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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3년 사도행전14강 "예루살렘 공회" (사도행전 15:1-35)2023-06-19 0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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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사도행전 제 14

 

예루살렘 공회

 

말씀 / 사도행전 15:1-35

요절 / 사도행전 15:28,29a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는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노니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할지니라"

 

오늘 말씀은 역사상 최초로 열린 기독교 공회에 관한 내용입니다. 이 공회 (또는 예루살렘 총회)가 열린 이유는 이방인들이 예수를 믿을 경우 유대인처럼 할례를 받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이 공회에서는 예수를 믿는 것 외에 어떤 조건도 지워서는 안 된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할례, 더 나아가 할례가 대표하는 율법 준수는,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다는 복음 진리를 확정합니다. 이 결정으로 복음이 유대 세계를 넘어 온 세상으로 전파될 수 있는 교리적인 기틀을 놓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참된 복음을 라틴어 'Sola'(오직)로 시작하는 다섯 단어로 표현합니다. "Sola scriptura (오직 성경), Sola fide (오직 믿음), Sola gratia (오직 은혜), Solus Christus (오직 그리스도), Soli Deo gloria (오직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구원은 오직 성경 말씀대로,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공로로 얻는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하는 이것이 참 복음입니다. 특히 우리의 구원 문제에 있어서 오직 은혜,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진리입니다.

 

오늘날 개혁주의 교회는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초대 예루살렘 공회에서 확인한 이 구원의 진리는 중세 1,000년 동안 변질되었습니다. 그 기간 동안 하나님은 참 복음을 회복하기 위해 종교개혁의 샛별이라고 불리는 존 위클리프와 같은 여려 믿음의 종들을 세우셨습니다. 마침내 인쇄술의 발명과 함께 마르틴 루터, 존 칼빈 같은 종교 개혁자들을 일으키시고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구원의 도리를 재확립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현재 누리는 구원의 진리를 사수하기 수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순교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름도 남지지 않은 그들에게 큰 빚을 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구원의 도리가 더 이상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현재도 13억 이상의 신도를 보유한 가톨릭교회의 입장은 이렇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이 단지 그리스도로 인해 죄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자비 때문이라고 하거나, 단지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고 말한다면, 그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트렌트 공의회, 1545-63) 가톨릭교회는 지금도 믿음으로만 아니고 다른 것들을 구원의 조건으로 주장합니다. 이는 (1) 가톨릭교회를 통해서만 구원 받을 수 있다. (2) 끊임없이 선행을 해야 한다. (3) 반드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 (4) 가톨릭의 7성사 (세례, 견진, 성체, 고해, 혼인, 신품, 병자)를 받아야 한다 등입니다. 이러한 조건을 충분히 지키지 못하는 사람은 천국에 가지 못하고 연옥에 간다, 연옥에 간 영혼을 위해서는 이 땅에 남은 사람들이 공덕을 쌓아야 그가 천국으로 올라갈 수 있다고 합니다. 이런 내용은 전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는 그저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하면서 실생활이 모범이 되지 않는 사람들을 봅니다. 대표적으로 구원파 신자들이 그렇습니다. 단번에 은혜로 죄 사함 받았다는 것만 강조하다 보니 구원에 합당한 열매에 관심이 없습니다. 은혜를 값싸게 여기고 방종한 삶의 핑계로 삼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 구원 받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누가 구원을 받았느냐 못 받았느냐를 판단하는 것은 쉽지 않는 문제입니다. 여하튼 오늘 본문에서 예루살렘 총회는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이라는 구원의 원리를 분명히 확정합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 성경적인 구원론을 확립하기를 기도합니다. 구원 문제에 있어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갖기를 기도합니다.

