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로마서 제 12 강
하나님의 주권과 긍휼
말씀 / 로마서 9:1-33 요절 / 로마서 9: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로마서의 구조를 보면 전체가 16장까지로 되어 있는데, 그중에 1-8장은 교리편입니다. 교리편의 중심 사상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것입니디. 그리고 의롭다함, 곧 구원을 받은 신자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실천편이 12-16장입니다. 그 중간에 9-11장이 끼어 있는데, 이 부분은 하나님이 택하신 민족 이스라엘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오순절에 성령께서 강림하심으로 이방인 선교의 문이 활짝 열렸는데 이러한 세계 선교 시대에 택하신 민족 이스라엘의 위상은 무엇인가? 또한 온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속 역사의 원칙과 방향이 무엇인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9-11장의 키워드는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지난주 말씀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으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9장에 들어서서 그는 동족 이스라엘 문제로 큰 근심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음을 말합니다. 왜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 이스라엘은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고 있는가? 왜 자기 동족들은 그렇게 많은 은혜를 받았는데 그리스도를 배척함으로 구원을 받지 못하고 있는가? 이런 문제로 마음에 고통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에 대해 묵상하는 가운데 깨닫게 됩니다. 곧, 하나님은 구약시대나 신약시대나 하나님의 백성을 당신의 절대 주권 가운데 택하신다는 것을! 그 내용이 9장입니다. 10장에서는 이스라엘의 불신앙 문제를 다룹니다. 11장에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잠시 버리시지만 이를 통해 도리어 온 인류를 구원하시는 오묘한 구속의 경륜을 말합니다. 이를 깨달은 바울은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을 찬양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것이 11장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1. 바울의 내적 고통 1,2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거하노니”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동족들에 대한 애끓는 사랑이 있었습니다. 특히 선교사역 초기에 그는 이방 지역 선교 여행을 다니면서도 언제나 제일 먼저 유대인의 회당을 찾았습니다. 그곳에서 먼저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때마다 그는 유대인들에게 쫓겨났습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에게 가고는 했습니다. 이방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주께 돌아오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를 인하여 기뻐하고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 한쪽에는 언제나 그의 형제, 친척, 동족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있었습니다.
3절입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바울의 이러한 심정은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를 생각나게 합니다. 출애굽기 32장을 보면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십계명을 받아 내려옵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우상숭배를 하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내리실 심판을 생각하며 하나님께 엎드려 간구합니다. 출애굽기 32장 32절입니다. "..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모세는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을 용서해 주시기만 한다면 생명책에 기록된 자기의 이름이 지워지더라도 원하는 바였습니다. 바울도 모세와 같은 심정이었습니다. 동족들이 구원을 받을 수만 있다면 자기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라고 합니다. 실제로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기보다 그토록 애절한 심정을 가진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특별히 그런 심정을 가진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던 사랑과 특권 때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특권이 무엇입니까? 4,5절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들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그들이 받은 특권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첫째, 양자 됨. 하나님은 온 세상 사람들중에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아들들로 삼으셨습니다. 둘째, 영광. 영광의 하나님이 그들 중에 거하셨습니다.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함께 하셨습니다. 그들 가운데 장막과 성전을 짓게 하시고 그곳에 임재하셨습니다. 셋째, 언약들. 하나님은 조상들에게 그들의 후손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신다는 언약을 주셨습니다. 넷째, 율법. 온 세상 이방인들이 무지몽매하여 돌이나 나무로 만든 우상을 섬길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셨습니다. 진리를 알게 하시고 참 하나님을 섬기게 하셨습니다. 다섯째, 예배. 살아계신 하나님을 예배하며 모든 신령한 은혜를 누리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여섯째, 약속들. 구약 성경에 기록된 수많은 약속들을 주셨습니다. 그 약속의 초점은 오실 메시야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일곱째, 조상들.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여호수아, 사무엘, 다윗 등 수많은 믿음의 조상들이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이 얼마나 영광스런 일입니까? 그중에서도 가장 영광스런 것은 그리스도께서 유대인으로 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이스라엘에 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보고 그에게서 들을 수 있었습니다. 복음을 가장 먼저 듣고 구원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이 모든 특권 중에 어느 하나라도 이방인들이 지극히 사모할만한 특권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함으로 이 모든 특권이 아무 소용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침노하듯이 밀려 들어가고 있는데 유대인들은 바깥 어두운 가운데 남겨져 있습니다. 그들은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입니다. 이 얼마나 기가 막힌 일입니까?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충성하였기에 유대인들로부터 미움을 받았습니다. 상종하지 못할 이방인들을 섬기는 배신자로 비난받았습니다. 예루살렘에는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겠다는 열성분자들도 있었습니다 (행23:12,13). 그러나 바울은 동족을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뜨겁게 사랑했습니다. 그들을 생각할 때마다 마음에 큰 근심이 있었고, 끊이지 않는 고통이 있었습니다. 그의 이러한 마음은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며 우신 예수님의 마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마23:37). 사도 바울의 동족에 대한 이 사랑은 인간적인 정에 매인 인본주의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대속의 사랑이요 영적인 사랑입니다.
