 선교사님을 비롯해서 전 세계 시니어 선교사님, 목자님들이 머물며 기도하며 말씀으로 섬겨주신 곳입니다. 그래서 종로를 본부라고 하기도 하며 종로가 가장 큰 센터이기도 합니다. 또한 종로 안에 있는 동역자님들도 당시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과 매우 흡사합니다. 2절을 보면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인내를 안다고 말합니다. 이는 큰 교회고 손님도 많이 들락날락 거리니 그들이 얼마나 수고롭게 섬기는 일을 많이 했는가 하는 것을 알려줍니다. 또한 그들은 영적 분별력이 탁월해서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영적인 분위기를 흐리고 복음정신에 위배되는 일을 하는 사라들을 가차 없이 잘라냈습니다. 자칭 사도라 하면서 거짓 선생 짓을 일삼는 자들을 골라내었습니다. 결코 게으르지 않았고 주님 이름을 위하여 견딘 것을 내가 안다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에베소가 어떤 곳입니까? 행19장에 나오지만 아데미 여신을 숭배하며 천명이 넘는 창기 일을 하는 여사제들이 있던 곳입니다. 퇴폐음란 매음굴이 많았습니다. 이런 곳에서 부지런하게 신앙생활을 했으면 인정해줘야 합니다.
그런데 4절을 보면 너를 책망할 것이 있다고 말합니다.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말합니다. 버렸다는 것은 완전히 단절된 상태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은 처음 사랑, 곧 신앙 초창기에 행하던 하나님에 대한 사랑, 그리고 형제에 대한 사랑을 버리고 이젠 형식만 남았다는 것입니다. 아! 그들을 통해 사랑과 열심을 내는 신앙이 항상 비례하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본질이 문제가 있을 때 외형적인 것으로 커버하려고 하는 인간의 무의식이 작동될 수도 있음을 보여줍니다. 사람은 드러나는 행위로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드러나는 기도생활, 소감생활, 양치는 생활로 판단하는 것이 다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드러나지 않는 사랑의 없음으로 책망하십니다.
그러므로 5절을 보면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고 말합니다. 어디서 문제가 되었는지를, 원인이 무엇인지를 잘 찾아보고 그 문제의 원인을 해결하고 초심으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누구든지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형제를 순수하게 사랑했습니다. 저도 심장을 식기 전에 드리겠다고 사랑고백을 한 적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그렇습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 마음은 없이 몸만 관성적으로 움직입니다. 겉으로 보면 충성일 수 있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엔 책망 받을 일입니다.
처음 행위, 처음 사랑을 가지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촛대는 교회를 상징합니다. 이것을 옮긴다는 것은 다시는 에베소교회가 교회 역할을 못하도록 하겠다는 것입니다. 교회로서 자격을 상실하고 영적으로 황폐한 곳이 되어 관광지나 백화점 홀로나 사용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교회로서의 사명을 잃어버리고 신자가 신자로서의 소명을 잃어버리면 그것보다 더 비참한 일이 어디 있을까요? 게으르고 수고하지 않아서 이 일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사라지고 형식만 남을 때 그렇게 됩니다. 그러므로 회개하여 사랑의 공동체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6절을 보면 그들은 여전히 훌륭한 모습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했습니다. 주님도 이것을 미워한다고 동조해주셨습니다. 니골라당의 행위는 세속주의 신앙, 은혜의 이름으로 방종으로 치닫는 리버럴한 신앙을 의미합니다. 이 좋은 것들은 지키면서 처음 사랑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기는 그에게는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 곧 영생을 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둘째 서머나 교회에 주는 메시지. 앞에서 에베소 교회를 얘기하실 땐 예수님을 표현할 때 오른 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를 거니시는 분으로 말했습니다. 이는 교회의 주권자이신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여기서는 처음이요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로 예수님을 말합니다. 