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시록 6강
6장부터 본격적인 재앙, 종말적 심판이 시작됩니다. 이것이 16장까지 계속됩니다. 1강에서 배웠지만 6장부터의 내용은 반드시 미래에 일어날 일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종말은 먼 훗날 지구 마지막 날에 관련된 날이 아니라 예수님의 초림으로부터 시작된 이 시대를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본문의 재앙을 볼 때 미래에 혹은 역사적으로 성취된 사건하고 자꾸 관계를 지우려고 한다면 오류에 빠지게 됩니다. 요한계시록의 예언과 사건을 역사적 사건과 맞추려고 하는 자들을 세대주의자들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전에 적그리스도는 로마의 교황이다 유럽공동체의 의장이다, 666은 몸에 심는 ID카드다, 바코드다, 베리칩이다, 아마겟돈은 3차 세계대전을 말한다는 등의 그런 얘기를 했던 것입니다. 이런 해석이 흥미가 있고 매우 재미있습니다. 저도 20대 시절 그런 해석을 지지했던 조용기 목사님의 추천에 힘입어 그런 책을 많이 읽었었습니다. 이런 세대주의적 해석이 오늘날 신천지와 많은 이단을 낳았고 그들의 해석에 날개를 달아준 격이 되었습니다. 결국 이단은 성경을 제대로 읽지 않는 정통이 만들어내는 처치곤란한 부산물들이요 우리가 갚아야할 부채들인 것입니다. 우린 이단을 욕하기에 앞서서 먼저 성경을 제대로 읽어내는 성경선생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전에는 인재앙, 나팔재앙, 대접재앙이 시간 순서로 발생하는 재앙인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러나 현재 정통 복음주의 교단에서 그렇게 해석하는 곳은 없습니다. 인, 나팔, 대접재앙 안에서는 어느 정도 순서가 있지만 인, 나팔, 대접 재앙이라는 세 묶음은 각각 순서보다 심판의 구체적인 현상이 심화되어 가고 있는 것을 나선형으로 드러내주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1절. 드디어 책을 받아든 어린 양이 일곱 인 중의 하나를 떼십니다. 이에 박자라도 맞추듯 네 생물 중의 하나가 우렛소리 같이 오라고 말하고 또 장단에 맞추듯 흰 말이 등장합니다. 먼저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어린 양이 인을 떼니까 기다렸다는 듯이 재앙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한 진노와 교회를 향한 구원사역을 어린양이 주관하심을 보여줍니다. 세상역사는 어린양의 손에 달려 있지 어떤 인간이나 최첨단 과학기계기술문명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는 심판받아야 할 사람이 있고, 구원받아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을 어린양이 하십니다. 인류 역사는 물론이고 한 가정과 한 개인사가 어린양의 손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의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할 때 양을 안고 있는 목자로서 이미지화시킬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그에 대한 이해와 깊이가 얼마나 더 확장되어야 하는지를 너무나 잘 보여줍니다.
첫째부터 넷째 인을 뗄 때까지의 내용은 자연계에 임하는 심판입니다. 이것은 나팔과 대접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인과 나팔과 대접 재앙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각 사건을 심화시켜 표현한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첫째 인부터 넷째 인까지는 말이 등장합니다. 환상에서 말이 등장하는 것은 스가랴서에서입니다. 붉은 말이 슥1장에서 등장했고 6장에서 네 가지 색깔의 말들이 등장하는데 본문과 매우 비슷합니다. 그래서 계시록을 볼 때 구약적 배경을 충분히 숙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은 메신저, 전령을 상징하기도 하는데 보낸 자의 사명을 성취하는 일에 쓰임을 받습니다. 그리고 말의 색깔과 그가 하는 일이 관련을 갖습니다.
흰 말은 황제가 타는 말인데 그가 하는 일이 2절을 보면 활을 가졌고 면류관을 받고 나아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한다고 말씀합니다. ‘활을 가졌다’는 것은 전쟁 중이라는 것이고 ‘면류관을 받았다’는 것은 싸움을 승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흰 말이 그리스도를 상징하는지 로마 황제를 상징하는지 아니면 장차 나타날 어떤 정복자를 상징하는지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어쨌든 싸움과 전쟁이 계속됨을 보여줍니다. 인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나라에서도 930여 번의 전쟁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전쟁은 인간 문명사에서 필연적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본문은 전쟁이 어린 양이 인을 떼자 시작된 것으로 나옵니다. 세계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다시는 그런 끔찍한 세계대전이 일어나지 않게 하려고 유엔을 만들고 많은 정상회담이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줄어들었습니까? 오히려 20세기 말부터는 총성 없는 경제전쟁, 사이버 전쟁이 더해졌습니다.
