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말씀/ 누가복음 13:10-35 요절/ 누가복음 13:24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오늘 말씀은 구원에 대한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구원의 길을 새롭게 깨닫고 만약 잘못된 길을 걷는 이가 있다면 이 길로 돌아오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또 바른 길을 걷고 있다면 이 길이 참 생명의 길이요, 구원의 길임을 확신하고 더욱 힘차게 걸을 힘을 얻는 귀한 은혜의 시간 되기를 기도합니다.
10-17절은 안식일에 병든 한 여인을 고치시고 그에 대해 분내는 회당장과 변론하시는 예수님에 대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열여덟 해 동안이나 귀신 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 심한 척추장애를 앓고 있던 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16절을 보면 예수님은 그녀가 그렇게 된 것은 18년간 사탄에게 매였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하나님 안에서 창공을 나는 자유로운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사람을 죄의 사슬에 매어둡니다. 이 매임에 묶인 자는 날이 갈수록 몸과 마음이 꼬부라지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 여자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말씀하심으로 18년 동안 사탄의 매임에 고통하던 그녀를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장면을 가만히 지켜보던 회당장이 분을 내며 말했습니다. 그는 차마 예수님께 대놓고 말하지는 못하고 빙 둘러 지켜보던 사람들에게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라 방향을 주었습니다.
15-16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그들도 안식일날 소나 나귀가 목이 말라 힘들어 하는 모습을 보면 그 매임에서 풀어 물이 있는 곳으로 데려가 물을 먹입니다. 엄밀히 따지면 가축을 매임에서 푸는 행위도 일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것이 안식일법을 어기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소나 나귀가 중동의 따가운 뙤약볕 아래 얼마나 뜨겁고 목마르고 힘들까를 그 소와 나귀 편에서 생각하고 깊이 헤아렸기 때문입니다. 자기 소유의 가축에 대한 애정과 사랑이 있을 때 그들은 누가 설명해 주지 않아도 이 행위가 안식일법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고 자동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본문의 여인에 대한 애정과 사랑이 없었고, 그녀의 편에서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안식일법을 철저히 지킴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그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브라함의 딸에 대한 동정과 연민이 없음으로 외식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18-19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을까 내가 무엇으로 비교할까 마치 사람이 자기 채소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 한 사람이 자기 채소밭에 겨자씨를 심었습니다. 겨자는 채소입니다. 일반적으로 채소씨가 그렇듯이 겨자씨는 매우 작습니다. 그런데 이 겨자가 성장하면 무려 4-5미터 크기로 성장합니다. 본래 채소임에도 나무처럼 커져서 나무라고 불렀습니다. 공중의 새들도 나무로 인정하고 그 가지에 깃들여 안식을 얻었습니다. 18절은 “그러므로”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18년간 사탄에 매여있던 한 여인이 그 매임에서 나음받은 것은 작은 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 작은 일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가 성장하여 큰 나무와 같이 됩니다.
20-21절을 보십시오. “또 이르시되 내가 하나님의 나라를 무엇으로 비교할까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가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하셨더라” 가루 서 말은 약 39리터 정도의 많은 양입니다. 이에 비해 누룩은 매우 적은 분량입니다. 그런데 이 적은 누룩이 밤 사이에 서 말 분량의 밀가루 반죽을 전부 부풀게 만듭니다. 이 부푼 반죽을 잘 구우면 부드럽고 맛있는 빵이 됩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의 은혜를 받은 한 여인은 그녀가 살던 마을 사람들 전체 수와 비교해 보면 매우 적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은혜를 체험한 이 작은 한 여인이 그녀가 살던 마을 전체에 예수님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바꾸어놓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특징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의 은혜를 체험한 작은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12제자를 단체로 부르지 않으시고 한 사람, 한 사람 인격적으로 나를 따르라 말씀하심으로 불러주셨습니다. 겨자씨와 같은 12명의 제자로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가 오늘날 온 세계에 퍼져 큰 나무를 이루었습니다. 우리 UBF 모임도 그러합니다. 미시시피의 부호의 딸로 태어난 Sarah Barry 양의 가슴에 전쟁의 상처로 찢긴 한국 민족에 대한 목자의 심정의 씨가 심겨졌을 때, 또 청년 이창우 전도사의 마음에 대학생들에게 줄 것은 없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주어야겠다는 결단의 씨가 심겨졌을 때 오늘날 90개국에 2천여명의 선교사를 파송한 모임이 되었습니다.