그들에게 부활의 능력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믿음이 무엇보다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9절에서 ‘내가 안다, 다 안다’는 말을 하십니다. 네 환난과 궁핍을 안다고 하십니다. 환난과 궁핍에 있을 때 하나님도 모르고 동역자들도 모른다고 생각하지만 주님은 안다고 하십니다. 겉으로는 궁핍하지만 실은 부요한 자인 것을 안다고 하십니다. 내면은 풍성하고 윤택한 것을 내가 안다고 하십니다. 겉으로 부요한 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전혀 부요의 부자도 되지 못합니다. 주님은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안다고 하십니다. 그 비방 속에서 얼마나 힘든 세월을 보냈는지 아신다고 하십니다. 그들이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고 하십니다. 이제 혈통적 아브라함의 자손을 높이 쳐주고 하던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교회를 핍박하는 그들은 사탄의 무리들입니다.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아신다면 그들의 고통을 경감해주신다는 것입니까? 10절을 보면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지금까지도 환란을 당했는데 또 고난을 당한다고 하십니다. 고난을 당하는데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심지어는 마귀가 그들 가운데서 몇 명을 옥에 던져 하나님이 나를 정말 버리셨다는 불신이 들 정도로 시험 받게 하신다고 하십니다. 왜 다른 교회에 없는 어려움을 서머나만 받아야 하는 것입니까? 우린 그 하나님의 뜻을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헤아려진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수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린 작년 욥기를 하면서 배웠습니다. 욥이 자신을 왜 고통 중에 두시고 이런 오해와 모욕을 받게 하는지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모르는 것이 정상인 것을 우리는 배웠습니다. 하나님이 두시는 수가 우리 눈에 보인다면 하나님이 나보다 하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몇 천 배 고수이십니다. 그렇다면 그가 놓으시는 수가 보이지 않아야 정상입니다. 나중에야 그것이 신의 한 수였다고 고백만 할 뿐입니다.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환란을 당합니다. 그러나 거기엔 작정하신 기간이 있습니다. 십일이라고 표현이 나옵니다. 십 일은 짧지만 완전한 환난을 의미합니다. 앞에 있을 영광에 비한다면 짧은 게 맞지만 그들을 연단하는데 완전한 기간입니다. 그 십일 환난을 받으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고 말합니다.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은 죽기까지 신앙의 정절을 지키라는 말입니다. 변사또의 수청을 들라는 요구를 끝까지 거절하며 이몽룡을 향한 정절을 지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어린양 되신 예수님의 신부이기 때문입니다. 11절을 보면 이기는 자는, 곧 끝까지 수절을 하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는다, 곧 영혼의 구원을 얻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셋째 버가모 교회에 주는 메시지. 13절을 보면 주님은 네가 어디에 사는지를 안다고 하십니다. 그들이 거처하는 곳은 사탄의 권좌가 있는 곳입니다. 이는 아마도 제우스 신상이 서 있거나 황제 숭배의 요람이 되는 지역의 한 가운데에 교회가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평양 김일성 김정일 부자의 묘역인 금수산 궁전 한 가운데에 교회가 있거나 IS가 점령하고 있는 시리아 북부 한 복판에 교회가 있다는 것과 같은 상황입니다. 이 얼마나 무섭습니까? 실제 우리 수단 UBF가 그러합니다. 2년 전에 수단의 개척 목자 중의 한 사람이었던 리더가 살해당한 일이 벌어졌었습니다. 그런데 버가모 교회는 예수님의 이름을 굳게 잡고 충성된 증인 안디바 목자님이 순교를 당하는 때에도 흩어지지 않고 믿음을 지켰습니다. 매우 훌륭합니다. 이것만으로도 흡족해보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책망할 것이 있다고 하십니다. 교회 안에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다고 하십니다. 발람의 교훈이란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우상의 제물을 먹고 행음을 하도록 한 혼합주의의 교훈입니다. 니골라 당하고도 비슷합니다. 세속주의, 물질주의가 교회 안에 자리 잡도록 방치했습니다. 외부적으로는 순교를 각오하며 일사각오의 정신으로 나아가는 그들이 내부적으로는 매우 허술했습니다. 같이 고생하고 있으니 눈 감아 준 것입니까?
