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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19년 창세기 7강 `노아와 맺은 언약 `(창세기 7:1-9:17)2019-05-06 0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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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창세기 제 7강

노아와 맺은 언약

말씀/창세기 7:1-9:17

요절/창세기 9:11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멸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노아 시대 홍수 심판은 무섭고 철저했습니다. 다 쓸어버린바 되었습니다. 인류역사상 가장 큰 재난이었습니다. 이 가운데 노아와 그의 가족은 살아 남았지만 끔찍한 공포와 두려움이 뇌리속에 남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트라우마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선제적으로 언약을 세우심으로 트라우마를 치료하시고 평안을 주시고자 합니다. 저는 대학생 때 유급을 당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학업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습니다. 30년이 지난 지금에도 가끔 시험보는 꿈을 꾸며 괴로워하다가 잠을 깹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인생의 여러 시련을 겪으면서 어떤 특정한 상황에 맞닿뜨리게 될 때 염려와 두려움이 엄습하지는 않습니까? 그때 어떻게 하십니까? 하나님께서는 두려움에 떠는 우리를 돕고자 하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도움의 손길을 발견하고 주님이 주시는 참된 평안을 소유하길 기도합니다.


제 1 장. 다 죽었더라 (7장)


7장 1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이 세대에서 네가 내 앞에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 드디어 홍수 심판이 임박했습니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명령하셨습니다. 구원으로 초대한 것입니다. 이렇게 초대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 의로움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노아는 비록 죄인이었으나 회개하여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삶을 살았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명령대로 방주를 지음으로 검증이 되었습니다. 홍수 심판이 있을 때 방주 안에 들어간 노아의 가족과 짐승들은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노아를 제외한 모든 인류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다 멸망했습니다. 왜 멸망했습니까?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이 부족해서 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십니다(딤전2:4). 완악한 인간들이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사랑을 멸시함으로 구원의 초청에 응하지 않은 것입니다. 벧후2:5에 보면 노아와 그의 가족들이 의를 전파했다고 나옵니다. 특히 짐승들을 방주 안으로 불러 들이면서 마지막으로 가까운 이웃과 친족에게 애타게 외쳤을 것입니다. “이제 얼마 안 남았어요. 빨리 오세요. 방주로~.” “사돈 어른~ 제 마지막 소원이에요. 제발 방주로 와 주세요. 동물들도 저렇게 방주로 오지 않습니까?” 그러나 아무도 그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을 빌리면 노아시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고 그런 일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요즈음 버전으로 말하면 ‘어떻게 재테크를 잘해 노후 걱정없이 살 수 있을까?’ ‘연봉을 어떻게 높힐까?’ ‘재미있는 영화, 뭐 없나?’ ‘맛 집이 어디 있지?’ 이런 데만 관심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후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16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그를 들여 보내고 문을 닫으시니라” 하나님께서 방주의 문을 닫아 버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한번 문을 닫으면 어느 누구도 구원 얻을 기회를 얻지 못합니다. 노아라 할지라도 도움을 줄 수 없습니다. 사람들 중에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금은 내가 하고 싶은 것 다 해보고 나중에 나이 들어서 믿을께. 그때 믿어도 구원받잖아~”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구원의 문을 닫아 버리십니다. 고후6:2에서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하였습니다. 구원의 문이 열렸을 때, 초대할 때 서둘러서 구원의 문에 들어가야 합니다.

 

드디어 홍수심판이 시작되었습니다. 노아가 600세 되던 해 2월 17일이었습니다. 그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고 하늘의 창문들이 열렸습니다. 40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습니다. 장마철에 2~3일만 장대비가 쏟아져도 산사태가 나고, 둑이 터지고 가옥이 침수됩니다. 그런데 40일 동안 주야로 하늘에서 물 폭탄이 쏟아졌으니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세상이 온통 물바다가 되었겠죠. 저지대부터 물에 잠겼습니다. 사람들은 조금 더 높은 곳으로, 조금 더 안전한 곳으로 피하고 또 피했습니다. 그래도 비가 그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당황해 하다가 나중에는 후회했습니다. ‘아! 노아가 초대할 때 그때 방주로 들어갈 걸. 안전하다 평안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구나.’ 어떤 사람은 방주로 달려갔습니다. 손가락에 피가 날 정도로 방주 문을 두드리며 “셈, 나야 나! 네 친구” 큰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그러나 결코 문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19절을 보면 물이 땅에 넘치매 천하의 높은 산이 다 물에 잠겼다고 했습니다. 북한산, 지리산, 백두산, 에베레스트산등 그 높이를 자랑하던 산들이 다 물에 잠겼습니다. 또한 21절을 보면 땅위에 움직이는 생물이 다 죽었다고 나옵니다. 홍수 심판이 얼마나 철저하고 극심했던지 ‘다 잠겼다’(19) ‘다 죽었다’(21,22)는 표현이 반복하여 나옵니다. 그런데 이 가운데 누가 살았습니까? 23절 하반절 ‘오직’부터 읽겠습니다. “오직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자들만 남았더라”


