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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0년 마태복음 37강 `착하고 충성된 종`(마태복음 25:1-46)2020-11-30 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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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마태복음 제 37

 

언약의 피

 

말씀 / 마태복음 26:1-39

요절 / 마태복음 26: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성만찬을 제정하시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성만찬은 기독교 성례인 성찬과 세례 중 하나로서 예수님의 죽으심이 주는 의미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우리에게 구원을 얻게 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 의미를 모르면 예수님의 죽으심을 설령 눈 앞에서 본다 하더라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들이 예수님께서 왜 죽으셨는지 배우고 그 의미를 잘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피흘려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주고자 하셨던 것을 깊이 받아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유월절에 자신에게 무슨 일이 있을 것이라고 예고하셨습니까? 예수님은 24장과 25장 말씀을 통해서 종말과 재림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마치시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누군가에 의해 팔릴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겉으로만 보았을 때는 사람이 파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이러한 일을 당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팔리게 내어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는 참으로 불쌍하게 팔려 불명예스러운 죽음을 당하시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있었습니다. 우리의 삶의 모든 일들도 세상 권력이 주관하고 사람들에 의해 일어나는 것 같지만 사실 그 이면에 하나님은 정확하게 우리를 위해 일하고 계시고 우리를 향한 크신 계획과 뜻을 이루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자신의 죽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마태복음에서 총 네 번째로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죽는다고 또 죽는다고 여러 번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그것을 제자들에게 여러 번 말씀하신 것은 제자들이 그 죽음의 의미를 반드시 알기를 바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구속사에서 가장 중대한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없이는 구속이 성립되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은 반드시 죽으셔야 합니다. 반면 예수님은 자신에게 오는 배반을 저항할 힘이 없어서 혹은 알지 못하고 무방비 상태에서 제자의 음모에 의해 팔리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다 알고 있고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음에도 그 죽음을 받으십니다. 그것을 감당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잘 알고 계셨고 그 뜻을 이루기 원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3-5절을 보십시오. 그 때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흉계로 죽이고자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었는데 곧 전직 대제사장인 안나스와 현직 대제사장인 가야바와 바리새인들로 구성된 장로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유월절에는 예수님을 죽이지 않고자 하는 나름대로의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상황적으로 예루살렘에 가장 많은 인구가 집결하는 그 시기에 예수님을 죽이면 소요가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죽이기는 하되 명절기간은 피해서 하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나름대로의 계획을 가지고 예수님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이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뜻대로 죽음을 당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대하신 뜻과 계획대로 속죄의 죽음을 당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오히려 그들이 피하려고 했던 바로 그 명절인 유월절에 죽임을 당하게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유월절에 죽임을 당하시는 것은 바로 구약의 유월절을 완성하시는 의미가 있었습니다. 유월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에서 구원하실 때 죽음의 사자가 어린 양의 피를 보고 그들을 피해 넘어간 것을 기념하는 행사였습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이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 되어 죽음을 당하시고 이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영생을 얻게 하십니다.

 

6절부터 13절은 베다니로 장면이 전환되어 죽음을 앞 둔 예수님께 한 여인이 향유를 붓는 사건이 나오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다니 나병 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였습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3km 떨어진 가까운 마을이었습니다. 이 곳에 있는 한 여자가 예수님께 무슨 일을 했습니까? 7절을 자매님들께서 읽어주시겠습니다.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한 여인이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식사하시는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요한복음 123,5절에 기초해서 보면 그가 부은 것은 순전한 나드 향유였고 삼백 데니리온 곧 삼천만원에 달하는 값진 기름이었습니다. 베다니는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의 집이라는 뜻으로 이 여인은 소유가 풍부한 여인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여인은 이것을 예수님의 머리에 아낌없이 부었습니다. 그것은 그 여인에게 있어서 모든 것과 같았습니다. 하지만 여인은 그것을 지금 한 순간을 위해 예수님에게 부어드리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았습니다. 이를 통해 여인은 자신의 주님께 대한 뜨거운 사랑과 감사를 표현했습니다.

