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마태복음 제 25 강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말씀 마태복음 17:1-21
요절 마태복음 17:5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 지라”
학생들이 공부하는 고난을 얼마나 싫어합니까? 한 학생이 열심히 시험 준비를 했습니다. 그런데 일어나 보니 꿈속에서 준비한 것이었습니다. 실제 공부는 미루다 미루다 결국 아무 것도 못하고 잠들었던 것입니다. 그가 시험 직전에 서원기도를 합니다. 하지만 그런 경우 하나님이 들어주시는 것은 극히 드뭅니다. 결국 낭패를 당하고 맙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크고 작은 일에서 고난을 싫어하고 안일을 좋아하며 고난은 감당하지 않으면서 영광 받기는 좋아합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고난을 싫어합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왜 고난의 길을 걸어야 합니까? 또 어떻게 고난의 길을 기쁨으로 걸을 수 있습니까? 그 비결이 오늘 본문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시간 그 비결을 우리가 잘 배우고 고난의 길을 적극적으로 걸어 갈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고난에 대해, 그리고 제자들이 걸어야 할 자기부인 자기십자가의 길에 대해 말씀하신 후 엿새가 지났습니다.
예수님은 수제자격인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왜 세 제자만을 데리고 가셨을 까요? 예수님은 이 세 제자만을 데리고 어디론가 가신 적이 세 번 있습니다. 먼저는 야이로의 딸을 부활시킬 때였고(막 5:37). 다음은 바로 이곳이고, 그 다음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간절히 고뇌하며 기도하실 때였습니다(마 26:37).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세 제자는 초대교회를 앞장서서 이끌게 됩니다. 야고보는 가장 먼저 순교자가 됩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계시록에 나오는 두 증인처럼 많은 고난을 감당하며 초대교회를 이끕니다. 예수님은 제자들 중에서도 가장 많은 고난을 감당할 세 제자들을 특별히 섬기셨습니다.
본문의 높은 산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가까운 헬몬산이라고 하기도 하고 가버나움에서 가까운 다볼산이라고도 합니다. 산은 예로부터 신령하고 영광스러우며 거룩한 면모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훗날 베드로는 이 날의 사건을 회고하면서 거룩한 산에서의 체험이라고 말했습니다(벧후 1:16-18).
예수님은 그 거룩한 산에서 세 명의 제자들 앞에서 변형되셨습니다(3). ‘변형’된다는 것은 질과 형체가 달라지는 것을 말합니다. 같은 존재인데 다른 질과 형체의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자로서 소박하고 초라한 모습에서 얼굴이 해처럼 빛나고 옷은 빛과 같이 희어지셨습니다. 이 모습은 예수님이 부활승천하시고 다시 재림하실 모습입니다(계 1:13-16) 이렇게 예수님의 변형된 모습을 수제자들에게 보여주신 이유는 예수님의 죽음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음을 알려주어 고난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하심이었습니다. 또한 주님이 부활하시고 영광스런 모습으로 재림하실 때 제자들도 그 영광의 몸을 덧입을 것을 바라봄으로 이 땅에서 고난의 길을 적극적으로 걷도록 하심이었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변형되었을 때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그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에 대해 말했습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구약을 대표하는 선지자들로 결국 예수님의 죽으심이 실패가 아니라 구약성경의 성취이며 진정한 성공임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또한 모세와 엘리야는 주님의 역사를 섬기다가 많은 고난을 받은 분들이 아닙니까? 특히 원망과 불평, 거역과 불순종 그리고 낙심과 절망의 고난을 겪었습니다. 이런 그들이 주님의 영광중에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제자들도 주와 복음을 위해 고난을 받을 때 장차 영광에 이를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베드로가 무엇이라 말했습니까? 4절을 보십시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베드로는 영광중에 초막을 짓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초막이란 임시거처 입니다. 베드로는 사랑하는 주님과 위대한 주님의 종들과 함께 영원히 영광중에 거하고 싶었습니다. 그는 자기부인이나 사명의 십자가와 같은 고난은 감당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누구나 베드로와 같은 마음입니다. 옛날 노래 중에 “저 푸른 초원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님과 함께 한 백년 살고 싶어”라는 노래가 있었습니다. 우리도 고난은 싫고 영광의 초막에 거하고 싶고 가시밭 길은 싫고 꽃 길만 걷고 싶습니다.
