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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1년 신년 4강 `주께 하듯 하라 ⁠`(골로새서 3:18-4:18)2021-01-17 19:18
작성자
2021 신년 4강 

주께 하듯 하라 

말씀/ 골로새서 3:18-4:18 
요절/ 골로새서 3:23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골로새서의 주제는 ‘그리스도’입니다. 사람에게 참된 깨달음을 주고 참된 내면의 부요함과 만족함과 생명을 주는 모든 지식과 지혜의 보화는 전부 그리스도 안에 다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없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어려움을 느낄 때 곤란함과 궁핍함과 곤고함을 느낄 때 그리스도 안에 그 어려움을 이기고 승리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모든 지혜와 지식과 보화가 전부 다 있습니다. 원천 센터의 김승원 목자님은 여러 고난 가운데 있습니다. 그는 그 고난 가운데서 일용할 양식을 깊이 먹어 고난 가운데 있는 분들과 함께 나누고 있습니다. 얼마 전 함께 공유한 양식을 보니까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고난을 피하여 아무 고난도 받지 않도록 하시는 것이 아니라, 고난 가운데서 그 고난을 이길 힘과 믿음과 능력을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의 고난을 면제받는대신 그 고난을 감당할 힘을 얻으셨다고 하였습니다. 이 예수님을 바라볼 때 본인도 현재 당하는 여러 고난을 감당할 힘을 얻는다고 간증하였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 안에는 고난 가운데 있는 신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할 수 있는 보화가 감추어져 있습니다. 또 오늘 본문에 나오는 것처럼 가정 가운데 직장 가운데 어려움에 처한 일들을 도울 수 있는 보화가 감추어져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실제적인 가정 문제, 직장 문제 가운데 승리할 수 있도록 하여 주는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진 보화를 발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3:18절을 보십시오.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 여기에서 아내들은 보통 아내들이 아닙니다. 본문에서 아내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모든 지식과 지혜의 보화가 다 감추어졌다는 것을 발견한 아내들입니다. 바울은 바로 이런 아내들에게 말씀합니다.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권위 앞에 복종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권위를 세워드리셨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하겠다고 하셨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우리는 십자가를 통한 죄사함을 얻지 못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죄사함을 얻지 못하게 된다면 죄의 형벌인 영원한 죽음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예수님은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시고 그 권위 아래 자신을 놓으셨습니다. 