3절. 둘째 인을 떼시자 붉은 말이 나옵니다. 붉은 색깔은 살육과 분노를 상징합니다. 그 탄 자가 허락을 받아 땅에서 화평을 제하여 버리며 서로 죽이게 하고 또 큰 칼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사탄도 하나님의 허락이 있어야 사람을 유혹하거나 공격할 수 있습니다. 말 탄 자는 자기 나름대로 할 수 없고 허락을 받고 어린 양이 정해주는 바운더리 안에서만 역할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그는 화평을 제하여 버리고 서로 죽이는 일을 했습니다. 그 옛날 로마가 ‘팍스 로마나’라고 해서 로마를 통한 세계의 평화를 외쳤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루어졌습니까? 지금 미국에 의해 세계평화가 지켜지고 있습니까? 뉴욕, 파리, 런던, 이스탄불 그 어디도 마음 놓고 여행할 수 있는 곳은 없습니다. IS를 격퇴하고 평화유지군을 늘려도 평화는 점차 사라지고 살육은 늘어날 것입니다.
5절. 셋째 인을 떼실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셋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들으니 셋째 생물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내가 보니 검은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가 손에 저울을 가졌더라” 검은 색깔은 기근. 질병과 같은 극심한 재난을 상징합니다. ‘저울’은 ‘물건을 달아서 파는 행위’, 곧 경제활동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요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 되’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한 데나리온은 하루 품삯에 해당하는 돈이며 한 되는 한 사람이 하루 먹을 양의 식량이라고 합니다.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라는 얘기는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 사는데 다 쓴다는 말입니다. 밀보다 가격이 떨어지는 보리를 먹으면 삼일을 버틴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는 당시 로마의 평균 물가의 12배에서 16배에 이를 정도로 농산물 가격 폭등 현상이 일어남을 뜻합니다. 이를 ‘애그플레이션’ 현상이라고 하는데 애그플레이션’(agflation)은 농업(agriculture)과 인플레이션(inflation)의 합성어로, 농산물 가격 급등 현상을 뜻합니다. 전문가들은 애그플레이션의 원인으로 가장 먼저 지구 온난화로 인한 농산물의 작황 부진에 따른 생산량 감소를 꼽고 있다고 합니다. 물론 그것 말고도 먹는 것 갖고 후진국들에게 장난치는 강대국들의 농간이 있습니다. 우리는 석유나 천연자원에 비해 물과 식량에 대한 문제의식이 상대적으로 약해서 큰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계시록을 통해 볼 때 식량의 위기는 종말의 징조이며 어린 양의 진노 중 하나임을 보게 됩니다. 어린양의 진노는 막연한 미래의 어느 날, 우리와는 상관없는 어떤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바로 오늘 우리의 식탁 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입니다. 먹거리가 매우 심각하게 위협을 받고 있는 것은 분명한 종말의 현상입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지 말라’는 말이 나옵니다. 감람유와 포도주는 밀과 보리만큼 생활필수품은 아니었지만 그것도 매우 중요한 식량자원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비싸서 돈 있는 자들의 점유물이었습니다. 그것을 사려면 몇 달 분의 생활비를 줘야할지 모릅니다. 그러면 서민들은 죽어날 것이고 어떤 폭동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그런데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것은 충분히 생산이 되게 하십니다. 이는 어린 양의 긍휼입니다. 아마도 그것들은 제주도 밀감처럼 생산량이 급등해서 서민들도 저렴한 가격에 구입할 수 있게 되나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을 다 굶어 죽게 하지는 않습니다. 아직은 인류 최후의 심판의 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7절. 넷째 인을 뗐을 때는 어떤 일들이 일어납니까? 청황색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의 이름이 사망이라고 합니다. 지금까지는 탄 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는데 지금은 밝힙니다. 그 뒤에는 음부가 따른다고 말합니다. 음부란 지옥입니다. 그가 가는 곳마다 지옥이 연출됩니다. 지금까지는 자연과 환경에 닥치는 간접 재앙이었다면 이제는 사람에게 직접 닥치는 재앙입니다. 온갖 종류의 죽음과 그 공포가 쓰나미처럼 엄습합니다. 칼로 죽거나 흉년으로 죽거나 수명이 다하여 죽거나 질병으로 죽거나 여하튼 죽습니다. 사실 의학은 날로 발달함에도 불구하고, 수치상으로는 인간의 수명이 길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사고와 병으로 죽는 사람은 얼마나 많습니까? 작년에 우린 메르스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습니까? 흥미로운 표현이 있습니다. “땅의 짐승들로써 죽이더라”는 말입니다. 인간의 정복과 관리의 대상이었던 짐승이 인간을 대적하며 죽이는 심판의 도구가 됩니다. 과거 유럽을 휩쓸었던 들쥐에서 발생한 패스트, 콜레라, 그리고 원숭이에서 시작된 에볼라 바이러스, 에이즈, 조류독감, 광우병, 등줄무늬 흰쥐에서 나오는 유행성출혈열 등 얼마나 많은 짐승을 매개로 한 병들이 있는지 모릅니다. 우린 지옥 같은 삶의 한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헬조선이라고 하나 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가 숨을 쉬며 살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1/4만 치시기 때문입니다. 3/4에게는, 내 삶의 3/4은 아직 희망이 있습니다.
