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메세지

제목2020년 에베소서 가을 성경학교 `교회는 그의 몸이니`(에베소서1:1-23)2020-11-01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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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성경학교 주일 예배 메시지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말씀/ 에베소서1:1-23
요절/ 에베소서1: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오늘 말씀은 성도의 정체성, 교회의 정체성을 말해줍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와 교회에게 두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1,2절은 바울의 인사입니다. 그는 현재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매인바 되어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에 대한 연민이나 슬픔이나 어두운 생각은 전혀 찾아 볼 수 없습니다. 그는 어떤 역경, 어떤 환난, 어떤 시련 속에서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서의 자긍심과 정체성이 분명합니다. 그는 에베소 성도들과 소아시아에 흩어져 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을 그의 가슴에 품고서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간구하였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젊은 청춘을 송두리째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여 드렸건만 나이 육십이 넘어서 그 보상은커녕 춥고 좁고 불편한 감옥에 갇혀 있다니~ ‘하나님, 너무 하시네요. 하나님, 왜 이러세요’ 바울의 입에서 원망과 투정이 나올 법도 한데 그의 입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외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신령한 복을 생각할 때 그의 심령에 기쁨과 감격에 젖어 찬송이 넘쳐흘렀습니다. 감옥에 갇힌 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추구하는 복이 무엇입니까? 좋은 학점, 좋은 직장, 승진, 많은 보수, 그리고 이상적인 배우자와의 결혼, 훌륭한 자녀, 좋은 집, 건강, 장수와 같은 복들입니다. 이것들은 율법적인 축복관이기도 합니다. 율법이 말하는 바 축복이 무엇입니까?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네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신28:3-6) 이러한 복들은 땅에 속한 복이며 현세적인 복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진 복의 개념이 이제는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전혀 인간들이 생각하지 못한 하늘에 속한 신령한 것으로 대체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복을 받기 원하십니까? 이 땅에서 현세적이며 물질적인 복을 받기 원하십니까?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받기 원하십니까? 이 땅의 복은 일시적으로 누리는 복입니다. 잠깐의 즐거움입니다. 반면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은 영원히 누리는 복이며 영원한 즐거움, 영원한 만족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만 누릴 수 있는 복이며 세상 사람들이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물론 이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물질의 복, 세상의 복을 주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또한 세상의 복이 가치없다는 말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에게 주시는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이야 말로 최고의 복이며, 궁극적인 복이란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는 현재 어떤 상황에서도 내가 병중에 있어도, 경제적 어려움에 처해 있어도, 고난속에서도 내가 받은 신령한 복을 헤아려 보고서 기뻐하며 감격하며 하나님을 찬송해야겠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이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재벌의 아들들이 얼마나 부럽습니까? 재벌 아들은 직장 염려 안합니다. 물질문제도 없습니다. 하고 싶은 것 다 해보고 인생을 즐기며 누릴 수 있습니다. 중소기업 사장의 아들만 되어도 얼마나 좋겠습니까? 최희철 목자님은 사업을 하면서 늘 마음이 졸였다고 합니다. ‘자본금이 조금만 더 있었으면 이 상황을 더 잘 헤쳐 나갈텐데~’ 생각한 적이 많았습니다. 이때 부모로부터 후원을 받으며 사업을 꾸려가는 분들을 보면 참 부러웠습니다. 그런데 여기 놀라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5절에 하나님께서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다니 우주만물을 지으시고 운영하시며 주관하시는 하나님, 그분의 아들이 되다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자기의 아들로 택하시되 창세전에 택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 하나님의 아들들이며 딸들입니다. 우리를 자기의 아들들로 택하실 때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자기 아들로 예정해 버린 것입니다. 우리를 자기 아들들로 점찍어 버리신 것입니다. 우리는 재벌 아들들보다도 더 높고 더 위대하시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요 딸들입니다. 우리를 자기 아들들로 삼아주신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감사 찬양을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의 자녀로 택하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4절 하반절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더럽고 흠이 많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거룩하고 온전하십니다. 도저히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는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까?

7절을 보십시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나님은 죄로 더러워진 인생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사랑하시사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자기의 독생자를 희생하셨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셨습니다. 그 피 값으로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셨습니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멀리 옮기셨습니다. 이것은 성령으로 우리로 깨닫게 하신 것이요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입니다(7-9). 창세전부터 계획된 인류의 구원 역사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완성되었고, 장차 만물이 회복됨으로 종결될 것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베일에 쌓였던 인류 구원의 비밀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로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빌리그래함 목사님은 이를 ‘온 우주가 깜짝 놀란 우주 역사의 최대 사건’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들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있어서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10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온 우주 만물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입니다. 구체적으로 20-23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자기의 보좌 오른편에 앉히시고 만물이 다 예수님께 복종하게 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부여 받은 예수님의 다스림 가운데 만물이 하나로 통일되게 됩니다. 하나의 질서가운데 만유가 회복되게 됩니다.