지난 여름 수양회에서 몇몇 형제 자매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심겨졌습니다. 어떤 형제는 말씀과 특강을 통해 하나님이 정말 살아계신 분이신 것을 체험하고 전율하였습니다. 어떤 형제는 십자가 말씀을 들으며 십자가 옆의 강도가 바로 자기라고 느껴졌고,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라는 주님의 말씀이 바로 자기에게 하는 말씀으로 들렸습니다. 수양회를 하는 기간 수양관 밖에서는 북한의 대륙간 탄도미사일(ICBM) 발사 소식으로 떠들썩하였습니다. 이에 비해 수양관에서 형제 자매들이 말씀받는 것은 세상의 관점에서 볼 때 관심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작은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작은 일을 통해 장차 세상을 변화시킬 위대한 일이 일어날 것을 믿고 참으로 기대가 됩니다.
22-35절은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시던 중 한 마을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23절을 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당시 유대인들은 유대인이면 출교를 당하지 않는 이상 무조건 다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한편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처럼 율법을 철저히 지켜야 구원받는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는 과연 전체 유대인들 중 몇 퍼센트나 구원받는지, 구원받는 것이 그렇게 힘들고 어려운 것인지, 경쟁률이 얼마나 되는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24절을 보십시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그의 질문에 예수님은 얼마나 구원받는지, 경쟁률이 얼마나 되는지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구원의 문이 좁은 문이라 하셨습니다. 어떤 점에서 구원의 문이 좁은 문입니까?
첫째, 구원의 문은 죄문제가 온전히 해결되어야 들어갈 수 있으므로 좁은 문입니다. 구원의 문은 어떤 특정 민족이나 혹은 단체에 속해있다고 해서 자동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유대인으로 태어나면 무조건 구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구원은 죄문제가 해결되어야 얻을 수 있습니다. 학생들이 의문을 가지고 공통적으로 질문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 죄값은 내가 받아야지 어떻게 다른 사람이 그 죄값을 받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각자 자기 죄값은 자기가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죄의 값은 영원한 지옥의 형벌입니다. 세상에 죄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이 죄 문제를 해결받을 수 있습니까? 오늘날 종교다원주의 시대에 많은 종교는 구원의 다양한 길을 제시합니다. 어떤 종교는 평생 참회하는 마음으로 살면 혹시 구원의 길이 열릴지 모른다고 말합니다. 어떤 종교는 선을 행하여 공덕을 쌓은만큼 지은 죄가 차감된다는 개념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돈을 번만큼 빚이 차감된다는 식이죠. 그러나 살인자가 아무리 참회를 하고 선을 쌓아도 그의 살인죄가 없어지지 않습니다. 이미 죄를 범한 자가 그 어떤 노력을 해도 그의 죄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보내주신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 한 분에게만 구원의 소망이 있습니다. 죄가 전혀 없으신 그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나의 모든 죄가 그의 죽으심 안에서 그 형벌을 받았고 대가를 지불하였습니다. 오직 이 예수님에게만 구원의 소망이 있으므로 구원의 문은 좁은 문입니다.