 

하지만 이를 바라보는 제자들은 여자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고 한마디씩 했습니다. “아니 어찌하여 그렇게 비싼 향유를 낭비하는가?” “그것을 현금으로 바꾸면 어마어마한 돈이 될텐데 말이야제자들은 현실주의적인 가치를 가지고 여자의 행동을 평가했습니다. 현실적인 눈으로 볼 때 여인의 행동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과 같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여자의 행동을 어떻게 여기셨습니까? 예수님은 그것이 자신의 장례를 위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곧 여자가 예수님이 죽으실 것을 알고 이것을 부었다는 것입니다. 향유는 주로 시체에 바르는 용도로 쓰였다고 합니다. 여인이 예수님이 죽으실 것에 대해서 실제 알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만약 이 여자가 마리아라면 마리아는 평소 예수님의 곁에서 말씀을 듣는 것을 좋아하였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말씀을 듣고 영접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고귀한 희생을 하신다는 것을 생각할 때 자신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든 예수님께서 죽으시는 희생에 대해 그냥 넘어가지 않고 자신도 꼭 감사의 표시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예수님께 드리는 사람들의 헌신은 제각각입니다. 이 사건에서 나병환자 시몬은 아마도 예수님께로부터 나병을 고침받은 자였을 것입니다. 사실 그는 예수님에게 불치의 병이 나음 받는 큰 은혜를 입은 자였지만 예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마음은 여인만큼 크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그가 육신의 질병을 고침 받기는 했지만 예수님의 죽음의 영적인 의미는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에 대해 아는 자는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목숨을 버리신 은혜를 알고 예수님께 기꺼이 자신의 귀한 것을 드리는 삶을 살게 됩니다. 찰스스터드는 캠브릿지 출신의 엘리트였지만 중국, 인도, 아프리카 선교사로 자신을 드렸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며 나를 위해 죽으셨다면 그분을 위한 나의 어떤 희생도 결코 크다고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 중 한 목자님은 예수님을 보며 저렇게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을 위해 내 일생을 바치더라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하며 세상 명예와 사람들의 인정을 구하는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기로 결단했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목자님은 졸업 후 취업을 위해 스펙을 쌓을 수 있는 3년의 길고 긴 시간을 예수님께 쏟아부어 풀타임으로 자신의 삶을 드렸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고귀한 헌신은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주며 주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드리게 합니다. 그럼에도 아무리 값진 것을 드렸다 하더라도 후회하거나 아까워하지 않게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가 우리가 드리는 것보다 비교할 수 없이 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나를 향한 사랑을 알 때 예수님께 드리는 것을 전혀 아까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 드리는 것을 아까워하는 것은 그가 본래 이기적이서가 아니라 나를 향한 주님의 놀라운 사랑을 알지 못해서입니다.

 

우리 목자님들은 모두 젊은 대학생 시절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께 자신을 드리기로 하고 지금까지 그 길을 모두 가고 있는 분들입니다. 저는 일대일 양을 섬기면서 양의 밥을 사준 돈이 지금까지 그것을 안쓰고 모았다면 얼마나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아마도 꽤 많은 돈이 될 것입니다. 30대가 되었을 때 20대 시절 주님께 드린 시간과 나의 삶을 돌아보며 과연 잘 한 것인가? 하는 생각을 가진 적도 있습니다. 아까운 생각, 혹은 어리석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나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신 예수님을 생각할 때 예수님도 나를 위해서 자신의 귀한 것을 주셨고 예수님과 비교할 때 나는 보잘 것 없는 존재에 불과한데 그렇기에 나의 희생은 예수님과 비교할 때 아까운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본질적으로 양에게 준 것이 그 양에게 준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게 드린 것임을 생각할 때 자신이 드린 것들이 아깝거나 허무하게 사라지는 것이 아님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이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고귀한 희생을 감사함으로 옥합을 부어드린 여인처럼 우리의 것을 드리는 귀한 신앙의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4절에서 16절을 보십시오. 그 때 가룟 유다는 무슨 기회를 찾고 있었습니까? 가룟 유다는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예수님의 몸값을 흥정했습니다. 예수님의 몸 값은 은 삼십으로 은 삽심세겔로 추정되며 약 1200만원 정도였습니다. 그가 이렇게 예수님을 판 것은 물질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13장을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주요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죄사함과 구원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는 오히려 물질적이고 현세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제자의 무리에 섞여 있었습니다. 그는 제자로서 예수님을 가까이서 3년이나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한 그는 예수님의 영적 가치를 알지 못하고 지상메시야로서 예수님께서 자신의 현실적인 꿈을 이룰 수 없음을 알고 예수님을 배반하고자 했습니다.

