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로마서 제 9강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말씀/ 로마서 7:1-25 요절/ 6절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라”
로마서 6장에서 8장까지 그리스도인의 성화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구원의 3단계 참조) 지난 6장에서는 신자와 죄와의 관계를 말했습니다. 우리는 죄에 대해 죽었습니다. 그러나 죄는 어떻습니까? 아직 죽지 않고 살아서 우리 몸을 통해 역사합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자기의 몸을 불의의 무기로 드리지 말고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7장은 성화과정가운데 있는 신자와 율법과의 관계를 말합니다. 율법의 역할이 무엇인지,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떻게 작용하는지, 그리고 그 가운데 일어나는 갈등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배우길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그 법이 사람이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제가 청년들에게 질문을 합니다. 어떤 사람이랑 결혼하고 싶습니까? 김창옥 쇼에서 어떤 여자분이 어떤 남자랑 결혼하면 좋을까요? 질문을 했습니다. 이때 김창옥씨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 남자를 만나 대화하고 식사하고 데이트했는데 그 남자로부터 에너지를 충전받는가? 아니면 방전이 되는가를 보라고 했습니다. 한 가지를 더 말하였는데, ‘저평가 우량주’ 남자를 선택하라고 했습니다. 저는 이 두 가지를 합쳐서 ‘믿음있는 형제’라고 말하겠습니다. 자, 본문으로 돌아와서 사도바울은 율법과 우리와의 관계를 부부 관계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한 여자가 ‘율법씨’와 결혼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아내는 남편이 살아 있을 동안 그에게 매인 바 됩니다. 하지만 남편이 죽으면 어떻게 됩니까?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자유롭게 됩니다.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녀가 되지 않습니다.
이 원리가 율법과의 관계에 있어서 그리스도인에게도 적용이 된다는 것입니다. 4절을 읽습니다.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해 죽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율법에 대해 죽으셨고, 우리도 함께 죽었습니다. 율법씨는 죽지 않았습니다. 살아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죽었기 때문에 율법씨와의 부부 관계가 끊어진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살아나셨습니다. 그리스도와 연합된 우리도 또한 살아났습니다. 이제 은혜의 주님을 새 남편으로 맞이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습니다. 과거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몸에서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습니다(5). 그런데 이제는 어떻게 바뀌었습니까?
6절을 읽겠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라” 이제는 얽매였던 옛 남편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습니다. 자유케 되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고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섬기지 않습니다. 율법 시대에는 깐깐하고 쫀쫀한 남편과 살았다면, 성령 시대에는 온유하고 사랑이 가득한 남편과 살고 있는 것입니다. 자, 어떤 남편과 사는 아내가 행복할까요? 누구와 살고 싶으세요? 누구와 사는 아내가 남편을 더 잘 섬길수 있습니까? 남편의 사랑 속에서 사는 아내일 것입니다. 우리가 현재 그러한 축복, 그러한 행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율법의 아내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은혜의 아내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의 신앙 생활의 원동력은 율법이 아닌 은혜입니다. 강압이 아닌 사랑입니다. 이제 율법에서 벗어나 성령의 이끄심을 따라 참된 자유를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자, 그렇다면 이런 의문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율법이 필요없다’는 율법무용론이나, ‘율법이 죄인가?’하는 질문입니다. 여기에 대한 바울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7절을 읽겠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율법은 죄가 아닙니다. 만약 율법이 없다면 우리는 죄를 알지 못합니다. 죄에 대한 인식은 율법에서 옵니다.
바울은 율법의 역할에 관해 세 가지를 말합니다.
첫째, 율법은 죄를 알게 해 줍니다.(7b) 죄를 죄로 깨닫게 하는 것, 이것이 율법을 주신 가장 큰 목적중의 하나입니다. 사실 율법이 주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죄를 알지 못하였습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마음에 주어진 율법, 곧 양심으로 죄에 대해 막연하게 알고 있었지만 인간들은 자기들 생각에 옳은대로 행하였습니다. 죄를 범하면서도 그것을 죄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 많은 죄를 지을 수 밖에 없었고, 자기만 행할 뿐 아니라 그런 행위를 하는 사람을 옳다 여겼습니다.
