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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2년 누가복음 23강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누가복음 12:35-59)2022-08-22 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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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누가복음 제 23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

 

말씀 / 누가복음 12:35-59

요절 / 누가복음 12:42

"주께서 이르시되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우리는 정보의 홍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날마다 각종 뉴스가 넘칩니다. 이번 여름에는 우리나라는 폭우로 인해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우리나라는 폭우이지만 유럽은 전례가 없는 사상 최고의 폭염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전 세계가 환경파괴와 기후변화로 인한 대가를 치르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나라 정치권은 바람 잘날 없습니다. 정치가 국민 수준을 못 따라 갑니다. 경제는 인플레이션과 경기침체로 문제가 심각합니다. 날마다 이런 뉴스를 접하다보면 우리 마음이 세상으로 많이 쏠립니다. 세상 뉴스의 문제는 우리의 관심을 그쪽으로 돌리게 하며 문제를 밖에서 찾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생각하기보다 남을, 안을 생각하기보다 밖을 주목하게 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언제나 안에 있습니다. 사람들의 속에 있고 내 자신 안에 있습니다. 사람들이 어떤 가치관을 갖고 살며 또한 내가 어떤 삶을 살아가느냐가 언제나 관건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가르쳐주십니다. 외적인 문제들에 집중하기 쉬운 시대에 우리 내면을 살피며 하나님 앞에서 바른 길을 가기를 기도합니다.

 

35-40절은 혼인 잔치 집에 간 주인을 기다리는 종의 비유입니다. 유대에서는 낮이 무덥기 때문에 주로 밤에 결혼식을 하였습니다. 주인이 결혼식에 가면 피로연이 언제 끝날지 모르기 때문에 집에 있는 종들은 깨어서 주인이 돌아올 때를 준비하였습니다. 당시에는 통신이 발달하지 않았기에 주인이 돌아오는 시각을 미리 알 수가 없었습니다. 도둑이 언제 올지 알면 자다가도 그때 깨어서 집을 지킵니다. 그런데 도둑은 언제 옵니까? 생각지 않은 때에 옵니다. 방심하고 있을 때 와서 집을 뚫고 세간을 훔쳐갑니다. 이와 같이 주인은 생각지 않은 때에 옵니다. 이경에나 혹 삼경에 올 수 도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충성스런 종들은 주인을 위해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서 기다렸습니다.

 

이 비유의 결론은 40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하시니라." "인자가 오리라"는 말씀을 통해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이 비유는 인자 곧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완성하시고 하늘나라로 가실 텐데, 그 예수님은 다시 오십니다. 그가 다시 오실 때 까지 우리 신자는 깨어서 주님을 기다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적으로 아무 일도 안 하면서 가만히 서서 기다리기만 하면 잘 기다릴 수 없습니다. 쏟아지는 잠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가 어떤 자세로 기다릴 것인가에 대해 이어서 청지기 비유를 주십니다.

 

42절입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청지기(오이코노모스)라는 단어는 요즘에는 잘 쓰지 않는 말인데 다른 번역에는 '관리인' 또는 '재산 관리인'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영어로는 "steward", "manager"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청지기는 자유인도 있고 종도 있었습니다. 여기서는 43 45절을 볼 때 후자의 경우입니다. 청지기 중에는 주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주는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있는 반면에, 남녀 종들을 때리며 먹고 마시고 취하는 악한 청지기도 있습니다.

 

이들의 근본 차이점이 무엇일까요? 자기가 청지기라는 것을 아는가 여부입니다. 자신이 청지기임을 아는 종은 그의 모든 소유가 주인으로부터 잠시 맡은 것이라는 것을 압니다. 주인이 곧 돌아올 것이고 주인에게 소유를 어떻게 관리했는지 보고를 해야 하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그 때를 생각하며 순전한 마음으로 열심히 관리합니다. 저는 지난주에 시카고에 가서 세계대표 이취임식을 하였습니다. 저의 후임자인 란 워드 목자님과 같이 앉아서 제가 그간 했던 일을 정리하여 인계를 하였습니다. 지난 4년간 했던 여러 국제 모임에 대한 정리, 많은 책임자들에 대한 임기와 앞으로의 인사, 특히 재정상황에 대한 정리와 인계인수가 있었습니다. 제가 그 직분을 영원히 하는 것이 아니라 임기가 정해져 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나의 맡은 직무, 또한 주어진 인생의 시간이 끝나게 되면 모든 것을 정리해야 할 때가 옵니다.