9절. 어린양이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다섯째 인에선 재앙이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서 부르짖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했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 헌신하다가 순교를 당한 사람들입니다.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게 있어서 그들은 안타깝게 죽어간 선배요 동료들이었을 것입니다. 또한 그들의 직면한 현실이 이처럼 순교를 각오한 삶이어야 함을 보여주십니다. 종말은 시한부종말론자들처럼 집 팔고 논 팔고 다 한 방에 모여서 손뼉치며 찬양만 해야 하는 때가 아닙니다. 더욱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복음을 증거해야 하는 때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빨리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시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11절을 보면 먼저 각각 그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십니다. 이는 보상과 승리를 상징합니다. 그들은 비록 순교당했거나 순교와 버금가는 희생을 치루고 있는데 하나님이 갚아주신다는 것입니다. 그 희생이 헛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직 잠시 동안 쉬라고 하십니다. 주님 안에서의 쉼은 안식입니다. 안식은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으로 가기 전, 영생의 부활의 몸을 받기 전 우리가 머물거나 거쳐 가는 과정 속에 있습니다.
그리고는 하시는 말씀이 아직 더 많은 동무와 형제들의 순교의 피가 흘러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그 수가 차야 한다고 하십니다. 아직도 하나님의 말씀에 매인바 되어 복음을 증거하다가 죽어야 하는 사람들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란 터툴리안이 말한 유명한 문구가 있습니다. 이 종말의 역사의 저변에는 순교자의 피가 있습니다. 그것이 교회를 세웠고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가져왔습니다.
12절. 어린양이 여섯 째 인을 떼실 때에 어떤 일들이 일어납니까? 큰 지진이 일어납니다. 해가 검은 천같이 새카맣게 변하고, 달은 온통 핏빛으로 변합니다. 하늘의 별들은 태풍에 무화과나무의 열매가 떨어지듯 땅에 떨어집니다. 하늘은 두루마리가 말리듯이 사라져 버리고, 산과 섬들도 제자리에서 옮겨집니다. 예수님도 말세를 얘기하시면서 천체가 흔들리고 별들이 떨어지고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간다고 하셨습니다.
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합니까? 모든 사람이 동굴과 산의 바위틈으로 숨었습니다. 이 땅의 임금들, 왕족, 장군, 부자, 권세자, 종, 자유인 할 것 없이 모두 숨어들었습니다. 그들은 산과 바위를 향하여 울부짖습니다. “우리 위에 무너져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과 어린 양의 진노에서 제발 우리를 숨겨줘” 심판의 날에는 그 분을 보는 것이 고통이기 때문에 오히려 안락사를 요청합니다. 진노의 큰 날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상의 종말론적 재앙을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 어린 양의 진노로 심판이 진행된다는 사실입니다. 그가 초림하셨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를 조롱하고 박해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누구도 우습게 볼 수 없는 분이요 세상을 반드시 심판하시는 절대 권세자이십니다. 그가 진행하시는 종말은 지금 자연계에서도 시작되었고 국가 간에도 시작되었고 내 삶에도 내가 살아가는 현장, 내가 먹는 식탁 위에서도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을 아는 사람이 현명한 사람입니다. 어린양의 진노는 결코 역사 끝에 있는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과 난리, 그리고 기근과 죽음의 소식들은 이미 우리가 심판의 한 가운데를 살아가고 있음을 증거합니다. 곳곳에서 벌어지는 헬조선의 모습들을 보면서 우리는 예수님을 기억해야 할 것이며 예수님의 진노는 더 강도가 높아질 것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둘째, 어린양의 진노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가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의 허락을 받는 한도 내에서만 재앙이 일어납니다. 더 이상 살 수 없는 상황에서도 숨통을 터주십니다. 먹거리를 남겨주셨고, 3/4을 남겨주셨습니다. 예수님도 ‘만일 주께서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하셨더라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거늘 자기가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셨느니라(막13:20)’ 하셨습니다.
셋째, 땅의 사람들로 사는 한 그 진노를 피할 길은 없습니다. 15절에 ‘땅의 임금’이란 표현이 있습니다. 땅은 계시록에서 하늘에 반대된 표현인데 하나님을 대적하는 인간적이고, 사탄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재앙이 오기 전에는 임금들, 왕족들, 장군들, 부자들, 강한 자들이 세상에서 이긴 자들이요 영원한 금수저들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날에는 숨느라 정신이 없고 안락사를 받고 싶어서 몸부림을 칩니다. 심판은 쭉정이와 같은 땅의 사람들을 철저하게 걸러냅니다. 종말의 때에 우린 어떤 사람들로 살아야 할까요? 내일 보게 될 7장은 그들과 전혀 다른 알곡과 같은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심판과 함께 동시에 진행이 되는 구원의 역사, 그 종말의 이중주를 7장을 통해 생생하게 체험해보기를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