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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0년 마태복음 18강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신 예수님`(마태복음 12:1- 21)2020-06-29 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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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마태복음 18강 메시지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신 예수님


말씀 마태복음 12:1- 21
요절 마태복음 12:20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시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우리는 어떤 삶을 성공적인 삶이라고 생각합니까? 자신의 능력과 지혜를 드러내고 과시하는 삶일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 정말 위대하고 성공적인 삶은 어떤 삶인지 배우고 우리도 그 길을 걸어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 때였습니다.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배가 고플 때에 다른 사람의 포도원에서 포도를 그릇을 사용하지만 않으면 배를 채을 만큼 따먹도록 허용하셨고 곡식의 경우는, 낫을 대지만 않으면 필요한 만큼 손으로 따서 먹을 수 있도록 배려하셨습니다(신 23:24,25) 이것을 보통 사랑과 긍휼의 법이라고 부르는 데 제자들은 몹시 배고파 그에 따라 행동했던 것입니다.


2절을 보십시오. 이런 제자들을 보고 어마어마한 범죄현장을 발견한 것처럼 목소리를 높혀 말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그들은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도둑질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겼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해서 안식일 계명을 어겼다고 주장했습니다. 십계명 4번째 계명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고 구체적으로 일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에 기초해서 유대인들은 39가지의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불문율로 정했습니다. 그중에 파종, 추수, 탈곡, 음식 만들기 등이 포함되어 있는 데 바리새인들은 제자들의 행위가 추수, 탈곡, 음식 만들기와 같은 일을 한 것이라 정죄한 것입니다. 즉 곡식을 딴 것은 추수요 손으로 비빈 것은 탈곡이며 호호불어 입안에 털어넣은 것은 요리를 한 것입니다.


이렇게 엄청난 범죄행각을 발견한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은 뭐라 말씀하셨습니까?


첫째로, 다윗의 예를 들어 제자들을 변호하셨습니다. 삼상 21:6절을 보면 다윗은 사울에게 쫒길 때에 몹시 배가 고팠습니다. 이때 다윗은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가 제사장외에는 먹을 수 없는 진설병을 제사장의 허락을 받아 먹었습니다. 제사장 아히멜렉은 자비와 긍휼의 마음으로 다윗 일행을 대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도 그런 다윗을 정죄하거나 판단하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둘째로, 성전안에서 일하는 제사장들은 인식일법의 적용을 받지 않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에 제사장들은 성전안에서 많은 일을 합니다. 그러나 누구도 그들이 안식일 법을 어겼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성전보다 크신 분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참된 성전이요 완전한 성전이란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 예수님안에 있는 제자들은 안식일에 설령 일을 하여도 그것이 일이 되지 않습니다.


제자들을 변호하신 예수님은 호세아서 말씀을 인용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7)” 여기서 자비는 사람을 향한 태도이며 제사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하는 사람들은 자기 의가 많고 다른 사람들을 잘 판단하고 정죄합니다. 호세아 시대를 비롯해서 구약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사람들에 대해서는 잔인하며 무정하며 강포를 행하면서 안식일에 경건한 척 성전을 찾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들에 대해 제사보다 차라리 사람들에 대한 긍휼을 더 원한다고 하셨습니다. 십계명의 정신은 크게 둘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사람에 대한 사랑을 강조했습니다. 이런 비슷한 말을 한 신약의 사도가 또 있습니다. 사랑의 사도라 불리우는 사도 요한입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요일 4:20)


본문에서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사소한 일을 확장하여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해하는 마음을 가지고 상대방의 행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얼마나 배고팠으면 저런 행동을 했을 까” 이렇게 이해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깊이 이해해 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이해는 영어로 understand입니다. 그의 위에서 멀리 내려다보는 것이 아니라 그의 발밑으로 들어가 그의 처지와 형편에서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고 예수님의 제자의 삶을 살려고 한다면 그가 조금 연약함을 보이고 허물과 실수를 한다 하더라도 널리 용납해야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부족한 사람들도 하나님의 사람이요 예수님의 제자들로 크는 비결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안식일을 만드신 분이요 안식일을 운용하는 권한이 있는 분임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안식일에 대한 자기 생각들을 예수님의 안식일 운용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밑밭 앞을 떠나 회당에 들어가셨습니다. 그 회당에는 한 손 마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다른 복음서에 의하면 오른 손이 말랐고 전직이 석공이었습니다. 그는 어떤 이유로 한 손이 말라 석공의 일을 더는 못하고 가족도 부양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무능해지는 것보다 자괴감을 주는 일이 없습니다. 특히 가장인 경우 더욱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어려운 중에도 늘 회당에 나왔습니다. 얼마나 귀합니까?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평소 이 사람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었습니다. 지금도 그저 예수님에게 안식일에 병고치는 것이 옳으냐고 따지는 데 미끼정도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런 바리새인들을 돕기 위해 예수님은 뭐라 말씀하셨습니까?