 

1절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지난 14장 마지막 부분을 보면 바울과 바나바가 제1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수리아 안디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들은 선교보고 대회를 열고 하나님이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보고하였습니다. (14:27)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셨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이 친히 천국에 들어가는 문을 여셨다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이방인들에게! 어떻게 들어가는 문? 믿음으로! , 하나님이 유대인에게 하신 것처럼 이방인에게도 동일하게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문을 활짝 열어놓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이방인들이 그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온 교회는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이러한 은혜를 주신 것을 듣고 감사와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그런데 그 즈음에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왔습니다. 예루살렘교회에서 온 유대인 크리스천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예루살렘교회의 공식적인 방향을 받고 내려온 것처럼 행세하였습니다. 그러나 실제는 예루살렘교회 지도자들의 허락을 받고 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15:24) 이런 그들의 주장이 무엇입니까?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이방인들은 할례를 받지 않으면 비록 예수를 믿어도 구원 받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복음만 믿어서는 안 되고, 그에 더하여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주장에 안디옥교회 성도들은 큰 혼란에 빠졌습니다.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굳게 믿고 은혜 충만한 신앙생활하고 있었는데 할례를 받아야만 한다니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는 그들의 신앙의 근본을 뒤흔드는 일이었습니다. 목자 바울과 바나바에 대한 불신도 생겼습니다. 성급한 양들은 할례를 안 받으면 큰일이라도 나는 줄 알고 서둘러 할례를 받고자 했을 것입니다. 이 문제로 교회가 큰 시험에 들었습니다.

 

유대인은 아브라함 때부터 반드시 할례를 받았습니다. 할례는 하나님의 백성의 징표였습니다. 또한 모세의 율법을 지키고자 애쓰는 삶을 살았습니다. 유대인들이 볼 때 이방인은 야만인이었습니다. 그들은 돌과 나무 같은 우상을 숭배하였습니다. 음란하였습니다. 기어 다니는 짐승 같은 것을 가리지 않고 먹었습니다. 피 채 먹기도 했습니다. 근친결혼, 심지어 동성애까지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런 그들을 "할례 받지 못한 자"라고 경멸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이 볼 때 기독교의 복음이 이러한 기본적인 것도 금하지 않고 그냥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 말하니 너무 허접하게 보였습니다.

 

이런 유대인들이 이방인 신자들에게 최소한 어느 정도의 율법은 지켜야 된다는 요구가 이해가 됩니다. 오늘날 버전으로 하면 이런 겁니다. 어떤 신자는 일주일 내내 성경 말씀을 한 자도 보지 않습니다. 가끔씩 술을 마시고 담배를 핍니다. 게임 중독에 빠진 청년도 있습니다. 자기 꿈과 커리어만을 위해 살며 하나님의 뜻은 안중에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입만 열면 교회에서 다른 사람 험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헌금생활 제대로 하지 않는 사람, 세상 사람보다 더 이기적이고 물질적인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신자들을 보면 그래도 어느 정도는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닌가, 적어도 기본은 해야 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이 율법 준수가 몸에 밴 당시 할례주의자들이 요구한 배경이었습니다.

 

이해가 됩니다.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2절을 보면 할례주의자들과 바울과 바나바 사이에 치열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났습니다. NIV "sharp dispute and debate"라고 되어 있는데 한 마디로 피 튀기는 사투를 벌인 것입니다. 아무리 다투고 변론해도 결론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게 되었습니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바울과 바나바와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했습니다. 모교회인 예루살렘교회에서 이 문제에 대해 명확한 결론을 내려 줄 것을 요구한 것입니다.

 

이 문제는 기독교의 사활이 걸린 문제였습니다. 할례를 구원의 조건으로 내세운다면 세계선교는 접어야 합니다. 예수를 믿고도 또 할례를 받아야만 구원을 받는다고 하면 어떤 이방인이 예수님을 믿겠습니까? 당시에 할례는 이방인들이 가장 끔찍하게 여기며 꺼리는 것이었습니다. 할례를 받다가 죽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은 예수 믿기 전에 먼저 유대인이 되어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되면 기독교는 유대교 내의 한 종파로 전락해 버릴 것입니다. 이 문제는 안디옥교회뿐만 아니라 앞으로 개척될 모든 교회가 직면할 문제였습니다. 반드시 해결되어야 할 신학적인 문제였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한 치도 양보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예루살렘 총회의 결정을 요구한 것이었습니다.