본문에서 복종은 남편의 권위를 세워준다는 의미입니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정말 존경이 되기 때문에 존경하고 권위를 세워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존경이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때에도 권위를 세워주는 아내가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몇년 전 제가 미국 국제 수양회 세미나를 위해 유대인의 자녀교육을 연구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연구하면서 깊이 배운 점 중 하나가 유대인 어머니들은 가정에서 철저히 아버지의 권위를 세워준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권위자였던 것처럼 가정에서 아버지를 모세와 같은 권위자로 인정하고 철저히 세워주었습니다. 아버지가 식탁에서 말씀하시면 자녀들이 공손한 자세로 잘 듣도록 도왔습니다. 이에 비해 최악의 자녀교육은 자녀들 앞에서 아버지의 권위를 실추시키는 것임을 배웠습니다.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함부로 대하고 심지어 은근히 무시하고 비하하면 자녀들은 더 이상 아버지에게 배울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배우지 않게 됩니다. 또 아버지를 존경하고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는 자녀는 거의 하나님을 아버지로서 존경하고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순종하지 못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고 하였습니다. 심지어 어떤 엄마는 자녀들을 앉혀놓고 아빠의 흉을 보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를 통해 어디에서도 하소연하지 못하는 속마음을 토해내고 스트레스를 풉니다. 그러나 자기 정신 건강에는 좋을지 몰라도 자녀 교육 측면에서 볼 때 이것은 정말 최악의 자녀교육입니다. 자녀에게 영적으로 망해라, 제발 망해라 하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문제는 남편이 존경이 되면 좋은데 존경이 전혀 안되는 경우입니다. 이런 경우 어떻게 해야 합니까? 존경하는 척 해야 합니까? 여기에서 본문 말씀은 예수님을 나의 모든 보화로 영접한 아내들에게 주신 말씀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상기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권위에 복종하였습니다. 이 예수님을 본받아 하나님이 세우신 가정의 가장의 권위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음을 따라하는 것이 아니라 주 안에서 마땅한 바를 따르는 것이며 사랑하는 나의 주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19절을 보십시오.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이 역시 그리스도를 나의 보화로 발견한 남편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를 보화로 발견한 남편들은 아내를 사랑하며 특히 아내를 괴롭게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 남편에 있어서 아내 사랑의 최고의 모델은 누구입니까? 구약 성경의 야곱입니까? 야곱은 라헬을 사랑하여 그와 결혼하기 위해 7년을 무보수로 일했습니다. 그는 그 7년을 단 몇 일처럼 여겼습니다. 이러한 야곱도 아내 사랑의 좋은 예입니다. 그러나 더 좋은 예가 있습니다.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몸된 교회를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 예수님은 자기의 몸된 교회를 위해 자기 생명을 아낌없이 내어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인 남편에게 있어 바로 이 예수님이 아내 사랑의 모델입니다. 곧 아내를 위해 자기를 희생하고 자기를 내어주는 사랑입니다. 구체적으로 자기 시간과 관심과 열정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부부간에 불화하고 갈등이 생기며 심지어 이혼에 이르는 것은 많은 경우 아내가 볼 때 남편이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으로 행동하는 경우입니다. 남자들은 연애할 때는 간도 쓸개도 다 빼줄 것처럼 하다가 막상 결혼하면 매우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으로 행동하는 경우가 종종 아니 매우 많이 있습니다. 주말이 되면 골프채를 메고 골프치러 가거나 낚시를 가기도 합니다. 아내보다 스포츠나 자기 취미생활을 더 사랑하여 아내를 매우 외롭게 만들기도 합니다. 남편 입장에서 볼 때 아내가 어제 했던 이야기 오늘 또 하고 요점만 간단히 이야기하면 될 것을 구구절절이 어떤 상황에서 누가 한 그 말에 자기 마음이 어땠고 그 다음 말에 또 자기 기분이 어땠고 그러니까 그 모든 것을 종합해 볼 때 지금 내 마음이 어떻겠느냐고 느닷없이 질문을 합니다. 그러면 남편은 그것을 내가 어떻게 알겠느냐고 대꾸합니다. 그러면 아내는 마음이 매우 상합니다. ‘내 말을 진심으로 듣고 있지 않구나. 내 마음을 헤아려주고 공감해주려는 노력은 아예 하려는 마음 자체가 없구나.’ 생각하고 깊은 상처를 받고 때로는 분노를 느낍니다. 

본문에서 사랑하라는 표현은 원문상 ‘아가페’입니다. 곧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아가페 사랑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아가페 사랑의 가장 큰 특징은 자기 희생이요, 자기를 내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자기 아들을 내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따르는 남편들은 아내를 위해 자기를 내어주는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시간을 내어주고 마음을 내어주어 아내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해 주어야 합니다. 자기 하고 싶은 일만 하려는 생각을 부인하고 함께 하는 시간을 가져주어야 합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이 말씀은 그 부모가 그리스도의 사람인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정말 자신의 보화로 여기는 사람, 그리스도가 전부인 부모의 경우 그 부모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옳은 일입니다. 특히 본문은 ‘모든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일이란 때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경우에도 부모님을 신뢰하고 부모님이 믿는 주님을 신뢰하고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자녀들은 아무래도 또래 아이들로부터 이래저래 영향을 받습니다. 이 시대 아이들을 지배하는 정신은 부모의 말보다 분명한 자기생각과 주관을 갖고 그 생각대로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부모님이 조언 정도는 해 주실 수 있겠으나 나의 삶에 개입하여 이래라 저래라 할 권한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믿음의 자녀들인 우리 2세들도 이런 생각의 영향을 받아 믿음이 없는 세상의 자녀들처럼 말하고 행동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주님을 전혀 기쁘게 하는 생각이 아닙니다. 주님은 믿음의 자녀들인 우리 2세들이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기를 원하십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이 순종이 무조건적이고 맹목적인 순종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아무 생각도 없이 자기 주관도 없이 무조건 시키는대로 하라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여기에서 순종은 부모님이 믿고 섬기는 주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일전에 JBF 교사 모임을 하면서 어떤 2세가 “엄마 아빠는 왜 말씀대로 안 살아?” “왜 말씀대로 이렇게 안해?”라고 말했다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은 그 부모님의 말씀이 곧 주님의 말씀과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모님의 말씀이 항상 주님의 말씀과 동일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부모님의 말씀이 이 세상의 기준이나 가치관을 따른 것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무조건 명문대학에 들어가야 한다. 그것이 최고다.”라는 식의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 훌륭한 2세 자녀들은 그 부모님의 말씀이 성경 말씀을 따르지 않은 것이므로 말씀에 기초해서 반론을 펼 수 있어야 합니다. 반론을 펴되 흥분하거나 혈기를 부리면서 말하는 것이 아닌 차분하게 말씀에 기초해서 해야 합니다. 우리 종로 센터 2세들은 너무 훌륭하기 때문에 다들 이렇게 잘 할 것을 믿습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아버지들이 저지르기 쉬운 잘못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녀들을 한 번에 심하게 혼내는 것입니다. 보통 아버지들은 직장 일에 매여있기 때문에 차분하게 시간을 내서 자녀들과 대화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또 엄마처럼 그때 그때 잔소리를 하지도 않습니다. 대신 아버지들은 자녀들의 문제를 평소 눈여겨 보고 있다가 한 번에 터뜨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때 자녀들이 고분고분하게 “네 아버지, 앞으로 잘 할게요.”하고 나오면 좋지만 아버지의 지적이나 책망에 자녀가 매우 불순한 태도로 나올 경우 아버지들은 분노를 폭발하게 됩니다. 거친 언어나 심지어 폭력을 행사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때 자녀들은 마음에 깊은 분노를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하였습니다. “노엽게 하지 말지니 분노를 폭발할까 하노라” 혹은 “노엽게 하지 말지니 집을 뛰쳐나갈지 모를까 함이라” 하면 잘 이해가 되는데 왜 “노엽게 하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말씀하였을까요? 

