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특강 1 나라가 임하시오며 말씀 마태복음 6:5-15 요절 마태복음 6:10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3대 경건이 있습니다. 구제, 기도, 금식입니다. 오늘 말씀은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에 대한 내용입니다. 같은 내용을 누가, 마태복음이 공히 기록하고 있는데, 누가복음은 기도의 내용을 먼저, 마태복음은 기도의 자세를 먼저 기술했습니다. 두 복음서의 기도의 내용은 유사하고 기도의 자세는 표면적으로 볼 때 좀 다릅니다. 누가복음은 간절히 반복하여 기도하라고 하고, 마태복음은 은밀하게 하며 단회적으로 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 정신은 같은 데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기도를 들으심을 확신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기도처럼 중요한 것이 있을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서 기도할 때 특히 주의할 점을 배우고, 주님이 가르쳐주신 포인트로 기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특별히 “나라가 임하시오며” 한마디 말씀을 받고 그의 나라가 임하도록 믿음으로 기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5절을 보십시요.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기도는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이고 자신을 하나님께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외식하는 자들 가운데는 기도를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보는 회당이나 큰 거리 어귀에서 기도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듣도록 큰 소리로 기도하고, 화려한 동작이나 미사여구를 쓰면서 기도하고 되도록 길게 기도 했습니다. 그들의 머리에는 자신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을 존경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은 이미 기도에 대한 자신의 상을 받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받은 상은 사람들의 시선, 인정, 칭찬의 말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기도말고 어떤 기도를 하라고 제자들에게 가르치십니까? 6절을 보십시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골방에 들어가서 기도할 것을 권유하셨습니다. 골방은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 앞에 자신을 보이며 하나님께 집중하여 기도할 수 있는 곳입니다. 이렇게 은밀한 데서 기도할 때 하나님이 갚으시는 것을 체험합니다. 하나님이 갚으시는 것은 기도의 직접적인 응답과 그 외에도 하나님이 기뻐하셨음을 보여주시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골방기도를 하고 싶어도 골방이 없는 사람은 어떻게 합니까? 혹 골방폐쇄공포증이 있는 사람은 어떻게 합니까? 골방은 공간적인 의미보다 효과적인 의미가 큽니다. 어떤 분은 골방에서 눈치 보지 않고 쿨쿨 잡니다. 그렇다면 공간적 골방은 의미가 없습니다. 골방의 의미는 하나님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하나님께 인격적으로 기도하는 곳을 말합니다. 저는 종종 혼자 운전하거나 걸으면서 기도합니다. 그러면 아주 집중이 잘되고 하나님과 깊은 대화를 할 수 있습니다. 어떤 목자님은 군대에서 일찍 일어나 화장실에 가서 말씀을 보고 기도했습니다. 이 경우 화장실이 그분의 골방입니다. 어떤 목자님은 직장에 가서 창고에 가서 점심시간에 기도했고 그 힘으로 다니엘처럼 직장과 목자생활에서 승리했습니다. 이처럼 골방은 우리 영혼의 힘을 제공하는 발전소와 같습니다. 크리스천은 두 종류가 있습니다. 골방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입니다. 크리스천에게 개인기도가 없다는 것은 삶의 가장 중요한 것이 결여되어 있는 것입니다. 크리스천에게 개인기도가 없는 것보다 더 안타까운 상태는 없습니다. 우리가 개인기도가 충만함으로 우리의 삶이 충만히 채워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기도의 최적의 장소는 ‘은밀한 곳’입니다. 우리는 대개 은밀한 곳을 잘못 활용합니다. 그러나 은밀한 곳이 기도장소로 최적인 것을 알면 은밀한 곳을 적극 활용할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가 은밀한 곳에서 기도하는 것을 기뻐하실까요? 우리가 은밀한 곳에서 기도한다는 것은 정말 하나님을 경외하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은밀한 중에 기도하면 은밀한 중에 우리를 보시는 하나님이 반드시 갚아주십니다. 반드시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보고 계셨음을 나타내 보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은밀한 곳에서 기도하기를 힘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갚아주심을 풍성하게 체험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또 피해야 할 기도방식에 대해서 무엇을 말씀하셨습니까? 7,8절입니다.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중언부언(重言復言)’이란 한 말을 또하고 한 말을 다시 한다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그 신 앞에서 주로 주문을 외웠습니다. 같은 말을 계속 반복했습니다. 우리 중에 어떤 분들도 이 말 저 말 별 필요없는 말들까지 동원하여 어떻게서든지 기도의 길이를 늘리려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말을 많이 해야 하나님이 들으시는 것 아닙니다. 