 

악한 종이 함부로 행한 것은 그 자신이 때가 되면 모든 것을 넘겨주어야하는 청지기라는 것을 깊이 인정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인이 더디 올 것이야, 아니 주인이 어디 있어, 아마 주인은 멀리 타국에서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르지" 하며 맡은 것을 자기 소유로 생각하기 때문에 먹고 마시고 취하며 방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나는 내 인생의 청지기라는 사실을 분명히 영접을 해야 합니다. 욥기 1:21은 말씀합니다.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사람들은 자기 인생은 자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결정하고 살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으로 부터 잠시 받은 청지기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것들이 무엇입니까? 나의 생명, 재능, 은사, 건강, , 물질, 내가 사는 집, 가족과 각종 소유물 등 다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들을 잘 사용하여 하나님께 유익을 드리라고 맡겨주신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깊이 영접할 때 우리는 게으르거나 방탕하지 않고 주님을 기다리는 자세로 깨어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성어거스틴은 젊었을 때 자기 인생은 자기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능력 있는 청년으로 세상의 성공과 출세를 위해 살았습니다. 육신의 정욕에 탐닉하였습니다. 이런 그가 로마서 13장 말씀을 통해 변화되었습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13:12-14) 그는 하나님이 자신을 일정 기간 세상에 살게 하신 것이요 마음대로 정욕을 위해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야 되는 존재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비신자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기에 거론할 대상은 아닙니다. 많은 신자들도 깨어 근신하는 삶을 살기보다 세상 일들에 파묻혀 비신자와 같이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청기기라는 인식이 없거나 약하기 때문입니다. 도적같이 다시 오실 예수님 앞에 서서 자신의 인생을 낱낱이 결산해야 된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나름대로의 하나님이 주신 여러 가지를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는 이 한 가지를 알아야 합니다. 때가 되면 우리가 소유하고 누리는 모든 것을 다 놓고 가야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인생은 신속히 갑니다. 마치 날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90:10) 늘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생각할 때 우리는 지혜로운 마음을 얻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생의 마지막 순간에 후회하지 않을 그러한 삶을 사는 길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청지기입니다. 곧 다가올 결산을 대비하는 지혜로운 삶을 우리 모두가 살기를 기도합니다.

 

42절을 다시 한 번 봅시다. "주께서 이르시되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주님이 원하시는 청지기는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입니다. 그는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줍니다.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 KJV "faithful and wise steward", NIV "faithful and wise manager"로 되어 번역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faithful'(피스토스)는 진실하다, 충성되다 (고전4:2) 등으로 번역되는 말인데 문자적으로는 '신실성이 발견되는 것'을 뜻합니다. 이는 곧 하나님을 믿고 그 앞에서 정직하게 사는 자세를 말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 일체의 거짓이 없이 순전한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신자의 자세로 이 'faithful'한 것, '신실'한 것만큼 중요한 자질이 없습니다. 그래서 고전4:2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하였습니다. 여기서 충성은 동양 사상에 따른 군주에 대한 복종이 아니라, 위에서 언급한 하나님을 진실된 마음으로 섬기는 '신실성'을 말합니다. 이중적인 마음, 외식하는 자세, 하나님을 섬기는 척하지만 속으로 자기 영광과 유익을 구하는 사람은 진실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은 잠시 사람들의 인정을 받을 수는 있으나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그는 결국 잘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진실된 자세- 이것이 무슨 일을 하기 이전에 우리가 갖추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것입니다.

 

청지기는 또한 지혜로워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지혜는 세상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참 지혜입니다. 특히 본문에서의 지혜는 주인의 마음을 잘 알아채서 주인의 마음에 맞도록 일하는 것입니다. 이런 센스가 없으면 자기 식으로 일하며 주인을 괴롭게 합니다. 영적 센스는 어찌하든 주인을 기쁘게 하고자 하는 겸손과 사랑에서 나옵니다. 그는 진실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에게 더욱 후하게 지혜를 주십니다. (1:5) 지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소유한 자는 말씀으로 인해 지혜가 풍성하고 그 인격이 온전하게 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됩니다. (딤후3:16,17)

 

