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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3년 종로2부 여름수양회 주제1강 `하나님의 사랑` (누가복음15장)2023-07-10 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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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1

하나님의 사랑

 

누가복음15

 

천국 잔치와 같은 여름 수양회에 참석하신 여러분들을 만나게 되어 참으로 기쁩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하나님의 사랑 입니다.

 

요절 말씀은 누가복음 1520절입니다. 다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얼마전 경기도 수원 모 아파트 냉장고에서 부모가 생후 하루밖에 안 된 아이를 살해후 냉장고에 보관해온 사건으로 모든 이를 경악하게 하였습니다. 아이들에게 아무런 죄가 없는데도 친부모에게조차 버림받는 비정한 현실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는 누구도 버림 받기를 원치 않으시는 하나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의 영적인 눈을 활짝 열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께 한 걸음 더 가까이 나아가는 시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1,2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세리와 죄인들은 예수님 옆에 앉아 말씀을 들으며 풍성한 식사 교제를 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예수님 말씀 너무 은혜롭고 감동적이지 않아" "맞아 맞아 최고야" 그들은 하하 호호 웃음 꽃을 피웠습니다. 반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멀리서 이를 지켜보며 수군거렸습니다. "율법도 안 지키고, 제 멋대로 사는 저 죄인들을 어떻게 영접할 수 있지?" 그들은 예수님의 이런 모습을 한 두 번 목격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죄인들을 영접하시는 이유를 여러 차례 설명해 주셨지만, 바리새인들의 비난은 매번 반복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마음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비숫한 비유를 세 가지나 말씀해 주십니다. 이 비유들을 통해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기 원하셨습니다.

 

첫 번째 비유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양 일백 마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마리를 잃었습니다. 그는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양을 찾으러 갔습니다. 왔던 길을 따라 가며 구덩이란 구덩이는 다 들여 다 보았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낭떠러지 아래도 가 봤습니다. 평소 가지 않았던 길도 다 찾아 가 보았습니다. 어느덧 해가 저물었습니다. 아흔아홉 마리 양은 여전히 들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가진 양이 한 마리 밖에 없다면 그의 행동이 이해가 갑니다. 두 마리 중 한 마리를 잃어 버렸다고 해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미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 마리 정도는 포기할 법도 합니다. 그러나 그는 한 마리 잃은 양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닙니다. 마침내 찾아 냈습니다. 덩실덩실 춤을 추며 크게 기뻐합니다. 잃은 양을 어깨에 메고 콧노래를 부르며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그 벗과 이웃을 다 불러 모으고 말합니다.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잃은 양을 찾아 낸 기쁨을 주체할 수 없어 그는 양 몇 마리 값이나 드는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보통 사람은 잃어버린 새끼 양 한 마리 찾았다고 기뻐하며 이웃을 불러 잔치를 벌이지 않습니다. 비유의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십니다.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7절을 다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시작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의인이 아흔아홉이나 있으면 죄인 하나쯤은 무시해버릴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마음은 그랬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길 잃고 방황하는 한 영혼을 찾아내기까지 찾아 다니십니다. 전 세계 나 한사람를 빼고 다 하나님께 돌아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잃어버린 나 하나를 포기하지 않고 찾아 다니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두번째 비유입니다. 어떤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었습니다. 열 드라크마는 남편이 예물로 준 동전 목걸이 한 세트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 중 하나를 잃어버렸습니다. 한 드라크마는 하루 일당입니다. 아깝지만 다른 동전으로 대신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비유의 여자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남편과의 소중한 시간과 추억이 깃든 특별한 동전이었기 때문입니다. 여자는 등불을 켜고 집을 구석 구석 쓸어 가며 부지런히 찾았습니다. 문 틈이나 가구 아래, 심지어는 옷 가지 하나 하나를 다 들추어 내었습니다. 마침내 동전을 찾았습니다. 여자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이웃을 다 불러 모으고 말합니다."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노라" 보틍 사람은 결혼 예물 중 한 부분을 찾았다고 해서 기뻐하며 이웃을 불러 잔치를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10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바리새인들은 세리와 죄인들을 제거해야 할 사회 악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열 드라크마의 잃어버린 동전 하나처럼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존재로 보셨습니다. 그들이 회개하고 예수님께 나아왔을 때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함께 먹고 마시며 잔치를 베푸셨습니다

 