여기에는 놀라운 사실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자녀는 낮은 자존감을 갖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아버지에게 인정받는 자녀가 건강한 자기 존중감을 갖게 됩니다. 반면 아버지에게 은근히 무시받는 자녀, 맨날 야단만 맞는 자녀, 인정받지 못한 자녀는 낙심하게 됩니다. 낮은 자존감을 갖게 됩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뭔가 위축되고 주눅이 들게 됩니다. 

그러므로 아버지는 자녀를 훈육할 때 그가 마음에서 분노를 일으키지 않도록 자녀의 인격을 존중하면서 훈육해야 합니다. 자녀가 다소 반항적으로 나온다고 해서 거친 언사를 내뱉거나 폭력을 행하는 것은 절대 안됩니다. 만약 이미 그렇게 했으면 자녀를 불러 사과하고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아버지가 정말 미안하다. 잘못했다. 용서해 달라.” 고백하고 자녀의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22-24절을 보십시오.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바울 당시 대부분의 종들은 주인의 눈치를 보며 일했습니다. 주인이 보면 열심히 일하는 척하고 주인이 보지 않으면 요령을 부리거나 게으름을 피웠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 종들은 그렇게 하면 안됩니다. 그리스도인 종들은 다른 노예들처럼 주인의 눈치를 살피며 적당히 일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다시 한 번 23절을 보십시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그리스도인 종들은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해야 합니다.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습니까? 이는 그가 종이기 이전에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져 있는 그 지식과 지혜의 모든 보화를 발견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모라비안 선교회는 1732년부터 1930년까지 무려 3,000명의 선교사를 파송하여 근대선교의 불을 지폈습니다. 그들은 교우 12명 중 1명의 비율로 선교사로 나갔습니다. 모라비안 선교회의 중요한 특징은 평신도 자비량 선교사였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선교지의 언어를 배워 그들의 언어로 복음을 전했으며 그들과 함께 살면서 삶과 희생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서인도 제도의 노예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스스로 노예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 모라비안 선교회가 감리교 창시자 요한 웨슬레를 복음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였습니다. 요한 웨슬레가 대서양을 항해하는 배를 탔을 때였습니다. 배가 심한 폭풍을 만나 금방 파선될 것 같은 상황에서 요한 웨슬레는 극심한 죽음의 공포에 떨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평화롭게 찬송하는 무리들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이 바로 미국의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떠나는 평신도 자비량 선교사들인 모라비안 선교회원들이었습니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그는 모라비안 선교회 지도자들과 교제를 나누게 되었고 이후 복음 안에서 다시 태어난 사람이 되어 감리교 운동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 모라비안의 자비량 선교 열정에 도전을 받은 윌리엄 캐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하라,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을 시도하라”는 유명한 말과 함께 선교 운동을 힘있게 하였습니다. 