사람들은 언제든지 좀 부담스러운 것은 단체로 하기 원합니다. 예수님이 구원의 좁은 문이라고 하시면 교회다니면 단체로 구원받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문은 한 번에 한 사람씩만 들어갈 수 있으므로 좁은 문입니다. 특공대 선교교회로 알려진 UBF 회원증을 내밀거나 UBF 로고가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 단체로 쓱 들어갈 수 없습니다. 믿음좋은 목자님의 이름을 대고 그 분 양이라고 말하고 쓱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 구원의 문 앞에서는 마치 미국 입국 전에 출입국 심사관 앞에서 1대1로 인터뷰를 하는 것처럼, 누구나 주님의 질문에 1대1로 답을 해야 합니다. 예상되는 질문이 있습니다. 아마도 “너는 어떤 죄인인가?” 물으실 것입니다. 이때 “그냥 죄인이에요. 다 아시잖아요.” 하면 “구체적으로 어떤 죄인인가?” 물으실 것입니다. 그러면 “저는 세리 삭개오였습니다. 삭개오처럼 오직 자기만을 위해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저를 예수님께서 친구가 되어주시고 저와 함께 식사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을 만나고 변화되어 돈이 아니라 주님과 이웃을 위해 살았습니다.” 이렇게 구체적으로 어떤 죄인인가, 예수님은 나에게 어떤 은혜를 주셨는가 답변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둘째, 구원의 문은 세상의 문과 비교하여 좁은 문입니다. 하나님이 제시하신 구원의 문이 객관적인 기준으로 보면 결코 좁은 문이 아닙니다. 배가 나온 사람은 결코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좁거나 머리가 너무 크다고 들어갈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세상의 넓은 문과 비교할 때 좁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문은 가급적 단체로 한꺼번에 많이 들어올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사람도 많고 시끌벅적하고 재미있는 것도 많습니다. 그 안에서 폭죽 터지는 소리, 경품 당첨되는 소리, 행복 아이템을 파는 소리, 환호성 소리, 깔깔대며 웃고 떠드는 소리로 가득합니다. 이에 비해 구원의 문은 별로 재미가 없어보입니다. 책상펴놓고 성경공부하고 소감쓰고 발표하고 기도하고, 그 다음 주에 또 책상펴놓고 성경공부하고 소감쓰고 발표하고 기도하고, 그 다음 주에도 계속 그렇게 하다가 계절별로 아예 날받아서 수양관가서 몇 일간 먹고 자고 숙박하면서 하루종일 성경공부하고 소감쓰고 발표하고 기도합니다. 세상에 이렇게 재미없고 지루한 삶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래서 양들은 목자님 몰래 환락의 밤, 불타는 금요일(불금)을 즐깁니다. 하지만 성경공부를 하면 찔려서 이것을 또 회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실 짜릿한 세상의 삶과 비교하여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삶이 재미없어 보일 수 있습니다. 외로워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렇게 보일 뿐입니다. 진짜 최고의 관광지는 화려한 도심 한 가운데보다 아무도 찾지 않지만 파도치는 바닷가가 내려다보이는 비좁은 오솔길입니다. 사람이 많은 곳에 있다고 해서 외롭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주님과 단 둘이서 손잡고 오손도손 대화하는 그곳에 진정한 사귐이 있고 외로움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됩니다. 다른 무엇보다 온유하신 예수님의 그 겸손과 섬김과 사랑을 배움으로 참된 만족이 있고 기쁨이 있습니다.
셋째, 구원의 문은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야 하므로 좁은 문입니다. 저번 금요일 조에스라 선교사님 강의에서 “post-truth”라는 개념에 대해 들었습니다. 옥스포드 사전을 찾아보니까 “검증된 지식이나 수치 따위가 대중에게 중요하지 않고 개인적인 느낌이나 생각이 더 중요하다”는 뜻이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크리스챤들이 post-truth Christian입니다. 객관적으로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뜻보다, 내 개인적인 감정과 생각을 더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그 결과 성경 말씀도 자기가 좋아하는 말씀만 붙들거나, 혹은 주관적인 해석을 합니다. 물론 성경을 읽으면서 주관적인 느낌으로 은혜를 받는 것은 좋습니다. 하지만 결코 본문이 말하는 객관적인 진리들을 희생하면서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그 객관적인 진리들은 하나님이 오늘 나에게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오늘날 젊은이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것이 자기 하고 싶은 것, 자기 마음의 감정을 부인(deny)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자기 하고 싶은 것만 하면, 그 생각과 감정의 근원지에 죄가 있기 때문에 결국은 죄악된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을 기준하여 내 생각과 감정이 그 주님의 말씀에 부합하지 않을 경우 자기 생각과 감정을 부인해야 합니다. 이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정말 주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소원이 있다면, 또 주님께 도와달라고 기도한다면 주님께서 도와주십니다. 그러므로 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주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힘쓴다는 단어는 원문상 ‘아고니조마이’로서 영어의 agony에 그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이 단어의 의미는 올림픽에 나가는 운동선수가 상을 받겠다는 자세로 자신을 훈련한다, 전쟁에 나가는 병사가 승리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다해 싸운다 하는 것입니다. KJV에는 strive로, NIV에는 make every effort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구원을 얻기 위해 힘쓴다 하는 것은 다른 일상의 모든 활동을 다 멈추고 구원을 얻기 위해, 오직 그것만을 위해 힘쓰라 것은 아닙니다. 