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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4년 로마서 3강 진리대로 심판하시는 하나님(로마서 2:1-16)2024-09-30 2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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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로마서 제 3 강 


진리대로 심판하시는 하나님


말씀/ 로마서 2:1-16

요절/ 로마서 2:2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지난 두 번의 로마서 주일 말씀을 생각해봅니다. 1:1-7절은 로마서 서론이었습니다. 8-17절에서 우리는 복음의 능력에 대해 배웠습니다. 지난 1:18-32에서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이방세계의 모습에 대해 배웠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3:20까지 계속하여 또 다른 두 그룹의 사람들의 죄를 드러내어 온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음을 선언합니다. 오늘 말씀은 그 다른 그룹의 첫 번째에 해당되는 사람들에 대한 내용입니다. 그들은 어떤 사람들이며 이들에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심판의 원칙이 어떠합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 진리대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1절입니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여기서 '판단'한다는 어떤 상황을 분별한다 또는 무엇을 해야 할지 판단한다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판단한다는 것은 ‘pass judgement’로 사람을 심판하다, 정죄한다는 것입니다. 법정에서 재판장이 피고인에게 유죄를 선고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서 사물과 사람을 분별하는 것은 매우 필요하고 중요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더 나아가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는 것이 잘못된 것입니다. 바울이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라고 할 때 그는 유대인들을 마음에 두었던 것으로 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가지고 있었기에 남을 판단하는 일을 잘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왜 남을 판단할까요? 우월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곧 자기가 남 보다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자기가 낫다고 여기는 것들은 모두 내적인 것이 아니라 외적으로 드러난 일들입니다. 외적으로 나타난 일들을 비교함으로 우월한 마음을 갖습니다. 누가복음 18:11 에 보면 바리새인이 어떻게 기도하였습니까? 그는 성전에 올라가서 서서 따로 기도하며 말합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그는 토색, 불의, 간음을 행하지 않았다, 동족을 괴롭히는 세리와 같지 않았다는 것을 상대적인 의로 삼았습니다. 겉으로 나타난 행위를 보고 판단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바리새인들이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원하는 자들이요..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겉으로는 경건하게 보일지 몰라도 그 내면은 교만과 탐욕으로 가득 차있음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행동으로 나타난 그 사람의 동기를 보십니다. 그 동기를 보시며 행동을 정확히 달아보십니다. 


1절을 다시 봅시다.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어떤 사람이 스스로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여기며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자는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동일한 일을 행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이를 볼 때 우리가 남을 판단하기 전에, 그 판단하고자 하는 것으로 자기를 먼저 판단해야 됨을 배웁니다. 남의 허물과 죄를 볼 때 나에게도 그러한 것이 있음을 인정하고 자기가 먼저 회개하기에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긴밀하게 동역하며 하나님의 역사를 섬깁니다. 동역자들끼리 기본적으로 서로 사랑합니다. 그런데 친밀한 모임이기에 남을 판단하는 일도 많이 생깁니다.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갑니다. (잠18:8) 자기만 아는 남의 프라이버시를 은밀하게 퍼뜨립니다. "내가 절대로 남에게 말하지 않기로 했는데... 음.. " 하면서 소근 소근 말합니다. 이런 말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어 없던 사실이 만들어집니다. 삼인성호라는 말이 있습니다. 세 사람이면 없는 호랑이도 만들어낸다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면 남을 판단하는 말을 하게 됩니다. 가십을 하게 됩니다. 가십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성을 파괴하고 친구 사이를 이간질합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이든지 잘 분별하되 항상 선한 쪽으로 해석하는 법을 훈련해야 합니다. 잘 모르는 것을 추측하지 말고 정말 기도하고 도와주고자 하는 마음으로 분별해야 합니다. 정말 판단하고 싶으면 그를 위해 진실된 마음으로 기도하고 도와줄 수 있는 만큼만 판단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를 알고 일체 판단을 중지하고 하나님께 맡기는 선한 자세를 갖기를 기도합니다. 