그러면 이런 베드로의 제안에 주님은 “나도 원한다, 어서 초막을 지어라” 라고 하셨습니까? 5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 지라. 베드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하나님의 두려운 임재가 있었습니다. 엄위하신 하나님은 두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가 맞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제자들은 자기 생각을 버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분이 맞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한다고 하니 그것이 흔들렸습니다.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부정적으로 이해했고 예수님이 고난 받고 무력하게 돌아가신다면 그리스도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렇게 흔들리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셔서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맞음을 친히 확증해 주신 것입니다.
둘째로, 제자들은 본성의 소리 대신 예수님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얼마 전 베드로는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신다고 하니 그래서는 안 된다며 예수님을 뜯어 말렸고 예수님을 책망까지 했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우리도 모두 고난보다는 영광가운데 초막을 짓고 편안히 살고 싶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고난을 감당하라는 주님의 소리를 들으라 하십니다.
일반적으로 본성이 요구하는 소리를 들으면 당장에는 좋습니다. 학생들이 공부를 지금해야 한다는 소리 대신에 나중에 하면 되니 지금은 좀 쉬고 즐기자는 소리를 듣고 장막에서 뒹글뒹글하면 어떻게 됩니까? 시험도 망하고 장학금도 다 날아갑니다. 우리는 본성의 소리를 거부하고 고난을 받으라는 주님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지금은 힘들지만 나중에 영광을 누립니다. No Cross No Crown, No Pain No Gain, No Sweat No Sweet입니다. 어느 학원 벽에 쓰여진 글입니다만 이는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우리가 삶의 태도 면에서 뿐 아니라 제자로서 근본적으로 이 땅에서 고난의 길을 걷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 마음에 고난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받으셨으니 이제 우리는 어떤 고난도 받을 필요는 없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생각은 틀립니다.
예수님이 구속을 위한 고난은 다 감당하셨으나 완성된 복음을 전하는 고난을 남겨 두셨기 때문입니다. 이 고난에 대해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골로새서 1:24절입니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채우노라”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은 복음을 전파하여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 고난입니다.
복음을 전파할 때 사람들이 잘 받아들이면 왜 고난이 되겠습니까? 세상은 소돔과 같습니다. 자기 생각과 판단을 기준으로 살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니, 선과 악, 옳고 그름, 회개 등을 이야기하면 듣기 싫습니다. 소돔사람들은 롯을 밀치며 폭행하려 했습니다. 오늘날도 복음을 전할 때 투명인간 취급하고 심하면 상처주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복음전파는 특별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만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말로 복음전파의 고난을 회패해 보려 하지만 복음전파의 의무, 복음의 사도의 직분은 복음을 영접하는 순간 모든 사람에게 즉각 부여됩니다(롬1:5). 복음의 속성상, 진정으로 복음을 영접한 사람은 그것을 전파하지 않고 살 수가 없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복음을 전파하지 않고 잘 살 수도 있다면, 그는 복음을 진정으로 영접하지 않은 사람이거나 혹은 이미 양심이 화인맞은 사람일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전파의 사명을 받고도 자신의 평안과 안일만 추구하며 초막가운데 거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하나님의 두려운 임재와 현현이 있습니다.
모세는 이방여인인 십보라와 결혼했습니다. 십보라는 표면적으로 모세를 따라 애굽 선교사로 나가지만 별로 믿음이 없었습니다. 모세는 자신의 자녀들을 아브라함의 전통을 따라 할례를 시키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십보라가 인간적인 이유로 반대했습니다. 이때 모세는 하나님보다 아내를 사랑하여 아내의 뜻을 따르려 했습니다. 그런데 이때 하나님이 어떤 극약처방을 내리셨습니까? 하나님이 십보라에게 나타나셔서 그녀가 사랑하는 남편 모세를 죽이려 하셨습니다. 남편을 잃고 싶지 않았던 십보라는 그제야 깜짝 놀라며 자식들을 할례 시키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 (출 4:20-26) 이렇게 해서 십보라는 하나님중심, 사명중심의 여인으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부르심에 대한 분명한 자세를 잃고 헤메고 있을 때 정말 피를 보게 하실 수도 있으십니다. 바울은 자신이 복음 전하는 것을 자랑할 수 없는 게, 부득불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고전 9:16). 이는 그가 복음을 전하고 싶어 전할 때도 있지만 많은 경우는 하고 싶지 않아도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라도 복음을 전한 이유를 바울은 자신이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자신에게 화가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고전 9:16).