기도는 길이가 아니라 무게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사실상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기 전에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다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많은 말보다 꼭 필요한 말들을 진지하게 아뢰면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구하기 전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다 아심에도 간구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와의 대화자체를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너무 기도를 짧게 하는 것도 좀 생각은 해야봐야 하겠습니다. “하나님, 다 아시지요” 이렇게 기도하고 끝내는 것도 문제가 있습니다. 또 다 아심에도 우리가 기도하는 이유는 구체적으로 구할 때 기도응답을 확인할 수 있고 이로인해 우리의 믿음이 증가되기 때문입니다. 기도할 때 우리는 누구에게 기도합니까? 9절 a를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9) 기도의 대상은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아버지는 존재의 근원이며 보호자며 후원자입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은 천지차이입니다. 그런데 이 땅의 아버지들은 아무리 훌륭한 분들도 자녀들에게 실망을 줍니다. 저도 아버지 노릇 해보니까 알겠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한계가 있습니다.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하늘 아버지는 어떻습니까? 하늘 아버지란, 완전하신 아버지로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 아버지란 뜻입니다. 또 간혹 좋은 아버지들가운데는 일찍 세상을 떠나 자녀들의 마음을 더 슬프게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늘아버지는 육신의 아버지처럼 도중에 떠나지 않으시는 영원한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합니다. 어떤 분은 하나님께 나아가 “아버지”라고 부르기만 해도 힘을 얻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까? 첫째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피조물과 구별되도록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피조물들과 근본적으로 구별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만 홀로 창조주이시고 다른 모든 것은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은 온 우주에서 홀로 높임을 받으셔야 합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이름이 땅에 떨어졌습니다. 피조물들 중 하나 같이 되었습니다. 심지어 피조물보다 못한 대접을 받습니다. 이 얼마나 부당하고 안타까운 일입니까? 그러므로 그의 자녀된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이 정당한 대우를 받으시도록 이를 위해서 애쓰며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첫 번째 기도제목입니다. 둘째로, 무엇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까? 10절을 읽겠습니다.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여기서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는 영역을 의미합니다. 하늘에서는 하나님의 통치가 확실합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는 제한을 받고 있습니다. 마귀가 하나님의 왕권을 침탈했습니다. 마귀는 죄와 죽음권세로 인생들을 통치하고 있습니다. 온갖 거짓말로 사람들을 속이며 왕노릇하고 있는 데 이 마귀의 다스림을 받을 때 인생들은 불행합니다. 하나님의 통치의 회복은 하나님측면에서는 그 거룩하심과 영광의 회복이며 우리측면에서는 행복한 삶의 회복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을 때 우리는 가장 행복합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면 어떤 장소, 어떤 인간조건가운데 살아도 기쁨이 충만합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면 초막이나 궁궐이나 하늘나라가 됩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마저 하늘나라로 바뀝니다. 반면 마귀의 다스림을 받으면 어떻게 됩니까? 그 어디나 지옥입니다. 그 어디나 불행입니다. 그 어디나 어두움입니다. 마귀의 다스림을 받으면 공부를 잘해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마귀의 다스림을 받으면 인기스타인데도 행복하지 않고 부자인데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다툼과 갈등과 미움의 종이 됩니다. 자학과 우울의 종이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나라에 갈 수 있도록 기도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 임하도록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갈 곳이지만 또한 이 땅에 임합니다. 예수님이 오시므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막 1:15a) 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에서 시작되고 하늘나라에서 완성되는 데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에서 충분히 경험할 수 있는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성령으로 거듭나면 하나님 나라를 체험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이 하시는 일은 예수님을 가르쳐주는 일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도우심으로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모셔 들일 때 우리 심령에 하나님이 오십니다. 