진정한 애국 애족이란 무엇입니까? 내 형제, 골육의 친척, 내 동족의 구원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며 섬기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라도 구원을 얻도록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 형제들, 가족들, 친척들, 우리 민족이 있습니다. 우리가 먼저 이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해야겠습니다. 우리나라가 80, 90년대에 복음 역사가 불같이 일어나다가 지금은 답보 상태에 있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의 피 묻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되어야겠습니다. 가까운 가족과 친척뿐만 아니라 우리가 섬기는 캠퍼스를 위해, 더 나아가 북한과 온 세상에 복음이 편만히 전파되도록 기도해야겠습니다.
2. 하나님의 절대 주권 우리는 앞의 내용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으로부터 엄청난 특권을 받았는데 그리스도를 거절함으로 그 모든 것이 헛것이 된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이 멸시한 이방인들은 구원을 받고 유대인들은 도리어 멸망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해 하셨던 약속의 말씀들은 도대체 어떻게 된 것입니까? 구약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여러번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들은 하나님이 백성이 된다고 하셨는데 그 약속의 말씀은 폐하여진 것인가요?
자, 이 점에 대해 바울은 무엇이라 합니까? 6절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이스라엘 사람에게서 난 사람이란 혈통적 이스라엘 사람을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의미하셨던 이스라엘은 그러한 혈통적, 육신적 자손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영적인 후손을 의미하신 것이었습니다. 핏줄을 따라 되는 자녀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에 따른 자녀를 의미한 것이었습니다. 이는 바울의 개인적인 주장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예가 7,8절입니다.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셨으니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니 명년 이 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심이라“
위에서 보았듯이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육신의 후손이라고 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여종 하갈에게서 난 이스마엘이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사라에게서 낳은 이삭이었습니다. 이삭은 사라의 태가 말라버린 상태에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태어난 아들이었습니다. 그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었습니다. “명년 이 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9) 사라는 이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 믿음으로 잉태하여 그녀의 나이 90세에 이삭을 낳았습니다.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으로 말미암아 태어난 아들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삭과 이스마엘을 둘 다 그 후손으로 삼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삭에게서 난 자라야 아브라함의 씨라 불리리라 하시고, 여종과 그 아들 이스마엘을 내어쫓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7, 창21:12). 이 사건이 말해 주는 바가 무엇입니까? 육신의 자녀가 다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말씀에 의해 태어난 자녀만이 참 자녀로 인정받는다는 것입니다(8). 약속의 말씀으로 태어난 영적인 후손이 아브라함의 참 자손이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신약 시대에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태어난 우리 신자들이 바로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의 자녀입니다 (갈4:28).
이러한 진리에 대해 사도 바울은 다른 증거를 말합니다. 10-13절입니다. “그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는데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창세기 25장을 보면 리브가가 쌍동이를 임신했습니다. 에서가 먼저 출생하여 형이 되고 야곱이 아우가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이 아직 복중에 있을 때 리브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창25:23)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하셨습니다. 곧 먼저 나올 에서가 나중에 나올 야곱을 섬기는 자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말라기 선지자가 ”여호와께서 야곱을 사랑하셨고 에서는 미워하였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말1:2) 그런데 하나님이 누구를 미워하셨다고 하시는 표현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식으로 괜히 가만히 있는 사람을 미워하여 잘못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야곱을 택하셨지만 에서는 택하지 않으셨다는 뜻입니다.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우리에게는 이런 제목 자체가 좀 불편하게 느껴집니다. ”공평하게 다 같이 사랑해야지... 미워하는 것은 나쁜 것이잖아? 하나님은 좀 편파적인 것 같으신데”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경을 읽다가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 영접이 되지 않는 말씀이 있을 때, 빨간 줄을 죽 긋고 넘어가야 합니다. 다시 돌아와서 그 뜻을 잘 파악하고, 또 그 말씀을 영접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성경은 절대무오한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내가 영접을 못하면 나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어려운 부분을 그냥 지나치지 말고 이해하고 영접하여 나의 잘못된 가치관을 바로 잡아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언제든지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할 때 하나님의 변치 않는 속성에 기초하여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선하고 인자하십니다. (시34:8) 절대적으로 정의롭고 공평하십니다. 영원히! 하나님이 야곱을 사랑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은 구속역사의 물줄기를 에서가 아니라 야곱을 통해 이어가시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하실까요? 왜 하나님은 야곱을 통해 구속역사를 이어가려고 하시는 것일까요? 이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바이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이 그것을 기뻐하시느냐고요? 거기에 대한 다른 답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기 때문이라는 것 외에는. 하나님은 자기가 원하시는 바, 기뻐하시는 바대로 행하실 절대적인 권한이 있으십니다.
