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
말씀 마태복음 15:1-28
요절 마태복음 15:19,20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증언과 비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는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
오늘 본문은 우리가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살아야 하는 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사람의 전통에 목숨걸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엇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까? 이시간 우리가 마음을 지키고 깨끗하게 하는 것이 왜 그리 중요한 지 잘 배울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갈릴리에 계신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루살렘 산헤드린에서 예수님을 주목하고 감시하고 흠을 찾고자 파견단을 보낸 것입니다.
그들은 어떤 문제를 발견했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이 장로들의 전통을 어긴다는 것이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손을 씻는 규례를 어긴 것이었습니다. 장로들의 전통이란 모세가 구전으로 전했다는 구전율법과 율법을 지키기위한 후대 사람들이 만든 시행세칙들을 뜻합니다. 그 가운데 손을 씻는 규례는 제사장들이 제사를 드리기 전에 몸을 씻는 것에서 착안하여 일반인들까지 확대한 것입니다. 식사하기 전에 손을 씻는 것은 위생적인 면과 종교적인 면 두 가지 이유였습니다. 특히 부정하게 여기는 이방인들이 있는 시장같은 데를 갔다오면 반드시 손을 씻도록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제자들이 이런 전통을 어긴 것을 심각하게 여기고 문제삼았습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이 무엇입니까? 3-9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오히려 그들이 그들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고 있고 그것이 심각한 문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그들이 고르반 전통으로 부모공경의 계명을 파괴하는 것을 지적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주셨습니다. 심지어 부모를 비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이라고 해서 그 계명을 강조하셨습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부모님께 드릴 것을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하면, 부모님께 드리지 않아도 된다는 전통을 만들었습니다. 이게 고르반 전통입니다. 더 중한 하나님을 잘 섬기면 부모님을 섬기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제사장이나 레위인들이 피치 못하게 하나님을 섬길 때 부모님을 섬기지 못함을 용인하는 율법을 일반인들에게 확장해 만든 전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외식하는 자 곧 겉과 속이 다른 사람들이라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처럼 하지만 사실은 부모님을 섬기기 싫어 그와같은 전통을 악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중에는 부모님께도 하나님께도 아무 것도 드리지 않는 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처럼 입술로만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들이었고 사람이 만든 계명을 중시하고 가르칠 뿐 정작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 하나님을 헛되이 경배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악영향을 받기 쉬운 무리들을 불러 그들을 교육하십니다. 종교지도자들의 말과 달리 예수님은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러운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와 바리새인들의 상태를 알려드렸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겸손히 주님의 가르침을 듣고 자신들을 돌아보며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전통을 어긴 것을 옹호하는 듯 보이는 예수님을 걸리적 거리는 존재로 여기고 어찌하든지 예수님을 제거하고자 하였습니다. 이제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그런 존재가 됨으로 예수님과 자신들이 위험에 처할 수도 있음을 제자들이 아뢴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뭐라 말씀하셨습니까? 예수님은 심은 것마다 하늘 아버지께서 심지 않으신 것은 뽑힐 것이니 그냥 두라고 하셨습니다. 그냥두라는 것은 신경쓰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편에서 가라지와 같은 존재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을 하나님께 맡기십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하나님이 우리보다 더 깊은 관심을 가지고 불꽃같은 눈으로 지켜보고 계십니다. 그러니 가라지 같은 자들은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묵묵히 하면 됩니다.
바리새인들의 죄가 심각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맹인이면서 맹인들을 인도한다고 나대며 자신들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파멸에 이르게 하기때문입니다.