하나님이 내 심령을 다스려주십니다. 그때 놀라운 평화와 기쁨과 만족이 임합니다. 여름 수양회는 흔히들 천국잔치라고 합니다. 여름수양회는 우리가운데 임하시는 하나님나라를 경험하는 최적의 곳입니다. 2005년 마르크스를 추종했던 한 형제님은 강화도 고려산 여름수양회에 참석한 후에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목자님 제가 천국을 경험했습니다.” 저도 1학년 때 여름수양회에서 천국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그후 여름수양회를 섬길 때마다 천국을 경험했습니다. 말씀강사님들이 말씀을 전할 때, 인생소감강사들이 자신들을 죄와 아픔에서 자유케 하신 예수님을 증거할 때 하나님나라의 실체를 보며 감동을 받고 많이 울었습니다. 그러면서 “이곳이 하나님의 나라구나” 하는 생각을 늘 했습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나라를 전파하는 목자의 삶에 대해서 보람과 긍지와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이 길을 가리라” 다짐하곤 했습니다. 올해도 우리는 여름수양회에서 하나님나라가 임하는 것을 체험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마귀가 물러나고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는 것은 오직 성령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하나님나라를 위해 힘쓰라고 하기보다는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죄와 사망권세, 마귀의 세력을 몰아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약한 자요 마귀는 강한 자입니다. 그러나 기도할 때 더 강한 자인 성령께서 마귀의 세력을 포박하여 몰아내십니다. 마귀의 거짓진리들로부터 참 자유를 얻게 됩니다. 우리는 이번 여름수양회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500번, 1000번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간절한 기도를 받으시고 각 지부 여름수양회에 하나님의 나라가 강력하게 임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세 번째로 기도할 제목이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11) 일용할 양식을 위한 기도입니다. 일용할 양식은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물질적 기반입니다. 우리는 육체를 지닌 존재들로서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먹어야 삽니다. 일용할 양식을 매일 얻어 산다는 것이 쉽지 않는 문제입니다. 때로는 광야를 지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가 죽을 때까지 과연 잘 먹고 살 수 있을지 염려가 많습니다. 대학생들에게도 최대의 화두는 최업문제입니다. 목자님들가운데도 사후는 염려하지 않으나 노후를 염려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사람들은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무엇을 합니까? 공부를 열심히 하고 열심히 자기개발을 하며 시류를 읽고 재테크를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더러 다른 무엇보다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의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은 무책임한 아버지가 아니십니다. 자신이 창조한 피조세계와 자신의 형상을 닮은 자녀들인 인생들을 어찌하든지 먹이고자 하십니다. 전요한 선교사님은 하나님의 책임감을 항상 동물원장에 비유하셨습니다. 동물원 원장이 세계각처에서 잡아온 동물들을 굶깁니까? 굶길 것이면 잡아오지도 않았습니다. 동물원에서 굶어죽은 동물은 없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은 자신의 피조물과 자녀들에 대해서 어떠하시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하는 것은 자녀의 기본권행사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께 자녀된 권리가 있습니다. 이것을 자권(子權)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 정당한 요구에 부응할 책임이 있으십니다. 우리가 필요한 일용할 양식을 얻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눅 11:9a)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약 4:2b) 라고 단정적으로 말했습니다. 죠지뮬러(1805-1898)는 필요한 양식을 구하는 가운데 일용할 양식을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깊이 체험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양식뿐 아니라 30명, 300명, 2000명의 고아들을 책임지고 평생에 15만 명의 고아들을 돌봤습니다. 죠지의 기도는 처음에 마지막 학기 학비를 마련하는 기도로 시작되었습니다. 선교사로 살기로 결단해서 집안에서부터 물질지원이 끊어졌습니다. 이 때문에 처음으로 진지하게 기도했는데 그 다음 날 하나님이 독일어 teaching 알바를 주시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이후로 5만 번의 기도응답을 받았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는 것은 주시겠다는 약속이 담겨져 있습니다. 우리는 15만명이 아니라 평생 5식구 먹이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으로 떨고 있습니다. 