2절입니다.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누가 사람을 판단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오직 사람을 심판하시는 분은 하나님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심판 기준이 무엇입니까?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진리대로 됩니다. ‘진리대로’란 ‘공의에 따라’, 또는 ‘드러난 사실에 근거하여’란 의미입니다. 6절 말씀처럼 각 사람이 "그 행한 대로" 입니다. "공의"(just)라는 말은 "의롭다"는 뜻이지만 또한 "공평하다"는 뜻도 있습니다. 공평무사(公平無私) 정신이2장 전체에 나타나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낯을 봐주지 않으십니다. 그의 삶을 보십니다. 


바울은 복음 전파자로 살면서 사람들의 많은 판단을 받았습니다. 그를 오해하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심지어 그가 섬긴 양들과 동역자들도 그를 비난하고 배반하였습니다. 바울이 사람들의 댓글에 신경 썼더라면 그는 여러 번 화병이 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살았습니다. 고전4:3,4 입니다.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 

그는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판단하는 것을 매우 작은 일로 여겼습니다. 언제든지 양심에 떳떳하게 행하였습니다. 물론 그는 자기 양심이 떳떳하다고 하여 자기가 의롭다고 여긴 것은 아닙니다. 자기도 허물이 있지만 그 모든 것을 주님이 판단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결산할 때를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진실되게 살았습니다. 이러한 자세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어느 누구도 완벽하지 않습니다. 오해를 받을 수도 있고 비난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이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공의롭습니다. 우리의 마음의 동기까지도 보시며 정확하게 판단하십니다. 


때로 우리는 온 마음을 다해 주님을 섬겼는데 남의 오해를 받기도 합니다. 또 어떤 결과가 잘 나왔을 때 시기를 받기도 합니다. 자신도 모르는 말이 돌고 돕니다. 저는 얼마 전에 어떤 스텝 목자님으로 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제가 정말 무슨 말을 했냐고 확인하는 전화였는데 그 내용이 완전히 아닌 밤중에 홍두깨를 두드리는 말이었습니다. 너무나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왔습니다. 우리는 그런 경우를 당하면 누구라도 붙들고 하소연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십니다. 사람들의 판단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잘못된 판단도 시간이 가면 드러나기도 합니다. 또 그렇게 판단하는 사람들도 시간이 지나면 다 사라집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판단입니다. 하나님은 진리대로 사람을 대하는 심판장이십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 앞에 우리를 다 그저 무릎을 꿇고 긍휼을 구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 앞에서 양심적으로 최선을 다하여 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두려움과 떨림으로 오늘 하루를 하나님 앞에서 사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세상에서도 양심껏 살아 왔다고 자부하는 사람들, 자기 나름대로 성실하게 살아왔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도 목자로 부르심 받고 충성했다, 그동안 여러 양들을 섬기며 헌신했다 그러니 지금 좀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며 살더라도 하나님이 나를 잘 대해 주실 것이다 라는 마음을 갖기 쉽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어떻게 말합니까? 4,5절입니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우월감이나 특권의식은 하나님 앞에서 교만입니다. 누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의를 내세울 수 있겠습니까? 인자하신 하나님의 이러한 사람들을 오래 참으십니다. 그렇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어찌하든지 우리가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사람들이 되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해 주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떻게 오해합니까? "아, 하나님이 나를 의롭게 보시는구나" 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고집을 피우고 회개하지 않습니다. 이들의 문제는 처음 받은 은혜를 잊어버리고 마음이 굳어지고 높아진 것입니다. 고집과 회개하지 않는 대표적인 예가 애굽의 바로 왕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반복되는 징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내 보내지 않았습니다. "여호와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을 보내지 아니하리라!"(출5:2) 고집을 피웠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바로의 아들을 포함하여 애굽의 모든 장자들이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풍성한 인내와 참으심을 멸시하면 결국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납니다. 이를 볼 때 우리가 늘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심령을 새롭게 해야 됨을 배웁니다. 신명기 10:16은 말합니다.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 습관적인 죄가 우리의 마음을 딱딱하게 만듭니다.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가 우리 마음을 둔하게 만듭니다. (눅21:34) 고집과 회개하지 않는 마음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잃게 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 날에 임할 진노를 쌓게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회개하는 삶입니다. 회개하는 마음을 유지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집니다. 현재 우리 마음의 상태가 어떠합니까? 고집과 회개하지 않는 마음입니까? 아니면 마음에 할례를 받아 부드럽고 겸손한 마음입니까? 