저는 이번에 종합 건강 검진을 받았습니다. 미리 작성해가야하는 설문 조사가 있었는데, 거기에는 무엇을 먹는가? 담배는 피는가? 술을 마시는가? 우울한 생각을 한 적은 없는가? 그리고 일 주일에 몇 번 운동을 하는가? 한다면 몇 시간 하는가? 아픈데나 불편한데는 없는가? 등등 세밀하게 작성토록 지시하였습니다. 피검사, 엑스레이, 초음파, 체지방검사, 위내시경, 대장내시경등 모든 검사를 다 진행하였습니다. 이때 제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불편했습니다. 뭘 먹는가? 얼마나 운동하는가?를 적으면서 분명 의사가 식습관, 운동습관을 고치라고 말할 것이 뻔했기 때문입니다. 또 몸 전체를 정밀 검사했기 때문에 그전까지만 해도 문제없이 넘어갔던 것들이 이번에는 어떤 문제점이 발견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대장에서 선종이 발견되어 제거하고 담낭에서도 콜레스테롤 용정이 발견되고 간에도 물혹이 있고, 피 정밀검사에서 뇨단백이 있고 비타민D가 부족하고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다는 검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지난번에 간단하게 검사했을때는 아무 문제가 없는 것으로 결과가 나왔는데~ 그래서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정밀검사하니 감추어져 있던 문제들이 속속 드러났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의 아버지는 병원에 가는 것을 꺼려하신다고 했습니다. 안 좋은 것이 드러날까 두려워서겠죠. 자, 그렇다면 우리의 몸 상태가 나쁘다는 것을 알려주는 병원이 잘못된 것일까요? 아니죠. 정밀 검진을 통해 우리의 몸 상태를 정확히 파악하고 진단해서 병을 예방하거나 조기에 치료하여 건강하게 살도록 해 주는 것이 병원의 존재 목적이 아니겠습니까? 이처럼 율법도 우리의 죄를 들추어내고 주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는 것을 알게 하여 그 해결책을 찾도록 촉구합니다.
둘째, 율법은 죄가 활동하는 근거지가 됩니다. 8절입니다.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 죄는 심히 간교합니다. 우리를 속입니다. 정체를 숨기고서 기회를 엿봅니다. 그러다가 기회가 오면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룹니다. 그 옛날 에덴동산에서 뱀이 아담과 하와를 어떻게 공격했고 죄짓게 했습니까? 하나님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2:17)하셨습니다. 그런데 뱀은 그 계명을 이용하여 하나님께 불순종하도록 충동질하였습니다. 율법은 좋은 것인데, 죄가 그 율법을 이용하여 아담을 공격한 것입니다. 이처럼 죄가 율법을 통해 기회를 찾아 우리를 공격합니다. 내 속에 온갖 탐심을 만듭니다. 율법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죄를 알게 된 것입니다. 율법이 없었다면 죄는 죽은 것입니다(8),
셋째, 율법은 우리가 죄인임을 깨우쳐 줍니다. 9절을 보십시오.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습니다. 자기 잘난 맛에 살았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만 주지 않으면 되지’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계명이 이르매 어떻게 되었습니까?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공부하면 할수록, 성경을 더 깊이 알면 알수록 어떻게 됩니까? 내가 얼마나 심각한 죄인인가를 깨닫게 되지 않습니까?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도리어 내게 대하여 사망에 이르게 합니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습니다(10,11). 죄는 계명이 없었을 때는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할 기회를 찾지 못하였는데~ 계명을 이용해서 사람을 속이고 죄를 짓게 하여 사망에 이르게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왜 계명을 주셔서 죄가 틈타게 하시는가? 하나님의 책임 아닌가? 그런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하는 사실은, 거룩하신 하나님은 결코 죄를 조장하거나 죄를 짓게 하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분이 주신 율법은 어떠한가? 12절을 읽습니다. “이로 보건데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 비록 죄가 율법을 수단으로 삼아 사람을 죽이기도 하지만, 율법 자체는 거룩합니다. 마치 칼 자체는 좋은 것인데 이것을 잘못 사용한 강도에게 책임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율법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본받아 거룩한 백성으로 살라고 주신 삶의 규범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으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쳐 줍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모든 사람에게 유익합니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보편적 가치가 있습니다.
