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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3년 사도행전9강 "택한 나의 그릇이라" (사도행전 9:1-31)2023-05-15 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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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사도행전 제 9


택한 나의 그릇이라

말씀/ 사도행전 9:1-31

요절/ 사도행전 9:15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오늘 말씀은 사도 바울의 회심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기독교 교회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중에 하나죠. 사울을 통해서 아시아와 유럽과 로마 선교의 문을 여셨고 우리까지 복음이 전파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쓴 13통의 편지가 신약성경이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어떻게 그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 하나님께 쓰임받는 자가 되었가?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에게 두신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을 보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게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사울은 스데반 집사를 죽이는데 참여했습니다. 그후에도 여전히 주님의 제자들을 위협하면서 살기를 띠고 있습니다. 그의 숨소리에서조차 살기가 느껴집니다. 예루살렘에서 박해한 것도 모자라서 박해를 피해 다메섹으로 도망간 그리스도인들을 잡아오고자 하죠. 대제사장에게 가서 잡아올 수 있는 편지를 써달라고 요청하는겁니다. 당시 대제사장은 사두개인입니다. 반면 사울은 바리새인이죠. 사두개인들은 성전 중심의 권력과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고, 바리새인들은 회당중심의 권력과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서로 자존심 싸움을 하는 그런 관계였죠. 공문을 써 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인데 요청을 한 것입니다. 다메섹이 어떤 곳이죠? 구약시대에는 아람의 수도였습니다. B.C. 732년 앗시리아 제국에 망하고 B.C. 64년부터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습니다. 예루살렘으로부터 동북쪽으로 240Km 떨어져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5만명이상 살고 있었고 30~40개의 회당이 있었다고 합니다. 드디어 사울이 공문을 손에 쥐게 됩니다.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데려오고자 여행을 떠납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인을그 도를 따르는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게 무슨 뜻이죠?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으며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르는 제자를 말합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생명의 길로 여행을 하는 사람이죠. 예수님과 자신을 동일시 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사울이 이토록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는데 열심인 이유가 뭘까요? 그가 그 도를 싫어했기 때문이죠나무에 달려 죽은 예수가 그리스도다주장하며 그를 따르는 자들이 너무나도 허무맹랑하고 싫었던거에요. “나무에 달려 죽은 사람이 어떻게 메시야가 될 수 있어? 그 사람은 선동가야. 사기꾼이야. 그 사람은 자기 죄 때문에 죽은거지~. 율법을 폐하고 성전을 허문다고 신성모독 했잖아. 그러니 죽어 마땅해~ 그 사람이 무슨 그리스도야?” 이렇게 생각한 것이죠. 그의 잘못된 열심으로 말미암아 그는 예루살렘에서 다메섹으로 내려가는 잘못된 여행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을 체포하러 다메섹에 간 사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나요? 다메섹에 가까이 갔을 때 홀연히 빛이 임하였습니다. 이때가 정오였다고 나옵니다.(22:6) 얼마나 햇빛이 쨍쨍 내리 쬐였겠습니까? 그런데 그 빛보다 더 강력한 빛이 하늘로부터 그를 둘러 비취는 것이에요. 이 빛은 (어떤 빛이냐면) 하나님의 영광의 빛입니다. 세상의 빛되신 예수님께서 사울에게 나타난 것입니다. 그때 사울이 어떻게 됩니까? 그 빛에 거꾸러졌습니다. 강력한 빛이 사울을 굴복시켰습니다. 바울이 땅에 엎드러졌는데 그 속에서 음성이 들렸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그 때 사울이 뭐라고 합니까? 놀래가지고누구~ 십니까?” 그때 주님은 뭐라고 하나요?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이 말을 듣는 순간 바울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멘붕이 왔을 것입니다. 심장이 멈추고, 얼음이 되었겠죠. 여기서 우리는 사울을 찾아오신 예수님에 대해 한번 생각해봅시다. 여호와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사울을 찾아간 것입니다. 저 같았으면 첫 일성이이 나쁜 놈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냐~ 너 죽을래?” 이렇게 말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사울아 사울아그의 이름을 부릅니다. 이것이 무얼 의미하죠?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그를 인격적으로 대했다는 것이에요. ‘이 나쁜놈, 이 웬수, XXX’ 하면서 욕이 튀어나올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좋게만 대한 것이 아닙니다.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그가 현재 하고 있는 행동이 무엇인가를 명확히 알려주죠. 그의 죄를 지적합니다. 책망합니다.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이 책망은 안타까워하며 그를 회개토록 돕는 주님의 자비로운 음성입니다. 멸망의 길로 가고 있는 그를 막아서서 잘못 가고 있는 그 길에서 돌이키게 하십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이 말에 어떤 메시지가 있습니까? 첫 번째로, 무력하게 죽어 무덤속에 있는 그런 예수, 사울이 잘못 알고 있는 그런 예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도 살아계시며 영원히 살아계신 부활의 주님이라 것이죠. “~ 살아 있어. ~ 부활했어. 내가 그리스도야이것을 알려줍니다. 두 번째로,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는 것이 바로 예수를 박해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기 때문입니다. 한 지체입니다. 그러므로 사울이 교회를 박해하는 것은 예수를 향하여 악랄한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더 이상 그 짓 하지 마~’ 경고하는 것이죠.