11,12절을 보십시오.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당시 바리새인들의 해석에는 양이 구덩이에 빠지는 경우에, 긴급하지 않으면 먹을 것을 넣어주고 내일 꺼내주고 긴급한 경우에는 당장 끌어내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말씀에 의하면 대부분의 바리새인들은 자기 양들이 구덩이에 빠지면 모두 긴급한 경우로 판단하여 무조건 끌어 내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기 양을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해석이 율법해석 영향을 미칩니다. 더욱이 1마리의 양만 있는 경우라면 100% 끌어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반문하셨습니다.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사람은 양과 비교할 수 없이 귀합니다. 양을 그렇게 귀하게 여기고 당장 끌어내고자 한다면 사람은 말할 것도 없지 않냐고 반문하셨습니다. 예수님에게 사람은 자기 양입니다. 자기 양들을 한 사람, 한 사람 인격적으로 귀히 여기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랑하는 자기 양인 한 손 마른 자가 하루라도 빨리, 몇시간 이라도 빨리 그 곤경에서 빠져나오기를 바라셨습니다. 그가 비참한 장애와 우울함에서 당장 벗어나기를 간절히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장 회당예배후에 일자리를 알아보고 내일부터 출근하여 가족을 부양하길 원하셨습니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배웁니다. 첫째는 한손 마른 사람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무정무자비와 예수님의 절대적이고 뜨거운 사랑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회당에서 영적 지도자요 목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회당에 출석하는 주님의 양인 한 손 마른 자에 대해서는 무심하였습니다. 그들은 한 손 마른 자를 매주 회당예배에서 보았겠지만 소가 닭을 보듯하였습니다. 자기 동물 양보다 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한손 마른 자가 오늘이 아니라 다른 날에 고침받기를 원하는 것은 안식일 계명의 준수때문이라기보다는 그에 대한 깊은 이해와 사랑이 없었기때문이었습니다. 사랑측면에서 그들의 내면은 한 손 마른자의 마른 손처럼 메마르고 피폐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회당에 나오는 형제자매들에 대해서 어느 정도 관심이 있습니까? 우리 목자님들 가운데 자기 양이 아니지만 자기 가족돌보기도 바쁘지만 청년들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섬기려 하는 분들이 있어서 감사합니다. 우리가 바리새인들의 내면이 아니라 회당의 한 손 마른 영혼들에 대한 주님의 뜨거운 사랑을 덧입기를 기도합니다.  


둘째는 예수님은 안식일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확대하셨습니다. 안식일에도 적극적으로 사람을 살리는 선을 행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을 일을 하지 않는 정도로 소극적으로 해석하지 않으시고 적극적으로 해석하심으로 안식일의 의미를 풍성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안식일에 쉬기도 하지만 사람을 살리는 일을 적극적으로 감당하기를 기도합니다.


한 손 마른 사람을 통해서는 무엇을 배웁니까? 이 사람의 순종하는 내면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는 한 손 마른 문제로 하나님을 원망하고 사람들을 회피하여 회당에도 나가지 않고 방구석에만 틀어박혀 있기쉬웠습니다. 그러나 그는 적극적인 마인드를 가졌습니다. 성령의 이끌림에 순종하여 매주 회당에 나갔습니다. 회당에 가서도 어디 숨어있지 않고 자신을 노출시켜 하나님의 빛가운데서 섰습니다. “나 좀 봐주십시오” 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럴 때 그는 예수님의 눈에 띄이고 은혜를 입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그는 예수님이 병든 손을 내밀라고 하셨을 때 부끄럽다고 그 손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내보여봤자 안될 것이라 생각하지 않고 믿음으로 자신의 마른 손을 내밀었습니다. 이때 그 손이 회복되는 치유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문제가 있을 때 마음이 어두워지고 소극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꽁꽁 숨어있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될 때 더욱 몸과 마음이 말라가고 피폐해집니다. 우리가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예배에 나오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우리의 부끄럽고 메마른 문제를 믿음으로 주님앞에 내어놓음으로 주님의 자비와 치유를 경험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사랑이 메말라 버리고 전통과 인습에 매인 바리새인들을 돕기위해 한 손 마른 자를 고치는 일을 내일로 미루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지혜로운 방법은 아니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을 공개적으로 무시하신 격이 되었고 안식일을 파괴하는 자로 몰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방향을 잡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결국 한 손 마른 자를 고치시고 바리새인들의 메마른 내면을 돕는 데 목숨을 거신 셈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자신을 이렇게 적대시하신다는 것을 알고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들을 떠나시고 자신을 따르는 이들을 섬겨주셨습니다. 구체적으로 그들의 병들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 경고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드러날 경우에 바리새인들의 표적이 되고 결국 그리스도의 사역이 훼방을 받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보통 자기가 어떤 대단한 일을 했을 때 못 견딜 정도로 그것을 알리고 싶어 합니다. 심지어 그렇게 할 때 자신이 위험에 처하는 데도 그러합니다.


