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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16년 요한계시록 특공대 3강 (계시록 3장)2017-03-14 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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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록 3강

우리는 2장에서 4개의 교회를 향한 주님의 메시지를 들었습니다. 그들에겐 외적인 유혹이나 환난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통해 그들의 문제가 드러났고 주님은 이를 회개하도록 하셨습니다. 3장에 등장하는 3개의 교회는 2장에 등장했던 교회들만큼 시련의 강도가 크지 않습니다. 아니, 사데 교회와 라오디게아 교회는 외적인 환난이 없는 것으로 나옵니다. 그들은 가장 복 받은 교회들이었을까요? 

첫째, 사데 교회에게 주시는 주님의 메시지. 1절을 보면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말씀한다고 하십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앞에서도 그들을 안다고 하셨는데 여기서도 3개의 교회 전부 ‘네 행위를 안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불꽃같은 눈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촬영하는 CCTV나 블랙박스도 사각지대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엔 사각지대가 없습니다. 우리의 행위를 아시며 그 중심을 아십니다. 사람들은 보이는 것이 다인 줄 알지만 하나님은 진실을 아십니다.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졌으나 실은 죽은 자라고 하십니다.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졌다는 것은 ‘살아있네, 살아있어’ ‘여전하구만’ 하는 말처럼 끄떡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과거의 명성 그대로 아직도 좋은 평판을 유지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사데 교회는 유명했던 시절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다른 교회들로부터 인정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보실 때 그것은 껍데기뿐이었습니다.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곧 이름뿐이라는 것입니다. 명목상의 신자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는 죽었습니다. 

과거의 명성과 사람의 평판이 신앙생활의 가장 큰 독초가 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필름 카메라 시절 코닥의 명성은 대단했습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누린 영화에 취해 자신들을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디지탈 카메라가 등장해도 필름 카메라를 대체할 수 없을 것으로 확신했습니다. 그들은 시장의 흐름을 무시하고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한 순간에 세계 기업사에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기업들이 기업 성장의 가장 큰 장애물로 과거의 명성을 꼽고 있고 이런 명성 지우기에 힘쓰고 있습니다. 이는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UBF종로센터라고 하면 본부센터, 서울개척센터, 세계선교의 시온성 등으로 표현합니다. 국제수양회에 가서 종로2부에서 왔다고 하면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우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우리는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진 자들입니다. 그런데 정말 살아있습니까? 이름만 그렇고 실상은 죽은 자로다 하는 주님의 말을 듣지는 않을 자신이 있습니까? 

사데는 현재 터어키인 루디아의 수도였습니다. 염직 염색 산업이 발달하고 양털과 금모래가 많이 생산된 매우 부유한 도시였습니다. 거기에다가 고지대에 위치하고 있어서 그 어떤 나라도 쉽게 정복할 수 없는 도시였습니다. 천연자원과 지정학적인 특별한 복을 받았습니다. 외적인 시련이 없으니 그들은 평안한 생활을 하였고 사치를 즐기는 삶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인정해주고 특별한 문제도 없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나 주님의 평가는 죽었다는 한 마디입니다. 앞의 어느 교회에게 죽은 자라는 말을 하셨습니까? 차라리 ‘죽일 놈’이라는 소리를 듣는 것이 낫지 ‘죽은 자’라는 소리를 듣는 게 낫겠습니까? 

