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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4년 마가복음 4강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마가복음 2:18-3:6)2024-04-07 2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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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마가복음 4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말씀: 마가복음 2:18-3:6

요절: 마가복음 2:22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너무나 유명한 말씀이어서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조차 잘 아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지금 급속한 기술의 발전과 사회변혁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모바일 시대를 맞이하여 스마트폰이 없으면 아무 것도 못하는 시대입니다. AI 시대가 성큼 다가와서 많은 직업들이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꿈으로만 여겼던 우주 시대가 열리고 있습니다. 너무나 래디컬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어서 앞으로 무엇이 어떻게 변할지 우리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습니다. 각 개인이나 기업, 국가 그리고 교회도 시대 변화에 발맞추기 위해서 연구하고 전략을 짜고 다양한 변화를 모색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마가가 전하는 복음을 배우고 있습니다. 복음은 유앙겔리온이라고 했습니다. ‘새로운 왕이 오셨고 새 시대가 열렸다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새 시대가 열리면 누가 좋아하고 누가 싫어할까요? 새로운 왕, 새 시대가 열린 것을 환영하고 받아드리는 사람에게는 기쁜 소식입니다. 그런데 기존에 자기가 가지고 있던 기득권을 내려놓기 싫은 사람들은 싫어할 것입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이 그랬습니다. 새 시대를 여는 예수님과 바리새인들이 필연적으로 충돌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두 가지 면, 금식과 안식일 문제에서 충돌하게 됩니다. 이를 통해서 예수님이 여시는 새로운 시대가 무엇이며,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맞아드려야 하는지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먼저, 금식 논쟁을 살펴보겠습니다.

 

18절을 보면, 어떤 사람들이 와서 예수님께 따져 묻습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당시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 두 번, 월요일과 목요일에 금식하였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여기에 더 해 수시로 금식하였습니다. 그들은 금식을 통해 자신들의 경건을 표현하여 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을 가만히 보니 일주일 내내 잔치만 했습니다. 월요일은 누구 죄인의 집에 초대 받아서 가고, 화요일은 누구 세리와 식사하고, 수요일은 누구 탕자를 심방 가서 먹고 마시고. 예수님 제자들의 얼굴은 항상 싱글벙글하고 즐거웠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제자들의 행태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이런 제자들을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천박한 자들’(11:19)이라고 그들은 비난했습니다. 여기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19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예수님은 신앙생활을 혼인잔치에 비유하셨습니다. 혼인잔치는 신랑신부들 뿐 아니라 그 친구들, 가족들 모두에게 가장 행복하고 기쁜 날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바로 이러한 혼인잔치와도 같습니다. 죄인들이 예수님을 만나 죄 사함 받고 거듭날 때 이보다 더 기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번에 봄학기를 맞이하여 국민대와 상명대에서 쏘잉을 하고 지난 3주에 걸쳐 학생들을 초청하여 세 번의 특강으로 말씀잔치를 하였습니다. 윤모세목자님의 ‘21세기에도 신앙이 필요한가’, 황제이콥목자님의 나의 미래를 묻고 답하다’, 강야곱목자님의 성경과 법, 그리고 리걸마인드강의는 너무나 좋았습니다. 우리 대학생들에게 새 시대를 어떻게 살아가야 승리하며 행복하게 살 수 있는가 그 길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청년들이 진지하게 말씀을 듣고서 특강 내용이 너무나 좋고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좋은 강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고 하였습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가운데서 말씀 듣고, 식사하고, 교제할 때 이것을 지켜보는 저는 너무나 기뻤고 감격스러웠습니다. 여기에 참여한 목자님들의 얼굴도 기쁨이 충만하였습니다. 이처럼 주님 안에서 말씀을 나누며 교제하는 것이 혼인잔치와 같은데,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금식한다면 되겠습니까? 결혼식에 와서 40일 금식하는 사람처럼 딱딱한 얼굴로 저 금식 중인데요하면 혼주측 사람들이 얼마나 부담스럽겠습니까? 물론 우리가 신랑되신 예수님을 빼앗기는 때가 온다면 그때는 금식해야겠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될 때 제자들은 금식하고 주님의 고난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은 이번 사순절에 금식하면서 주님의 십자가를 묵상하며 고난에 동참한 걸로 압니다. 우리가 회개 제목이 있다면 그때는 금식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영적으로 교제하는 동안에는 기뻐하며 즐거워해야 합니다. 또한 다른 사람의 감격과 기쁨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축복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기쁨의 종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복음역사의 성격을 한 비유를 통해 가르쳐 주셨습니다. 21,2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 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예수님은 자신의 역사를 생베와 새 포도주에 비유하셨습니다. 생베는 신축성이 있어서 잘 늘어납니다. 새 포도주는 발효력이 뛰어나서 팽창합니다. 당시에는 나병환자에게 손을 대면 안 되는데, 예수님은 일부러 손을 대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1:41)’하십니다. 또한 지붕을 뚫고 내려진 중풍병자에게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하시며 죄사함을 선포하시고,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하시며 병을 낫게 해주십니다. 세리같이 흉악한 죄인을 제자로 불러 주시고 그의 집에 들어가 다른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식사교제를 나누셨습니다. 그러시면서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과 그 행보들은 참으로 파격적이고 신선하였습니다. 틀에 매이지 않고, 유연성이 있고, 포용력이 있으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깜짝 깜짝 놀라게 합니다. ‘놀라게 하다이 말은 다른 말로 대체하면 혁명적이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역은 인류역사상 가장 혁명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예수님을 최고의 혁명가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새 포도주는 발효되는 과정에서 이산화탄소가 나오기 때문에 아주 많이 팽창합니다. 그래서 이를 담는 부대도 반드시 신축성이 있는 새 부대여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고 늘어나지 않는 낡은 가죽부대이면 팽창력을 감당하지 못하여 터져버립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낡은 가죽부대와 같았습니다. 그들은 낡은 관습과 율법적인 생각에 사로잡혀서 예수님의 역사를 용납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꾸 어찌하여, 어찌하여만 반복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일반 백성들은 열린 마음으로 예수님께 나아와서 주님의 능력과 사랑을 체험했습니다. 그들은 부족하지만 예수님께 배우고자 하는 뜨거운 열정이 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새 부대들이었습니다.