사랑하는 여러분! 홍수심판을 하신 하나님은 세상 마지막 때에 최후의 심판을 하십니다.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납니다(벧후3:8-10). 그 후에는 모든 영혼들이 하나님의 백보좌 앞에서 그 행한대로 심판을 받습니다(계20:11-15). 이와 관련하여 히브리서 저자는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했습니다(히9:27).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방주되신 예수님 안에 거해야 합니다. 요5:24은 말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자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즈음 사람들은 노후대책을 잘해 놓아야 안심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노후대책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후대책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사후대책을 확실히 해 놓았기 때문에 언제나 안전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마음에 평강이 있습니다.


제 2 장. 새 역사를 위한 준비(8장)


노아의 가족은 방주 안에서 얼마나 있었습니까? (도표 참조) 1년 17일동안 있었습니다. 그들이 1년 넘도록 배 안에 있었다는 것이 쉬운 일이었을까요? 저는 군복무대신 공중보건치과의사로서 전남 병원선에서 1년 동안 근무했습니다. 병원선이 한번 출항하면 15일간 배 안에서 지내야 했습니다. 일주일 정도 지나면 멀미도 좀 하고 좁은 공간에서 생활하니 답답하여 빨리 땅을 밟고 싶어집니다. 노아 가족이 방주 안에서 1년 넘게 지냈으니 오죽 답답하고 힘들었겠습니까? 거기에다 짐승들을 먹이고 똥 치우는 일등 해야 할 일들이 너무나 많았을 것입니다. 이 기간 동안 하나님은 무엇을 하고 계셨습니까? 8장1절 전반절 ‘기억하사’까지 읽겠습니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가축을 기억하사” 노아와 방주에 탄 짐승을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기억하다’는 히브리 원어로 ‘자카르’인데, ‘어떤 사람을 기억하다’ ‘약속을 기억하다’ 할 때 많이 사용됩니다. 150일 동안 물이 땅에 넘친 상태로 있었기 때문에 노아 가족은 하나님이 우리를 혹시 잊으신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잊은 적이 없습니다.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노아와 그의 가족을 구원하시고자 여념이 없으셨습니다. ‘기억한다’는 말에는 지속성과 연속성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인내를 요구합니다. ‘기억하고 있으니까 일이 마무리 될 때 까지 참고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노아가족에게는 긴 기간 동안 좁고 답답하며 동물들로 인해 냄새나고 시끄러운 그런 방주 안에 갇혀서 지내야 하는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구원이 완성되고 새롭게 정화된 땅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150일이 지난 후부터 점차 물이 줄어들게 하심으로 노아의 가족을 기억하고 계셨음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노아가족이 방주에 더 있도록 하사 노아의 가족이 나와서 잘 정착할 수 있도록 섬세하게 환경을 예비하셨습니다. 노아가족에겐 1년 17일이라는 방주 안의 생활이 힘든 기간이었겠지만, 실은 하나님께서 노아가족을 위해 땅을 정리하고 생활할 수 있도록 배려하신 축복의 기간이었습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가 겪는 시련과 어려움, 문제들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합니다. “주님! 도와 주십시오.” 그런데 아무 진척이 없고 상황은 더 나빠지고 힘에 부칩니다. 이럴 때 하나님은 나를 잊으셨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잊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한 때까지 인내하고 주신 시련을 회피하지 말고 감당해야 됩니다. 때가 되면 나오게 하시고 구원을 완성하십니다.