우리는 민주주의 체제에 살면서 누가 절대적인 권한을 갖고 있는 것을 불편하게 생각합니다. 이해가 됩니다. 실제로 영국의 역사가 액튼 경은 “절대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고 말했습니다. 아무리 선한 사람이라도 절대 권한이 주어지면 독재자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르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선하십니다. 정의롭고 공평하십니다. 긍휼과 사랑이 많으십니다. 지혜가 뛰어 나십니다. 전능하신 분으로 절대로 실수가 없으십니다. 무엇보다 그분은 창조주시요 지금도 만물을 붙들고 계시는 유지자이십니다. 만물의 주인이십니다. 주권이란 주인된 권리입니다. ‘주’는 한자로 보면 (主)인데 왕(王)보다 위에 있는 분이십니다. 주님이신 하나님이 절대 주권자가 되심은 마땅합니다. 마땅함에서 더 나아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만일 하나님이 절대 주권을 갖고 계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분이 절대 주권자가 아니라면 우리가 이미 얻는 구원도 확실하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택하신 것은 이들의 선악간의 행위에 근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주권적으로 야곱을 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셨고 뚯하셨습니다. 그 뜻에 따라 택하셨습니다.
이상에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이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혈통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택하심을 따라 된다는 사실입니다. 구약 시대에도 하나님의 자녀들은 모두 믿음으로 산 자들입니다. 그들에게 아직 그리스도가 충분히 계시되지는 않았지만 부분적이나마 오실 그리스도를 믿고 산 자들입니다. 신약 시대에는 오신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방식은 구약 시대에나 신약시대에나 동일합니다. 곧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주권적인 뜻에 따라 사람을 택하시고, 택하신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선물로 주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십니다. (엡2:8)
하나님의 택하심으로 된 참 이스라엘은 바로 예수님을 믿는 우리 크리스천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 이스라엘에게 주셨던 특권을 다 물려 주셨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우리 영적인 조상이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신자들을 구별하셔서 거룩한 백성이요, 제사장 나라로 삼으셨습니다(벧전 2:9). 우리에게 복음 전파의 사명을 맡기시고, 온 인류 구속 역사를 맡기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이 축복을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상을 볼 때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약속을 주신 하나님은 신실하시며, 하나님의 그 모든 약속들은 결코 폐해진 것이 아닙니다(6).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참 이스라엘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이루어가고 계십니다. 택함 받은 사람들을 통해서 그 모든 약속을 성취해 가고 계십니다. 이 신실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3.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 14절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이 태어나기도 전에, 무슨 선과 악을 행하기도 전에 사람을 택하신다면 불공평하지 않은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는 기본적으로 피조물인 사람이 창조주에 대해 어떤 권한이 있다는 생각에서 나오는 질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무에게도 빚지지 않으셨습니다. 아무도 하나님에게 먼저 주고 갚음을 받을 자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나오고 그에게로 돌아갑니다. 이 하나님은 절대 주권자이십니다. 그분은 당신의 주권을 다른 누구와 상의하지 않고 행하십니다. 주권을 행하시되 선하고 의롭게 행사하십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은 긍휼의 하나님이십니다. 15절입니다.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공의롭게 행하시되 긍휼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 좋은 예가 마태복음 20장에 나옵니다. 어느 포도원 주인이 이른 아침에 남대문 인력 시장에 나가서 품꾼을 구합니다. 일자리를 얻고자 새벽부터 나와 기다리던 어떤 사람이 주인의 눈에 들었습니다. 그가 일자리를 얻어 포도원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얼마나 기뻐했겠습니까? 하루 열심히 일하여 주인에게 일당을 받아 집에 돌아가 아내에게 주면 아내가 가족들이 먹을 음식을 준비할 것입니다. 그는 아침 8시부터 기쁨으로 일했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인력 시장에 다시 나가 낮에도 일꾼을 찾아 포도원으로 들여 보냈고 오후 5시에도 한 명을 찾아 들여보냈습니다.