만약 그런 뜻이라면 모든 사람이 다 목회자가 되거나 풀타임 수도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본문에서 구원의 좁은 문을 들어가기에 힘쓰라 하신 뜻은 구원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고 여기에 삶의 최우선권을 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원을 받는 자들의 수가 적은가 하는 질문에 구원받는 이의 수가 많다 적다 혹은 구원이 쉽다 어렵다를 말씀하시는대신 구원을 얻으려 하는 자가 가져야 할 올바른 자세의 중요성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올림픽에 나가는 선수가 상을 받으면 좋고 못받아도 어쩔 수 없다 하는 생각으로 훈련한다면 결코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또 전쟁터에 나가는 병사가 전쟁놀이하는 가벼운 기분으로 나가거나, 한 손으로 스마트폰을 하면서 전쟁에 임한다면 필시 생명을 부지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와같이 구원을 얻으려 하는 자는 구원을 얻는 것을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일로 생각하고 그 구원을 얻기 위해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다하여 힘써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힘써야 합니까? 먼저는 하나님이 제시하신 구원의 길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기에 힘써야 합니다. 어떤 분은 성경공부 몇 번 해보고 아브라함 족보 나올 때 졸고, 물이 포도주 “되었다” 하는 부분에서 이제 그만 “되었다” 하고 성경공부를 그만둡니다. 이성의 한계, 세상 지식의 한계 앞에서 쉽게 포기합니다. 그러나 성경에 정말 구원의 길이 있다면, 내 영혼의 영원한 생명이 여기에 달려 있을지도 모른다면 최소한 3년은 성경을 꾸준히 공부해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레미야 29:13절은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만약 온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구한다면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이 주신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고 지키기에 힘써야 합니다. 로마서를 보면 예수님을 구주로 믿어 구원받았다고 생각한 자가 구원을 잃을 두 가지 위험에 대해 나옵니다. 먼저는 장기적으로, 또 지속적으로 죄에 거하는 생활(go on sinning 혹은 remain in sin)을 하는 것입니다. (롬 6:1) 오늘날 많은 크리스챤들이 습관적인 음란생활 또 술취함을 비롯한 여러 방탕생활에 빠져 있습니다. 어떤 이는 너무 연약해서 어쩔 수 없었다, 정욕만큼은 싸우려고 시도해 보았으나 그것은 인간의 본성 아니냐, 술은 사회생활에 필요한만큼 취하지 않을만큼만 마시려 했으나 어쩔 수 없이 취하곤 했다 말합니다. 그러나 천국 문 앞에서 우리 주님께서 물으실 것입니다. “그러한 죄들과 싸우면서 정말 너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 보았느냐? (Did you really make every effort to fight against them?)” 그 질문 앞에 No라고 할 수밖에 없다면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다음으로는 믿음을 잃어버리고 믿음으로 사는 것을 포기할 때 구원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롬 1:17) 사실 믿음으로 사는 것은 어느 시대이든 어렵습니다. 먹고 사는 것이 힘드니까 헌금으로 적금을 드는 것이 현실적이지 아닐까 생각됩니다. 천문학적인 액수의 자녀 교육비 등을 생각할 때 돈벌이가 가장 좋은 주일날 일하러 가는 것이 맞지 않은가 생각됩니다. 일단은 이 세상에서 먹고 살아야지 죽은 다음 천국에 가는 것이 나중에 생각할 일이라고 여깁니다. 이러한 사람은 천국문에서 주님께 변명할 것입니다. “주님, 현실 문제가 너무 심각했어요. 먹고 사는 것이 너무 힘들었어요.” 그때 주님께서 물으실 것입니다. “너는 정말 그 문제를 믿음으로 승리하기 위해 너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 보았느냐? (Did you really make every effort to overcome them and have victory in faith?)”
물론 성경 전체적으로 볼 때 몇 가지 면에서 죄를 범했다고 해서, 또 주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했다고 해서 구원을 잃는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구원은 나의 행위나 나의 의로 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 삶이 전반적으로 죄와의 싸움에서 늘 지고 습관적으로 타협하고 죄로 물든 삶을 산다는 것은 자기의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러시안 롤렛보다 더 위험한 도박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오랜기간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여 살지 않는 것은 내 믿음의 집이 겉보기에는 멀쩡해 보이지만 사실은 모래 위에 지은 집일 가능성을 보여주는 위험한 징조입니다. 어떻게 하나밖에 없는 나의 소중한 생명, 나의 영원한 운명을 가지고 이런 위험한 도박을 할 수 있습니까? 그 무슨 배짱으로 그렇게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이런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시속 200km를 질주하는 카레이서처럼, 밤마다 총을 들고 싸우는 갱단처럼 하루하루를 생명을 내놓고 살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은 간곡한 사랑의 음성으로 말씀하십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이 주님의 음성을 듣고 구원에 이르기를 힘쓰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24절을 다시 보면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하셨습니다. 이는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먼저는 들어가기를 그냥 구한다는 것입니다. (NIV: because many, I tell you, will try to enter and will not be able to.) 들어가기를 구한다는 표현은 다소 중립적인 표현입니다. 여기에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쓴다에서처럼 반드시 이 문을 들어가고 말겠다는 절박한 자세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 중에는 그러한 자세가 없는 이가 많을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그저 구원받기를 희망하는 자들 중에는 구원받지 못할 자가 많으리라 라는 것입니다.