오늘날 세상에 온갖 악한 소식이 가득합니다. 이러한 소식들을 들으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굳어집니다. 마음이 어두워지고 세상을 정죄하다가 마음이 딱딱해집니다. 이러한 세상에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그 은혜를 간직하는 사람이 복됩니다. 그런 사람의 마음에 감사와 은혜가 넘칩니다. 바울이 그러했습니다. 그는 디모데전서 1:15에서 말합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바울은 신앙이 성숙해 질수록 더욱 자신의 죄인됨을 깨닫고 주님 앞에서 겸손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제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시는 원칙과 기준이 무엇인가를 밝혀 줍니다. 6-8절입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


첫째, 하나님은 각 사람을 그 행한 대로 심판하십니다. 어떤 교회 출신이냐? 어떤 선교단체 출신이냐? 어떤 집안 사람이냐? 단체로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심판하십니다. 또한 "그 행한 대로"입니다. 그런데 로마서 1:17절에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였는데 여기서는 행한 대로 판단하신다니 좀 헷갈린다고 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행한 대로라는 것은 행위로 구원을 받는다는 그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없어도 선한 일을 많이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그런 행위가 아니라, 그 사람의 믿음이 겉으로 나타나는 행위를 말합니다. 사람이 참된 믿음이 있으면 그 믿음이 그 사람의 말과 행위로 나타납니다. 그 행위를 보면 그 사람이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대상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지만 우리의 그 믿음은 사람의 눈에 보입니다. 마음에 소원이 있다, 사랑이 있다, 믿음이 있으면 행위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행동을 달아보시는 분이십니다. (삼하2:3) 저울에 달면 무게가 정확히 측정이 되듯이 우리의 마음에 있는 것들도 나타난 행동을 통해 정확히 측정됩니다.


둘째, 현재 무엇을 추구하는가에 따라 심판하십니다.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한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영광과 존귀는 하나님의 고유한 성품입니다. 썩지 아니함 역시 하나님의 불멸성을 말합니다. 결국 선을 행한다는 것은 도덕적인 차원을 넘어 하나님의 영광과 존귀와 영원함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을 추구하며 하나님을 즐거워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는 예배자가 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참아야 합니다. 인내해야 합니다. 악한 세상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을 지속적으로 추구하는 삶이 선을 행하는 삶입니다.


여기서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은 모두 현재형 동사입니다. 현재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과거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추구했다가 아닙니다. 미래에 선을 행하는 즉,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추구하겠다가 아닙니다. 현재가 중요합니다. 또한 '구한다’는 것은 인생의 목적과 방향을 의미합니다. 그러한 목표와 방향이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전 생애에 일관되게 추구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삶을 지속적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의인이 돌이켜 그 공의에서 떠나 죄악을 범하면 그가 그 가운데에서 죽을 것이고 만일 악인이 돌이켜 그 악에서 떠나 정의와 공의대로 행하면 그가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 (겔 33:18,19) 과거에 어떻게 살았든지 현재 어떻게 사는 것에 따라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이 말씀은 우리가 지금까지 어떤 삶을 살아왔든지 상관없이 지금 회개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라고 도전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사람에게 영생으로 하십니다. 영생은 죽음의 요소가 전혀 없는 삶,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는 영원히 복된 삶입니다. 이는 우리 인생이 추구할 최고의 가치입니다. 영생은 우리가 죽고 나서 비로소 얻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삶을 살아갈 때 이미 얻습니다. 그 영생을 이 땅에서 누리며 살아갑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며 누리는 마음 깊은 곳의 평강은 이 영생을 얻은 기쁨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한편 진노의 보응을 받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입니다. 여기서의 ‘당을 짓는’ 은 헬라어는 "토이스 여스 에리데이아“ 인데 이는 분파를 형성한다는 뜻보다는 자기의 이기적인 야망을 좇는 것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NIV에는 ”self seeking“ 으로 번역합니다. 결국 하나님이 영생을 주시는 사람은 ”God-seeking“하는 사람이며,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사람은 ”Self-seeking“ 하는 사람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되었습니다. 우리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십니다. 지금도 우리의 호흡을 가능하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 되는 것이 마땅합니다. 마귀는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면 우리는 하나님의 노예가 되어 불행할 것이라고 속삭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다른 말로 하나님을 구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 때, 우리도 가장 가치 있는 존재가 되며 가장 행복합니다. 반면에 창조주 하나님을 부인하고 자기만을 위해 살 때, 즉 ”God-seeking“이 아니라 ”Self-seeking“의 삶을 살 때 우리 스스로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으로 전락해 버립니다. 