1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모든 일을 그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계획대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기업이 되게 하셨습니다. 기업은 후사 또는 유산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인 영광스런 부활의 몸을 유산으로 주셨습니다(롬8:23, 벧전1:4). 이 몸은 진시황제도 얻고자 했던 몸입니다. 또한 성도는 이것을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습니다.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기업의 보증이 되어주십니다. 약속의 도장을 찍었다는 말이죠. 마태복음에서 예수님께 성령이 임할 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3:17)고 하셨습니다. 성령의 인침은 이미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라는 선언이자 보증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우리를 인치심은 예수님에게 하신 것과 동일한 선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서 담대하게 기쁨으로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신령한 복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가 받은 복은 너무나도 놀랍고도 영광스러운 복입니다. 원더풀 그레이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복을 우리에게 거저 주셨습니다. 우리의 공로는 1도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로 된 것이요 하나님의 크신 사랑으로 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이렇게 큰 은혜를 받았으니 영원토록 죽도록 일해서 그 은혜를 갚아야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4절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으로부터 받게 된 이 풍성한 은혜와 그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하나님을 찬송하며 하나님께 감사로 영광 돌리는 것을 기뻐하시며 원하십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사랑을 감사 찬양합시다.

이제 바울은 15,16절에서 에베소 성도들의 믿음과 사랑으로 인해 감사한 후 그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바울의 구체적 기도제목이 무엇입니까? 17-19절을 보십시오.

첫째, 하나님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그들에게 주사 하나님을 더욱 알게 하기를 기도했습니다. 신자의 기쁨과 행복은 하나님을 더욱 알아 가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을 더욱 알아갈수록 우리의 신앙생활은 더욱 부요해지고 풍성해집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신 후 그가 원하는 아들을 25년 동안이나 주지 않으면서 그가 하나님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성장하도록 도우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처음 하나님에게서 자기가 원하는 아들의 축복만을 받고 싶어서 많은 갈등을 했습니다. 이런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소망과 그의 전능하심, 완전하심, 공의로우심과 죄인들을 향한 불타는 하나님의 사랑과 약속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등을 알아가도록 도우셨습니다. 아브라함은 25년 동안 훈련을 받으며 하나님을 배우고 깊이 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은 더 이상 자기 아들에 얽매이지 않고 이삭까지 하나님께 바칠수 있는 참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죄악의 도성을 품고 중보기도하는 열국의 아비가 되었습니다. 믿음의 조상이 되었고 복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종로2부 성도들에게도 주사 하나님을 더욱 알아가게 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둘째, 그들의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과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과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을 알기를 기도했습니다. 우리 성도는 현재 지상교회에서 장차 들어갈 천상교회를 바라보며 순례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는 마치 애굽에서 해방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떤 문제가 있었습니까? 그들에겐 부르심의 소망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가야 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을 바라보지 않고 현재 부족함과 불편함이 가득한 광야만을 바라볼 때 원망과 불평과 망언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나안을 소망하고 바라보았던 모세, 여호수아, 갈렙과 같이 마음의 눈을 밝게 하여 부르심의 소망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또한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어떠한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들어갈 가나안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었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땅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일찍이 이스라엘을 위해 이 땅을 준비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출애굽 일 세대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습니까? 열 명의 정탐꾼들이 가나안을 악평했기 때문입니다. 거민을 삼키는 땅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대다수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아름답고 심히 좋은 기업을 마련해 놓으셨어도 우리가 그것을 바라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면 들어갈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불평과 원망속에서 살다가 허무하게 생을 마감하게 될 뿐입니다. 우리에게 약속으로 주신 그 기업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풍성한지를 알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그의 능력의 지극히 크심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열 정탐꾼들이 부정적인 보고를 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네피림, 즉 거인족속인 아낙 자손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아말렉과 헷, 여부스, 아므리, 가나안 자손이 그 땅을 이미 차지하고 있음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자신들의 힘으로는 도저히 들어갈 수 없다고 본 것입니다. 거기에 좌절과 원망과 실패의 원인이 있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이 그들의 힘으로 말미암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때 여호수아와 갈렙이 무엇이라 하였습니까?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민14:8)” 이스라엘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었습니다. 이스라엘에게는 그럴 능력이 전혀 없지만 하나님께는 능히 그럴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 역시 이 사실을 알아야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업의 영광의 풍성으로 이끌어 들이실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아니 그 능력을 이미 베푸셨다는 사실을 알아야겠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이 이상에서 말한 세 가지 사실을 확실히 알고 믿는다면 시련속에서도 그들의 신앙이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이며 마침내 영원한 구원에 들어가게 될 것을 확신하였습니다. 우리는 현재 페러다임의 전환기에 서 있습니다. 교회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위기일수도 있고 기회일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경륜가운데서 밝은 마음의 눈으로 보면 하나님의 역사는 결코 실패함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기업이 무엇입니까? 캠퍼스입니다. 가정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입니다. 영적인 눈으로 보면 소망이 보이고, 영광의 풍성함이 보이고, 하나님이 능히 하실 수 있는 능력이 보입니다. 우리의 눈을 밝히사 이를 알게 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20-23절은 하나님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역사하였는가를 보여줍니다. 그 능력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다시 살리신 부활의 능력으로 나타났습니다. 더 나아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높여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 편에 앉히시고 하늘과 땅의 모든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케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세우신 능력으로 나타났습니다.