 

3절을 보면 바울 일행은 예루살렘에 가는 도중에 베니게와 사마리아로 다니며 이방인들이 주님께 돌아온 일을 말하여 형제들을 다 크게 기쁘게 했습니다. 바울 일행이 예루살렘에 이르렀을 때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이 그들을 뜨겁게 영접해 주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예루살렘교회에서 안디옥교회의 부흥과 아시아 선교역사를 보고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시아에서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시고,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이루신 것을 증언했습니다.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큰 은혜를 받았을 것입니다.

 

이때 거센 항의가 들어왔습니다. 5절입니다. "바리새파 중에 어떤 믿는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어떤 바리새파 출신 신자들이 이렇게 주장하였습니다. "이방인들이 예수만 믿어서는 안 되고, 반드시 할례를 받고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 공개적으로 이런 주장을 한 것을 보면 예루살렘교회에 그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예루살렘교회에는 그 동안 할례 문제가 크게 거론되지 않았었습니다. 모든 유대인 신자들이 이미 할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방인 선교를 하면서 할례 문제가 등장한 것입니다.

 

이에 예루살렘교회 총회가 소집되었습니다. 총회 중에 많은 변론이 있었습니다. 할례주의자들은 이렇게 주장했을 것입니다. "아무리 믿는다고 하지만 도덕적으로 기본은 되어 있어야 하지 않느냐? 주 예수님도 할례를 받으셨고, 모든 사도들도, 심지어 바울도 할례를 받지 않았느냐? 모든 이방인 신자들은 할례는 받아야 한다!" 바울 일행은 이와 같이 말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방인들이 회개하고 믿기만 하였을 때 그들에게 성령을 부어 주셨다. 그들은 변화된 새 사람이 되어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을 우리가 보았다.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변화시켜주신 분이 하나님이신데 우리가 무엇이기에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막을 수 있단 말인가?" 치열한 토론이 벌어졌습니다. 막상막하였습니다.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합니다. 7,8,절입니다.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언하시고" 베드로는 자기가 고넬료의 집에서 복음을 전했던 때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0장에 무슨 사건이 있었나요? 베드로가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서 기도할 때 하늘로부터 각종 짐승이 든 큰 보자기가 내려왔습니다. 하나님은 베드로에게 "일어나 잡아 먹어라"라고 세 번이나 명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가이사랴에 있는 고넬료 집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고넬료와 그의 가족들이 베드로가 전한 말씀을 듣고 있을 때 성령이 임하였습니다. 베드로는 그 사건을 다시 증언하는 것입니다. , 하나님이 유대인이나 이방인을 차별하지 아니하시고 구원의 증표인 성령을 보내주신 사실을 증언하였습니다. 베드로의 결론이 11절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베드로의 결론은 명쾌하였습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 것이지 할례가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Sola Gratia!

 

베드로가 누구입니까? 예수님의 수제자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와 함께 예루살렘교회에서 기둥같이 존경받는 수사도였습니다. (2:9) 그가 내린 결론이 "오직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였습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유대인들이 이를 받아들이기는 매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그들과 그들의 조상들이 천년이상 지켜온 그 율법이 이제 아무런 소용이 없다니... 충격이었습니다.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차이가 없다? 율법에 따라 사는 유대인이나 율법 없이 사는 이방인이나 차이가 없다?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말이 맞았습니다. 더 이상 반박할 수는 없었습니다. 무리들은 모두 조용해졌습니다. 이에 더 나아가 12절을 보면 바울과 바나바가 "하나님께서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에 대해 말했습니다. 온 무리는 그들의 말을 들으면서 베드로가 증언한 내용을 실제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선교보고를 마치자 총회 의장인 야고보가 말합니다. 14-17절입니다.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그들을 돌보신 것을 시므온이 말하였으니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일치하도다 기록된 바 이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야고보는 시므온 베드로의 말이 선지자들의 말, 즉 구약성경과 일치한다고 합니다. 그는 성경에 근거하여 결론을 냅니다. 야고보가 인용한 말씀은 아모스 9 11,12절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메시아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과 이방인들로 다윗의 장막, 곧 교회를 다시 세우시겠다는 예언의 말씀이었습니다. 이 성경 말씀대로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교회에 들어오는 것이 맞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을 두지 않으신다는 것을 성경말씀으로 확증하였습니다.