 

오늘날도 예수님을 따르다가 예수님을 떠나고 믿음에서 떠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주시는 영적인 선물인 구원보다도 현실적인 유익이나 자신이 바라는 꿈이 성취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자신의 현세적 소망을 따라 참고 견디며 예수님을 따르지만 결국 그러한 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실망감과 후회와 분노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가까이서 따르는 우리들은 자신이 예수님을 따르는 목적이 순수한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도 자신이 바랐던 꿈이나 기도가 응답되지 않을 때 자신이 지금까지 드린 헌신을 아까워하거나 후회하며 한순간에 사명에서 떨어져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삼고 따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7-2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제자들로 하여금 유월절 식사를 준비하게 하셨습니다. 유월절 후 무교절이 7일간 이어지게 되는데 통상 가족들이 모여 유월절 식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가족들을 떠나 예수님과 공동생활하고 있는 자들로서 예수님과 진정한 영적 가족으로서 유월절 식사를 합니다. 유월절 식사 장소에 대해 예수님은 원수들에게 정확한 위치를 노출시키지 않고자 성안 아무에게나 가서 즉흥적으로 장소를 준비하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은 성만찬을 하시며 자신의 죽음의 의미를 안정적으로 충분한 시간을 통해 제자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유월절 식사 자리에서 예수님은 무슨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습니까? 예수님은 제자들 중에 한 사람이 자신을 팔 것을 말씀하십니다. 유대 사회에서도 배반은 사람으로서 해서는 안될 일로 여겨지는 일들 중 하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사실을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을 팔려는 가룟 유다가 예수님의 신성을 깨닫고 회개할 기회를 주시려 함이었습니다. 하지만 가룟 유다는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슬그머니 그 장소를 떠나버립니다. 그는 회개의 부르심보다도 사탄의 이끌림을 받았습니다.

 

26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형제님들께서 읽어주시겠습니다.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예수님은 이제 곧 잡히시고 죽으시는 자신의 죽음의 의미가 진정 무엇인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일반적으로 유월절 식탁의 주 메뉴는 어린 양입니다. 그런데 이번 성만찬에서 유월절 양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그들 중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만찬은 예수님의 육체를 상징하는 떡과 포도주를 나눕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를 잘 알고 기억하도록 성만찬 의식을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몸은 곧 십자가에서 찢기시게 됩니다.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몸이 찢기신 사실을 영접하는 것이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를 올바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또 잔을 가지고 감사 기도를 하시고 제자들에게 나눠주시며 이것이 자신의 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7,28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예수님은 자신의 피에 대해 말씀하시며 언약의 피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출애굽기 24장을 보면 하나님이 모세에게 율법을 주시고 모세는 이것을 세우며 동물의 피를 뿌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피를 뿌리며 모세는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는 언약의 피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피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는 것을 인치는 의미가 있었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본문의 예수님의 피를 새 언약의 피라고 했는데 이는 구언약을 인생들이 지킬 수 없기에 새롭게 주신 언약이라는 뜻입니다. 새 언약은 행위언약이 아니라 은혜언약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피는 은혜언약의 내용이며 동시에 이 언약을 인치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죄사함을 주시고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치기 위해서 피를 흘리십니다. 여기서 많은 사람은 유대인 뿐만이 아니라 이방인 그리고 나아가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하나님이 그 백성으로 부르실 무수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피의 능력과 효력은 단지 제자들 몇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를 수많은 무리들에게 풍성하게 나눠주셨듯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주어지게 됩니다.

 

새 언약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새 영을 보내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규례를 지켜 행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실 것을 약속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은혜에 기초해서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구약 전체의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죄가 전혀 없으신데도 죄인을 대신하여 죽으시고 자신이 율법을 순종함으로 얻은 의를 죄인들에게 전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이 구원의 선물을 조건없이 받아들이는 믿음만 가지면 구원의 은혜를 얻게 됩니다. 이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는 사람 안에 전인격적인 감사의 고백이 나오게 하고 온전한 순종에 이르고자 하는 삶의 열정을 이끌어냅니다. 성령은 새 언약의 영으로 역사하여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이 기뻐하는 삶을 살 수 있게 하고 우리 안에 순종을 일으킵니다.