이솝우화를 보면 자기를 드러내고 싶은 개구리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하늘을 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여 자신의 지혜를 뽐내고 싶었습니다. 드디어 그는 기러기들의 도움을 받아 하늘을 날게 되었습니다. 기러기들은 막대기를 개구리가 물도록 하고 한 가지를 신신당부했습니다. 그것은 어떤 경우에도 비행이 끝날 때까지 입을 열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늘을 높이 날게 되자 개구리는 우쭐한 마음이 되어 “난 최고야” 큰 입을 열어 말했습니다. 그 순간 개구리는 그 높은 곳에서 떨어져 죽고 말았습니다.


우화의 개구리와 달리 예수님은 자신을 나타내지 말라고 경고하시고 자기를 숨기시고 조용히 사역하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을 보고 마태는 예수님이 이사야 42:1-4 절을 성취한 그리스도임을 깨달았습니다. 18-21절을 보십시오. 


이 말씀에서 이사야가 예언한 예수님은 첫째로 하나님이 택하신 종입니다. 자칭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택하셔 보내신 예수님만이 진정한 그리스도이십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하나님이 정말 기뻐하시고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삼위일체 성자 하나님이셔도 그렇지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자기를 비우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은 예수님을 기뻐하사 성령을 충만히 허락하십니다. 누구든 성령충만할 때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넷째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정의를 온 땅에 실현하십니다.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이 말씀은 하나님의 뜻과 정의가 예수님을 통해 온 세계가운데 성취되는 것을 뜻합니다.


이상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보내신 그리스도가 맞습니다. 그런데 이분은 어떤 스타일로 그 일을 하십니까? 19-21절을 보십시오. “그는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또한 이방들이 그의 이름을 바라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여기서 ‘들레다’는 ‘소리를 지르다’, ‘소란을 피우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대적들하고 싸우거나 언성을 높이지 않으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은 믿음이 있고 겸손하시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모든 일을 하나님께 맡길 수 있습니다. 혈과 육으로 싸울 때 다툼이 끝이 없고 품격이 떨어지며 서로 상처와 미움만 남깁니다. 그러니 예수님처럼 모든 분노와 억울함을 하나님께 맡기고 조용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때가 되면 모든 명예와 손해를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목소리도 모습도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일하십니다.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않거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들의 경우 대부분 아예 실망하거나 분노해서 아무 일도 하지 않기로 결심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드러내진 않지만 아주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섬기십니다. 하나님의 역사에는 들레기만 하고 실제는 섬기지 않는 사람보다 이런 잠수함같이 묵묵히 큰 일을 하는 분들이 많아야 은혜와 힘이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상갈꺼심’같은 사람들을 끝까지 섬기는 것입니다. ‘상갈꺼심’이 무엇입니까? 상한 갈대, 꺼져가는 심지입니다. 갈대는 약한 식물의 대명사입니다. 그런데 상한 갈대는 그런 갈대가 그나마 부러져버린 것입니다. 이런 상한 갈대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눈과 발에 거칠 뿐입니다. 그래서 발로 걷어차거나 막대기로 때려버리거나 괜히 짓밟아버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상한 갈대같은 사람을 반창고로 붙여 주시고 지지대를 세워주십니다. 그래서 상처가 아물고 강건한 사람이 되기까지 섬겨주십니다. 꺼져가는 심지같은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가물가물 꺼져가는 심지는 소망없는 영혼을 상징합니다. 심지가 꺼져가는 것은 기름이 없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인생을 지탱하고 밝혀줄 기름에 해당하는 것이 그 사람의 내면에 없습니다. 게다가 시련의 바람이 불기까지 합니다. 이러 때 그 영혼은 꺼지고 암흑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도와주십니까? 소망없다고 훅 불어 꺼버리지 않으십니다. 바람을 막아주십니다. 그리고 성령의 기름을 부어주십니다. 성령의 기름은 삶의 이유와 동기와 힘입니다. 그때 그는 다시 그 영혼이 빛을 발하고 활활 타올라 다른 사람들을 밝힐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이렇게 상한 갈대, 꺼져가는 심지같은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세리 마태였습니다. 그는 상한 갈대처럼 인생이 부러져 있었습니다. 자책과 자괴감, 그리고 사람들의 비난과 욕설로 꺾였습니다. 무너지고 짓밟힌 삶을 살았습니다. 다시 일어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의 영혼은 삶의 소망을 잃고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를 제자로 받아주시고 그를 감당하여 성자마태가 되게 하셨습니다. 인류를 밝히는 등불이 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도 모두 ‘상갈꺼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섬김으로 모두 인류의 사도들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소망없는 자, 어떤 심약한 자도 포기하지 않고 섬기십니다. 그의 사랑과 능력으로 강해지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어느정도 섬기다가 포기합니다. 심지어 부모도 “더 이상은 못섬기겠다” “내가 언제까지 너를 섬겨야 하겠니” 라고 포기선언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떤 영혼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에게 포기는 배추 셀 때나 필요한 말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섬기십니다. 이런 예수님의 이름은 모든 사람에게 소망이 됩니다. 예수! 그 이름안에서 어떤 부족하고 못난 사람도 소망이 있습니다. 어떤 고구마처럼 답답한 사람도 사이다같은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저를 생각할 때도 예수님은 소망없는 자를 포기치 않고 도우시는 은혜와 소망의 주님이십니다.