그러면 지혜롭고 진실한 청지기가 해야 되는 일이 무엇입니까? 그 집 주인의 종들에게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주어야 종들이 먹고 힘을 내어 주인을 섬길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에 대한 영적인 의미가 무엇일까요?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청지기들로 영적인 양식인 말씀을 잘 먹고 또 맡겨주신 분들에게 말씀을 잘 공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성령께서 말씀을 통해 하시는 역사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가 할 일은 말씀을 깊이 연구하여 잘 먹고 또 잘 공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일하시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아르테미스 여신 숭배의 본거지였던 에베소를 개척할 때 인간적으로 심히 연약했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두란노 서원에서 2년 동안 소수의 제자들에게 말씀을 열심히 가르쳤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말씀이 세력을 얻었습니다. 말씀이 흥왕하게 역사하여 아시아 온 지방에 퍼져나갔습니다. (19:20) 그 도시가 변화되어 초대 일곱 교회의 하나로 귀히 쓰임 받았습니다. 우리가 코로나로 인해 침체된 영적 환경을 볼 때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것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말씀을 맹렬하게 먹고 공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변화시키고 우리가 섬기는 캠퍼스를 변화시킵니다. 사회를 변화시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캠퍼스 부흥을 위해 우리가 영적인 양식을 잘 먹고 부지런히 나누어 주기를 기도합니다. 지혜 있고 진실된 청지기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기도합니다.

 

43,44절입니다. "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이 그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리라." 주인이 돌아왔을 때 지혜 있고 진실한 종을 어떻게 합니까?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깁니다. 36,37절에서도 보면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들리라"하셨습니다. 실제 세상에서는 주인이 혼인집에서 돌아왔을 때 종들이 깨어 있었다고 하여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섬기는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예수님은 주님을 기다리는 자를 크게 축복하신다는 것입니다. 44절에서도 지혜롭고 진실된 청지기에게 그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신다 하십니다. 이는 참으로 놀라운 약속입니다.

 

우리에게 많은 소유와 섬길 사람들을 보내주시고 청지기 직분을 주신 것만 해도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런데 이 직분을 잘 감당하면 장차 주님의 모든 소유를 맡기신다고 하니 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이요 은혜 위에 은혜입니까? 주님은 이 세상에서 청기기직을 잘 감당한 성도들에게 영광스러운 축복과 권세를 주십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오실 때에 왕노릇하게 될 것입니다. (딤후2:12) 이런 주님의 약속은 우리의 세상에서의 소망이 됩니다. 세상에서 소망을 둘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사라집니다. 우리가 영원히 붙들고 있을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청지기 직분을 잘 감당할 때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영원한 기업을 얻습니다. 그의 모든 소유를 다 맡아 다스리는 왕들로 삼으십니다. 우리의 마음에 날마다 이러한 소망이 불타오르길 기도합니다. 이러한 소망을 갖고 이 땅에서 청지기 직분을 잘 감당하기를 기도합니다.

 

사람들 중에는 악한 청지기들도 있습니다. 그런 청지기는 어떻게 됩니까? 45,46절입니다. "만일 그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남녀 종들을 때리며 먹고 마시고 취하게 되면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신실하지 아니한 자의 받는 벌에 처하리니." 주인은 악한 청지기를 엄히 때립니다. 여기서 '엄히 때리고'(디코토메세이) '두 부분으로 자르다'는 뜻으로 토막을 낸다는 의미입니다. 이 말은 구약에서 제물을 토막 내는데 사용하기도 하였고(29:17), 아주 참혹한 처형을 표현하는 말로 쓰이기도 하였습니다. 주인은 악한 청지기를 벌하십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그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 종은 더 많이 맞습니다. 우리는 신자요 성경 선생으로 주인의 뜻을 잘 아는 사람들입니다. 게으르면 더욱 심히 책망을 받을 것입니다. 그때 가서 주인의 뜻을 알지 못했다고 변명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49-53절에서 자신이 복음의 완성을 위해 오신 것을 말씀하십니다. 49절입니다.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이 구절을 공동번역은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이 불이 이미 타올랐다면 얼마나 좋았겠느냐?" 예수님은 세상에 불을 지르러 오셨습니다. 그런데 아직 그 불이 본격적으로 타오르지는 않았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은 복음역사를 말합니다. 그 복음역사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완성됩니다. 복음이 완성될 때 인류의 죄문제가 해결됩니다. 복음전파를 위해 성령이 불같이 임합니다. 강력한 구원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그런 복음역사의 완성을 위해서는 먼저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셔야 되었습니다. 세례는 죽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다 흘리고 죽으셔야 되었습니다. 이를 생각할 때 마태복음 26:38에서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말씀하신 것과 같이 인간적인 고뇌가 몰려왔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사명을 완수하고자 하시는 마음은 분명하셨습니다. (18:11) 예수님은 이 일을 이루시기까지 답답하시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또한 그 복음으로 인해 일어날 갈등과 분쟁에 대해서 예고하십니다. 특히 가정에서의 분쟁을 자세히 말씀하십니다. 52,53절입니다. "이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아버지가 아들과, 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딸과, 딸이 어머니와, 시어머니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 복음이 전해지면 가장 가까운 가족일지라도 신자의 진리성과 비신자의 비진리성의 충돌로 인해 필연적으로 갈등이 생겨납니다. 복음은 개별적인 결단을 요구합니다. 또한 복음으로 인한 가정 내에서의 갈등이 발생하는 것은 유감이지만 그러나 실상은 그간 잠복해있던 불화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어두운 부분, 병든 부분이 빛으로 드러나는 것일 뿐입니다. 갈등의 과정을 믿음과 인내로 잘 감당할 때 오히려 가정 복음화가 이루어집니다. 가족들 간에 예수님이 왕으로 다스리시는 진정한 평화가 임하게 됩니다.