15절을 보십시오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비유에 대해 설명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예수님은 비유라고 할 것도 없는 말씀을 하셨는 데 비유라고 하면서 설명해 달라니 베드로의 깨달음수준에 안타까움을 표현하셨지만 설명해 주셨습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나오기 때문입니다. 인체는 더러운 것은 구토나 설사를 통해 거부하거나 통과시킵니다. 그러니 씻지 않는 손으로 무엇을 먹는 것은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사소한 것에 대해 눈에 쌍심지를 키고 목에 핏대를 세웠습니다. 그들은 사소한 것들에 목숨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낙타는 삼키고 하루살이는 걸러내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보시기에 정말 중요하고 심각하게 여겨할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그 일에 목숨걸어야 할 정도의 일은 무엇입니까? 18절을 보십시오.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예수님은 정말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은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입은 마음의 출구로 마음에 쌓였던 것들이 입을 통해 밖으로 배출됩니다.
마음에서 나오는 더러운 것들은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19,20절을 보십시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는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 예수님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에서 선한 것들도 나옵니다. 하지만 인간이 타락한 후 마음은 만물보다 부패하게 되었고 순간순간 인간존재를 더럽히고 하나님의 눈살을 찌뿌리게 하는 것들이 나옵니다. 그 첫 번째로 언급된 것은 ‘악한 생각’입니다. 이것은 이후에 언급되는 7가지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중에 하나로 볼 수도 있지만 그 모든 것의 초기단계로 볼 수도 있습니다. 모든 말과 행위 이전에 생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즉 사람이 악한 생각을 하고 그 생각이 발전하여 악한 말과 행위가 됩니다. 악한 생각이란 선악의 기준이 하나님이시니까 하나님이 슬퍼하실만한 생각들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슬퍼하실만한 생각이 무엇입니까? 첫째 살인입니다. 살인은 다른 사람을 죽이는 행위인데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분노하고 멸시하는 것도 살인에 해당됩니다. 다음으로, 간음과 음란입니다. 간음은 자신의 배우자 아닌 사람과 육체적 관계를 맺는 것으로 상상으로 하는 것도 간음에 해당합니다. 음란은 성적 무질서, 난잡함으로 간음보다 훨씬 광범위합니다. 도둑질은 남의 것을 훔치는 것인데 물질적인 것뿐아니라 다른 사람이 행한 공적을 가로채는 것도 도둑질입니다. 컨닝도 그에 해당됩니다. 마지막으로 거짓증언과 비방입니다. 거짓증언과 비방은 상대방을 억울하고 화나게 하는 것으로 가장 악독한 죄중 하나이며 무엇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에 심각한 죄입니다. 거짓증언과 비방의 원조는 마귀이며 그런 짓을 하는 자들은 마귀와 같은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더럽히는 것들을 십계명 순서에 따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음이 더럽혀지는 것을 심각하게 보셨습니다. 왜 우리가 마음의 더러움에 민감하며 마음을 깨끗하게 하기에 힘써야 합니까? 마음은 생명의 근원이며 성령의 좌소이기 때문입니다.
첫째로, 마음은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잠언 4:23절을 보면 “모든 지킬만한 것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잠 4:23) 라고 했습니다. 마음은 생명의 근원이기에 마음을 더러움에 방치하면 그 사람은 생명력이 없어집니다. 점점 무기력한 중풍병자처럼 됩니다. 삶이 무기력하고 패배적인 삶을 삽니다. 그러니 우리가 마음관리를 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얼굴은 사람들이 보니까 좀 관리하는 데 마음은 한 주, 한 달 그냥 더러움과 악에 방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결국 마음관리를 안하는 것은 삶으로 곧 드러납니다. 그러니 우리가 보이는 얼굴이상으로 마음을 철저히 관리해야 하겠습니다.