지금 제가 어떻게 보일지 몰라도 저는 참으로 나약하고 쓸모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제가 개구리 올챙이적을 잊고 우쭐해 있을 때 저를 실수로 갈대 목자님이라고 불렀습니다. 갈렙과 절대를 합쳐서 부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저는 진짜 갈대같은 사람이요 소망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저를 꺾어버리지 않으시고 주님의 종들은 통해서 섬겨주셨습니다. 일대일 목자님, 전요한 박사님, 윤모세 목자님 등 많은 목자님들을 통해 감당해 주셨습니다. 제가 변화된 것을 볼 때 어떤 사람도 소망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도 쓸모있는 사람, 위대한 말씀의 종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섬길 때에 조급한 마음이 포기하는 마음을 가져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섬길 때도 25년은 섬기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단거리경주처럼 금방 승부를 보려하지 않고 마라톤처럼 길게 보고 사람을 끝까지 포기치 않고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섬김의 기간이 길수록 탈진하거나 힘이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섬김의 기간이 길수록 우리의 내면은 예수님을 더 많이 배우며 더 많은 믿음의 스토리들을 쓸 수 있습니다. 소설로 하면 단편이 아니라 장편을 쓰는 것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많은 인내와 기도를 하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두 가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첫째, 그는 우리를 정말로 위대하게 만드는 고마운 존재라는 것입니다. 둘째, 그는 틀림없이 대기만성의 위대한 사람일 가능성이 많다는 것입니다. 가장 감당하기 힘들었던 사람은 우리의 십자가인 동시에 우리의 자랑이며 면류관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빨리 변화된 이들로 인해서만 감사할 것이 아니라 천천히 변화되어가고 있는 이들로 인해서도 감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의 한계를 아십니다. 그래서 끝없이 섬기게는 하지 않으십니다. 아무리 긴 터널도 끝이 있고 마라톤도 반드시 끝이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를 섬겨 변화시켜 주신 주님을 기억하면서 좀 더 인내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드러내는 일과 외적인 일을 중시합니다만 본문을 볼 때 조용히 한 영혼을 섬기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며 이렇게 예수님을 배우며 소자 한명을 감당하는 것이 진정한 삶의 성공입니다. 우리가 이런 섬김의 삶의 가치를 확신하고 끝까지 인내하며 잘 감당하기를 기도합니다. 힘든 영혼을 섬기며 예수님을 배우고 계신 우리 모든 목자님들, 형제자매님들에게 주님의 위로와 기쁨과 도우심이 있기를 간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