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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4년 데살로니가전서 제2강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라 (데살로니가전서 1:1-10)2024-02-12 0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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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데살로니가전서 제 2 강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라


말씀 / 데살로니가전서 2:1-3:13

요절 / 데살로니가전서 2:19,20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오늘 본문은 데살로니가전서 2장과 3장입니다. 우리는 지난 1장에서 데살로니가 교회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된 것을 배웠는데 그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말씀을 전하는 자가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복음을 전했기 때문이며 또한 성도들이 비록 많은 환난 가운데 있었지만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바울과 주님을 본받는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오늘 본문 2:13처럼 복음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은 바울의 목자 생활에 대한 간증입니다. 이는 바울이 자기를 자랑하고자 함이 아니요 자기를 비방하는 대적자들로부터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보호하고자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 복음 전도자로서의 바울의 자세와 믿음, 그리고 양들을 향한 목자의 사랑을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 복음을 위탁받은 바울

1,2절입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 가운데 들어감이 헛되지 않은 줄을 너희가 친히 아나니 너희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먼저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말하였노라” 사도행전 16장을 보면 바울 일행이 마게도냐의 첫 성 빌립보에 도착하여 개척 역사를 시작한 내용이 나옵니다. 빌립보에는 유대인의 회당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안식일에 갈 곳이 마땅치 않아서 강가에 나가서 거기에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였는데 루디아가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 후 길을 가다가 점치는 귀신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 귀신을 쫓아내어 주었습니다. 귀신이 나가자 여종은 신통력이 떨어졌습니다. 점괘가 영 맞지 않았습니다. 이에 그 주인들은 더 이상 돈을 벌 수 없게 되자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 고소하였습니다. 관리들은 그들의 옷을 벗기고 많이 쳤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깊은 감옥에 갇히고 차꼬에 채워졌습니다. 결국 빌립보에서 추방을 당하여 데살로니가에 오게 된 것이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이런 고난과 능욕을 당하게 되면 얼마나 가슴이 떨리고 두렵겠습니까? 트라우마로 인해 다시 복음을 전한다는 것 자체가 힘들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바울 일행은 데살로니가에서 어떤 자세로 복음을 전했습니까?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전하였노라" 여기서 ”많은 싸움 중에“는 NIV에 "in spite of strong opposition"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입니다. 데살로니가에서도 강한 반대에 부딪치자 바울은 빌립보에서의 박해가 생각났을 것입니다. 다시 매질을 당하고 깊은 감옥에 투옥될 것을 생각하면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움츠러들지 알았습니다.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담대함이야말로 복음의 일꾼에게 가장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그 당시나 오늘이나 많은 싸움이 요구되는 일입니다. 세상은 복음을 싫어하고 배척하고 대적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공중 권세 잡은 자의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부드럽고 호의적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내적으로는 복음을 거부하는 정신으로 가득합니다. 이것이 세상의 정신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많은 싸움이 요구됩니다. 


복음 전파는 영적 전쟁입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 세상의 어둠의 세력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승리할 수 있습니까?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는 승리할 수 없습니다. 백전백패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용기나 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며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였습니다. 그의 하나님을 힘입었습니다. (with the help of our God) 그랬을 때 그는 원수의 대적 앞에서도 기죽지 않았습니다. 물러나지 않고 담대히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결심과 의지는 약합니다. 지식과 언변도 그러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연약한 우리라도 하나님을 힘입을 때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 담대히 복음을 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바울은 많은 싸움 중에서 담대히 하나님의 복음을 전했는데 그의 복음 전파의 동기는 간사함이나 부정에서 난 것이 아니었고 속임수로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3) 그러면 그의 동기는 무엇이었습니까? 4절입니다. "오직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위탁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그는 자신이 오직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위탁 받았다고 말합니다. 위탁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에게 사람들에게 전하도록 복음을 맡기셨다는 것입니다. "바울아, 온 세상 사람들이 복음을 들어야 하는데 네게 부탁하니 네가 좀 전하거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심히 죄악된 자신, 죄인 중의 괴수인 자기에게 생명을 얻기 위해 반드시 들어야 할 복음을 자기에게 위탁하신 것이 너무나 감사하였습니다. 그는 이 하나님의 부탁을 온 마음으로 순종하기를 결심한 것입니다. 그가 복음을 전한 동기는 바로 자기에게 복음을 위탁하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었습니다. 그럴 때 그의 복음을 전하는 동기는 진실하고 깨끗하였습니다. 정직하였습니다.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아첨하는 말을 하지 않았고 탐심의 탈을 쓰지 않았습니다. (5) 