주님의 방향이 무엇입니까? 2절을 보면 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고 하십니다. ‘일깨우라’는 것은 시간이 없으니 정신을 차리라는 것입니다. ‘남은 바 죽게 된 것’이란 말은 거의 다 죽어가고 있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을 굳건하게 하라는 것은 마치 장작개비의 불씨가 거의 다 꺼져서 매우 희미해져 있는데 이것을 빨리 불어서 다시 키우라는 것입니다. 그 죽어가고 있는 것은 구원의 은혜이며 복음신앙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 앞에서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다고 말합니다. 자기의 배만 만족시키며 살았지 하나님 앞에서 특별한 영적인 투쟁을 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3절을 보면 네가 어떻게 받았고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고 하십니다. 이는 과거에 구원을 어떻게 받았고 부르심을 어떻게 받았는지 생각하고 그것을 다시 붙들고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만일 속히 이 일을 하지 않으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겠다고 하십니다. 도둑이 하는 일은 세간을 순식간에 훔쳐가는 것입니다. 그의 생명, 그의 부, 그가 누리고 있는 모든 축복들이 어느 순간에 다 홀연히 사라져버릴 것이라는 준엄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놀랍고 은혜로운 사실은 그런 사데 교회에도 남은 자가 몇 명 있다는 사실입니다. 엘리야 시대에 남은 자 칠 천이 있었듯이 어느 시대에나 의인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들이라고 말씀합니다. 옷을 더럽히지 않았다는 것은 그런 세속과 사치와 방탕에 물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에녹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매우 적은 숫자입니다. 그러나 그들을 통해 사데 교회에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4절에서 그들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여기서의 흰 옷은 승리한 자가 입는 영광의 옷입니다. 당시 로마는 전쟁에서 혹은 경기에서 승리한 사람에게 흰 옷을 입혔다고 합니다. 흰 옷을 입고 주님과 함께 한다는 것은 승리자가 금메달을 목에 걸고 경기를 주최한 그 나라 대통령과 나란히 손을 흔드는 장면을 연상시킵니다. 5절에서도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않으며 그 이름을 아버지 하나님과 천사들 앞에서 시인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삼중의 축복을 말합니다. 이것은 축복을 매우 강조하는 말입니다. 사데 교회는 죽은 자와 방불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일깨어 회개하기만 하면 희망이 있습니다. 

둘째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주시는 주님의 메시지. 7절을 보면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로 주님은 자신을 말씀하십니다. ‘다윗의 열쇠’란 천국으로 들어가게 하는 구원의 열쇠라는 의미입니다. 다윗 왕국은 하나님의 왕국을 상징하는 그림자였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구원의 문을 닫을 사람이 없고 그 문을 닫으면 또한 열 사람이 없습니다. 구원의 주도권은 주님이 쥐고 계신 것이고 어떤 성인도, 철인도, 초인도 이를 바꿀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8절에서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니 능히 닫을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구원의 문을 열어두었으니 당당하게 들어오라는 환영의 멘트입니다. 사데 교회와 달리 어떻게 이렇게 처음부터 특별한 축사를 하신단 말입니까? 

8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고 하십니다. 주님은 어떤 행위이든 정확하게 파악하십니다. 그들은 작은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작은 능력’이란 ‘거의 능력을 찾아볼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거의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정말 어디에 내놔도 쓸 데가 없어서 데려갈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실제로 빌라델비아는 가난한 도시였다고 합니다. 지진에 취약한 지반을 갖고 있었는데 한 번은 큰 지진이 일어나 모든 건물이 무너지고 살 수가 없어서 능력이 있고 돈이 있는 사람들은 살 곳을 찾아 이주해갔다고 합니다. 그러니 빌라델비아에는 이사하고 싶어도 돈이 없어서 갈 수 없는 사람들이 판자촌을 형성하고 살았습니다. 
먹고 살기도 힘든데 핍박도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그들의 신앙을 위협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지켰고 그 이름을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거처를 빼앗기고 생존권이 위협을 받아도 말씀을 지켰습니다. 

그때 주님은 놀라운 일을 이루십니다. 9절을 보면 사탄의 회당이라 불리는 유대교 모임에 속한 어떤 사람들이 빌라델비아 교회 성도들 앞에 무릎을 꿇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갑질을 하던 자들인데 오히려 항복을 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신앙을 인정합니다. 주님이 이 일이 일어나도록 역사하신 것입니다. 이를 통해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게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가난과 핍박 속에 너무나 힘들게 투쟁해야 할 때 하나님은 뜻하지 않게 불신자, 대적자들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 보이십니다. 그들이 내 앞에 무릎 꿇게 하심으로 진정으로 강한 자가 누구인지, 이렇게 사는 삶에 하나님의 가호가 얼마나 충만한지를 깨닫게 해주십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10절을 보면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한다고 하십니다. 인내하며 말씀을 지키면 주님이 그 인생을 지켜주십니다. 온 세상이 당하는 시험에서 지켜주십니다. 내가 내 인생을 지키려고 하지 않아도 됩니다. 말씀을 붙들면 주님이 내 인생을 붙들어 주십니다.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고 하십니다. 지금까지 하던 대로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고 하십니다. 빌라델비아는 지진이 일어나면 모든 건물들이 다 무너지는데 오직 신전의 기둥만 서 있다고 합니다. 기둥은 움직이지 않는 구원의 상징입니다. 그들은 이 구원의 천국에서 결코 다시 나가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셋째,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주는 주님의 메시지. 항상 처음 말씀은 주님의 자기소개입니다. 그것을 보면 그 교회에게 주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14절에서 아멘이라는 말은 진리 혹은 진실되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진실하시고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이 없으신 분이며 참된 증거자이시며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의 근원이 되시는 분입니다. 이에 반해 라오디게아 교회는 진실되지 않고 참되지 않고 정함이 없었습니다. 