우리가 사명을 받고도 정욕과 안일과 본성의 소리에 따라 살 때 하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여러 번 사인을 주셨는데도 계속 그런 길을 가면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십니다. 그 심히 두려운 임재를 통해 정신을 차리도록 도와주십니다.
저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예수님을 만났는데 지금까지 세 번 예배에 빠졌습니다. 그 때마다 사고를 당했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는 장티푸스에 걸려 병원에 실려 갔습니다. 중학교 2학년 때는 깨진 유리병에 손가락이 잘려, 병원에 실려가 마취 없이 7바늘을 꿰맸습니다. 대학교 1학년 때는 휴양지에서 바위 위에서 뛰어내리다가 바위에 붙은 굴 껍데기에 다리가 찢겨져 군위생병이 와서 마취 없이 12바늘을 꿰맸습니다. 저는 그 다음부터 예배에 빠지지 않습니다. 영혼구원보다 운동에 빠져 있을 어느 날은 “네가 놀 때가 아니다”라는 성령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복음운동에 전념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떻게든지 주와 복음을 위해 고난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장차 영원한 거처에서 주님과 함께 영광누리기를 원하십니다. 고난은 우리의 본성과 배치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때마다 자기 본성의 소리에 순종하기보다 주님의 소리를 듣고자 애써야 합니다. 요새 사람들은 풀의 꽃처럼 사라질 임시거처인, 초막에 관심이 많습니다. 초막 위치, 초막 평수, 초막 값, 초막 소유권 등입니다. 우리가 잠시잠간의 이 땅에서의 초막의 평안과 안일보다, 영원한 거처에서 받을 영광을 바라봐야 하겠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영적 귀와 영원한 영광을 생각하는 참된 지혜와 통찰력을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제자들은 하나님의 현현 앞에 심히 두려워 죽은 자처럼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일으켜 세우시고 함께 산에서 내려오셨습니다. 내려오시면서 본 일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 말씀하셨는 데 사람들이 또 영광의 주님의 모습을 오해하여 예수님을 정치적인 왕으로 삼고자 해 그리스도의 길을 방해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을 확실히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의구심이 생기는 것은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 선구자는 어디 있는 가 하는 것이었습니다(말 4:5,6). 예수님은 이미 선구자가 왔으나 사람들이 함부로 대했고 그리스도도 그렇게 대우할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고난과 죽음을 부정적으로 보기 때문에 고난을 받고 죽은 세례요한이 선구자인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은 고난과 죽음을 부정적으로 보는 눈을 고쳐야 합니다. 오히려 고난과 죽음이 진정한 주님의 종과 그리스도의 표식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산에서 내려왔을 때 한 사람이 나아와 예수님께 도움을 호소했습니다. 그의 아들은 간질에 걸려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간질은 의학적으로 뇌전증인데, 뇌가 과도하게 흥분하여 온 몸이 경련을 일으키는 질병입니다. 거품을 물고 발작하며 불속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물속에 뛰어들기도 합니다. 본문에 보면 이 간질의 원인은 귀신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간질로 고생하는 그 아들과 그것을 지켜보는 아버지는 얼마나 많은 마음고생을 하며 살아왔을 까요?