둘째로, 마음은 성령의 좌소이기 때문입니다. 노아시대 사람들은 음란했고 생각하는 것이 항상 악했습니다. 그러자 이를 지켜보신 하나님께서 어떤 결정을 내리셨습니까? 하나님의 영이 사람과 함께 할 수 없다는 결정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떠나자 사람들은 육체가 되었습니다(창 6:2,3,5). 사람의 가장 큰 행복과 기쁨은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떠나면 그 사람의 삶에 성령의 역사가 사라집니다. 자신에게서 아무런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을 때 그 사람은 가장 우울하고 슬픈 존재가 됩니다. 여러분은 이런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그러지 않기 바란다면 우리는 자신의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은 금그릇이나 은그릇을 쓰지 않으시고 깨끗한 그릇을 사용하십니다. 코로나 기간 우리는 사람들이 보지 않는 가운데도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훈련을 감당해야 합니다. 프로는 누가 보지 않아도 자기를 관리합니다. 우리가 코로나 기간 영적 근육을 키우고 마음을 단련하여 하나님이 쓰실만한 깨끗한 그릇들로 빚어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상과 같은 이유로 마음이 더럽혀지는 것은 사람에게 가장 심각한 문제입니다. 마음을 지키는 것은 생각을 지키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아무도 보지 않는다고 해서 생각을 함부로 하지 말아야 겠습니다. 때마다 더럽고 악한 생각들을 회개하고 예수님의 보혈로 정결케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생명력이 있고 성령이 함께하시고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들이 다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예수님이 갈릴리 지역을 떠나서 북쪽 이방지역인 두로와 시돈으로 가셨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종교지도자들의 이목을 피해 제자양성의 시간을 갖고자 하신 것같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한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 예수님을 간절히 찾았습니다. 그 여자는 가나안 여자였습니다. 참고로 가나안 민족은 어떤 민족입니까? 고대에 죄악이 극에 달하여 하나님이 심판하기로 작정하셨던 민족입니다. 하나님없이, 말씀없이 살아 근친상간, 동성애, 수간의 죄까지도 일삼던 자들이었습니다(레 20장).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심판을 대행하여 가나안 민족을 멸절하고자 했었습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수로보니게 여인이라고 나오는 데 굳이 가나안 여자라고 한 것은 그녀가 구약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는 여자임을 말하고자 함입니다.
그 가나안 여자가 주님께 뭐라 외치며 호소했습니까?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 다윗의 자손” 이란 말은 그리스도의 별칭으로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약속된 구주, 하나님이 보내신 인생문제의 해결자를 뜻합니다. 그녀는 예수님께 도움을 요청하며 자신의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다고 말했습니다. 귀신들렸으니 사람의 손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흉악히’ 라는 말은 ‘위험할만큼 해로운’의 뜻으로 귀신이 딸 아이를 정말 아슬아슬하고 위험스런 지경으로 몰아갔음을 보여줍니다. 예컨대 날카로운 흉기에 자신의 얼굴을 찧거나 자해소동을 벌이기도 하였습니다.
이 여자는 딸로 인해 애간장이 녹고 하루하루를 지옥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그녀가 예수님께 도움을 요청할 때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말했는 데 이는 자신이 스스로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상태요 오직 주님의 불쌍히 여기심만이 자신을 지옥같은 상황에서 구해낼 수 있다는 고백이었습니다. 또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는 것은 딸의 문제가 곧 자신의 문제요 딸과 자신이 공동운명임을 말한 것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렇게 호소할 때 평소의 예수님이라면 즉각 여인을 부르시고 소원을 묻고 고쳐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예수님은 다르십니다. 그녀의 그러한 간청에 한마디 대답도 않으셨습니다. 여자는 계속하여 간청했습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제자들은 이 여자의 소리가 시끄럽기도 하고 하도 딱해 보여 예수님께 도움을 줘서 보내야 되지 않겠냐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뭐라고 하시면서 거절하셨습니까? “나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24) 이 말씀은 복음역사의 원칙을 선언한 말씀이었습니다. 그 원칙에 기초해 자신은 이방인 사역을 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이었습니다. 