종로2부의 김진수 목자는 카타르 자매 선교사와 선교가정이 이루어지지 않지 상심이 많았습니다. 거기에다 종로 2부가 한 동안 시끄러웠습니다. 이때 그는 풀타임으로 역사를 섬기고 있어 우리 모임에 많은 실망을 했었습니다. 이때 그가 “야! 못해 먹겠네” 하고 뛰쳐 나갔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러나 진수목자님은 제 3세계 선교사로 쓰임받고자 하는 소망을 붙들고 인내하며 예수님 안에 거하고자 힘썼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김안나 목자와 브라질 선교가정을 이룰 수 있게 하셨습니다. 또 훌륭한 하나님의 종으로 빚어지도록 하셨습니다. 진수목자님이 국민대 월요 찬양 예배를 인도하는데, 하나님의 임재가 느껴지고 은혜롭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은 칭의의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가는 길이 비록 좁고 험하지만 예수님 안에 있을 때 구원을 온전히 이룰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인내로써 믿음의 완주를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땅이 다 마르고 정한 때가 되자 노아에게 방주에서 나오도록 하셨습니다. 방주에서 나온 노아가 가장 먼저 한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이라면 무엇을 하겠습니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먹고 살기 위해서 씨를 뿌릴 농토를 먼저 알아 보겠습니까? 아니면 그동안 배 안에서 힘들었으니까 동물들을 다 내 보내고 장막치고 한숨 푹 늘어지게 자겠습니까? 20절을 읽겠습니다. “노아가 여호와깨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로 제단에 드렸더니” 노아는 먼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제사를 드렸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성을 맺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것은 하나님께서 쓸어버리시면 하나도 남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에 거기에 소망을 둘 수가 없었습니다. 영존하시는 하나님을 붙드는 것이 그에게 가장 중요했습니다. 자신도 물로 쓸어버림 당할 처지였지만 하나님께서 살려주시고 구원해주셨기에 너무나 감사하여 제단을 쌓은 것입니다. 또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의미로 번제를 드렸습니다. 노아는 새 출발 앞에서 하나님을 첫 자리에 두었습니다.


이 부분을 성경공부할 때 토양환경사업을 하는 최희철목자님께서 이런 간증을 하셨습니다. 본인은 말 주변도 없고 재정 경영업무도 꼼꼼하게 보지 못하고 귀가 얇아 충분한 사업성 검토 없이 사람말만 믿고 몇 번 투자했다가 큰 손해를 보았습니다. 회사가 망해도 몇 번 망했어야 마땅한데, 망하지 않고 매년 성장하고 있습니다. 올해는 음성공장을 증축하고 사업이 확장되어 천안에 제2공장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주변에는 말 잘하고 똑똑한 사장들이 많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토양환경사업에서 잘 나가는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이 있는데, 최희철 목자님이라고 한답니다. 그 비결이 무엇이었을까요? 희철목자님은 ‘새벽기도’라고 했습니다. 본인이 새벽기도 하지 않은 날은 힘만 들고 일이 잘 안 풀렸습니다. 거래처에 전화도 안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새벽기도한 날은 심령이 기쁘고 힘이 생겼습니다. 말을 해도 자신있고 확신있게 말하게 되었고, 그럴 때 일도 잘 풀렸습니다. 하루의 첫 시간을 새벽기도, 일용할 양식으로 하나님을 만나는데 드릴 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신 것이라고 희철목자님은 자신있게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희철목자님 간증처럼 우리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성을 맺을 때 힘이 생기고 적극적인 삶을 살게 되고 형통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마음 중심으로부터 드린 노아의 제사를 어떻게 받으셨습니까? 21절을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 하나님은 노아의 마음 중심에서 드리는 제사를 향기로 받으셨습니다.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그 중심에 이르시되’ 란 말이 나오는데 이 말은 노아가 드린 예배가 하나님의 마음까지 터치하였음을 말해줍니다. 마음과 마음이 만나면 마을이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는데, 사람의 마음과 하나님의 마음이 만나면 무엇이 될까요? 참된 예배가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감정까지 터치하는 그런 예배를 드리고 싶지 않습니까? 우리 예배가, 우리 삶이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예배요 삶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노아의 예배를 받으시고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악의 뿌리가 어떤 심판을 통해서도 쉽게 제거되지 않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죄는 징계나 심판으로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제 새로운 방법으로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코자 하십니다.


제 3 장. 무지개 언약 (9장 1-17절)


9: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하나님은 노아를 제 2의 아담으로 삼으시고 복을 주시고 번성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방주에서 나온 노아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제단을 쌓는 것이었고, 하나님이 제일 먼저 노아에게 주신 것은 ‘복’이었습니다. 복이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셔서 생육하고 번성할 수 있도록 돌봐주시고 힘을 주십니다. 더불어서 짐승들이 사람을 두려워하게 함으로 인간에게 만물의 영장으로서 권위를 부여하셨습니다. 또한 모든 산 동물들을 인간의 양식으로 주셨습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은 인간을 생존케 하시고 번성케 하십니다.