 

54-59절은 하나님과의 화해를 촉구하시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천지의 기상을 잘 분별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지역은 지중해 동쪽에 위치하고 있고 서쪽에 비해 동쪽이 높습니다. 1,000 미터 정도의 산맥이 남북으로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동쪽에 태백산맥이 있는데 그와 같이 동고서저 지형입니다. 그래서 지중해를 통과한 따듯한 구름이 동쪽으로 이동하면서 산맥에 걸립니다. 구름이 상승하면서 온도가 내려가 비를 뿌리게 됩니다. 따라서 서쪽에 구름이 이는 것을 보면 곧 비가 올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열왕기상 18장에서 엘리야는 가뭄 끝에 하나님께 비를 구하면서 사환에게 '바다 쪽', '서쪽'을 보라고 했습니다. 바다에서 작은 구름이 보였고 결국 큰 비가 내렸습니다. 예수님 당시 사람들은 구름이 서쪽에 일어나는 것과 비가 오는 것의 관계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누구나 다 아는 상식이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의 남쪽은 사막입니다. 따라서 남풍이 분다는 것은 사막을 통과한 더운 공기가 유입된다는 의미입니다. 당연히 기온이 상승합니다. 복잡하지 않습니다. 이런 기상 현상에 대한 지식은 전문가만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도 다 아는 상식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귀신이 쫒겨나가고 병자들이 나았습니다. 눈 먼 자가 눈을 뜨고 죽은 자들이 살아났습니다. 이는 구름이 서쪽에서 이는 것보다 더 명백한 예보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통해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보며 그 시대가 바로 하나님께 구약에서 말씀하신 메시아의 시대임을 알아야 했습니다. 구약의 율법시대가 지나가고 있음을, 메시야가 그들 앞에 서 계심을 알아야 했습니다. 증거 분석이 어렵고 복잡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열린 마음으로 합리적인 추론을 했다면 그것은 상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알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고의적인 거부, 이것이 그들의 문제였습니다. 고의적인 무관심이었고 고의적인 무지였습니다. 도리어 그들은 예수님이 행하시는 치유와 기적에만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했습니다. 회개하고 악한 일 행하기를 그치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하는 일을 계속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시대를 분간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런 그들을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들이 할 일은 지금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마치 고소를 당하여 재판관 앞에 서야 된 사람들과 같습니다. 그들은 지금 법정으로 가고 있는 중입니다. 재판의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유죄입니다. 너무나 명백한 죄이기 때문에 어떤 변호도 의미가 없습니다. 그들은 옥졸에게 넘겨지게 됩니다. 즉시 옥에 갇힙니다. 옥에 들어가도 금방 나올 수 있다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한 푼도 남김없이 다 갚지 못한다면 결코 나올 수 없습니다. 법의 심판은 철저하고 냉혹합니다. 이러한 명백한 사실 앞에 설마하고 지내는 것은 어리석을 뿐입니다. 슬기로운 자는 재앙을 보면 숨어 피하여도 어리석은 자는 나가다가 해를 받습니다. (22:3, 27:12)

 

주님의 재림을 믿지 않으며,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을 자기를 위해 사용하며 사는 사람에게는 거룩하신 재판장에게 유죄 선고를 받고 형벌을 받습니다. 일단 재판장 앞에 서게 되면 더 이상의 기회는 없습니다. 기회는 지금, 재판장 앞에 서기 전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는 예수님의 메시지는 지금도 유효한 우리 각자에게 주시는 도전입니다. 우리는 아직은 ''에 있습니다. 고발하는 자와 화해할 수 있습니다. 회개할 수 있습니다.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고후6:2)

 

결론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청지기들입니다. 주님이 언제 다시 오실지 모릅니다. 그때는 결산의 때요 심판의 때입니다. 우리가 예고 없이 오실 주님을 깨어 기다리며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로서 주님이 보내주신 양무리들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주기를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