저녁 6시가 되어 일이 끝났습니다. 주인은 먼저 오후 5시에 고용된 사람에게 20만원을 줍니다. 이를 보고 아침 8시부터 일한 사람은 "아, 저 사람은 한 시간만 일하고 저렇게 받으니 나는 더 받을 수 있겠구나“라고 기대합니다. 그런데 주인은 아침 8시부터 일한 사람에게도 20만원을 줍니다. 그러자 그가 주인에게 원망합니다.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그러자 주인은 말합니다.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마 20:12-15) 주인은 그 먼저 들어온 사람에게 약속했던 대로 일당을 주었습니다. 주인은 나중에 온 사람도 그 가족이 먹고 살도록 동일한 일당을 준 것입니다. 이 주인은 앞의 사람에게 부당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약속을 지켰습니다. 주인은 의로웠습니다. 뒤에 온 사람에 대해서는 불쌍히 여겨서 동일하게 준 것입니다. 먼저 온 사람이 나중 온 사람과 비교하여 주인이 공평하지 않다고 원망할 수는 없습니다. 주인은 자기 것을 가지고 그의 뜻대로 한 것입니다. 주인은 행한 선한 일을 악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주권 행사 원칙은 이와 같습니다. 오늘날도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왜 저 사람은 더 귀하게 쓰임 받지?“ ”왜 쎈타에 먼저 나온 나는 안 세워주지?“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부당하게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주권대로 하십니다. 우리는 받은 은혜 자체를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하나님께 대해 어떤 일정한 권한을 가진 것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세상에 왜 이렇게 고난이 많은가?“ 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왜 이렇게 고난이 적은가?“ 라고 말해야 됩니다. 우리가 어떤 상태에 있었습니까? 우리의 심각한 범죄, 온 세상의 왕께 대한 반역으로 영원한 멸망을 받을 자들이었습니다. 이런 자들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세상에 여전히 고난이 있습니다. 신자들도 애매히 고난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선하고 인자하신 하나님이 지금도 그의 주권과 긍휼하심으로 다스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께 범사에 감사하고 그의 주권에 순종하기를 기도합니다.
16절입니다.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주권자 하나님이 그 기뻐하시는 뜻대로 행하십니다. 그 주권을 행사하시는 하나님은 선하고 의롭고 긍휼이 많은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긍휼을 베풀 자에게 긍휼을 베푸시고, 완악케 하실 자를 완악하게 내버려 두십니다. 하나님의 유기하심을 불공평하다고 말할 권리가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다만 크신 하나님을 경외하고, 완전무결하신 주권 행사를 찬양할 뿐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대한 반문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20,21절입니다.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어리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이 사람아! (O Man!)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God!) 반문하느냐? 사람과 하나님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엄위하심을 잘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사람들은 모두 그 앞에서 죽은 자와 같이 되었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화로다 나여 죽게 되었도다"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내산에 임하신 하나님을 경험하고는 두려워 떨며 다시는 자기들이 하나님을 대면하지 않게 해 달라고 모세에게 간청하였습니다. 욥은 자기 의를 주장하였지만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티끌과 재를 쓰고 회개한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두려워 떨며 다만 순종하는 것뿐입니다.
하나님은 실로 절대 주권자가 되십니다. 유대인들이 걸려 넘어진 것이 바로 이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마음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께 압박을 가할 수 있는 분으로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래야 저래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들이 율법을 더욱 열심히 지키기 때문에 자기들을 축복하셔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무거나 먹고 마시고 돌이나 나무로 만든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인들을 멸하셔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몰랐습니다. 하나님께 대해 무지하여 자기들의 주장만 열심히 들이댄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문제를 생각할 때 우리가 범사에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감사하고 순복하는 믿음을 가져야 함을 배웁니다. 우리 모임이 내 생각, 우리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세워지는 공동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시고 참 이스라엘로 삼으셨습니다. 우리에게 모든 신령한 축복을 물려주시고, 우리를 통해서 천하 만민을 구원코자 하시는 소망을 두셨습니다. 이는 오직 하나님의 긍휼하심 때문입니다. 우리가 범사에 하나님의 주권을 세우는 신자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이 시대에 적은 무리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택하신 남은 자로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