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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3년 사도행전 20강 "주를 위하여 죽을 것도 각오한 바울" (사도행전 21:1-22:29)2023-08-14 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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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사도행전 제 20

주를 위하여 죽을 것도 각오한 바울

말씀/사도행전 21:1-22:29

요절/ 사도행전 21:13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사도행전 21장부터 28장까지는 바울의 예루살렘 도착과 로마까지의 여정이 나옵니다. 사도행전의 1/4 에 해당되며, 사도바울의 사역과 관련하여서는 절반에 해당합니다. 저자 누가는 그만큼 중요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특히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부분에서 우리는 그의 비장한 각오를 엿볼 수 있습니다. 이는 마치 누가복음에서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한 내용과 비슷합니다(9:51). 오늘 말씀을 통해 바울이 어떻게 예수를 따르는가? 그의 믿음을 배우길 기도합니다.

 

1절입니다. 바울 일행은 에베소 장로들과 작별하고 배를 타고 고스로 가서 로도를 거쳐 바다라로 갑니다. ‘바다라는 바다로 나갈 수 있는 큰 배들이 정박하는 항구입니다. 그곳에서 배를 탔습니다. 아마 큰 배를 타고 다른데 들리지 않고 지중해를 가로질러 곧장 두로로 가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서두르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구브로를 왼편에 두고 항해하여 드디어 두로에 상륙합니다. 순풍에 돛단 듯 항해하여 생각보다 빨리 왔습니다. 두로에 오니 이제 여유까지 생겼습니다. 에베소는 못 들렸는데, 바울이 개척하지 않은 이곳에서 칠일 동안 머무르면서 제자들과 교제를 나눕니다. 그리고 돌레마이에 이르러 형제들에게 안부 인사하고 하루 있다가 배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관문인 가이가랴에 드디어 도착합니다. 이곳에서도 여러 날 머뭅니다.

 

이 과정에서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모든 일정이 착착착 순적하게 이루어졌습니다. 반면 두로에서는 제자들이, 가이사랴에서는 아가보 선지자가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결박 당할 것이다”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예언하였습니다. 이에 제자들이 어떻게 합니까? “바울목자님~,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마세요~” 만류합니다. 특히 가이사랴에서는 저자 누가까지 합세하여 바울을 설득하죠. “바울목자님, 제발 저희 말 좀 들으세요. 목자님이 안 계시면 이 사역은 누가 합니까? 바울목자님이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그러셨잖아요. 결박당하면 어떻게 로마선교를 해요? 그 거룩한 꿈을 이루어야 하잖아요? 제발 가지 마세요

 

이에 바울이 어떻게 대답합니까? 13절을 다 함께 읽겠습니다.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자신의 안위를 걱정하는 동역자들의 그 충정 어린 애정에 바울의 마음이 저미어 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각오를 분명하게 밝힙니다.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이 말은 이런 말입니다. “설령 내가 예루살렘에서 결박당해도 좋습니다. 죽을 것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내 꿈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추구하는 것은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해서이기 때문입니다.”

 

주 예수를 위하여사랑하는 여러분~ 이 뜻이 무엇입니까? 바울의 삶의 목적, 동기가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 무엇보다 예수님을 첫 자리에 두는 것을 말합니다. 돈이나 자녀나 건강이나 쾌락이나 안정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제자의 도라고 합니다. ‘예수를 어떻게 따를 것인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 다루고 있는 큰 주제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주 예수를 위하여구체적으로 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첫째, 연합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지금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고자 하는 목적은 그동안 하나님께서 자기를 통해 이루신 모든 이방 선교 결과를 보고하고자 합니다. 또한 이방인 교회에서 모금한 구제헌금을 예루살렘 교회에 직접 전달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이방인 교회와 예루살렘 교회가 하나되게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 듯이 유대인들은 조상때부터 자기들은 거룩한 율법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아주 강한 선민의식이 있습니다. 이런 그들은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여전히 율법을 열심히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이방 민족들에 대해 우월의식과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세워진 지 27년이 지났건만 지금도 여전합니다. 수 만명의 교인을 자랑하지만 주님께서 원하시는 교회의 모습이 아닙니다. 유대인 신자와 이방 신자 사이의 간극은 좀처럼 가까워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를 묶는 역할을 바울이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가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라고 했습니다.(3:28) 또한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인 성도나 이방인 성도가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한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되었다고 하였습니다.(3:6) 이 연합을 위해서 바울이 지금 결박 뿐 아니라 죽을 것도 각오하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루살렘을 올라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전에 종로2부에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고민하며 주님께 나아가 주님, 제가 무엇을 하리이까? 합당한 말씀을 주시시오.’ 이렇게 기도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주님은 엡2:14,16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네가 할 일은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지라는 것입니다. 그때 저는 알겠습니다 주님~. 제가 십자가를 질터이니 종로2부가 하나되게 하옵소서.’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저와 우리 공동체에 은혜를 부어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이를 통해 저는 하나님의 뜻은 하나되는 것이며, 그것을 이루는 방법은 십자가인 것을 배웠습니다. 모든 피조세계가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로 통일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며 경륜이며 최종목표입니다.(1:10)