 

그리고 나서 주님은 사울에게 방향을 줍니다.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6) 같이 길을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여 서 있었습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제대로 보고 그 음성을 제대로 들은 사람은 사울 뿐이었다는 것이죠. 하나님의 은총과 긍휼이 모두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이 은혜를 받은 사람은 정말 주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사울이 땅에서 일어납니다. 눈은 떳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합니다.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갑니다. 사울은 예수쟁이를 다메섹에서 체포하여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려고 했는데, 도리어 그가 예수님께 체포되어 사람들의 손에 끌려가고 있습니다.

 

그는 사흘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였습니다. 사흘동안 흑암에 있게 되었어요. 마치 요나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도망가다 물고기 배 속에서 사흘 동안 스올의 경험을 한 것과 비슷합니다. 사울이 사흘동안 무엇을 했을까요? 그는 번민하면서 먹지 마시지도 않으며 기도했을 것입니다. “나에게 나타난 그 예수가 누구일까?” 깊이 생각했겠죠. “이제껏 내가 헛살았구나. 잘못 살았구나. 왜 내가 이런 바보같은 짓을 했을까”, 자신의 죄에 대해 철저히 회개하고서예수여~ 나로 하여금 당신이 누구인지 알게 하소서~” “나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 “나의 눈을 뜨게 하옵소서”, “나를 구원하여 주옵소서이렇게 기도하지 않았을까요?

 

그때 주님께서 사울을 어떻게 도와 주십니까? 주께서 친히 제자인 아나니아를 찾아갑니다. 환상중에 불러아나니아야~’ 인격적으로 그를 부르시죠. 이때 아나니아는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마치 대기하고 있는 시종처럼 대답합니다. ‘말씀하옵소서. 내가 여기 있나이다아니니아는 참으로 기도를 많이 하고 성령에 민감한 사람이었을 것으로 추측해 볼수 있겠죠.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라 그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11,12) 구체적으로 어디로 가서 누굴 만나 무엇을 할 것인가를 지시하십니다. 이에 대한 아나니아의 답변이 무엇입니까?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들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결박할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았나이다아나니아는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당황스러웠습니다. 이 상황은 마치 이슬람국가에서 이슬람에서 기독교인으로 개종한 사람에게 기독교인을 잡아 참수하는데 앞장섰던 악질 이슬람 종교 경찰을 찾아가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더군다나 그 사람에게아나니아라는 내 이름까지 알려주면 어떻게 합니까? 나보고 죽으라는 것입니까?‘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요? 이에 주님은 뭐라 합니까? 15,16절을 함께 읽습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니” ‘가라~’ 가라고 합니다. 두말하지 말고 가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사람은 주께서 점 찍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택했다고 합니다. 무엇을 위해 택하였나요? 내 이름, 곧 예수의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 전하기 위해 택한 나의 그릇이라는 것이죠. 예수님을 위해, 예수의 이름을 증거하기 위해, 예수님의 사역을 위해, 예수의 영광을 위해 택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누구에게 증거한다고요? ‘이방인과 임금들, 이스라엘 자손들에게입니다. 특히 앞으로 있을 이방선교를 위해 사울을 쓰시겠다는 것입니다. 더불어 지도자급 사람들과 이스라엘 선교에 쓰시겠다고 합니다. 저는 사울을 이스라엘 선교에 쓰시겠다고 한 말이 언뜻 이해가 안되었습니다. 묵상을 할 때 이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사울이 이방인 선교를 함으로서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것을 보고서이스라엘로 시기하게 하여 그의 혈육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한다는 말씀이었습니다.(11:14)

 