 

야고보는 결론적으로 말합니다. 19,20절입니다.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라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으니" 그는 자기 의견이라고 했는데 이는 단순한 개인적인 의견 제시가 아니라 의장으로서 최종적인 판단을 내린 것입니다. 야고보의 결론은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를 괴롭게 하지 말라". ,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키도록 요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구원은 율법을 지킴으로가 아니라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로라는 선언입니다. 이 결정은 유대인 신자들에게는 큰 도전이 되었습니다. 이는 그들의 모든 민족적인 우월감을 내려놓아야 되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둘째, 이방인들에게 네 가지 권면사항을 두었습니다. "우상의 더러운 것, 음행, 목매어 죽인 것, 피를 멀리하라" 입니다. 우상의 더러운 것은 우상에게 제물로 바쳐진 음식을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한 짐승을 목매어 죽이면 피가 그 몸 안에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도축한 고기를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는 피를 먹지 말라는 구약 말씀을 어기는 것입니다. 또한 음행을 멀리하라고 합니다. 이 네 가지를 요긴한 것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유대인들이 의식적인 정결을 매우 중요시했기 때문에 그들의 입장을 배려하기 위한 권면 사항이었습니다. 유대인 신자들은 아직도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구약을 듣기 때문에 그들의 양심을 거슬리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권고사항은 한시적인 것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인 출신 신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필요한 규칙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구원을 문제와는 별개의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어떤 음식이든 먹을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양심을 위해, 공동체의 하나 됨을 위하여 때로는 자기의 권리를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범사에 다른 사람을 배려하며 스스로 절제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결국 예루살렘 총회의 결론은 이것입니다. "오직 은혜로만 구원을 받는다. 그러나 교회의 하나 됨을 위하여 서로 배려하자"

 

본문을 보면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이는 발언을 한 사람은 베드로, 바나바와 바울 그리고 야고보인데, 기록된 발언은 베드로와 야고보뿐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나중에 안디옥에 가서 이방인과 식사하다가 할례자가 오니까 자리를 피해 여러 유대인 성도와 바나바까지 외식하게 만든 장본인이었습니다. ( 2:11-14) 야고보는 행함을 강조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마르틴 루터는 야고보의 편지를 지푸라기 서신이라고까지 폄훼하였습니다. 가장 유대적일 수 있는 이 두 사람이 '오직 은혜, 오직 믿음으로 충분하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면 예루살렘 총회가 이와 같은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중에 회의를 마친 후 그 결과를 사절단(유다, 실라)를 통해 보내는데, 그 공문에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는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노니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 (28,29)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의 교리는 사람들의 독자적인 결론이 아니었습니다. 성령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성령 하나님이 구약 선지자들을 통해 그리고 신약 사도들의 말과 행한 일을 통해 확증하시는 복음 진리는 이와 같습니다. "구원은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얻는다. 여기에 다른 무언가가 추가되지 않는다" 기본은 돼야 한다, 어느 정도는 돼야 구원받는다는 생각은 100점은 못 돼도 적어도 30~40점짜리는 되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이는 사람의 선행과 공덕을 구원에 필수적인 것처럼 만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공덕은 30~40점이 아닙니다. 100점 만점입니다. 율법으로는 어느 누구도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100점을 받으셨습니다. 우리는 그를 믿음으로 그가 이루신 의를 얻습니다. 단지 그를 믿음으로, 죽기까지 순종하신 그분의 완벽한 공로가, 우리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그의 공로가 우리의 것이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는 그와 연합하기 때문입니다. ( 6:3,4) 예를 들어보죠. "여러분이 버스를 타고 갑니다. 버스가 마구 흔들립니다. 그때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저 손잡이를 잡으면, 나는 절대 넘어지지 않아, 나는 그것을 의심치 않아' 버스 안의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이것은 신념이지, 믿음은 아닙니다. 그런 종류의 신념만 갖고는, 버스 안에서 넘어지고 맙니다. 버스 안에서 넘어지지 않으려면, 손잡이를 붙잡아야 합니다. ‘, 이 손잡이 끈이 약하게 보이는데, 끊어지면 어떡하나?' 하는 마음을 부인하고 그 손잡이를 자기 손으로 붙잡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손잡이를 잡을 때 손잡이와 연합이 됩니다. 그러면 그는 넘어지지 않습니다. 믿음은 버스 손잡이를 붙잡듯이 내가 믿음의 대상과 하나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연합입니다. 하나 됨입니다. 에스더는 평범한 유대 여인이었습니다. 이런 그녀가 아하수에로 왕의 총애를 얻어 왕후가 되었습니다. 결혼이라는 연합을 통해 아하수에로 왕의 권세와 영광이 그녀의 것이 된 것과 같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을 때, 곧 그와 연합할 때 그의 죽으심의 공로가 나의 것이 되고 그의 부활이 나의 것이 됩니다.