그런즉 이 선한 율법이 내게 사망이 될 수 있습니까? 13절을 읽습니다.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라” 그렇습니다. 율법은 내가 얼마나 추하고 악한 죄인인가를 깨닫도록 해 줍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죄를 숨기고자 하는 본능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문학이나 예술을 통해 죄를 미화하거나 아름답게 포장합니다. 학자들은 심리학이나 정신분석학을 통해 죄를 합리화하기도 합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다수결로 새로운 법을 만들어 죄를 합법적으로 정당화 합니다. 하나님께서 ‘간음치 말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많은 나라에서 인간의 자유와 행복 추구권을 침해한다며 간통죄를 없애 버렸습니다. 더 나아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라는 진리를 깨고, 동성결혼을 인정하는 추세로 가고 있습니다. ‘동성애가 잘못되었다. 죄다’라고 말하면 왕따 시키거나 덜 떨어진 사람으로 취급을 합니다. 기독교국가인 영국에 있는 대학에서 교수가 이런 말을 했다가는 옷을 벗어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법에는 강한 힘과 효력이 있습니다. 교회가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이유가 그 법이 통과되면 교회에서 동성애가 죄라고 설교하면 잡혀가고 교회가 폐쇄될 수도 있습니다. 법을 어겼다고 언론들이 떠들 것입니다. 그래서 법이 무서운 것입니다. 지금 어느 나라에서는 성경이 차별을 조장한다면서 법을 제정하여 성경을 찍어내지 못하도록 하는 청원운동을 펼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현재 그리스도인들이 정신 바짝 차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세대는 괜찮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음 세대가 성경적 가치관으로 살기 힘든 영적 혹한기가 올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에게 이 세대를 분별할 수 있는 영적 안목을 주시길 기도합니다. 율법으로 이 세대를 올바르게 조명하는 신자라면 하나님 앞에서 절규할 수 밖에 없고, 부르짖어 기도할 수 밖에 없음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14절부터 25절까지는 바울의 고백입니다. 이 내용이 믿기 전인가? 아니면 믿은 후인가? 의견이 분분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바울이 그리스도를 믿고 난 후 성령 안에서 율법을 지키려다가 겪은 자신의 갈등과 모순을 고백한 것으로 봅니다.
14절을 읽겠습니다.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 바울은 율법이 신령한 줄 압니다. 그런데 자신이 ‘죄 아래 팔렸다’고 고백합니다. 이 말은 6장에서 ‘죄에서 해방되었다’란 말과 대조가 됩니다. 분명 신자는 죄에서 해방되었다고 했는데, 죄 아래 팔렸다고 하니 이게 어찌 된 것입니까? 바울은 중생한 후 신령한 율법을 어찌하든지 잘 지켜보려고 애썼습니다. 그런데 실패하였습니다. 처참하게도 죄 아래 팔려서 죄에 붙잡혀 살아가며, 죄에게 종노릇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바울 같은 대사도가 중생한 후에도 ‘자신은 죄 아래 팔렸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는 육신에 속하여’란 말에 답이 있습니다. 신자가 구원받은 후에도 몸은 아직 구원받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5절에도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란 말이 나오는데, 이 때는 거듭나지 않았을 때를 말합니다. 불신자일때나 신자일 때나 육신이 문제입니다. 우리의 영혼은 구원받았지만 몸은 아직 구속함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타락한 본성의 찌꺼기가 아직 남아 있습니다. 이것을 ‘원죄’라고 합니다. 이러한 현상을 통해 신자의 실존에 대해 무엇을 알게 해 줍니까? 신자는 두 가지 신분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죄에서 해방되었다’와 ‘죄에게 팔렸다’입니다. 다른 말로 ‘의롭다 함을 받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화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죄의 찌꺼기를 하나 하나 몰아내야 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하여 우리가 새 몸을 입을 때 비로서 죄의 찌꺼기가 완전히 사라지게 됩니다. 이것을 ‘영화’라고 했죠. 우리는 현재 성화의 과정 속에서 아직 대속함을 받지 못한 몸을 다스리며 살아야 합니다. 어떻게 다스릴 수 있습니까?
15절에서 23절까지 형제, 자매 순으로 읽겠습니다. “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사도 바울이 내 힘으로, 내 의지로 내 몸을 쳐 복종시켜서 선을 행하고자 애썼습니다. 그런데 안되었습니다. 마음 따로, 몸 따로인 것을 발견했습니다.
여러분이 치과에서 이 치료 받을 때 마취주사를 맞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마취가 풀리지 않은 상태에서 물을 마시거나 밥을 먹으면 입술이 다물어지지 않아 한쪽으로 질질 흘리게 됩니다. 혹시 다리에 쥐가 나 본 적은 있나요? 그때 제대로 설 수 있습니까? 똑바로 서려고 해도 다리가 말을 안 듣고 이내 꼬꾸라집니다. 이처럼 바울도 마음과 몸이 따로 노는 영적 기현상, 모순을 경험하였습니다. 그가 원하는 선을 행하지 않고 도리어 미워하는 죄를 행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화들짝 놀랍니다. 신령한 율법을 지켜보고자 애쓸수록 정작 죄 아래 팔린 무능력한 자신을 발견하였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20절 ‘내 속에 거하는 죄’ 때문입니다. 내 속에 선과 악이 함께 공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거듭난 성도로써 의롭게 살아볼려고, 주님을 위해 살아볼려고, 의의 무기로 살아보려고 몸부림치는데 잘 되던가요? 잘 안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육신의 몸이 나를 죄 가운데로 끌고 갑니다.