바울은 그동안 누구의 그릇이었습니까? 사울의 그릇이었습니다. 자기 생각, 자기 뜻, 자기 꿈,  자기 열심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럴 때 그는 예수를 박해하는 그릇으로 쓰임 받았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그를 예수의 그릇으로 택하여 쓰십니다. 이제부터는 자기 맘대로 못 삽니다. 예수님이 쓰시는대로 사용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이끄시는대로 살아간다는 것이죠. 여러분은 내 자신의 그릇으로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예수의 그릇으로 살고 있습니까? 사람들은 사울처럼 자기가 중심이 되어 열심히 살아갑니다. 그것이 행복이고 잘 사는 것이라 생각하죠. 그러나 그것은 착각입니다. 그 길은 멸망으로 이끄는 길입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가고 있을 때 우리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시고 만나주시고 그 길을 막아섭니다. 예수님이 나의 죄를 담당하신 것을 깨달아 알게 하여 생명의 길로 가게 하십니다. 예수의 그릇으로 살게 하십니다. ‘그 도를 따르는 자가 되게 하십니다. 예수를 증거하는 삶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은 박해자 사울을택한 나의 그릇이다고 하십니다. 이를 통해 우리가 배울수 있는 점이 무엇입니까? 대하16:9에서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능력을 베푸신다고 하였습니다. 주님을 찾는 사람을 하나님은 만나주시고 하나님의 역사에 쓰신다는거죠. 지난주 말씀에서 수레를 타고 가면서도 성경을 읽으며 주님을 만나고자 했던 이디오피아 내시가 바로 그런 사람이죠. 주님은 그를 택하사 아프리카선교사로 쓰셨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주님은 사울처럼 주님을 대적하는 원수라도 일방적으로 지명하여 불러 그를 변화시켜 사용하십니다. 그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주님의 부르심은 참으로 일방적인 은혜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려 함이라’(15:16)

 

제가 한 때 종로 JBF교장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전국 JBF수양회에 종로센타 중,고등학생을 데리고 참여하였습니다. 유독 종로센타 아이들이 말썽을 일으켰는데, 어떤 센타 학생은 종로JBF학생들 때문에 다음에는 오지 않겠다고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힘이 빠져 있는 저에게 주님은 요1:42“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말씀으로 종로JBF 학생들에 대한 주님의 소망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때 믿음이 생기고 소망이 생겼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종로 JBF에 은혜를 주사 서서히 변화시켜 주셨고 2세들이 잘 성장하도록 해 주셨습니다. 올해 초 서기드온, 서여호수아, 강가일, 송요셉 청년들이 목자 선서를 할 때 제 마음이 울컥하고 하나님께 얼마나 감사와 찬양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주님은 우리 자신을 포함하여 어떤 사람에게도 소망을 두고 계십니다. 사랑과 은혜로 우리를 대우하시고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르도록 축복해 주십니다. 우리를 소망가운데 부르시고 쓰시는 우리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립니다.

 

이제 사울이 주님의 택한 그릇으로 살아갈 때 어떤 일이 있게 됩니까?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16) 그동안 사울은 박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제부터는 박해받는 사람이 됩니다. 본회퍼 목사님은고난은 참된 제자 도의 상징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은 아나니아에게사울이 앞으로 이런 사람이 될 것이다. 그러니가라~’”고 하십니다. 과거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현재와 미래가 중요합니다. 그러자 아나니아가 어떻게 합니까? 예수님의 명령에 미적대지 않고 자기가 있는 곳을 떠나 사울이 있는 집으로 들어갑니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구약의 에스더와 같은 심정으로 믿음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사울에게 안수합니다. 안수는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기 위해 그 사람과 관계를 맺는 행위입니다. 축복하는 것입니다. 아나니아가 말합니다. “형제 사울아~” 사울이 이 말을 들었을 때 어떠했을까요? ‘아니~ 나는 저 사람을 잡아다가 족칠려고 이곳에 왔는데, 저 사람은 나를 형제로, 가족으로 맞아주다니~’ 용서와 사랑이 담긴 그 말에 마음이 녹았을 것입니다. 사울의 눈이 글썽글썽하지 않았을까요? 아니니아는 계속하여 말합니다.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오기를 꺼려했을 아나니아를 내게 보내시고, 돕게 하시고,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시는 주님, 그 주님을 생각할 때 어떠했겠습니까? ‘오 주님, 제가 무엇이관데 이렇게 도우시고 살피시나요? 주님, 감사합니다.’ 사울을 향한 주님의 한량없는 사랑, 자비, 은혜가 느껴집니다. 아나니아가 사울에게 안수 기도해 주자 어떤 일이 일어나죠?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졌습니다.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그의 가려졌던 영적인 어두움이 벗겨지고 예수의 생명의 빛이 그의 내면에 충만하였습니다. 이제 그는 예수를 믿고서 구원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일어나 세례를 받습니다. 공적인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죠.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이제 그는 음식을 먹고 강건하여졌습니다. 새 사람으로 거듭났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게 됩니다. 교회안에 들어와 다른 그리스도인과 교제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나면 주님 안에 있는 사람들과 교제를 해야 합니다. 그래야 참된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고 성장하게 됩니다. 이것이 건전한 신앙생활이죠. 코로나가 끝났음에도가나안(반대로 하면 안나가)‘ 신자가 많이 있다고 합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목사님의 설교를 골라 영상으로만 보고 교회에 안 나옵니다. 영상 예배는 부득히 한 경우에만 하는 것이지 결코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거듭났으면 당연히 성도들과의 교제에 합류를 해야 합니다.

