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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3년 가을 빌레몬서 특강 사랑 받는 형제로 두라 (빌레몬 1:1-25)2023-10-23 0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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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가을 특강

사랑 받는 형제로 두라


말씀 / 빌레몬 1:1-25

요절 / 빌레몬 1:16 “이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오늘 말씀은 빌레몬서입니다. 우리가 올해 사도행전을 공부했는데, 28장 마지막에 사도 바울이 로마 셋집에서 복음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전했다는 말로 끝납니다. 그 사역의 결과물이 빌레몬서에 나옵니다. 그래서 특강으로 하게 된 것입니다. 빌레몬서는 사도바울이 쓴 옥중서신이며, 빌레몬에게 보낸 개인 서신입니다. 한 장으로 된 짧은 서신으로 평이하지만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어떤 신학자는 보석과 같은 서신이다고 했습니다. 본문에는 여러 가지 사상이 담겨져 있습니다. 사랑, 용서, 회복, 화해가 나오고요. 이것을 가능케 하는 속량, 그리고 복음, 자유가 나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바울의 복음 사상을 배우고 우리 삶속에서 실천하기를 기도합니다.

 

1-3절을 읽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인 빌레몬과 자매 압비아와 우리와 함께 병사 된 아킵보와 네 집에 있는 교회에 편지하노니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본문을 보면, 바울이 빌레몬 개인에게 쓴 서신이기도 하지만 또한 그의 가정교회에 쓴 서신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빌레몬의 이름의 뜻이 무엇인지 아시나요? ‘필레오’(우정, 사랑)에서 온 것입니다. 빌레몬은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구원을 받았습니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2년간 두란노서원에서 말씀을 가르칠 때 그곳에 사업상 이유로 갔는지, 아니면 여행을 갔는지 모르지만 바울에게서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에바브로와 함께 고향 골로새로 돌아와 교회를 세운 개척목자요 평신도 지도자로 섬겼습니다. 그는 또한 부유하였습니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습니다. 사업이 번창하여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많은 식솔을 거느렸으며 그의 집은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거렸습니다. 교회로 쓸 수 있는 큰 저택이 있었고 순회 전도자들이 머물 수 있는 방도 여러 개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영육간에 듬뿍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성도들로부터 사랑을 받았습니다. 1절에서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요라고 나옵니다. 그는 사도바울을 비롯한 모든 성도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그 사람이 바로 빌레몬이었습니다. 이 얼마나 부럽습니까? 그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받은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는데 힘썼습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이 4절부터 7절까지에 나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 기도할 때마다 빌레몬으로 인해 감사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빌레몬에게 주 예수와 및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 있다는 소문이 들려왔기 때문입니다. 빌레몬은 예수를 사랑하고 성도들을 사랑하였습니다. 자기 집을 예배처로 내어 놓았고, 주일마다 성도들을 위해 식사를 풍성하게 준비하여 섬겼습니다. 순회 전도자들이 오면 숙소를 내주고 몇 달이 되든 머물게 하였고 그들의 필요를 제공해 주었습니다. 또 그 집의 종들은 배를 곯은 일이 없었고 인격적으로 대우하였어요. 가난한 이웃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주고 선을 베풀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서 베푸는 삶을 사는데에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6절을 함께 읽습니다. “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이르도록 역사하느니라사람들은 빌레몬을 보면 저 분은 참으로 선한 일을 많이 하신 분이야~. 저 사람을 보면 예수를 믿고 싶다니까.’ 말합니다. 또한 7절을 보면 성도들의 마음이 너로 말미암아 평안함을 얻었으니라고 나옵니다. 빌레몬을 만나본 사람들은 한결같이 빌레몬목자님과 함께 있으면 너무나 마음이 편해, 즐거워이렇게 말했다는 것이죠. 이런 사람들의 특징이 뭐죠? 잘 들어주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주고, 친철하고, 유머러스하고, 베풀고, 격이 없이 친구처럼 대해주고, 타인의 문제를 내 문제로 여겨서 기도해주고 도와주는 그런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누구나 좋아합니다. 빌레몬이 그랬다는거죠. 그래서 바울은 7절 하반절에서 빌레몬, 당신의 사랑으로 인해 내가 많은 기쁨과 위로를 받습니다라고 합니다.