홍수이후 노아의 가족은 하늘의 먹구름만 보아도, 가랑비만 내려도 불안해졌을 것입니다. 또 다시 대홍수때와 같이 온 땅이 물로 뒤덮이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며 두려워 떨었을 것입니다. 노아의 가족들 뿐만 아니라 홍수 심판의 무서운 경험을 전해들은 후손들도 비만 오면 불안하고 두려워 떨었을 것입니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온 땅이 물로 뒤덮이지는 않을까 두려워 떨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대홍수의 트라우마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노아와 인간의 내면을 치유해 주시기 위해 선제적으로 도와 주십니다.


9:11-13절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멸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나와 너희와 및 너희와 함께 하는 모든 생물 사이에 대대로 영원히 세우는 언약의 증거는 이것이니라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와 세상 사이의 언약의 증거니라” 하나님께 우리에게 주신 언약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다시는 홍수로 멸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허물과 죄를 범할 때마다 하나님이 홍수심판을 내리셔서 쓸어버리신다면 얼마나 두렵습니까? 우리는 너무 부족하고 죄에 넘어질 때가 많은데 그때마다 하나님이 무서운 심판을 내리신다면 너무 두려워서 기를 펼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늘에 먹구름만 끼어도 또 홍수심판이 오지 않나 무서워서 간이 콩당콩당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영원한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다시는 홍수로 세상을 멸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언약의 증거로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셨습니다. 구름이 온 땅을 덮을 때에 무지개가 구름 속에 나타나면 하나님이 언약을 기억하시고 홍수를 내리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무지개가 언약의 증거가 됩니다.


무지개는 영어로 rainbow입니다. 무지개는 활 모양으로 생겼습니다. 무지개라는 말의 원어가 ‘케쉐트’로서 ‘활’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전쟁무기인 활이 아래를 향하고 있지 않고 위를 향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심판의 도구인 활을 사용하지 않겠다는 의미입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성품상 죄를 보면 진노를 쏟아 부으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화가 났다가도 무지개를 보면 자신의 언약을 기억하시고 화를 참으시게 됩니다. 무지개처럼 미소를 짓게 됩니다. “아이구 내가 참아야지” “얘들이 부족하잖아” 9장에 ‘내가’란 단어가 8번, ‘언약’이라는 단어가 7번이나 나옵니다. 이는 하나님이 참고 또 참고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무지개를 언약의 표징으로 삼으시고 스스로 그 언약에 매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무지개 언약은 은혜 언약이요, 사랑의 언약, 화평의 언약입니다. 이 무지개 언약은 후에 예수님을 통해 이루실 십자가 언약의 예표가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범한 죄에 대해서 그 진노를 우리에게 쏟아 붓지 않으십니다.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 진노를 쏟아 부으십니다.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십니다. 우리에 대한 심판을 거두십니다. 롬3:23-25절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하나님은 예수님을 화목제물로 삼으시고 그 피를 믿는 자의 죄를 간과해 주십니다. ‘간과한다’는 것은 ‘눈감아 주는 것’입니다. 내 죄로 봐서는 당장 심판하셔야 마땅한데 예수님의 대속의 피 때문에 진노를 참으시는 것입니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다가도 구름사이에 무지개가 뜨면 비가 그칩니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심판의 손이 올라갔다가도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내어 밀면 주님의 심판의 손이 내려옵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 언약입니다. 십자가 언약은 은혜 언약입니다.


무지개는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의미도 있습니다. 십자가가 그렇습니다. 죄 때문에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 때문에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새로운 산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히10:20). 그래서 십자가 언약은 화평의 언약입니다. 이 예수님의 사랑, 화평의 언약 때문에 우리가 지금도 심판받지 않고 은혜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수시로 허물과 실수와 죄에 넘어지지만 다시 일어나서 새롭게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은혜로 주신 이 십자가 언약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십자가 언약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감사 찬양드립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이와같이 일방적인 은혜의 혜택을 받은 우리는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합니까? 그를 정죄하는 마음이 아니라 심판하는 마음이 아니라 불쌍히 여기는 마음, 용서하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으로 대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무지개 언약을 주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결론입니다. 하나님은 죄로 병든 세상을 홍수로 심판하셨습니다.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하고 순종한 노아와 그 가족을 구원하시고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근본적으로 심령이 부패한 인간을 아시고 은혜의 역사를 이루기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무지개 언약을 인간에게 주셨습니다. 이 무지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예표합니다. 예수님을 바라보고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에서 벗어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무지개를 볼 때마다 죽어 마땅한 나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나의 죄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의 은혜를 기억해야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화가 나지만 참고, 내가 받은 은혜를 기초로 자비와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실천하고 전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