우리가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에 따라 기도할 때 우리는 능히 광야같은 세상에서 생존문제를 해결하고 다른 사람들을 먹이는 풍성한 삶을 살 수 있음을 믿습니다. 넷째로 기도할 제목은 죄를 사해주시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12절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죄사함에 대해서 문제의식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특히 죄의식이 약해지는 시대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나 죄문제는 죄의식문제가 아닙니다. 죄문제는 우리를 보시는 하나님의 시각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정죄와 심판의 대상으로 보실 때 우리는 결코 평화를 누릴 수 없고 우리의 미래는 불안합니다. 때문에 우리는 범죄한 경우 곧바로 하나님께 나아가 죄용서를 빌어야 합니다. 어떤 분은 말합니다. “이미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는데 새삼스럽게 또 죄용서를 또 빌어야 하는 가”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소서”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우리가 죄사함을 값싸게 여기지 않고 죄의 심각성을 인식하도록 함입니다. 우리가 때마다 죄사함을 간구하고 받는 가운데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되어 언제나 마음에 평안과 확신이 넘치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우리가 늘 죄사함 받는 죄인들로서 다른 사람들의 죄에 관대하고 용서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마지막으로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13절a를 보십시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죄사함을 위한 기도가 과거의 죄를 위한 기도라고 한다면 이 기도는 미래의 죄를 위한 기도입니다. 어떤 사람은 죄를 경험주의적 관점에서 좋게 보기도 합니다. 죄를 경험할 때 더 은혜가 깊어지고 진리에 깨달음과 확신도 깊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는 날카로운 칼이요 독입니다. 너무나 크고 깊은 상처를 입힙니다. 독을 마시면 목구멍이 녹는 것처럼 죄는 큰 상처와 후유증을 남깁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치유가 되지만 회복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마귀는 우리가 하나님의 절대적 선택을 입었고 받은 구원을 잃지 않을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유혹에 넘어져 죄의 수렁에서 허우적대다가 시간을 다 낭비하고 비참한 구원만 얻기를 원합니다. 마귀는 사자가 연약한 노루나 영양을 노리듯 우리를 예의주시하고 있다가 우리가 연약한 모습을 보일 때 우리를 향해 돌진해 옵니다. 그리고 약점을 물어뜯어 회복이 오래 걸리는 치명상을 입힙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는 권면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말씀을 새겨듣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만만했습니다. 그래서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는 여자종 앞에서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결국 그는 죄의식, 자의식, 수치심의 종이 되었습니다. 수사도로서 당당함을 잃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를 다시 찾아와 회복하지 않으셨던 들 그는 영원히 물고기 잡는 어부로 전락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시험에 든 후유증은 큽니다. 어떤 사람이 말한 것처럼 죄를 안 지으면 라이프테스티모니도 스토리도 없고 재미도 없는 것입니까? 죄를 짓지 않아도 주님을 배우고 하나님과 많은 믿음과 사랑의 스토리를 쓸 수 있습니다. 죄를 짓는 것이 그리 좋아 보인다면 왜 예수님은 그 제자들을 죄를 짓고 늙었을 때 부르지 않았을 까요? 왜 청년의 때에 부르신 것입니까? 주님께서 우리를 청년의 시기에 부르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순수한 청년의 열정과 헌신으로 예수님을 배우고 영적으로 성장하며 믿음의 거목이 되고 열매를 많이 맺도록 함입니다. 구약의 요셉이 만약 시험에 들었다면 그는 불륜녀의 성노리개로 살다가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시험을 이겼을 때 그는 30대에 대제국 이집트의 총리가 되어 하나님의 백성을 보호하고 살리는 아름답고 의미 있는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 청년들이 시험을 이기고 이처럼 요셉이나 예수님 제자들처럼 인류역사를 움직이는 위대한 역사의 주인공들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오늘날 시험은 너무나 강하여 우리가 과연 이길 수 있을까 싶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면 이깁니다. 기도하라는 것은 기도하면 시험을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번 수양회를 통해서 많은 주님의 청년들이 거듭나고 청년기를 주님께 드려 요셉과 같이 쓰임받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결론입니다. 기도는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고 효과적인 일입니다. 주님은 우리 힘으로는 하나님나라가 임하게 할 수 없기에 기도하라 하셨습니다. 우리가 인격적인 기도에 힘쓰는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하는 데 쓰임받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의 간절한 기도를 받으시고 이번 여름수양회에 하나님의 나라가 충만히 임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