 

빌레몬은 이처럼 그의 이름에 걸맞게 하나님과 사람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고, 또한 다른 사람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랑하였습니다. 한마디로 그는 사랑의 목자입니다.

 

8절부터 22절까지는 바울이 빌레몬에게 이 서신을 쓰게 된 이유를 말합니다. 그것은 오네시모 문제를 해결코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빌레몬에게 한 종이 있었습니다. 오네시모 입니다. 이름의 뜻은 유익한입니다. 주인 빌레몬은 오네시모가 그의 이름처럼 유익한 종이 되어 주길 기대하였습니다. 그를 사랑하였고 인격적으로 잘 대해 주었습니다. 믿고 돈도 맏겼습니다. 그런데 오네시모가 어떻게 합니까? 재물을 가지고서 도망갔습니다. 그는 주인에게 유익한 종이 아니라 무익한 종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오네시모가 도망갔을까요? 이렇게 사랑 많은 주인, 선한 주인을 떠난 걸까요? 한번 생각해 봅시다. 오네시모에게 꿈이 있었습니다.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하는 꿈이었습니다. “내 인생, 종의 신분으로 이렇게 주인에게 갇혀서 썩고 싶지 않다. 세계의 중심지인 먼나라 로마에 가서 내 꿈을 펼쳐보리라. 내 능력을 발휘해 보리라. 내가 원하는 것을 해 보리라. 자유를 누리리라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당시 사회에서 노예가 도망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로마제국내에는 자유민의 4배에 해당되는 약 6천만명의 노예가 있었습니다. 노예는 사람이 아니라 살아있는 도구에 불과했습니다. 노예에 대한 생사여탈권을 주인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한 노예가 수정으로 된 술잔들을 안 뜰로 나르다가 그 중에 하나를 떨어뜨려 깨뜨렸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화가 나서 즉시 그 노예를 연못에 던져버렸습니다. 그 연못에는 포악한 칠성상어가 있었는데, 그 노예를 갈기갈기 찢어 죽였다고 합니다. 반항적인 노예는 즉시 형벌에 처해지고 죽이기도 했습니다. 도망가다 잡히면 본보기로 죽이든지, 정말 자비를 베풀 경우 그의 이마에 도망자라는 라틴어 첫 문자인 ‘F’ 자 낙인을 찍었습니다. 사소한 죄로 십자가 형벌을 받아 죽은 노예들이 부지기수였습니다. 생각만 해도 도망갈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과감하게 도망을 결행을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로마에 와서 자유인 행세를 합니다.

 

반면 바울은 어떻습니까? 바울에게도 꿈이 있었습니다.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그 꿈 때문에 현재 로마에 왔습니다. 그런데 죄수의 몸이요 갇힌 신세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어떻게 해석합니까? 1절과 9절에서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복음을 위하여 갇혔다고 합니다. 그는 외형적으로 갇혀있지만 자신은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요 복음 전파자로 이곳에 파송되어 왔다는 분명한 정체성이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갇힌 상황에서도 위축되지 않고 담대히 거침없이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 바울은 갇힌 것이 오히려 복음의 진보를 이루었다고 고백합니다.

 

바울과 오네시모 둘 다 꿈을 좇아 로마에 왔습니다. 한쪽은 로마시민권을 가졌지만 죄수의 몸으로 갇혀있고 한 쪽은 종의 신분에서 도망쳐 나와 자유로운 상태입니다. 이 둘 중에 누가 진정으로 자유를 누리는 사람입니까?

 

자유를 찾아 로마에 왔던 오네시모, 그가 갇혀있는 바울을 찾아옵니다. 그동안 도대체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그가 처음 로마에 도착했을때는 너무나 기분이 좋았을 것입니다. “~ 로마공기가 역시 골로새 공기와 달라~”, ‘이제 내 꿈을 펼쳐보리라~’ 하지만 어떻습니까? 로마는 텃새가 심했습니다. 뭘 좀 해보려고 하면 아시아인이라고 차별하고, 급여도 조금 밖에 주지 않았습니다. 살인적인 물가때문에 주인집에서 먹던 것보다 훨씬 못한 음식을 먹어야 했습니다. 또한 만나는 사람들에게 신분을 숨겨야 했습니다. ‘이름이 뭐에요?’ 물으면 제 이름은 오....오바댜입니다.’ 거짓말을 해야 했어요. 로마군인만 보아도 자신의 신분이 탄로날까봐 심장이 쿵꽝거렸습니다. 무엇보다도 선한 주인을 배반하고 손해를 끼치고 도망왔다는 양심의 고소, 하늘로부터 천벌을 받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그를 괴롭혔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는 자신의 선택한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후회해도 소용없습니다. 이미 엎지러진 물입니다. ‘이 상황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참된 자유라는 것이 정말 있기나 하는 걸까?’ 그의 영혼은 구원을 갈망하였습니다.