이제 세번재 비유를 보겠습니다. 세번째 비유에서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을 아들의 위치로까지 높이셨습니다. 11절을 보겠습니다.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두 아들을 둔 아버지는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든든하고 흐뭇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둘째가 찾아와서 말했습니다. 12 상반절을 "하는지라까지 형제님들이 읽겠습니다. 시작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분깃은 유산을 의미합니다. 유산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혹은 돌아가실 때 분배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아버지가 멀쩡히 살아 계신데 유산을 요구하는 것은 자칫 빨리 죽으라는 말로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보통의 아버지라면 버르장머리 없다며 호되게 책망하거나, 갑자기 유산을 요구하는 이유를 말하라며 꼬치꼬치 캐 묻거나, 그래도 설득이 안 되면 빈손으로 나가라며 쫓아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비유의 아버지는 어떻게 했습니까? 12 하반절을 자녀를 둔 아버지들이 읽어 보겠습니다. "아버지가 부터 시작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아버지는 둘째의 마음이 이미 떠난 것을 아셨습니다. 둘째의 계획도 아셨고, 유산을 어디에 쓸지도 아셨습니다. 둘째의 연악함과 한계도 잘 아셨습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둘째의 요구대로 유산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아버지가 큰 부자였음을 감안할 때 유산의 규모는 매우 컸습니다. 땅 평수도 백 단위 천 단위가 아니라 백만 단위, 천만 단위였을 것입니다. 둘째는 유산을 받자마자 계획대로 추진했습니다. 13 상반절을 보겠습니다.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둘째는 유산을 처분하기 시작했습니다. 최상급 땅과 건물과 가구들이었기 때문에 빠른 시간에 거래가 완료되었습니다. 유산으로 받은 것은 마당 빗자루 하나까지 당근마켓에 올려 다 팔아 치웠습니다. 며칠이 안 되어 통장에 거액이 찍혀 있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습니다. 눈 앞에 펼쳐진 새로운 삶을 생각할 때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둘째는 그토록 가고 싶었던 유토피아, 먼 나라를 향해 길을 떠났습니다. "야호, 자유다 자유"

 

아버지 집을 멀리 떠나 먼 나라에 도착한 둘째의 삶이 어떠합니까? 13 하반절을 보겠습니다.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허랑은 헛되이 낭비하는 것입니다. 방탕은 본성이 이끄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아버지 집에서도 본성대로 할 때가 있었습니다. 시간과 물질, 에너지를 낭비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때마다 바른 길로 이끌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섬세하게 보살펴 주시는 아버지의 사랑도 있었습니다. 둘째가 처음 먼 나라에 도착했을 때는 어릴 때 배운 대로 자신을 잘 통제해보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오감을 자극하는 먼 나라의 유혹들 앞에서 둘째의 결심은 며칠을 가지 못했습니다. 먼 나라에서 사귄 친구들은 둘째를 달콤한 죄의 신세계로 이끌었습니다. 친구들의 호탕하고도 과감한 말을 들으며 지난 날 자신이 너무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갇혀 산 것 같았습니다. 둘째의 행동은 날로 과감해졌습니다. 돈 냄새를 맡고 둘러 붙은 사기꾼, 창기들로 인해 둘째는 시간과 돈을 헛되이 낭비했습니다. 삶의 규모가 다 무너졌습니다. 밤새 쾌락을 즐겼습니다. 해가 중천에 떠 올라서야 일어났습니다.

 

14절을 보겠습니다.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둘째는 그 많던 돈을 다 써 버렸습니다. 마침 그 나라에 큰 흉년이 들었습니다. 투자한 사업도 다 부도났습니다. 컵라면 하나 사 먹을 돈도 없었습니다. 가까스로 돼지치기 알바 하나를 구했습니다. 적어도 끼니 걱정은 하지 않으리라 기대했습니다. 열심히 일했습니다. 일과를 마치면 온 몸에서 돼지 똥 냄새가 진동했습니다. 그보다 더 견디기 힘든 것은 창자까지 파고드는 배고픔이었습니다. 허기로 인해 팔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습니다.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라도 먹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흉년이라 그 마저도 주는 자가 없었습니다. 자신에게 주는 이가 없다는 현실이 너무나 비참하고 슬펐습니다. "내가 이렇게 살려고 아버지 집을 떠나온 것이 아니었는데 지나 온 과거가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흘러 내렸습니다.