 

둘째,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여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합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을 지극히 사랑했습니다. 애착할 정도로 사랑했습니다. 예루살렘은 예수님 당시에도 여전히 선지자를 죽이고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던 도시였습니다. 그럼에도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13:34) 라고 하셨습니다. 그 만큼 우리 주님이 예루살렘을 지극히 사랑하였습니다. 온갖 노력을 했습니다. 예수님과 바울의 이러한 예루살렘 사랑의 마음은 곧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반영한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기도제목이 있습니다. 골육친척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얻는 것입니다. 연로하신 부모님이 주님믿고 천국 가는 것이 우리의 소원입니다. 그리고 육신의 자녀나 일대일 양들이 예수님을 알고 거듭나 생명을 얻는 것이 우리의 간절한 소망일 것입니다. 우리 생명과도 바꿀 가치가 있습니다.

 

셋째, 성령에 메이는 것입니다. 바울이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이유는 성령께서 올라가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 그 길을 반복하여 알리십니다. 그 여정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착착착 진행되게 하십니다. 하지만 말이 쉽지 그 고난이 현실이 되면 어떻습니까? 감당하기 쉽지 않습니다. 베드로도 그렇게 장담하였지만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지 않았습니까? 성령님은 바울에게 굳은 결심을 하도록 그의 마음을 준비시킵니다. 바울도 성령의 인도하심을 캐치하고 어찌하든 순종하고자 각오를 합니다.

바울이 사람을 기쁘게 하기보다 주를 기쁘게 하고자 할 때 만류하던 사람들이 어떻게 합니까?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영접합니다.

 

지난주 미국 시카고 닥터 죠셉정 선교사님이 소천하셨습니다. 이 분은 초창기 UBF 멥버이며 소아과 의사로써 주와 복음을 위해 그동안 헌신하셨습니다. 시카고 선교사로써 은퇴후에 연금을 받고 편하게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주의 부르심을 받고 70세에 부인인 에스더선교사님과 함께 아프리카 우간다 실버선교사로 나가셨습니다. 열악한 환경에서 7년 반동안 겸손하게 아프리카 양들을 섬기셨습니다. 연로하심에도 매주 12팀의 일대일 성경공부를 하셨습니다. 이 가정이 온후 30명이던 우간다 주일예배가 두 배로 부흥을 하였다고 합니다. 2년 전에 에스더선교사님을 먼저 하나님 나라에 보내셨습니다. 그후 사무엘선지자처럼 기도하지 않는 죄를 범치 않겠다는 방향가운데 365일 매일 새벽기도를 감당하셨고, 매일 500명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매일 말씀을 보며 회개하며 중보기도에 힘쓰셨습니다. 국제 수양회 마지막 날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달려갈 길을 마치시고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이 분의 고귀한 삶을 우리가 본받기를 기도합니다.

 