그러므로 회개하라고 말씀합니다. 내가 죄 지은 것이 아닐지라도 내가 속한 교회 안에 발람과 니골라가 있으면 나도 죄를 지은 것입니다. 침묵으로 허용한 것이고 다른 사람에게 걸림돌이 되도록 방조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해야 합니다. 나는 깨끗하다고 뒤로 물러서서는 안 됩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겠다고 하십니다. 이는 말씀으로 정죄하고 심판하겠다는 의미입니다. 그 정죄하는 말씀 앞에서 설 자가 없습니다. 그때 이기는 자에겐 감추었던 만나를 준다고 하십니다. 이는 하나님 나라의 생명의 양식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흰 돌을 줄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우승자에게 주는 트로피와 같은 것입니다.
넷째 두아디라 교회에 주는 메시지. 그들도 훌륭한 점이 있고 이를 먼저 알리고 계십니다. 그들은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가 출중했습니다. 그것이 갈수록 성장하여 처음 믿음 생활을 시작할 때보다 훌륭해졌습니다. 한마디로 내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좋은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책망할 일이 있다고 하십니다. 자칭 선지자라고 하는 여자 이세벨을 용납하였다고 말합니다. 교회는 죄인을 용납해주는 곳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꾀어 행음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할 정도로 용납하는 곳은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감이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거짓 선지자 한 명 정도 용납한다고 이 교회가 무너지겠느냐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당신의 피로 사신 바 된 교회가 행음과 우상 제물에 더럽혀지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자기의 음행을 회개하고자 하지 아니한다고 하십니다. 아주 독합니다. 보통 음행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도 전체의 분위기가 그것이 아니면 수그러드는 것이 보통인데 그는 그러지 않고 완강히 버텼습니다. 주님은 친히 간섭하십니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와 함께 간음하는 자들도 회개하지 않으면 다 큰 환난 가운데 던져버리겠다고 하십니다. 그의 가장 사랑하는 대상인 자녀를 죽이겠다고 하십니다. 이로서 모든 교회가 하나님은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것을 알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아직도 사탄의 깊은 속을 모르고 순진하게 속아 넘어가는 사람들에게 이를 말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다른 말은 할 것이 없다고 하십니다. 25절을 보면 다만 신앙의 순수성, 복음정신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고 하십니다. 이기는 자에게는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겠다고 하십니다.
2장에 4개의 교회가 나오고 3장에 나머지 3개의 교회가 나옵니다. 3장까지 다 살펴봐야 하지만 우리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점들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주된 관심은 교회이지 일반 세상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노아를 부르셨을 때 그 한 사람에게 지대한 관심을 갖고 계셨습니다. 아브라함 한 사람을 부르셨을 때 그 한 사람을 25년이 넘게 일대일로 지속적으로 키우셨습니다. 그들은 전부 교회의 조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광야에서의 200만의 이스라엘은 구약의 교회를 상징합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인도하시고 가나안으로 들이신 역사적 사건도 교회에 관심을 갖고 계신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교회 바깥에 있는 정치가들을 판단하고 사회의 비리를 고발하며 문화의 성숙을 위해 힘을 기울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교회가 교회다워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불꽃같은 두 눈은 하나님이 부르시고 세우신 신앙공동체가 제대로 가고 있는지를 항상 체크하십니다.
둘째는 모든 교회가 그 상황과 직면한 문제에 있어서 조금씩 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언급했던 서머나 교회는 첫 번째 언급했던 에베소 교회에서 80킬로 정도 북쪽에 위치한 교회입니다. 그런데 환경은 에베소와 완전히 반대였습니다. 그들은 가장 가난하고 시련이 많은 교회였습니다. 에베소교회는 부유한 교회였습니다. 맨 뒤에 나오는 라오디게아 교회도 부요했습니다. 앞으로 3장에 등장하는 교회를 더 살펴보겠지만 같은 소아시아에 있지만 그들의 상황과 직면한 문제가 조금씩 다 다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인 모임이지만 그들은 다릅니다. 이는 우리 모임도 생각나게 해줍니다. 100명이 넘는 센터의 문제가 다르고 개척센터의 문제가 다릅니다. 대형센터에서도 종로와 관악과 광주와 안암과 연희가 서로 다릅니다. 종로 안에서도 종로1,2부가 서로 다릅니다. 우리 안에서도 국민대와 상명대가 다릅니다. 더 자세히 들어가면 요회마다도 다릅니다. 각 교회를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이처럼 다양합니다. 잘하는 점이 다르고 못하는 점도 다릅니다. 우린 다양함을 인정하고 비교하지 말아야 합니다. 서머나 교회가 에베소 교회와 인간적으로 비교를 하기 시작했다면 고난에 담대히 맞설 수 없을 것입니다.