 

우리도 오늘날 새 포도주와 같이 역동적인 주님의 생명구원역사를 영접하고 따라가기 위해서는 새 부대가 되어야만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새 부대가 될 수 있을까요? 3:5 말씀처럼 성령의 새롭게 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말씀처럼 그리스도안에 거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면서 나의 삶의 중심이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되게 하여야 합니다. 나는 죽고 그리스도가 살아 그리스도가 나를 다스리게 해야 합니다.(2:2) 또한 우리는 세상풍조를 본받지 않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여야 합니다.(12:2)

저는 이번 황제이콥목자님의 강의와 강야곱목자님의 강의를 들으면서 어쩜 이렇게 새 시대에 맞게 새롭게 강의를 잘 준비해 오셨는가생각을 하면서 많이 배우고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제목도 신선하고 내용도 은혜가 있었습니다. 두 분의 공통점을 보면, 신앙연수가 오래 되었어도 말씀을 사랑하시고 다 아는 말씀이라고 치부하지 않고 늘 말씀을 배우고자하는 마음, 새롭게 연구하는 자세, 그리고 말씀대로 살고자 애쓰는 그런 모습을 봅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그러면서 떠오르는 말씀이 있었는데요.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4:16) 그리스도안에서 나이나 신앙연수에 관계없이 늘 주님을 닮아가고자 하는 우리 목자님들과 청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도전주시고 기쁨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23절부터는 안식일 논쟁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23절을 보겠습니다.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 때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 먹었습니다. 이를 보고 있던 바리새인들이 트집을 잡았습니다. “보시오. 저들이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당시 랍비들은 안식일에 금지된 일의 조항을 39가지를 만들었습니다. 그 중에는 추수하는 일을 해서도 안 되고, 곡식을 따서 손으로 비비는 것도 해서는 안 된다는 규정이 있었습니다. 이런 그들의 잣대로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안식일 법을 어긴 죄인들이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어떻게 답하십니까? 사무엘상 21장에 나오는 다윗의 경우를 들어서 제자들을 변호하셨습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쫓기고 있을 때 사흘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했습니다. 이때 아히멜렉 제사장에게 가서 먹을 것을 조금 달라고 했는데 진설병 외에는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진설병은 제사장 외에는 먹을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아히멜렉 제사장은 다윗의 사정을 참작해서 그 진설병을 다윗 일행에게 주어서 먹게 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제자들도 안식일이긴 하지만 예수님과 함께 다니면서 열심히 생명구원역사를 섬기다가 먹을 것이 없어 한 일이기 때문에 안식일 법에 저촉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은 안식일에 대한 바른 의미를 설명해 주셨습니다. 27, 28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하나님께서 처음에 안식일을 제정하신 목적은 사람들에게 안식을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안식일이 없으면 사람들은 주구장창 땅만 쳐다보고, 탐욕의 노예가 되어서 일만 하다가 병이 나서 죽을 것입니다. 또 사회적 약자들이나 종들, 짐승들은 쉬지도 못하고 죽어라고 일만 하다가 쓰러질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안식일을 두셔서 일을 내려놓고 쉬도록 하셨습니다. 재충전의 시간을 갖게 하셨습니다. 또한 하늘을 쳐다보며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하나님께 감사하도록 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사람을 위해서 안식일을 제정하셨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킨다는 명목하에 너무나 많은 안식일 규례들을 만들었습니다. “이것도 해서는 안 되고, 저것도 해서는 안 되고이로서 안식일이 오히려 안식이 없는, 숨 막히는 날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안식일의 본래 의미를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

 

3:1-6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한쪽 손 마른 사람을 고쳐주시는 사건이 나옵니다. 2절에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고발하려는 목적으로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한손 마른 자에 대한 자비심이나 관심은 전혀 없었습니다. 사실 한 손이 말라서 정상적인 생활을 못하면 얼마나 살기가 힘들겠습니까? 그의 인생은 안식이 없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보면 어떻게 이 사람을 도와줄까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오직 예수님이 안식일 법을 지키는가? 안 지키는가?’ 거기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한 손 마른 자를 예수님을 고발하는 도구로 보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주의자들의 병폐입니다. 하나님이 인생들을 사랑하셔서 율법을 주셨는데 그것을 악용하면 오히려 율법이 올무가 됩니다.