 

사울은 즉시로 회당에서 예수를 증거합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입이야” “예수가 그리스도야증거합니다. 그동안 예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했던 사람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니 사람들의 반응이 무엇입니까? 다 놀라죠. 그러자 사울은 힘을 더 얻어예수가 그리스도입니다. 여러분~ 그를 믿으세요. 그래야 하나님의 자녀가 되요. 그래야 구원 받아요증언하였고, 다메섹에 있는 유대인들을 당혹하게 하였습니다.

 

23절을 보면 다메섹에서 복음을 전한지 여러 날이 지났다고 합니다. 여러 날은 갈1:16,17에 나오는 3년동안 아라비아로 가서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눈 시간을 말한다고 학자들이 봅니다. 사도들이 3년간 예수님과 동고동락하며 훈련받았듯이, 사울은 3년간 은거하며 주님과의 교제에 힘썼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 기간동안 다메섹과 아라비아를 왔다 갔다 했는지 아니면 아리비아에서만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시 다메섹에 돌아왔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유대인들이 사울을 죽이고자 합니다. 밤낮으로 성문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다메섹에서 그동안 전도하고 키웠던 사울의 제자들이 그를 광주리에 달아 피신시킵니다.

 

사울은 이제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과 사귀고자 합니다. 그동안 3년 동안 소식도 없던 사람이 갑자기 나타나 사귀자고 하니 다 두려워 합니다. ‘속임수 아냐?’ 믿지 않았습니다. 전에 스데반집사를 죽였던 그 사건이 아직도 생생하여, 받아들이기 힘들었습니다. 이때 누가 나섭니까? 바나바입니다. 그의 이름처럼 바나바는 사울을 데려다가 사도들에게 소개합니다. 그 때 세 가지를 들어 사울을 변호하죠. ‘그가 다메섹 가는 길에서 주를 보았다’,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다메섹에서 그가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했다살아계신 주님께서 그를 만나시고 택한 나의 그릇으로 삼으셨던 내용등 세가지를 자세히 말해주자 사도들이 그를 믿고 영접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사울이 예루살렘 교회를 자유롭게 출입합니다. 15일 정도 머물렀는데 이것이 사울의 예루살렘 1차 방문입니다. 사울이 예루살렘에 있으면서 과거 자기와 함께 했던 헬라파 유대인들을 만납니다. 그리고 그들과 변론하죠. 헬라파 유대인들은 헬라 철학을 배운 사람들로서 논쟁과 토론을 좋아합니다. 유럽 사람이 그러죠, 바울은 그들에게 구약의 글과 선지자들의 말을 빌어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야. 예수가 그리스도야. 그를 믿어야만 구원받아. 내가 다메섹에서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났다니까~” 이렇게 증거했을 것입니다. 그러자 그들은이놈이 우리를 가르치려하네. 이 배신자~” 죽이려고 합니다. 사울이 애시당초 그리스도인이었다면 이 정도로까지 미움 사지 않았을터인데, 예수쟁이를 박멸하는데 앞장섰던 사람이 오히려 예수를 따르라고 하니 살려둘 수가 없다고 생각한거죠. 어제의 친구가 한순간에 원수지간이 되었습니다.

 

형제들이 이를 알고 어떻게 합니까? 사울을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냅니다. ‘다소가 어떤 곳이죠? 길리기아 수도로 사울의 고향입니다. 그는 낙향하여 천막 만드는 생업을 하며 조용히 지냅니다. 그것이 10년 동안입니다. 주께서 그를 이방 선교에 본격적으로 사용하기에 앞서 때를 기다리며 기도하며 생업을 잘 감당토록 하십니다.

 

이에 교회의 형편이 어떻게 됩니까? 온 유다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갑니다.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집니다.(31)

 

결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대적하고 박해하는 사울을 사로잡아 구원하십니다. 택한 예수의 그릇으로 이방 선교에 쓰십니다. 예수님의 사랑, 예수님의 은혜는 측량할 수 없고 한량이 없습니다.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날에도 우리를 찾아오셔서 구원하시고 우리를 복음의 증인이 되게 하십니다. 주님의 역사에 동역자 삼으십니다. 우리에게 베푸신 그 구원, 그 부르심은 일방적인 택하심입니다. 이 은혜에 기초하여 생명을 살리는 복음의 사명자로 살아가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