주님은 15절에서 유명한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당시 라오디게아는 금융, 유통의 중심지였고 양모가 유명했고 유명한 안과의사가 있었고 의학산업도 발달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수질이 안 좋아서 히에라볼리라는 곳으로부터 온천수를, 그리고 골로새로부터 냉수를 끌어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섞이면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은 맛없는 물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배경을 가지고 은유법을 사용해 영적인 메시지를 전하십니다. 여기서 차든지 뜨겁든지 하라는 말은 안 믿으려거든 아예 믿지 말든지, 믿으려면 제대로 확실히 믿든지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차가운 것도 좋고 뜨거운 것도 좋은 것인데 분명한 신앙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하는 둥 마는 둥, 도대체 뭘 하겠다는 것인지, 장막생활을 결단했으면 사관학교에 입소한 것처럼 분명히 하고 양을 치기로 했으면 말씀을 준비하고 시간을 들여서 확실히 하라는 것입니다. 공부할 땐 공부하고 쉴 때는 팍팍 쉬어야 하는데 공부할 때도 쉬엄쉬엄 하고 쉴 때는 공부에 대한 염려에서 떠나지 못해 쉬어도 쉬는 것이 아닌 삶을 사는 분이 있습니다. 늘 쉬어도 피곤하다고 말합니다. 이런 식이기 때문입니다. 모라토리엄 증후군이란 것이 있습니다. 졸업을 했으나 사회가 두려워 과감히 나가지 못하고 안 나간다고 당장 죽을 것도 아니고 그래서 도서관에 자리를 잡고 학교 언저리를 떠나지 못하는 증상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학생도 아니고 직장인도 아닙니다. 

왜 그들이 이렇게 미지근한 신앙생활을 해서 토하여 버리겠다는 심한 말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까? 마음에 모티베이션, 모멘텀, 곧 동기부여가 없기 때문입니다. 환난이 없습니다. 부유합니다. 자극을 받을 만한 것이 없습니다. 배가 고파야 밥을 찾는데 배가 늘 부릅니다. 올해에 취업해야 한다, 올해에 선교사로 나가야 한다 간절함이 있어야 하는데 없습니다. 17절을 보면 그들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부족한 것이 없으니 무슨 간절함이나 도전정신이 생기겠습니까? 