이런 분들의 특징은 자꾸 미룬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뭔가를 별로 하고 싶지 않거나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자꾸 미루게 됩니다. 시험공부가 중요한지 알지만 하기 싫으면 자꾸 미룹니다. 직장에서 상사가 중요한 업무라고 지시했지만 자기가 볼 때에 그렇지 않은 것 같으면 미룹니다. 이런 분들은 신앙생활도 미룹니다. 언젠가는 성경을 읽어보고 교회도 다닐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 지금은 날라리처럼 신앙생활하지만 언젠가는 나도 사도 바울처럼 멋지게 제대로 한 번 신앙생활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언젠가는 결국 찾아오지 않습니다.
또 어려움이 찾아오면 쉽게 포기합니다. 사실 세상에서도 무엇이든 가치있는 것을 얻고자 하려 할 때에 쉬운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단돈 1만원을 벌려고 해도 힘들게 일해야 합니다. 원하던 대학이나 직장에 들어가려 할 때에 당연히 여러가지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구원만큼은 공짜로 편하게 얻으려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물론 구원은 값없이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 얻습니다. 개신교의 가장 핵심적인 교리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내가 마음으로 구원받기 바랍니다 라고 생각한다고 해서 자동으로 주어지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미리 준비하여 완성하신 그 구원의 길을 “내가 걸어감으로” 얻어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의 복음으로 활짝 열어놓으신 그 구원의 문을 “내가 들어감으로” 얻어지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생기는 여러가지 어려움을 참고 인내해야 합니다.
25절을 보십시오.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주소서 하면 그가 대답하여 이르뒤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구원의 문은 한 번 닫힌 후에는 결코 다시 열리지 않습니다. 주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은 구원의 문이 닫히기 전에 있어야 합니다.
26-27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의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그가 너희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 가라 하리라” 그들은 주님께서 말씀을 전하실 때 바로 그 거리에 있었습니다. 또 주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실 때 그 때 그 자리에서 그들도 같이 밥을 먹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전하시는 복음의 말씀은 귀 기울여 듣지 않았습니다. 마음으로 영접하지도 않았습니다. 오늘날 교회도 오고 여름수양회도 오고 각종 프로그램에 참여하지만 마음으로 주님을 나의 구주요 내가 믿고 따르고 순종할 주님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구원의 문이 닫힌 후 내가 주님을 안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주님께서 그들을 알지 못하신다는 것입니다.
28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예수님이 메시야로 오실 것을 믿고 바라보고 즐거워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을 바로 눈 앞에 보고서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를 거절했습니다. 심지어 그가 전하는 말씀을 듣고 그가 행하는 모든 기적을 보고, 그가 베푸는 떡을 받아 먹으면서도 그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하나님 나라 밖으로 쫓겨나게 됩니다.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됩니다. 반면 그를 믿음으로 죄사함받은 수많은 자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하게 됩니다. 먼저 하나님의 백성이 된 유대인들이 나중되고, 나중되었던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31절을 보십시오. 어떤 바리새인들이 헤롯이 예수님을 죽일 계획에 대해 알렸습니다. 예수님은 이에 굴하지 않고 메시야의 길을 끝까지 가실 것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결론입니다. 구원을 얻기가 어려운지 묻는 질문에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말씀해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정말로 구원을 받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의 소원이 있다면, 구원받는 것을 나의 삶에 가장 소중한 것으로 생각하고 거기에 나의 마음과 시간과 열정을 투자할 자세가 되어 있다면, 그렇다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주님의 약속입니다. 보십시오. 저기 구원의 문이 활짝 열려 있습니다. 이 구원의 문에 지금 들어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