여러 날 후에 바울 일행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형제들이 반갑게 맞았습니다(17). 그 이튿날 예루살렘 교회의 책임자인 야고보에게로 들어가니 장로들도 함께 있었습니다(18). 바울은 그들에게 인사하고, 하나님께서 이방 사람 가운데 하셨던 사역을 낱낱이 보고하였습니다(19). 구제 헌금도 전달했겠죠. 교회 지도자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20). 하나님께서 바울을 쓰셔서 이방 사람 가운데 생명 사역을 이룬 줄 믿었습니다. 여기까지는 좋았습니다. 그런데 바울에 대한 안 좋은 소문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심을 가진 자라여기서 그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수는 많았지만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보다 율법을 열심히 지키는 것을 더 우선순위에 두었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주신 주님보다 율법을 더 사랑했다는 것이죠. 그들은 하나님의 의, 은혜의 복음에 기초하지 않고 자기 의를 기초로 신앙생활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의 가치관과 대조가 됩니다. 그들 중에는 바울을 오해하고 있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바울이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말고 또 관습을 지키지 말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죠. 바울은 율법을 신령한 것이라 하였고, 그 긍정적 역할을 인정했습니다. 다만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게 되지 못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했습니다. 또한 바울이 할례를 금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했습니다. 또한 바울은 유대인으로서 유대인처럼 행했습니다. 고린도에서 서원하였을 때 유대 관습을 따라 서원 기간동안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았고, 서원이 끝날 때 겐그리아에서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았습니까?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은 바울의 오해를 풀어주기 위해 어떤 제안을 합니까? 예루살렘 교회에 서원한 네 사람이 있었습니다(23). 그들을 데리고 가서 정결 예식을 함께 하고, 그들이 머리를 깍는 비용을 대신 지급하도록 제안합니다. 서원의식을 마치려면 성전에서 예물을 드려야 하는데, 가난한 사람은 예물을 드리지 못해서 서원의식을 완성하지 못한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때 다른 사람이 그 비용을 지불해 주는 행위는 당시 유대인들에게 지극히 경건한 행위로 보았습니다. 그것을 바울에게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율법을 무시하지 않는구나. 경건한 사람이구나하며 오해를 풀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제안에 바울이 어떻게 합니까? 군 말없이 그대로 행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도 자기 생각과 자기 주장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 않아도 될 명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를 믿고 구원받는 일과 상관없는 비본질 적인 것에 대해서는 언제든지 포용적입니다. 그 기준은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입니다. 올해 신년 말씀인 로마서 15장에서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15:1-3)하였습니다. 또한 롬15:8에서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추종자가 되셨다고 했습니다. 성자 하나님이 유대인으로 태어나 유대인과 같이 할례를 받으셨습니다. 또 죄가 없으시므로 세례받지 않아도 되었지만 의를 이루기 위해 세례 요한에게 물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따르고 있습니다.

 

, 바울이 정결예식을 하면 유대인들이 오해를 풀 줄 알았는데 어떻게 됩니까? 예상이 빗나갑니다. 결례 마지막 날 제 칠일에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서 모든 무리를 충동하여 그를 붙들고 외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 곳을 비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혔도다유대인들이 자랑하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율법, 성전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 세 가지를 비방했다는 거예요. ‘반유대적이며, 반율법적이고, 반성전적으로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바울이 이방 사람을 성전 안으로 데리고 와서 거룩한 성전을 더럽혔다는 겁니다. 그들은 전에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시내에 있음을 보았는데, 바울이 그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줄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29)

여기서 성전은 유대인의 뜰을 말합니다. 유대인은 들어갈 수 있으나 이방인은 들어가면 안됩니다. 들어가는 입구에는 외국인은 누구든 막론하고 이 울타리를 넘어오면 죽음의 고통을 겪으리라는 경고문이 붙어 있었습니다.

 

그러자 온 성이 소동하여 백성이 달려와 모여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갑니다. 성전 문이 곧 닫혔습니다. 이 말에는 상징적 의미가 있습니다. 성전의 기능이 닫혔다는 것입니다. 성전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 분의 말씀을 듣고, 사람을 살리는 곳입니다. 그런데 그 성전에서 사람을 붙잡아서 죽이려고 합니다. 그런 성전의 문은 닫힐 수 밖에 없습니다.

 

당시 성전 북쪽에 안토니오 요새가 있었고, 로마군대가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망루에서 성전을 늘상 감시하였습니다. 소요가 일어날 기미가 보이면 즉각 군대를 출동시켜 제압하는 것이 그들의 임무였습니다. 특히 명절 때는 많은 유대인들이 몰려 왔기에 군사를 증강시키고 예의 주시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일려고 한다는 소식이 신속하게 로마 군대 천부장에게 올라갔습니다(31). 천부장과 군대들이 현장으로 달려가니 사람들이 바울을 때리는 일을 멈추었습니다. 천부장은 바울을 잡아 두 쇠사슬로 결박합니다. 예언대로 되었습니다. 동시에 바울은 아무 잘못도 없고 피해자인데 오히려 죄인이 됩니다. 천부장은 바울을 정식으로 심문합니다(33). 하지만 흥분한 군중의 목소리에 사실관계를 따질 수 없어서 영내로 끌고 갑니다(34). 군중은 따라오면서 그를 없애버려라. 그를 없애버려~” 고함칩니다. 이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 십자가에 못박아~” 외쳤던 그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바울은 영내로 들어가려 할 때 천부장에게 헬라 말로 대화합니다. 천부장은 그가 헬라 말을 하자 놀라면서, “얼마 전에 폭동을 일으켰던 그 애굽인이냐?”라고 묻습니다. 바울은 자기는 유대인이고, 길리기아 다소 출신임을 밝힙니다. 그리고 유대 동족들에게 말하도록 허락을 구합니다. 그는 유대인들을 향해 히브리 말로 말합니다(40).