 

반면 예수님은 어떻게 하길 원하십니까? 3,4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 가운데에 일어서라 하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예수님은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일을 하기 원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마음, 즉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그들의 악한 생각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들의 완악함을 탄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도전하십니다. 한손 마른 사람을 가운데 세우고서 네 손을 내밀어라명하십니다. 그러자 그는 즉시 순종하여 자기의 마른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러자 손이 온전히 회복되었습니다. 이로서 예수님은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 생명을 살리는 것이 옳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셨습니다.

 

이것을 본 바리새인들이 어떻게 반응해야 마땅합니까? ‘저희들이 잘못 생각했습니다. 저희는 죄인입니다. 저희들의 죄를 어떻게 씻을 수 있을까요?’ 이래야 했습니다. 그러나 6절에 보면 이들은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예수님을 어떻게 하면 죽일까 의논했습니다. 이들은 마음이 완악한 정도가 아니라 사악했습니다. 율법 지식을 많이 알고 있다고 해서 선한 것이 아닙니다.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를 알아야 합니다. 율법의 본질을 바로 알고 실천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바리새인들처럼 낡은 가죽부대가 되어서 터져 버리고 맙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 감추어져 있지만 우리가 놓쳐서는 안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누구이신가를 알려주는 계시입니다.

 

첫 번째로, 예수님은 자신을 신랑으로 묘사했습니다. 이것은 구약에서 자기 백성과 관련하여 하나님을 나타내는 말이었습니다(54:6, 2:16-20). 2:19,20은 다음과 말합니다. “내가 네게 장가 들어 영원히 살되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어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예수님은 자신을 신랑으로 묘사함으로 자신이 신적 존재이며, 그리스도라는 것을 드러내셨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미 도래하였음을 알리십니다. 또한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라는 말을 통해 자신이 신부를 위하여 십자가 죽음을 당할 것을 예고하십니다. 신부된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주신 이 소명을 늘 기억하셨고, 이 일에 자신을 헌신하셨습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은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하십니다. 우리 인생의 참된 안식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은 이 안식에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11:28-30). 쉽이 필요하신 분은 예수님께로 나아오십시오.

 

예수님은 이처럼 자신이 하나님이신 것을 계시함으로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시고 우리를 새롭게 하는 재 창조역사를 이루어 가고 계십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제대로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대적하고 충돌을 일으킨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누구로 알고 계십니까? 얼마나 깊이 잘 알고 있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제대로 알 때 영생에 이르게 됩니다(17:3). 또한 그 분의 신령한 성품에 참여하게 됩니다(벧후1:2-4).

 

과거 저는 예수님과 심각하게 충돌하였습니다. 1때였습니다. 저는 고등학교에서 나누어준 신약성경을 읽고서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로 시작되는 마태복음의 산상수훈 말씀은 너무나도 새롭고 충격적이었습니다. 특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며말씀은 저의 심장을 뛰게 했습니다. 어찌 세상에 이런 가르침이 있단 말인가? 저는 호기심을 가지고 신나게 성경을 읽어 나갔습니다. 그런데 요14:6에서 멈추어서게 되었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나아올 자가 없느니라저는 아니, 어떻게 인간 예수가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란 말인가? 더군다나 자기를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고? 이건 완전 독선적이군.’하며 저는 성경을 덮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속으로 내가 차라리 종교를 하나 만들지허세를 떨었습니다. 저는 교만과 무지로 가득찬 낡은 가죽부대였습니다. 주님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비난하였고 배척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구주 예수님은 이런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대학 1학년 가을, 친구가 들려주는 복음을 통해 찾아오셨습니다. 복음을 듣던 중, 성령께서 제 마음을 열어주셔서 예수께서 죄악된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음을 깨닫게 하시고, 그 분의 사랑을 받아드리고, 예수를 나의 구주, 나의 왕으로 모시는 기도를 드리게 하셨습니다. 이때 제 마음에 죄사함과 생명이 임하고 세상이 천국으로 변하는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새 피조물로 저를 창조하신 주님은 지금도 저와 함께 하시며 예수님을 닮아가는 자로 저를 빚어가고 있습니다. 현재적으로 제가 이 시대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 나라 운동을 담을 수 있는 새 부대로 쓰임받기 위해 성령의 새롭게 하심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의지하기를 기도합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예수님은 새 포도주가 되십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너무나 감동적이고 역동적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 종으로서 전폭적으로 섬기셨습니다. 그의 생명을 나누었습니다. 이 예수님의 사상과 삶을 우리 안에 담기 위해 우리는 새 부대가 되어야 합니다. 낡은 가죽부대와 같은 안일과 교만, 자기중심적인 생각을 부인하고, 힘써 예수님을 배우길 기도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예수님과 함께 하는 혼인잔치와 같은 기쁨으로 항상 충만하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