 

그러면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도리는 우리를 방종으로 이끌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참다운 은혜는 우리로 우리가 받은 구원이 공짜라는 사실에 주목하게 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받은 구원이 싸구려라고 생각하며 하찮게 여기게 하지 않습니다. 참 은혜를 받은 사람은 자기를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이 치르신 고난을 바라보게 합니다. 믿음은 구원의 은혜를 인지하는데 멈추지 않습니다. 구원의 은혜에 감격하고 감사하는 데까지 나아가게 합니다.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은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를 바라보게 하고,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오직 성경에 따른 참 은혜요 참 믿음입니다.

 

참 은혜가 임하는 것은 단지 이론이 아닙니다. 참 은혜가 올 때 그 사람의 마음에 하나님의 씨가 심깁니다. 요한일서 3:9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 하나님께로 난 사람, 거듭난 사람은 그 마음에 하나님의 씨가 심깁니다. 그 씨는 성령입니다. 그 씨 때문에 그는 죄를 짓지 않습니다. 이 말은 신자는 아무런 죄를 짓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그가 계속하여 죄를 짓는 데로 나아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 하나님으로부터 거듭난 사람은 죄를 지면 양심에 타격을 받습니다. 하나님을 슬프시게 한 것에 괴로워합니다. 회개하고자 하는 소원이 일어납니다. 마음속으로 하나님께 부르짖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의 은혜로 회개하고 돌아옵니다.

 

무엇보다 참 은혜는 사랑을 낳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에 감격하고 그 사랑을 본받고자 합니다. 사랑은 참 복음의 열매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쓴 편지에서 은혜 외에 무언가 더하려는 행위 (특히 할례)를 혹독하게 비난했습니다. ( 5:2) 그런데 루스드라에서 만난 디모데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합니다. 도대체 왜? 사랑 때문입니다. 회당에서 복음을 전할 때 디모데가 할례 받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많은 유대인이 복음을 거절할까 봐입니다. 잃어버린 영혼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신자들 간에는 비본질적인 것에 매여 사랑에서 멀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랑이 아니면 말하지 말라, 사랑이 아니면 행하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본질에서는 일치를, 비본질적인 것에서는 사랑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구원은 은혜로 받습니다. 은혜란 자격 없는 자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이 은혜는 우리가 값없이 받지만 값싼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도저히 값을 치를 수 없기에 거저 주시는 것입니다. 이 은혜를 참으로 아는 자는 은혜를 남용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았다고 마음대로 살지 않습니다. 구원의 증거는 과거의 감정적인 경험이 아닙니다. 과거와 다르게 살아가는 현재의 나의 모습입니다. 한번 회개하고 믿은 과거의 경험이 아니고, 늘 현재형으로 회개하며 계속하여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원한 멸망에 처할 수밖에 없던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피 흘리신 예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누리며, 이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기를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