 

221절을 읽습니다. “부형들아 내가 지금 여러분 앞에서 변명하는 말을 들으라” ‘부형들아~’ 이 말은 형님들~’ 이런 표현입니다. 아까까지만 해도 자기를 폭행하였고 지금도 죽이라고 고함치는 그들에게 바울은 정중하게 다가섭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는 자들을 향하여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23:34) 하셨던 말씀이 연상됩니다. 바울의 마음은 주님의 마음과 같습니다. 그는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기보다 어찌하든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를 찾고 있습니다.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애쓰는 사도바울의 모습입니다.

 

바울은 먼저 자신에 대한 오해를 변명합니다.

 

첫째, 자신은 반유대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나는 유대인입니다. 내가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났지만 이곳 예루살렘에서 쭉 자랐습니다. 내 몸에는 유대인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뼈 속 깊이 저는 유대인입니다. 그 자긍심을 말하라면 나를 따라올 사람이 없습니다.’

 

둘째, 자신은 반율법적이지 않다고 합니다. ‘나는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습니다.’ 가말리엘은 당대 최고의 율법학자였습니다. 존경의 표시로 우리 랍비라는 칭호을 받은 일곱 사람중 한 사람입니다. 그의 제자가 될려면 13살 때 모세 오경을 다 암송해야 했습니다. 바울은 그 밑에서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다고 합니다. 자신이 얼마나 율법에 정통한 식견을 가졌는지를 어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당신들처럼 하나님께 대한 열심을 가졌다고 합니다. 그 구체적 증거가 무엇인가? “‘이 도즉 예수를 믿는 신앙을 박해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습니다. 증인도 있는데, 당시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이다. 그들에게 물어보면 알 것이다.” “또한 예수를 믿도록 나를 도왔던 사람이 아나니아인데, 그도 율법에 따라 경건한 사람으로 거기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받는 사람이었다.”

 

셋째, 자기는 반성전주의가 아니라고 합니다. 그가 예수를 믿고 3년간 아라비아와 다메섹에 체류한 후 첫 번째 예루살렘 방문 때의 경험을 말합니다. 그가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황홀한 중에 주의 계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가 주의 계시를 받은 곳이 바로 성전이었음을 강조합니다. 이는 유대인들이 성전을 거룩한 장소로 여겼으므로 함부로 시비를 걸 수 없을 것입니다. 계시의 내용이 무엇이냐고요? ‘예루살렘에서 나가라는 것이었습니다(18). 그리고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바울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한 이유와 당위성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 생각에 기초해서 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명령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오해하고 있는 세 가지를 이렇게 변명하면서 중간 중간 복음을 담아 증거합니다. “내가 그토록 그 도를 따르는 자들을 박해하기에 열심이었는데, 내가 이렇게 변화된 것은 부활하시고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빛으로 내게 찾아오셨고 내가 그 분을 직접 보았습니다. 그 분은 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왜 나를 박해하느냐?’,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다’,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네가 해야 할 모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나는 그 분의 음성을 분명히 들었습니다. 그리고 나에게 나타난 그 분은 의인이었으며 살아계셔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깨끗함을 받는 것은 예수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죄 씻음을 받게 됩니다. 내가 그렇게 하여 죄 씻음을 받고 현재 그 도를 따르는 자가 되었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것을 듣다가 무리들이 어떻게 합니까? 가슴을 치며 아이구~ 바울목자님,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떻게 해야 죄 씻음을 받겠습니까?” 이렇게 하였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회개는커녕 이런 놈을 세상에서 없애버리자. 살려둘 자가 아니다소리치며 옷을 벗어던지고 티끌을 공중에 날립니다. 엄청난 분노를 표출합니다.

 

말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바울은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뿐 아니라 죽을 것도 각오합니다. 성령에 사로 잡혀 고난의 길,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연합을 위해 그는 예루살렘에 올라갔고, 야고보의 제안을 따랐고, 결박가운데서도 자신을 폭행한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를 증거했습니다. 그는 복음의 승리를 체험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 죄 값을 대신 지불하시고 우릴 살리셨습니다. 이 은혜에 기초하여 우리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기를 기도합니다. ‘예견된 승리의 길,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