 

둘째의 모습은 하나님을 떠난 우리 인생들의 모습입니다. 처음에는 내 힘으로 잘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간섭이 없는 먼 나라가 더 행복할 것 같습니다. 본문의 세리와 창기, 죄인들도 다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떠나, 돈과 쾌락과 자유를 쫓아 원하는 대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비참했습니다. 전혀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받은 것들을 다 허비했습니다. 청춘을 허비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 수 있는 기회들을 허비했고, 하나님이 주신 고귀한 내적 형상을 다 망가뜨렸습니다. 그들은 산전수전 다 겪으며 마침내 궁핍하게 되었습니다.

 

둘째가 궁핍하게 되었을 때 어떤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까? 17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이에 스스로 돌이켜" 돌이켰다는 것은 방향을 바꾸었다는 뜻입니다. 생각을 바꾸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잘못된 방향인 줄 알면서도 사람의 고집은 꺾기 어렵습니다. 잃은 양은 찾도록 찾아서 데려올 수 있고, 잃은 드라크마는 집을 부수어서라도 찾아낼 수 있지만, 한 번 떠난 사람의 마음은 돌이키기가 어렵습니다. 둘째는 자신의 처지가 너무 비참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이렇게 된 근본적인 원인을 돌아보았습니다. 17-19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시작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둘째는 생각만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즉시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20 상반절을 읽겠습니다. 이에 부터 시작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한편 그 시각 아버지는 무엇을 하고 계셨습니까? 20절 하반절을 읽겠습니다. 아직도부터 시작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둘째가 집을 떠난 후 아버지가 무엇을 하고 계셨는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20하반절을 통해 아버지의 마음이 어떠했는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평소 둘째가 돌아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둘째는 아버지에게 연락하고 오는 것이 아닙니다. 당시에는 전화도 카톡도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마을 어귀에 나와 서 계셨습니다. 아직도 거리가 먼데 둘째를 알아보았다는 것은 마음에 사무치도록 둘째를 그리워하고 있었음을 말해 줍니다. 아버지는 날마다 마을 어귀에 서서 둘째가 돌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비가 올 때도 , 거센 바람이 불 때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아주 먼 곳에서 새카만 점이 하나 보일 때부터 아버지는 둘째인가 하며 가슴이 콩닥 콩닥 뛰었습니다. 점이 조금 커질 때 둘째가 아님을 알고 크게 실망하기를 수없이 반복했습니다. 한 밤중에도 문 밖에서 인기척이 나면 혹시 둘째가 왔다가 그냥 갈까봐 문 밖으로 나가 이리 저리 주변을 살펴 보았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멀리서 걸어오는 사람이 둘째가 분명했습니다. 아버지는 둘째에 대한 측은한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동안 집 떠나 고생했을 것을 생가하면 마음이 울컥하고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자리에 가만히 서서 기다리고만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들이 오는 방향으로 달려갔습니다. "둘째야, 둘째야" 둘째는 멀리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소리를 잘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설마 아버지일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거리가 가까워 가면서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아버지가 분명했습니다. 몽둥이로 얻어 맞고 품꾼으로라도 받아 주면 감사하다고 생각했는데, 아버지는 이미 자신을 알아보고 그 늙은 몸을 이끌고 자신을 향해 달려 오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둘째는 아버지의 변함없는 사랑에 목이 메었습니다. 둘째도 아버지를 향해 달렸습니다. 오랫동안 부르지 못했던 그 이름을 불러 보았습니다. "아버지" 아버지는 둘째를 부둥켜 안았습니다. 더러운 똥 냄새 나는 몸을 있는 모습 그대로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니" 둘째는 솔직하고 겸손하게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아버지의 선처를 구했습니다. 아버지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22,23절을 보십시오.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아버지는 아들의 지위를 다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중요한 손님이 올 때만 잡는 그 송아지를 잡도록 하여 큰 잔치를 베풀도록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기쁨이 어느 정도입니까? 24절 보십시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떠난 한 영혼을 애타게 찾고 기다리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께 돌아왔을 때 큰 기쁨이 됩니다.