22절과 23절은 사도 바울의 논증의 클라이막스 부분이라고 합니다. 22,23절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바울이 말하는 교회의 위치가 무엇입니까? 만물위에 있다는 것입니다. 만물에 속해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만물의 지배를 받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오히려 세상을 다스리고 우위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음부의 권세조차 교회를 이기지 못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마16:18)? 교회는 세상을 이깁니다. 그 절대적인 위치에 있습니다. 심지어 사도바울은 교회가 세상을 판단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교회가 천사들조차 판단하게 될 것이라고 증거했습니다(고전6:2-3). 또한 교회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메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지 않았습니까? 교회가 이처럼 엄청난 권세와 지위를 갖고 있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런 결과가 어디서 오게 된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과 존귀케 되신 사실을 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님이 이기셨음을 말하고자 함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온갖 패배주의적인 생각들을 버려야 합니다. 두려움을 버려야 합니다. 예수님의 몸인 교회는 이미 승리하였습니다. 사도바울은 롬1:5에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을 믿어 순종케 하는 사명과 권위를 교회가 받았습니다. 교회는 몸으로서 머리이신 예수님의 명령에 철저히 복종할 뿐 아니라 세상을 하나님의 뜻에 굴복시키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교회가 힘쓰기를 기도합니다.

23절을 다시 한번 읽겠습니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본문은 예수님을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만물을 완성하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만물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시고 완전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온 목적입니다. 허무한데 굴복하여 탄식하는 피조세계만이 아니라 인간의 약점, 부족한 점들을 보완하며 완성시키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요10:10에서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로 생명을 얻게 하고 풍성한 삶을 살도록 하십니다. 또한 예수님은 교회를 풍성함으로 채우십니다. 본문은 교회를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충만함으로 충만해야 함을 말합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예수님의 영광, 예수님의 능력, 예수님의 사상, 예수님의 인격, 예수님의 겸손, 예수님의 자비, 예수님의 용서, 예수님의 인내, 예수님의 희생, 예수님의 섬김, 예수님의 기도, 예수님의 전도, 예수님의 거룩, 예수님의 순종, 예수님과 관련된 모든 것들로 교회가 충만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약간만 있으면 안됩니다. 부족함이 있어서도 안됩니다. 남아 돌 만큼 충만해야 합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충만함을 맛보고 경험하고 감격해야 합니다. 그래야 참된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 와서 누구든지, 어떤 죄인이라도 이것을 맛보고 경험하고 잠길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교회는 세상을 향하여 예수님의 충만함을 맛보게 하는 충만의 공급처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는 현재 어떻습니까? 예수님의 충만으로 가득합니까? 아니면 고갈되어 있습니까? 각 성도는 어떻습니까? 생명의 풍성함이 넘치고 있습니까? 아니면 메말라 있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충만으로 채울 수 있을까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채우기 위해서는 먼저 비워야 한다.’ 우리는 먼저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사람을 벗어버려야 합니다(4:22). 거짓을 버려야 합니다(4:25).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려야 합니다(4:31). 오직 우리의 심령이 성령으로 새롭게 되어야 합니다(4:23). 그럴려면 회개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받는 하나님의 자녀같이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5:1).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가운데서 행해야 합니다(3:18,19, 5:2). 빛의 자녀들처럼 행해야 합니다(5:8). 무엇보다 예수님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성장하도록 모두가 힘써야 합니다(4:15).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의 충만을 깨뜨리고자 하는 사단 마귀의 궤계를 대적해야 합니다(6:10-20). 하나님께서 종로2부가운데 그리스도로 충만해지게 하옵시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입니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시며 우리는 교회의 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안에서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성도들과 교회에게 주셨으며 그리스도로 충만케 하셨습니다. 이를 각 개인과 교회가 어떤 형편에서도 찬송하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알고 체험하며 우리의 삶을 통해 세상으로 그 풍성함을 흘러보내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