우리가 캠퍼스 양들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왜 하는 것일까요?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내 인생에서 전도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 교회 역사를 성장케하여 젊은 세대들에게 계승시키기 위해? 예, 다 맞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복음을 위탁하시고 전하라고 하셨기 때문임을 믿습니다. 복음을 전하여 캠퍼스 양들이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사람들이 되도록 섬기라는 우리 주님의 부탁 때문임을 믿습니다. 복음 전파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받은 명령이요, 순종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일차적인 이유요 목적입니다. 이는 심히 죄악되고 부족한 우리들에게 임한 놀라운 은혜요 특권입니다. 우리가 감사함으로 이 은혜와 특권을 잘 감당하기를 기도합니다.


2. 목숨까지도 주기를 기뻐한 바울

7절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마땅히 권위를 주장할 수 있으나 도리어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가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바울은 예수님의 사도였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를 직접 부르시고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습니다. 초대교회 당시 사도는 절대적인 권위가 있었습니다. 사도의 말은 주 예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바울은 그런 사도로서 마땅히 영적 권위를 주장할 수도 있었습니다. 교회의 권위와 질서에 복종하도록 요구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도리어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유순하게 섬겼습니다. 마치 젊은 엄마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습니다. 엄마는 자기의 어린 아이를 얼마나 귀하게 돌봅니까? 엄마는 잘 자라는 아기를 보면 너무나 행복해합니다. 넘어질까, 다칠까 아주 조심스럽게 살핍니다. 아기가 조금이라고 아프면 잠을 못자고 돌봅니다. 온유함과 사랑으로 지극 정성 기릅니다. 바울은 그와 같이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섬겼습니다. 


8절입니다.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뿐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너희에게 주기를 기뻐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라" 바울은 그들을 너무나 사모하는 (loved so much) 마음으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한 것은 물론이고 더 나아가 그들을 위해 자기 목숨도 주기를 기뻐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고백입니까?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자기 목숨 아닙니까? 천하를 주어도 바꿀 수 없는 것이 목숨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기꺼이, 아니 기쁨으로 그들을 위해 자기 목숨도 주고자 한 것입니다. 그가 이렇게 뜨거운 사랑을 소유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는 바울이 그와 같이 자기를 사랑하사 목숨을 주신 예수님의 사랑을 깊이 알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과거에 교회를 잔인하게 핍박하였습니다. 가가호호 집을 수색하여 예수 믿는 자들을 모조리 잡아내어 가두었습니다. 다메섹까지 원정을 가서 모든 신자들을 잡아오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그도 사랑하셨습니다. 딤전 1:13-16절에서 그는 말합니다.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죄인 중에 괴수인 그를 사랑하사 긍휼을 베푸신 까닭은 세상에 구원 받지 못할 자가 없다 라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는 일생동안 주님의 용서와 구원의 은혜를 결코 잊을 수 없었습니다. 자기를 뜨겁게 사랑하신 예수님의 사랑을 알았을 때, 바울의 마음에도 그 사랑의 샘이 생겼습니다. 예수님을 향하여 터져 나오는 사랑의 샘물! 그 예수님께 대한 사랑이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양들에게 향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 때문에 그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예수님을 사랑하듯이 뜨겁게 사랑하였고 자기 목숨을 주는 것도 기뻐하였습니다.