 

그때 마침 바울이 로마 셋집에 갇혀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어요. 전에 주인 빌레몬이 에베소를 갔다가 와서 했던 말이 생각났습니다. ‘내가 바울선생으로부터 복음을 듣고 구원받았어~’ 주인의 환한 미소와 기쁨에 찬 그 모습이 떠 올랐습니다. 오네시모는 혹시 여기에 해결책이 있지 않을까?’ 지푸라기라도 잡고자 하는 심정으로 용기를 내어 바울을 찾아갔습니다. 바울 앞에 무릎꿇고 엎드려 제가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빌레몬의 종 오네시모라고 합니다. 제가 주인을 배반하고 도망쳐서 어찌어찌해서 이곳까지 왔습니다. 저의 죄가 너무나 중하여 고통스럽습니다. 어떻게 해야 씻을 수 있을까요? 선생님, 저 좀 도와주십시오.” 그러자 바울이 말합니다. “형제여, 걱정하지 마세요. 구주 예수를 믿으면 됩니다.” “주님께서 우리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 분께 나아가면 어떤 죄든지 용서받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 옆에 달렸던 흉악한 강도가 주 예수여 나를 기억하소서요청하자, 주님께서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이렇게 그의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해 주셨어요.” “형제여, 나도 과거 예수 믿던 자들을 죽이고 박해하던 죄인중에 괴수였어요. 그런데 그 분은 나같은 자도 사랑하셔서 찾아와 나를 용서해주시고 구원해 주셨어요. 그리고 이방인의 사도로, 복음전도자로 이제껏 사용해 주셨습니다. 나를 이렇게 죄수의 몸으로 이곳에 보내시고 오네시모 당신을 만나게 하신 이유가 당신을 구원코자 하는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오네시모~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을 사랑하셔서 당신을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어요.”