셋째, 주님의 공통된 메시지의 방향이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우린 4개 교회만 살펴봤는데 전적으로 부패한 교회는 없었습니다. 잘한 점, 잘난 점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눈감아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한두 가지라도 잘못되는 것이 있으면 회개하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잘하고 있는 나머지 것들을 다 잠식해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실제 이런 일들이 교회사 속에서 많이 벌어졌습니다. 우리는 종말의 때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종말은 예수님의 초림으로 시작되었고 그의 재림으로 완성이 될 것입니다. 이 속에서 우리가 할 일은 회개하는 것입니다. 회개를 매일 가슴을 부여잡고 눈물을 흘리는 것으로 생각해선 안 됩니다. 오히려 그것이 가짜 회개일 수도 있습니다. 진정한 회개가 무엇입니까?
이것이 가장 중요한 2,3장의 메시지인데 그것은 ‘이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네 번째 제목은 ‘교회는 이기는 자들이 있는 곳입니다’로 잡습니다. 일곱 개 교회에 반복되는 말씀은 회개와 ‘이기는’이란 단어입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회개는 5번 등장하지만 ‘이기는’은 일곱 번 다 등장합니다. ‘이기는’이란 단어는 전쟁터에서 쓰이는 용어라고 합니다. 싸워서 이겨야 합니다. 이 단어를 통해 만들어지는 요한계시록의 큰 그림이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는 전투하는 교회라는 사실입니다. 우린 영적 전투의 현장에 있는 병사들이란 사실입니다. 요한계시록의 결론이기도 하지만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교회는 전투하는 교회요 승리한 교회입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한 핵심입니다. 앞으로 다시 돌아가서 무엇을 이겨야 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사랑을 잃고 형식주의로 나아갔습니다. 진리는 있지만 사랑이 없습니다. 거룩은 있지만 화평이 없습니다. 처음 사랑으로 가지 못하도록 막고 계속 드라이한 형식주의자로 남이 있도록 유혹하는 사탄과 싸워 이겨야 합니다. 서머나 교회는 환난과 궁핍 속에 살았는데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하는데 좀 쥐구멍에 볕 뜰 날이 있어야 하는데 또 고난입니다. 그러면 피하고 싶습니다. 고난을 피하도록 유혹하는 사탄과 싸워 이겨야 합니다. 버가모 교회는 죽음도 이기는데 발람과 니골라의 교훈에게 밀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발람과 니골라의 교훈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합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다 좋은데 행음과 우상의 제물을 용납하여 거기에 미혹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침상 채 다 던지시기 전에 이세벨과 싸워 이겨야 합니다. 이기기까지 싸우는 것, 그것이 회개입니다. 춘향이가 몽룡 서방님이 오시기까지 변사또의 회유와 강압을 싸워 이겨내는 것, 그것이 예수님의 신부된 교회가 할 일이며 진정한 회개입니다.
오늘날 이러한 회개가, 이러한 싸움이 우리 가운데서 벌어지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잘 된 일입니다. 서로 응원해줍시다. 그런데 혹 어디를 봐도 이런 싸움과 이김이 보이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언제 하나님이 우리와 싸우는 우리의 대적자가 되어 오실지 모릅니다. 이것이 종말의 때에 이뤄지는 일입니다. 세상을 심판하시기 전에 먼저 우리 교회가 심판을 받으며 그 앞에서 정결하게 이뤄지는 일이 하나님의 경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상을 받아야겠습니까, 벌을 받아야겠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이기는 자로 사느냐에 달렸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