이상을 볼 때 우리가 목자요 전도자로서 살아가기 위해 무엇보다 예수님의 우리 각자에 대한 사랑을 깊이 아는 것이 중요함을 봅니다. 예수님의 사랑의 힘은 세상의 그 무엇보다 강합니다. 그 사랑을 깨달은 자는 누구라도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에 대한 책 "사랑의 원자탄"이 있습니다. 사랑은 원자탄 같이 강합니다. 목자의 힘은 사랑입니다. 전도자의 힘도 사랑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고 덧입을 때 양들을 위해 기쁨으로 목숨을 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이런 사랑을 알고 이런 사랑을 실천하는 종들이 되도록 해주시길 기도합니다. 바울은 이러한 사랑으로 양들을 사랑하였고 또 실제적인 삶에 있어서도 그들에게 조금도 경제적인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밤낮으로 텐트메이킹을 하며 물질자립을 하였습니다. (9) 


3.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은 데살로니가 교회

10절입니다. "우리가 너희 믿는 자들을 향하여 어떻게 거룩하고 옳고 흠 없이 행하였는지에 대하여 너희가 증인이요 하나님도 그러하시도다" 전도자로서 바울은 말로 복음을 전했을 뿐 아니라 삶에서도 본을 보였습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과 하나님이 증인이 될 정도로 거룩하고 옳고 흠 없이 행하기를 힘썼습니다. 11,12절입니다.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너희 각 사람에게 아버지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하노니 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라" 7절에서는 바울은 엄마가 아기를 기르듯 유순하게 그들을 섬겼다고 했습니다. 11절에서는 그가 아버지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했다고 합니다. 아이들이 자랄 때 부모가 필요합니다. 엄마의 절대적인 사랑과 아버지의 공의로운 훈육이 필요합니다. 바울은 엄마처럼 그들을 돌봤지만 또한 아버지처럼 그들을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했습니다. 여기서 특히 경계한다는 것은 NIV 에는 “urge”, KJV 는 “charge”, 공동번역은 "지도하다"로 번역하는 데 한 마디로 훈육한 것입니다. 가르치고 명하고 올바르게 행하도록 지도한 것입니다.


바울이 이 같이 그들을 사랑하며 지도한 목적이 무어입니까? 12절입니다. "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라" 바울이 그들을 가르치고 섬긴 목적은 하나입니다. 곧, 그들이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구절인 3장 13절에서도 바울은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기도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의 순수한 동기를 볼 수 있습니다. 그의 동기는 양들을 이용해서 자기 영광을 누리고자 함이 아닙니다. 그들을 통해 무슨 유익을 얻고자 함도 아닙니다. 그는 오직 그들이 하나님께 합당한 사람, 거룩한 사람들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이런 자세로 성도들을 섬겼을 때 그들은 또한 어떻게 말씀을 받았습니까? 13절입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 바울이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생각할 때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이 세상에서 성공하여 잘 살기 때문입니까? 고난 없이 안락하게 살기 때문입니까? 바울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은 것을 감사하였습니다. "진실로 그러하도다"는 말은 바울이 전한 말씀이 진실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말씀에 대한 자세가 어떠했는가 보게 됩니다. 곧 바울이라는 사람이 전했지만 그 말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기고 받았습니다. 그러한 자세로 받았다는 것은 겸손한 마음, 경외하는 마음, 한 말씀이라도 놓치지 않고 듣고자 하는 마음, 마음에 깊이 담고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 말씀 듣는 것을 큰 은혜임을 아는 마음으로 받았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10장을 보면 백부장 고넬료가 베드로 앞에 선 장면이 나옵니다. 고넬료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는데 오셨으니 잘 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행10:33) 고넬료는 베드로를 하나님으로 여기고 그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습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도 그러했습니다. 가난하고 겸손한 마음, 하나님 앞에서 선 것 같은 두려운 마음으로 말씀을 받은 것입니다. 바울도 그런 점에서 기뻐하고 감사한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그런 믿음과 자세로 말씀을 받았을 때 말씀이 그들 가운데 역사하였습니다. 3주간 짧은 기간 동안 말씀을 전했는데도 그들은 마게도냐와 아가야의 모든 믿는 자들에게 본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자세의 중요성을 배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을 때 성령께서 그 말씀을 통해 우리 마음에 역사하십니다. 깨달음을 주시고 믿음을 일으키십니다. 내면에 변화를 일으키십니다. 그러나 그저 사람의 말로 받을 때 지적인 호기심만 채워주고 끝납니다. 말씀을 받는 자세가 나의 변화와 영적 성장을 결정합니다. 요즘 유트브에 보면 좋은 설교가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좋은 설교를 잘 들을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또한 내가 말씀을 선택하여 듣는 것으로 경외심이 약해질 수도 있습니다. 마치 영화관에 가서 어느 영화를 볼지 선택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내가 듣고 싶은 것을 선택하여 들으니 거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세를 갖기 어렵습니다. 지식은 늘어가지만 마음의 변화를 일으키는 성령의 역사는 드뭅니다. 그래서 실제 경기를 뛰는 선수로 사는 것이 아니라 중계석에 앉아서 선수들을 판단하는 위치에 섭니다. 삶에서 자기를 실체화 시키지 않고 남을 평가만 하면서 살아갑니다. 많은 지식으로 남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것으로 자기는 신앙생활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속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또한 말씀을 들을 때, 이것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믿음을 가져야겠습니다. 그러한 믿음을 가질 때 우리의 심령에 말씀을 통한 성령의 역사, 변화와 성장의 역사가 있게 됩니다.