정말요. 저 같은 죄인도 용서해주시나요?” “암요.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십니다.” “바울 선생님, 감사합니다. 제가 예수님을 믿겠습니다.” 그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예수님을 나의 구주, 나의 그리스도로 영접하였습니다. 중생의 체험을 한 오네시모는 구주 예수님께 너무나 감사하여 앞으로 주와 복음을 위하여 살리라굳게 결심을 하였습니다. 그는 갇힌 바울을 수시로 찾아가 바울과 일대일 성경공부를 열심히 하였습니다. 바울의 분신이 되어 바울이 하고자 하는 일이라면 만사 제쳐두고 충성을 다해 섬겼습니다. 오네시모가 바뀌었습니다. 무익한 종이 유익한 종이 되었습니다. 그의 이름처럼 되었습니다. 이런 그를 바울은 어떤 사람으로 여깁니까? 12절을 보십시오. ‘그는 나의 심복이다라고 합니다. 나의 심복은 영어로 ‘my heart’입니다. 오른 팔 정도가 아니라 나를 대신할 사람이라는 것이죠. 13절을 보면, 내 곁에 머물게 하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인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어떻게 오네시모가 이렇게 놀랍게 변화된 것입니까? 복음이 그를 변화시겼습니다. 한 목소리로 따라서 외쳐보겠습니다. “복음이 사람을 변화시킵니다우리는 종종 이런 말을 듣습니다. ‘사람은 절대 안 변해이 말이 맞는 말입니까? 틀린 말입니까? 세상에서는 맞는 말일지 몰라도 성도들에게는 맞지 않는 말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우리는 이 약속의 말씀을 기초하여 사람을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변화된 모습이 보입니다. 변화되어가고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변화될 모습이 보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절대 안 변해이런 눈으로 보면 진짜 사람이 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부정적인 눈, 불신의 눈이 안 변했기 때문입니다. 그럴때 눈이 회개해야 합니다. 성경에 기초한 영적인 눈을 갖기를 바랍니다. ‘사람은 변화될 수 있다’, ‘복음이 사람을 변화시킨다이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 서신을 써서 보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돌려보내어 용서하고 화해하여 두 사람의 관계를 회복시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빌레몬은 그 이름처럼 그동안 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었고 선을 베풀었습니다. 오네시모에게도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빌레몬의 마음을 고양이처럼 할퀴고 도망갔습니다. 경제적 손해를 끼쳤습니다. 배신했습니다. 그런 오네시모를 바울은 빌레몬에게 용서하고 받아주라고 합니다. 더군다나 16절을 보면, 종이 아닌 종 이상인 형제로 두라고 요청을 받습니다. 빌레몬 입장에서는 참으로 감당하기 힘든 요청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요청하는 이유가 뭘까요? 빌레몬에게 예수님의 성육신의 사랑, 십자가 사랑을 몸으로 체험토록 하고자 합니다. 더 성숙한 사랑의 단계로 나아가게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15절에서 그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은 너로 하여금 그를 영원히 두게 함이라고 합니다. 오네시모가 도망간 것이 잠시 떠나는 것으로, 그리고 그리스도안에서 그와 영원한 관계, 동역자로 두고자 하는 하나님의 섭리로 해석합니다. 빌레몬은 이제 자기를 괴롭혔던 오네시모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그를 용서할 뿐만 아니라 형제로 영접해야 합니다. 동역자로 영접해야 합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최고봉을 실천해야 합니다. 내 힘으로 안되니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내 마음에 부어지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이번에는 오네시모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자기가 죄짓고 도망쳐 왔던 그 집으로 다시 돌아가라고 바울이 방향을 주었습니다. 그가 돌아가고 싶을까요? 말이 쉽지 행동으로 옮기기가 쉽지 않습니다. 무슨 낮짝으로 주인의 얼굴을 볼 수 있겠습니까? 같이 일했던 종들, 동네 사람들이 이 나쁜 놈, 배신자하면서 손가락질하고 째려 볼 것을 생각하면 비참해집니다. 또한 자신의 중한 죄를 생각하면 어떤 처벌이 내려질지 형벌에 대한 두려움이 듭니다. 그런데도 그는 가야 합니다. 왜입니까? 회개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용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회개는 자기가 죄 지은 사람에게 가서 용서를 구하고 응분의 댓가를 지불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네시모가 맺어야 할 회개의 열매입니다. 또한 그가 참 자유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갇힌 것처럼 이제 오네시모도 그리스도를 위해 육체의 자유를 포기하고 돌아가 빌레몬의 종이 되어 섬겨야 합니다. 그게 그리스인의 자유의 본질입니다. 5:13절은 말합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고후4:5절은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그렇습니다. 우리는 자유인이지만 서로에게 종이 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사랑과 겸손으로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고 섬기는 복된 종의 삶을 우리가 살기를 기도합니다.

 

이번에는 바울의 입장에서 보겠습니다. 바울의 역할은 중재자입니다. 빌레몬과 오네시모를 화목케 하는 역할이죠. 어떻게 그 일을 할 수가 있습니까? 지금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에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이 전쟁의 저변에 깔려있는 것이 무엇인가요? 분노입니다. 서로 당한 것에 대한 분노가운데서 피의 복수를 서로에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 분노를 잠재울 수 있는가? 속량물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과 우리사이에 있는 하나님의 진노를 잠재우기 위해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셨습니까?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속량물로 내어 주셨습니다. 그 예수님께 하나님의 모든 진노를 쏟아 부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가 우리의 죄를 속량하였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것이 아닙니까? 사도 바울은 지금 빌레몬과 오네시모를 화목시키기 위해 자신이 속량물이 되고자 합니다. 16-22절에 나오는 바울의 말은 내가 대신 속량하겠다이런 말입니다.

 