영국의 청교도 신학자로서 ‘청교도의 황태자’, ‘영국의 칼빈’이라고 불리운 ‘존 오웬’이 ‘신자안에 내재하는 죄’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신자라 할지라도 내재하는 죄로 말미암아 영혼의 깊은 곳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존 오웬은 내재하는 죄의 본질을 ‘인간 의지의 활동이 아닌 인간 영혼을 사로잡고 있는 외부적인 힘’이라고 하였습니다. 죄는 인간이 살아 있는 한 결코 소멸되지 않고 죄의 영향력도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믿기 전이나 믿은 후나 죄가 가진 경향성은 언제나 동일합니다. 사실 우리가 신자가 될 때 죄의 지배는 파괴되었습니다. 그래서 신자 안에 내재한 죄의 경향성은 변하지 않지만 신자 안에서 차지하고 있는 죄의 position은 변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죄의 힘을 약화시키지만 그 근원적 뿌리는 제거할 수 없습니다. 이는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족속을 정복했지만 완전히는 제거하지 못했고, 이스라엘이 약해졌을 때 가나안 족속의 세력이 강성해져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끊임없이 괴롭힌 것과 같습니다. 바울은 21절에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죄는 법(law)으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법은 본질상 강한 힘과 효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죄는 인간 영혼을 사로잡는 외부적인 힘일 뿐만 아니라 신자의 삶속에 계속해서 역사하며 활동하는 실제적인 힘(real force)입니다. 죄는 신자들 속에서 정당한 지배권을 상실했지만 힘을 가지고 활동합니다. 죄는 약해져도 그 본성은 약해지지 않습니다. 죄는 여전히 법이고, 강한 효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기 안에서 거듭난 자아와 죄악된 옛 본성이 치고받고 싸우는 것을 리얼하게 경험하였습니다. 이 갈등으로 말미암아 고뇌하며 탄식을 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성화의 과정 속에서 이러한 갈등과 탄식은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인생의 무력감을 가장 많이 느끼는 그때가 바로, 자신의 믿음이 시작되고 성장할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믿음에는 기본적인 공식이 있습니다. 바로 ‘절망적인 마음’입니다. 나에게는, 내 안에는 아무 답이 없다는 절망이 필요합니다. 절망하지 않으면 절대로 무릎을 꿇지 않습니다. 스스로에게 절망해야 주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여러분은 현재 이러한 영적 갈등과 탄식을 하고 있습니까? 하고 있다면 ‘아, 내가 성화의 길을 가고 있구나!’ 이렇게 긍정적으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우리가 설령 죄에 넘어진다 할지라도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께 나아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면 주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해 주십니다.(요일1:9).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납니다.(잠24:16)
바울은 갈등과 탄식 후에 어떤 고백을 합니까? 25절을 읽겠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감사하리로다’ 감사 찬양하고 있습니다. 죄는 신자 속에서 여전히 힘을 갖고 활동하지만 궁극적인 지배권을 상실했습니다. 이제 다른 법, 즉 은혜의 법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서두에 신자는 율법씨에게서 벗어나 은혜씨와 결혼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 은혜의 법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내주하시는 성령의 법입니다. 이를 깨달은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완성하셨고 율법의 마침이 되셨습니다. 우리와 똑같이 계명으로 말미암아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지만 육신에게 지지 않고 영으로서 승리하셨습니다. 첫사람 아담의 실패를 완전히 역전시키셨습니다.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받으셨기에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율법에서 벗어났습니다. 자유를 얻었습니다. 이를 감사 찬양드립시다.
결론입니다. 율법이 구원 자체와 상관이 없다 할지라도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성화의 삶에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성화를 위하여 극복해야 할 죄가 무엇인지를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또한 내 안에 선과 악이 공존하고 있음을 깨달아 알게 하여, 갈등하게 하며 탄식하게 합니다. 이로 말미암아 영적인 투쟁을 하게 하고 죄와 싸우게 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내 힘으로 안되니 그리스도를 의지하게 합니다. 내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게 합니다. 이 과정을 통하여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되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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