 

한편 둘째가 돌아와서 아버지가 잔치를 베풀었다는 사실을 알고 첫째가 아버지에게 불만을 쏟아냈습니다. "내가 여러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삼켜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첫째는 그 동안 아버지 집 일을 도맡아 하며 충성했다는 자기 의가 있었습니다. 동시에 자격 없는 둘째에게 과분한 환대를 한 것을 부당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첫째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몰랐습니다. 31,32절을 보겠습니다.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첫째는 아버지 집에서의 모든 풍족함과 자유를 마음껏 누리지 못했습니다. 무엇보다 아버지의 마음을 잘 몰랐습니다. 그 결과 아버지의 품에서 교제하는 즐거움을 맛보지 못했고, 아버지의 풍성한 사랑과 은혜를 누리지 못했습니다. 율법적인 생각으로 아버지 눈치 보며 일만 했습니다. 신앙 생활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 안에서 모든 풍요와 자유를 누리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모를 때 둘째처럼 집을 떠납니다. 첫째처럼 자기 의와 판단, 불평이 가득한 채 행복하지 않은 신앙생활을 합니다.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기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하나님과 같이 세리와 죄인들을 기쁨으로 영접해 주기 원하셨습니다. 동시에 그들도 자기 의와 판단을 내려 놓고 하나님의 뜻을 마음 깊이 영접하고, 예수님과 더블어, 그리고 세리와 죄인들과 더블어 함께 먹고 마시는 기쁨의 신앙 생활을 하기 원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으로 깨닫고, 하나님과 교제하며 기쁨과 생명력 넘치는 신앙 생활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저도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잃었다가 다시 얻은 하나님의 딸로서 풍성한 은혜와 사랑을 받으며 기쁨을 누린 자였습니다.

 

저는 196911녀중 장녀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제가 10살때 간암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의 남동생이 엄마한테는 시동생이 되고 저희 한테는 삼촌이 되시는데 군제대 후 오갈데가 없어 저희 집에 같이 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오늘날까지 어머니와 삼촌은 평생 부부처럼 사시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두분이 매일 싸우셨습니다. 그냥 평범한 부부 싸움이 아니라 삼촌의 구타와 부엌 칼이 날라 다니고 구두 발로 걷어 차고 허리 띠로 때리면서 집안 살림이 부셔져 나갔습니다. 저와 남동생은 무서워서 늘 다락방에 숨어 살아야만 했습니다. 어떻게든 빨리 학교를 끝내고 집을 떠나는 것이 저의 유일한 소망이었습니다. 정상적인 가정에서 사랑 받으며 자란 학교 친구들이 부러웠습니다. 아버지가 살아 계셨더라면 이런 불행은 없었을텐데라는 생각을 많이 하였습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꿈에 그리던 독립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옥 같았던 집만 벗어나면 행복한 인생을 살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 사랑에 대한 목마름과 갈증이 컸던 저는 고등학교를 막 졸업하고 취업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직장 상사의 유혹을 관심과 사랑으로 착각하게 되었습니다. 유부남과의 만남은 저에게 죄책감과 절망감을 안겨 주었습니다. 불행한 가정환경만 떠나면 행복한 삶이 되는 줄 알았는데 제가 바라던 삶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로 고통 받던 죄인을 여름 수양회 통해 찾아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413-14절 말씀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저는 이 말씀 통해서 그동안 아버지 사랑에 대한 목마름과 갈증이 해소되었습니다. 잘 못 살아 왔던 인생의 방향이 전환되었고 생수되신 예수님을 만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19951224일 주 짐바브웨 대한민국 대사관 행정직원으로 채용되어 짐바브웨 선교사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26살 꽃다운 나이에 선교사로 나간 저를 하나님은 기뻐 받으시고 많은 축복을 부어 주셨습니다. 선교사로 살기 위해 필수 조건인 체류, 비자 문제와 물질 자립인데 대사관 행정직원으로 채용되어 나아갔기 때문에 이 필수 조건이 해결되었습니다. 가정을 이룸으로 안정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사랑스런 두 아들을 키우는 복을 받게 하셨습니다. 짐바브웨가 꽃에 나라 답게 날씨도 좋고 경치도 아름다웠습니다. 사람들도 매우 겸손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하나님의 축복을 잘 감당하지 못하여 어느 순간부터 심령이 부요해 지고 교만해져서 하나님께 대한 감사함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저의 잘못된 선택으로 스스로 안정된 대사관 직장을 그만 둠으로 저희 가정은 체류, 비자 문제와 물질 문제로 고생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죄인을 인내로 인격적으로 기다려 주셨습니다. 저는 짐바브웨 자매 목자들과 함께 매일 성경 말씀 4장을 읽었습니다. 하루도 빠짐없이 365일 읽으면 1년에 성경전체를 통독할 수 있었습니다. 그냥 성경 말씀을 읽으면 졸립고 무슨 말씀인지 몰라 읽을 수가 없습니다. 혼자 읽으면 쉽게 포기하기 때문에 자매 목자들과 함께 성경 말씀을 연대순으로 읽었습니다. 유트브 찾아 가면서 설명해 놓은 내용 들어가면서 한 장에 한시간씩 수험생처럼 마음을 다해 힘을 다해 성경을 공부하고 읽었습니다. 하루에 4장이면 4시간을 투자해 공부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짐바브웨 사모님하고는 일주일에 한번 몇시간에 걸쳐서 2030장분량의 성경공부를 하였습니다. 이렇게 2년을 반복하자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말씀이 살아 역사하였습니다. 저의 삶도 말씀에 사로잡혀 살게 되었습니다. 주야로 말씀을 묵상하다보니 세상에 말씀이 주는 기쁨만큼 큰 것이 없었습니다. 말씀을 통해 나의 하나님, 저에 인생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신 하나님 만나는 것이 행복했습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복 받은 삶이구나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은 제가 죄인 되었을 때 먼저 찾아와 주시고 하나님 만나기까지 본문의 아버지와 같이 인내로 기다려 주셨습니다. 이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려 드립니다.