“Self-seeking” 곧, 자기를 구하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자기 이름, 자기 영광, 자기 쾌락, 자기 유익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모든 중심이 I, My, Me 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속한 영광과 존귀와 불멸을 구하지 않고, 자기를 구할 때 그는 결국 진리를 떠나 불의를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결국 포인트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추구하느냐, 나를 추구하느냐? 영원한 것을 추구하느냐? 나의 욕망을 추구하느냐? 영원한 것을 추구하는 사람은 영생을 누립니다. 이 땅에서부터! 그렇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습니다. 이 땅에서부터! 우리 마음에 영생의 기쁨과 평강이 있습니까?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의 삶의 방향과 목적을 돌아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9,10절입니다.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며 선을 행하는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라" 8절의 진노와 분노가 9절에서 환난과 곤고로, 7절의 영생이 10절에서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으로 바뀌었습니다. 환난은 외부로부터의 압박 때문에 고통하는 상황입니다. 구약에서는 이방인의 압제를 받는 이스라엘의 상태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사 8:22)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영혼은 이방인의 압제 아래 있는 이스라엘처럼 짓눌려 고통하며 신음합니다. 반대로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습니다. 9,10절 모두 ‘먼저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라’는 후렴구가 있습니다. 각 사람의 행위에 대한 보응이 유대인과 헬라인에게 예외 없이 적용된다는 말씀입니다. 유대인이라도 악을 행하면 환난과 곤고를, 헬라인이라도 선을 행하면 영광과 존귀를 얻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조건을 보고 편애하거나 불공평하게 대우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의 내면을 보고 그 삶을 보고 행동을 달아 보십니다. 여기에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도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할 것을 추구해야 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12,13을 보면 당시 유대인들이 이방인에 대해 우월감을 가진 근거는 ‘율법이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들은 율법 없는 이방인들은 심판을 받는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율법을 가졌다고 자부심 가질 수 없습니다. 그들이 이방인과 같은 일을 행한다면 율법은 더 중한 심판의 근거가 됩니다. 율법은 들으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지키라고 주신 것입니다. 14,15절을 보면 이방인에게도 마음에 새긴 율법이 있습니다. 양심입니다. 그 양심이 자기 행위를 고발하기도 하고 변명하기도 함으로 마음에 새겨진 율법의 행위를 나타냅니다. 이러한 양심이 이방인에 대한 심판 기준이 됩니다.


16절입니다. "곧 나의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 복음은 구원의 기쁜 소식입니다. 그런데 복음이 기쁜 소식이 되려면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심판이 없다면 구원도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복음 전할 때 반드시 심판을 먼저 전했습니다. 사람들에게는 은밀한 것들이 있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 숨긴 죄, 악한 생각들이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입니다. 사람을 속일 수 있지만, 하나님을 속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은밀한 죄를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죄 사함 받아야 합니다. 이 땅에서 회개하고 죄사함 받으면 우리는 심판의 날 재판장이신 예수님 앞에서 담대함을 가질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세상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십니다. 또 세상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은 죄인들이 회개하기를 애타게 기다리시는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십니다. 우리가 각 사람에게 보응하시는 공의로우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먼저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하기를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