16절을 다 함께 읽겠습니다. “이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사도 바울은 거듭난 오네시모를 종과 같이 대하지 말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받는 형제로 두라고 합니다. 한 가족으로 여기라는 것입니다. 17절에서는 오네시모를 대할 때 바울을 대하듯이 영접하라고 합니다. 18절에서는 만약 불의를 한 것이나 빚진 것이 있다면 그것을 내 앞으로 계산하라고 합니다. 19절에서는 내가 친필로 쓴다고 합니다. 내가 얼마나 이 일에 관심을 가지고 정성을 쏟고 있는지 알라는 것이죠. 유머를 곁들여 빌레몬 당신이 나에게 빚진게 있는데, 그것은 내가 말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게 뭐겠습니까? 빌레몬이 바울을 통해 복음을 듣고 천하보다 귀한 영생을 얻은 것 아니겠어요? 20절에서는 오 형제여 주님 안에서 그대를 통해 내가 기쁨을 얻도록 해주세요.’ ‘내 마음이 그리스도안에서 평안하게 해주세요이렇게 부탁합니다. 21절에서 당신이 순종할 줄 믿습니다. 내 부탁보다 120퍼센트 할 줄로 기대합니다’ 22절에서는 내가 이곳 로마 셋집에서 풀려나면 당신 집을 방문할려고 합니다. 나를 위해 숙소를 마련해 주시오이 말이 뭐하겠다는 거죠? 내 요청대로 했는지 확인해 보겠다는 거죠. 사도 바울은 이렇게 적극적으로 자기가 속량물이 되어서 둘 사이를 화해시킵니다. 모든 책임을 자기가 지겠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뭡니까? 먼저는 바울이 갇힌 가운데서 오네시모를 낳았기 때문입니다. 영적 부모로써 빚진 것을 다 자기가 대신 갚겠다고 합니다. 두 번째로 바울 자신이 실제로 체험을 했기 때문입니다. 24절에 보면, 나와 함께 하는 자들이 문안한다고 하면서 나의 동역자 마가가 문안한다고 합니다. 마가가 어떤 사람입니까? 사도행전에 보면 바울과 바나바가 1차전도여행할 때 동참했던 청년입니다. 그런데 그가 여행이 힘들자 도중에 도망쳐 버렸어요. 바울은 이 일로 기운이 빠지고 굉장히 화가 났던 모양입니다. 2차전도여행때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가자고 했지만 바울은 안된다고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저 무익한 자를 데리고 가면 사역에 방해만 됩니다반대했습니다. 마가문제로 인해 바울과 바나바가 싸우고 서로 각자의 길을 간 것 아닙니까? 그랬던 마가가 지금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바울의 신실한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여기에는 마가가 성장하여 성숙해진 것도 있지만 바울이 마음이 넓어지고 마가를 용서하고 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마가와 함께 동역하면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높은지, 넓은지를 알아가게 되었습니다. 이를 기초로 빌레몬과 오네시모도 자신이 경험한 그리스도의 사랑, 그리스도의 복음의 핵심을 체험하고 그들이 알아가길 바랬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화목케 하는 직분을 받았습니다.(고후5:18) 사람과 사람을 화목하도록 연결해 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의 사랑이 모든 반목과 대립을 깨뜨립니다. 화목을 이룹니다. 그리스도의 사랑만이 인류의 소망입니다. 그 사랑이 담겨있는 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은 하나님과 사람을 연결해 주고,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줍니다. 우리가 복음 정신을 깊이 깨닫고 배우고 실천하기를 기도합니다. 복음을 널리 전파하길 기도합니다.

 

오네시모는 빌레몬에게 돌아간 후 어떻게 되었을까요? 기록에 의하면 그는 빌레몬에게 용서를 받고 자유인이 되어 로마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는 자기와 같이 불쌍한 처지에 있는 노예들과 도시 빈민들에게 소망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리고 에베소 감독인 디모데가 순교한 후 그를 이어 에베소 교회 감독이 되었습니다. 30년간 일하다가 화형을 당해 순교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는 참으로 복된 삶을 살았습니다. 복음은 이처럼 한 사람의 인생을 놀랍게 변화시켜 위대하게 살도록 합니다.

 

우리 또한 우리 구주 예수의 사랑과 그 속량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고 무익한 죄의 종이었던 우리가 하나님의 유익한 종이 되어 쓰임받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행하신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감사 찬양합니다.

 

결론입니다. 오늘 바울의 짧은 편지 속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옥중에 갇혀있는 상황속에서 노예출신이며 주인에게서 도망나온 오네시모를 해산의 수고를 통해 영적 아들로, 심복으로 키워낸 바울의 목자의 삶을 배웠습니다. 또한 빌레몬을 동역자로 삼고 존중하며 주님의 사랑으로 오네시모를 영접해 주도록 부탁하는 바울의 겸손과 중재 역할을 보았습니다. 우리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한량없는 용서와 사랑을 배워 그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성장하고 우리에게 맡겨주신 화목케 하는 직분을 힘써 잘 감당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