 

하나님은 저희 가정이 영육간에 준비되자 하나님의 때에 더 이상 짐바브웨서 사업과 자비량 선교사로 이어 나갈 형편이 되지 않음으로 올해 초 3월말에 한국 선교사로 귀국하게 되었습니다. 저의 젊음을 죄 짓는 삶에 낭비하지 아니하고 일찍이 짐바브웨 선교사로 28년동안 사용하여 주신 하나님께 너무 감사하였습니다. 짐바브웨 선교사의 삶이 아니었다면 말씀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나 같은 죄인을 살려서 말씀의 맛을 체험케 하여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사실 한국 선교사로 들어와 한국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아무 계획이 없었고 막막하였습니다. 분명한 것은 한국에서도 선교사로 정착하려면 자립하는 것이라 생각하였습니다. 당장 집과 직장이 필요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가 전혀 상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인도하여 주셨습니다. 한국 들어와서 한달만에 신축빌라 깨끗한 집을 싸게 구해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더 놀라운 일은 아는 원장님이 제가 한국 정착에 도움이 되도록 본인이 운영하시는 치과에 알바를 하도록 하셨습니다. 치과가 전문직이다 보니까 저처럼 전혀 치과 지식이 없는 사람이 치과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청소 밖에 없었습니다. 원장님은 이런 저를 불쌍히 여기사 친히 치과 교육 과정이 있는지 알아봐 주시고 찾아 주셨습니다. 일년에 딱 한번 있는 치과 양성 교육을 운 좋게 한달동안 속성으로 수료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꼬트리가 되어서 교육 과정이 끝나자 다른 치과에 취업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계약직도 아니고 꿈에 그리던 4대보험이 되는 정직원이 되었습니다. 경력도 없고 자격증도 없는데 이런 기적과 같은 일이 저에게 일어 났습니다. 20대 후반에 대사관 3년 근무한 것 빼고는 쭉 가정주부로 살다가 그것도 생판 모르는 전문직 치과에 취업이 되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짐바브웨에서의 삶은 저를 영적으로 거듭나게 하셨고 한국에서의 삶은 실력과 능력을 덧입도록 저를 도우십니다. 저의 아버지가 되어 주신 하나님은 필요에 따라 모든 것을 채워 주시고 회복해 주셨습니다. 제가 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잘 감당하는 자, 말씀의 기쁨을 남은 평생도 맛보며 사는 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오늘날에도 잃은 아들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품이 얼마나 좋은지 모르고 아버지 품을 떠나 허랑방탕하게 산 둘째 아들이나 이미 아버지 품안에 들어와 아버지의 모든 것을 다 상속 받을 첫째 아들임에도 이런 아버지의 마음과 사랑이 보이지 않아 기쁨이 없는 아들을 본문에서는 잃은 자들이라고 합니다. 잃은 자들을 지금도 찾으시고 애타게 기다리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속히 깨닫고 기쁨을 주시는 말씀 안에 함께 참여하는 자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