그 아버지는 수많은 노력을 했지만 자기 힘으로는 도저히 아들의 상태를 바꿀 수 없었습니다. 이런 그는 절망중에 예수님 소문을 듣고 희망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안 계시고 9명의 제자들만 있었습니다. 아이의 아버지는 그래도 예수님의 제자들이고 게다가 9명이나 되니 기대를 걸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아무런 영적 파워를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다른 복음서를 보면 제자들은 아이 아버지를 실망시켰을 뿐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 서기관들의 조롱을 받기까지 했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의 영적 무능을 개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영적 무능의 이유가 ‘믿음이 없고 패역하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영적 지도자들은 그 세대를 대표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영적 지도자가 믿음이 없으면 그 세대가 믿음이 없고 영적 지도자가 패역하면 그 세대가 패역한 것입니다. 영적 지도자가 귀신에게 쩔쩔 매면 그 세대가 귀신에게 쩔쩔 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1달 후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데, 제자들이 그와 같으니 실망하시고 염려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문제가 첫째, 믿음이 없는 것이고 둘째 패역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첫째로 제자들은 믿음이 없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있었는데 믿음을 까먹었습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내가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귀신을 쫒아낼 수 없지만 하나님은 쫒아낼 수 있고 우리는 불치병을 결코 고칠 수 없지만 하나님은 고칠 수 있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전도여행 때 겸손하고 단순하게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하나님을 단순하게 믿지 않고 있습니다.
둘째로 그들은 패역해졌습니다. ‘패역’이란 ‘구부러지다’, ‘왜곡하다’ 의 뚯입니다. 그들은 주님께 대한 단순하고 우직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세 제자만 데리고 어디론가 가신 것으로 마음이 구부러졌습니다. “예수님도 별 수 없어, 예수님도 세상처럼 사람을 차별하는 구나” “여기도 똑같네” 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주님과 하시는 일에 대해 구부러진 마음을 가지게 되면 모든 것이 왜곡해서 해석됩니다. 이런 사람은 매사를 단순하게 생각하지 못하고 항상 이 말에는 무슨 의도가 있나, 이런 조치에는 무슨 음모가 있나 맨날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이런 그의 머릿 속은 복잡해지고 주님께 대한 단순한 믿음을 잃어버립니다.
마음이 비뚤어지기로 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 얼마나 구부러진 생각을 할 수 있으셨습니까? “왜 죄 없는 내가 죽어야 해?” “왜 내가 버림받아야 해?” “왜, 나만 고난을 받아야 해?” 등등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뜻에 단순히 복종하셨습니다. 이 때 하나님은 예수님께 성령을 한량없이 부어주셨습니다. 우리가 주님과 그 역사에 대해 곧고 심플한 마인드를 가짐으로 성령이 충만하고 영적 파워가 있는 사람들이 다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귀신이 나가자 제자들은 자신들은 왜 귀신을 쫒아내지 못했는가를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대답하셨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이라도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리로 옮겨지라 하여도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예수님은 그들이 영적으로 무능해진 이유가 믿음이 작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도 없었습니다. 믿음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합니까? 겨자씨 한 알 같은 믿음만 있어도 산을 옮길 수 있습니다. 산은 큰 문제를 뜻합니다. 어차피 믿음이란 내가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이기에 문제의 크기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산 같은 문제든지, 산맥, 대륙같은 문제든지 상관없습니다. 문제가 큰 가 여부보다 내 믿음의 크기가 중요합니다. 분명히 제자들은 전도여행 시 믿음이 컸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인간적인 생각을 많이 하다 보니, 그 큰 믿음이 다 사라지고 담배씨처럼 작은 믿음이 겨우 남아 있었습니다. 그 믿음은 사탄이 까부르면 언제든지 저만치 훅 날아갔다 겨우 하나님의 은혜로 겨우 제자리를 찾는 믿음이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회개하고 다시 믿음을 키워야 합니다. 정말 우리 믿음이 바위처럼 커지고 산처럼 커진다면 우리가 못할 일이 없습니다. 힘든 학업, 직장, 제자양성, 자녀교육, 세계선교도 능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회복을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기에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생활이 믿음의 크기를 좌우합니다(22). 온전한 기도생활이 우리의 믿음을 회복시키고 크게 합니다. 기도생활도 고난입니다. 자기절제를 해야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에 헌신함으로 다시 믿음의 사람들로 회복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산적한 문제들이 믿음의 능력으로 해결되고 사명도 능히 감당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결론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평안히 초막을 짓고 고난 없이 살고 싶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고난의 길을 걷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영원한 거처인 하나님 나라에서 칭찬과 존귀와 영광을 누리는 사람들이 다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본성의 소리보다 주님의 소리를 듣고 고난의 길을 적극적으로 가므로 우리 모두가 참된 영광, 영원한 영광에 이르는 사람들이 다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특히 코로나 기간, 기도의 고난을 잘 감당하며 기도로 일하는 법을 배울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