 

물론 예수님을 통해 구원의 언약을 맺었다 하더라도 우리는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통해 구원을 얻은 그는 더 이상 죄의 무조건적인 통치에 굴복하지 않게 됩니다. 죄를 짓더라도 하나님의 은혜의 통치 아래로 언제든지 기쁨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또한 새 언약의 성령은 지속적으로 우리 안의 죄의 오염을 제거하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십니다. 예수님을 통해 맺는 새 언약으로 우리는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을 말합니까? 식인종이 되라는 것입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음을 믿고 예수님을 나의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할 때 우리를 위해 희생하신 이 은혜가 내 것이 됩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655-57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떡을 먹고 포도주를 마실 때 그것이 우리 몸 안에 들어와서 생기를 주고 맛을 주고 상쾌함과 배부름을 줍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개인적으로 받아들일 때 예수님은 우리의 구세주가 되시며 우리는 속죄의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반면 이것을 머리로만 아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에게 예수님의 은혜는 말그대로 그림의 떡일 뿐입니다. 그 풍성하신 은혜와 사랑을 깨닫고 받아 누릴 수 없습니다.

 

여기 모인 우리 목자님들은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피흘리셨음을 영접하고 이미 이 예수님의 살과 피를 나눠 먹어 새 생명을 얻은 형제자매들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은 우리가 매일 맛있는 식사를 하고 음료를 마셔서 생명력을 얻듯이 매일 묵상하고 음미해야 할 것입니다. 밥을 먹지 않으면 삶에 기쁨이 없고 조그만 일에도 짜증이 나는 것처럼 우리의 생명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받아 누리지 않으면 영적으로 허기진 마음에 여러 가지 죄와 시험을 이길 힘이 없게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나를 위해 돌아가신 사실을 기억하며 십자가 사랑을 묵상할 때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성령이 충만히 임하며 기쁨과 만족과 감사가 넘치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고자 우리의 죄를 속해주시기 위해서 그 고귀한 피를 흘리셨습니다. 자신의 생명은 잃고 우리에게 예수님의 생명을 불어 넣으셨습니다. 예수님의 피에 우리를 향한 진한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이러한 새 생명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고통하고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들을 위해 하나님이 내려주신 생명의 만나입니다. 우리가 힘들고 어려울 때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피를 흘려 자신의 죽음으로 우리를 구원하였다는 사실을 영원히 기억하고 감사하고 음미하는 우리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이 예수님의 보혈이 세상의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우리의 삶의 참된 만족이요 기쁨과 힘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매일 하루를 시작하기 전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속에 채우고 그것으로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저는 최근 이렇게 매일 주어지는 양식 본문에서 한 말씀을 받고 그것을 생각하며 살아갈 때 제가 당면한 여러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지혜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죄를 이길 힘도 얻게 되었습니다. 또 그 말씀이 생명이 되어 저의 삶을 즐겁게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또한 힘들 때 예수님을 묵상하면 힘이 납니다. 예수님은 나를 위해 모든 것을 주신 분이십니다. 제가 세상을 살면서 만족, 인정, 성공, 사랑 등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저에게 주어지지 않으면 힘들어했습니다. 하지만 사실 저는 이미 그 이상의 것을 예수님을 통해 얻은 자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아이문제는 저에게 있어 심각한 문제이지만 이를 위해 기도할 때에도 구원의 언약을 맺어주신 예수님, 또 피흘려주신 예수님의 사랑을 생각하며 기도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가지게 됩니다. 저는 예성이가 백혈병문제를 가지고 있기 피에 대해 많이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몸 안에는 피가 계속 흐르며 생명을 공급하고 있습니다. 산소를 운반하고 병균을 퇴치하여 우리 몸을 건강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피가 건강할 때 건강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의 피를 흘려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피흘리심을 묵상함으로 우리 안에 예수님의 피가 항상 흘러 예수님의 생명력이 충만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 세상 험하고 나 비록 약하나 늘 기도힘쓰면 큰 권능얻겠네

주의 은혜로 대속받아서 피와 같이 붉은 죄 눈 같이 희겠네

내 맘이 약하여 늘 넘어지오니 주 예수 힘주사 굳세게 하소서

주의 은혜로 대속받아서 피와 같이 붉은 죄 눈 같이 희겠네

 

29,30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떠나시기 전 제자들에게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암시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통해 구원을 성취하시고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제자들과 함께 기쁨의 만찬을 나누실 것입니다.

 

결론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언약의 피를 흘리시고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깨트려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우리는 예수님의 희생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모든 것을 다 가진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과의 구원의 언약을 맺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이 이 예수님이 흘리신 피를 기억하는 자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에 감사하는 자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우리의 죄를 속해주셨고 하나님 백성 삼으신 것을 확신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 피가 우리 안에 언제나 흘러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의 생명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