물론 자신은 이스라엘 백성들 사역을 하시고 후에 제자들이 이방인사역을 하실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은 그 사역원칙에 기초해서 이방인 여자의 간청을 듣지 않겠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때 뒤에서 소리 지르던 여자가 이제는 예수님앞에 와서 절하며 “주여 저를 도우소서” 간절히 엎드려 호소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 여인을 향해서 직접 어떤 냉담한 말씀을 하셨습니까?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26)”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자녀들이고 이방인들은 개들과 같으며 당신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다고 매우 도발적인 발언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여자는 감정적으로 맞대응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스라엘 중심이고 이방인들을 지나치게 비하하는 발언처럼 보였습니다. 여인에게는 인간적인 생각, 민족감정이 솟아날 수 있었습니다. 역사상 이스라엘은 가나안 민족을 도륙하고 멸절시킬려고 했던 민족이 아닙니까? 그 원한과 미움까지 끄집어 내어 예수님을 향해 “왜 사람을 차별하십니까?” 하며 “개실망”했다며 예수님과 한바탕 싸울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여자는 감정적이 되지 않고 어떻게 말했습니까? 27절을 보십시요.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 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첫째 이 여자는 겸손한 태도로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였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택하신 선민임을 인정했습니다. 또한 자신의 민족이 개같은 민족임도 인정했습니다. 성경에서 개라는 표현은 본성대로 사는 더러운 사람들을 뜻하는 말입니다. 말씀도, 하나님도 없이 산 가나안 민족은 하나님앞에서 개처럼 살아온 것이 맞습니다. 그녀는 자기 민족과 자신이 심판받아야 마땅할 자들인데 개정도로 봐주는 것도 감사했습니다.
둘째, 그녀는 주님의 은혜받기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는 은혜를 누립니다. 주인은 자비로워서 개들에게 부스러기를 던져줍니다. 여인은 주님의 자비를 믿고 그런 은혜라도 자신에게 달라고 끝까지 겸손히 간청했습니다.
우리는 여인에게서 겸손과 지혜를 배웁니다. 이 여인은 그 옛날 다윗을 감동시킨 아비가일처럼 겸손하고 침착하고 지헤로웠습니다.
여인에 대해서 이상하리만큼 매몰차게 대하셨던 예수님은 이제 이 여인에게 어떤 말씀을 하십니까?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28) 예수님은 그녀의 믿음이 크다고 칭찬해주셨습니다. 그녀의 믿음은 얼마나 큽니까? 태산처럼 큽니다. 태산은 요동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얼마나 예수님을 신뢰하였는 지 예수님이 자신을 어떻게 대하시든지 거기에 따라 요동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믿음이 작아 바람에 나는 겨와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좀 잘 대해주시면 기뻐서 촐삭대다가 조금만 차갑게 대하시면 요동치고 까불림을 당합니다. 가나안 여인은 예수님이 자신을 어떻게 대하시든지 변함없이 예수님의 성품과 능력을 신뢰했습니다. 그녀는 진짜 겸손한 여인이요 지혜로운 여인이요 무엇보다 큰 믿음의 여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때로 우리의 간절한 호소를 외면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또 나에게만 비정하게 대하시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왜 주님이 이렇게 하십니까? 나의 믿음의 그릇을 알고 계시기에 나를 시험하시고 나의 믿음을 드러내시고 나를 믿음의 모델로 삼기 위함입니다. 주님은 감당할만한 사람에게 감당할만한 시험을 주십니다. 감이 안되는 사람들에게 절대 심하게 대하지 않고 말한마디도 골라서 하고 유리구슬 다루듯 하십니다. 우리가 나를 잘 아시고 연단하시는 주님을 끝까지 신뢰하고 태산같은 믿음으로 주님께 나아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여인이 큰 믿음을 가진 것을 칭찬하시고 그녀의 소원이 이루어 주십니다. 그러자 도저히 해결될 것같지 않았던 딸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흉악한 귀신이 나가고 딸이 순하고 예쁜 딸이요 기도의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결론입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 무엇을 중시하고 힘써야 하는 가를 배웠습니다. 우리가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것을 가장 중요시 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모두가 누가보든 안 보든 마음을 지키고 정결케 하여 생명력이 넘치고 성령이 함께 하시고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증언과 비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는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19,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