그러나 정말 부자고 부족한 것이 없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실체를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보실 때 그들은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 멀고 벌거벗었습니다. 시리아 피난민 보다 더 가련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에겐 믿음이 없습니다. 영혼의 양식이 없습니다. 영적인 힘과 비전이 없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볼 때 안타까우셨습니다. 그래서 18절을 보면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고 하십니다. 불로 연단한 금은 시련을 통해 빚어진 순수한 신앙입니다. 그게 있어야 진정으로 부요한 것이지 겉으로 잘 먹고 잘 산다고 부요한 게 아닙니다. 흰 옷을 사 입으라는 것은 죄 용서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라는 것은 영적인 눈을 뜨라는 것입니다. 양모산업이 발달한다고 영혼의 옷을 사 입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니며 안과 의학이 발달했다고 영혼의 눈을 뜰 수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외적인 것들은 다 얻었지만 영혼의 것들은 하나도 얻을 수 없었습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그런 것들인데 말입니다. 이것을 어디서 삽니까? 18절을 다시 보면 ‘내게서’입니다. 믿음도, 죄사함도, 비전도, 힘도 양식도 예수님에게서 살 수 있습니다. 이마트와 홈플러스를 간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에게서 사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9절을 보면 열심을 내어 회개하라고 하십니다. 열심을 내라는 것은 한 번이 아니라 지속적인 의미입니다. 세상 모든 것이 일만 시간의 법칙이 있어서 달인이 되려면 일만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데 우리도 지속적인 노력을 해야 하지 않습니까?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한다고 하십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한 마디도 칭찬하지 않으셨지만 주님의 그들을 향한 마음은 사랑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책망한 것입니다. 말로 해도 안 들으면 직접 손을 대시는 일도 발생하는데 그것이 징계입니다. 이것이 다 사랑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20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을 모셔 들여야 합니다. 예수님이 문 밖에 서서 두드리고 계십니다. 내가 불로 연단한 금도 가지고 왔고 흰 옷도 가지고 왔고 안약도 가지고 있으니 문을 열라는 것입니다. 문을 열면 내가 그것들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도 힘도 비전도 다 예수님이 주셔야 하는데 그것은 예수님을 모셔 들일 때 가능합니다. 문을 열어 그를 모셔 들이면 그와 더불어 먹게 될 것입니다. 더불어 먹으면 영혼이 부요해지고 힘을 얻고 영의 눈이 밝아질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이기는 그에게는, 예수님을 모셔들이고 회개를 열심히 감당하는 자에게는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해주겠다고 하십니다. 그의 놀라운 영광을 공유하겠다고 하시니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몇 가지를 배웁니다. 첫째, 외적인 부요함과 외적인 시련 없음이 결코 복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좀 가난하고 시련이 있는 교회들이 칭찬을 받았습니다. 가장 부요했고 환난이 없었던 사데와 라오디게아 교회가 가장 불쌍한 교회로 낙인이 찍혔습니다. 2장의 교회들은 문제가 있어도 먼저 칭찬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이 두 교회에게는 먼저 칭찬을 하시지 않습니다. 라오디게아는 아예 칭찬이 없습니다. 
저는 물질이 부족하고 문제가 해결됐다 싶으면 또 닥치는 문제들로 인해 힘들어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언제나 두 다리 쭉 펴고 근심걱정 없이 숙면을 취해보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볼 때 쉬지 않고 터지는 문제들과 사건들이 오히려 저를 더 말씀과 기도에 매진하게 만들었습니다. 예상하지 못했는데 계시록 특공대를 하게 되었고 또 매일 메시지를 써야겠다는 간절한 마음도 생겼습니다. 제가 부족함이 없고 시련이 없다면 어떻게 동기부여가 되어 이 일을 하겠습니까? 외적인 부요보다 내적인 부요를 추구하고 외적인 평안보다 믿음을 단련시킬 시련을 사모하는 우리가 되길 기도합니다. 

둘째, 예수님은 우리의 행위를 정확히 꿰뚫어 보십니다. 의사는 환자를 정확히 알 때 정확한 처방을 할 수 있고 정확한 치료에 완치가 이뤄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모든 교회에 회개하라고 하셨다고 해서 모든 병에 다 아스피린 주고 타이레놀 줘서 끝낸다는 말이 아닙니다. 7개 교회에 공통된 말씀이 ‘내가 네 행위를 안다’는 말입니다. 잘 하고 있는 것, 못하고 있는 것, 키워야 할 점, 고쳐야 할 점 등을 다 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진단과 처방이 정확합니다. 칭찬을 하셨으면 칭찬을 하신대로, 책망을 하셨으면 책망을 하신대로 예수님의 판단이 정확합니다. 이 말씀은 당시 일곱 교회에 주신 진단과 처방이며 또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과거의 명성과 영화에 취해서 살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름만 남았고 옷은 더럽혀진 것을 보고 일깨워 회개하라고 하십니다. 능력이 거의 없어도 말씀을 지키면 그 인생이 지켜진다는 것을 믿도록 하십니다. 영적으로 피폐한 모습을 다시 보여주심으로 동기부여를 시켜주시고 예수님을 모셔들이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이러한 예수님의 진단과 처방을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모든 사탄의 세력과 싸워 이기는 자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새벽마다 영적 전투의 현장에서 회개하며 이기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