4.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라

바울은 데살로니가에서 불과 3주간만 말씀을 전하고 유대인들의 박해를 피해 베뢰아로 떠났습니다. 그때 그가 몸으로는 떠났지만 마음이 떠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다시 보기 위해 열정적으로 돌아가고자 하였지만 사탄이 막았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사모하였습니다. 19,20절입니다.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바울은 과거에 뛰어난 율법학자가 되어 세상에 이름을 내는 것이 그의 소망이요 기쁨이었습니다. 이런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에 소망과 기쁨의 이유가 변했습니다. 주님의 소망과 기쁨이 그의 소망과 기쁨이 되었습니다. 


주님은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는 것을 더 기뻐하십니다. (눅15:7) 이 하나님의 마음을 따라 바울은 죄인들을 구원하여 영적인 자녀로 삼는 것을 가장 기뻐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변화되어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장해 가는 모습을 보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기쁨이었습니다. 그것이 그의 자랑의 면류관이었습니다. 그는 가는 곳마다 핍박과 고난을 받았습니다. 세상은 바울을 귀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채찍으로 때리고 돌로 치고 옥에 가두고 추방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슬퍼하거나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온갖 환난과 핍박 속에서도 언제나 감사와 기쁨과 소망으로 충만하였습니다. 이는 그에게는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망과 기쁨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생명보다 귀하게 여겼고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주안에서 얻은 그들이야말로 그의 진정한 소망이요 기쁨이었습니다. 자랑의 면류관 (the crown), 곧 주님 앞에서 그의 인생의 최고의 자랑이었습니다.


미국의 John Piper 목사님은 말하기를 요즘 미국에서 노인들이 은퇴하고 바닷가에서 여유를 즐기면서 조개껍질을 모으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그는 그들에게 묻습니다. 당신들은 나중에 주님 앞에 가서 주님이 주신 생명으로 무엇을 했냐고 물으시면 뭐라 하시겠습니까? "Look at my shells!" (내가 수집한 조개껍질을 보세요!) 하실 겁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곧 주님 앞에 설 날이 옵니다. 그때 우리가 주님 앞에서 기쁨으로 자랑하면서 보여드릴 무엇이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무엇을 보여드리겠습니까? "주님, 제가 모은 조개껍질을 보세요, 제가 수집한 골동품을 보세요. 제가 모은 돈을 보세요!" 하시겠습니까? “주님! 주님이 하신 역사에 제가 부족하지만 이렇게 쓰임 받았습니다. 저의 영적 열매들을 보세요. 이들이 저의 기쁨이요 자랑입니다. 세상에서는 인정하지 않을지라도 주님 앞에서는 이것이 저의 영광이요 자랑의 면류관입니다.“


이 시대에 캠퍼스 양들을 돕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보면 복음을 전하는 환경은 언제나 어려웠습니다. 지난 80, 90년대에 우리나라에 영적 부흥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기억하면서 현실이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런 부흥이 정상이 아니라 지금이 정상입니다. 부흥이 지난 후에 사막과 같은 시절이 오는 것이 당연합니다. 도리어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진짜로 우리의 주님께 대한 사랑을 보여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연약하나 하나님의 말씀을 강합니다. 한번 나간 말씀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경로를 통해 이동하며 반드시 열매를 맺습니다. 양들을 쳐서 세상에서 자기 자랑으로 삼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비교 경쟁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나의 자랑입니다! 나의 인생의 결산 때 내가 하나님 앞에 내어 놓을 것입니다. 왜? 그것이 하나님이 가장 원하시는 것이며 그 일을 위해 우리에게 복음을 위탁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 같이 지나가는 나의 인생을 귀히 여기며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있는 삶을 사는 종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5.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

3장에서도 바울의 데살로니가 성도들에 대한 사랑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사도행전 17장을 보면 바울은 데살로니가를 떠난 후 베뢰아를 거쳐 아덴에 왔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 대한 안부가 몹시 궁금하여 디모데를 데살로니가로 보냈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알아보고, 영적 도움이 필요하면 그들을 좀 돕고 오라고 보낸 것입니다.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있을 때 디모데가 돌아왔습니다. 그는 좋은 소식을 갖고 왔습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복음 안에서 잘 거하고 있다, 믿음의 역사가 있고 복음 역사를 위해 사랑으로 수고하며 예수님에 대한 소망으로 환난 가운데서도 인내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왔습니다. (1:3) 그 소식은 바울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되었습니다. 


3장 8절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 당시 바울은 고린도 개척역사의 어려움으로 극심한 궁핍과 환난 가운데 있었습니다. 또한 그의 마음은 교회들에 대한 염려로 눌려있었습니다. (고후11:28) 그러한 때 데살로니가 성도들에 대한 기쁜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의 마음이 어떠합니까?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 지금까지 염려 걱정으로 마음이 눌려서 죽을 것 같았는데 이제 좋은 소식을 들으니 살 것 같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살리라! 바울의 마음이 죽을 것 같기도 하고 살 것 같기도 한 것은 그의 일신상의 문제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자기가 매를 맞고 갇히고 하는 그런 것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양들 때문이었습니다. 이리 가운데 있는 주님의 양들이 연약해지면 바울의 심령은 죽음을 맛보았습니다. 성도들이 잘 견디고 이겨나가면 비로소 사는 것 같았습니다. 바울의 마음은 온통 성도들로 꽉 차 있었습니다.


9절입니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 앞에서 너희로 말미암아 모든 기쁨으로 기뻐하니 너희를 위하여 능히 어떠한 감사로 하나님께 보답할까" "모든 기쁨으로 기뻐하니" 이는 매우 강조된 표현입니다. 바울의 기쁨은 자신이 잘 되고 영광 받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로 부터 좋은 대접이나 존경을 받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양들이 믿음 가운데 서서 세상을 이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진정으로 양들을 사랑하고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드리고자 한 예수님을 닮은 선한 목자였습니다. 


바울은 양들이 그의 소망이요 기쁨이었습니다. 그의 모든 기대와 자랑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을 품은 목자요 복음 전도자였습니다. 우리가 목자 바울을 잘 배우기를 소망하며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