우리 모임에서도 이러한 모라비안 선교회의 정신을 이어받아 대학을 졸업한 인재임에도 대사관의 말단 행정 직원으로, 혹은 운전기사로 취업하여 선교사로 나간 이들이 있습니다. 짐바브웨의 이제임스 선교사님은 대사관 행정 직원으로 일하면서 대사님을 정말 주님을 섬기듯 절대적으로 섬겼습니다. 케냐의 잭키 윤 선교사님 역시 대사관 행적 직원으로 일하면서 마음을 다해 절대적으로 대사관 직무를 감당했습니다. 이렇게 했을 때 대사님으로부터 그 교회에 또 선교사로 올 다른 분 없냐는 말을 들을 정도로 깊은 신뢰와 인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어떤 한 선교학자의 연구에 의하면 로마 제국에 그렇게 단기간 내에 복음이 널리 전파된 것은 그리스도인 노예의 역할이 매우 컸다고 합니다. 주인의 눈치나 살살 보는 일반 노예와 너무도 달라 보이는 그리스도인 노예, 그가 하는 일에 마음과 정성을 다하는 그리스도인 노예, 주인이 시킨 일을 마치 자기가 섬기는 주님이 시킨 일처럼 온 마음과 정성과 충성을 다해 감당하는 노예들을 주인들은 눈여겨 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주인들은 마침내 그리스도인 노예가 왜 그렇게 전혀 노예답지 않은 성품과 인격을 갖추고 있는지 그 비밀을 알게 되었고 자기들도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로마서 16장을 보면 이러한 노예들을 통해 상류층에 복음이 전파되었고 그들이 자기 가정을 오픈하여 노예들과 함께 예배드렸던 그 아름다운 현장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조선에 처음 복음이 전파되었을 때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의 원색적인 구호가 큰 효과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개신교 복음이 전파된지 백년도 더 지난 지금 이런 원색적인 복음전파는 그 효과가 많이 떨어졌습니다. 그러면 대안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각자가 자기 삶의 현장에서 맡은 일을 마치 주님을 섬기듯 감당함으로 복음의 향기를 내는 것임을 믿습니다. 가정에서는 그리스도인 부모의 역할이 중요하고, 직장에서는 그리스도인 직장인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새해에는 우리가 모두 이런 그리스도인들이 다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4:1절에서는 상전들이 의와 공평으로 행할 것을 권면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 가운데서도 직장 가운데 상전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경우 인맥이나 학연을 기초로, 혹은 자기가 개인적으로 선호하고 좋아하는 사람에게 불공정한 호의를 베풀어서는 안됩니다. 하늘의 상전이신 하나님께서 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4:2-6절을 보십시오.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 일 때문에 매임을 당하였노라 그리하면 내가 마땅히 할 말로써 이 비밀을 나타내리라 외인에게 대해서는 지혜로 행하여 세월을 아끼라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바울은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고 말합니다.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이는 늘 감사한 마음으로 살고 특히 기도할 때에 감사를 많이 하라는 것입니다. 구약의 다니엘은 식민지에 사로잡혀 있는 상황에서 늘 힘들고 어려운 상황 가운데 있었지만 힘든 말을 하거나 또 필요한 기도제목을 말하기 이전에 먼저 감사를 하였습니다. 기도를 시작할 때 먼저 감사하면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기도를 더 잘 할 수 있게 됩니다. 또 힘들고 어려운 상황 가운데 두신 하나님의 뜻을 더 잘 깨닫게 됩니다. 

바울은 특히 전도할 문을 열어주시도록, 그래서 그가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지원을 요청했습니다. 

외인들에 대해서는 지혜로 행하여 세월을 아끼라 하였습니다. 말을 할 때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하였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특히 교회 내 사람이 아닌 일반 사회에서 사회생활할 때에 더욱 그러합니다. 말 한 마디가 천지차이를 가져옵니다. 말 한 마디 부드럽고 상냥하게 하면 안 될 일도 되고 인간관계도 부드러워지게 됩니다. 그러나 말 한 마디 잘못하면 다툼과 분쟁 갈등이 일어나고 심지어 법적인 송사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이 경우 많은 시간과 물질과 정력이 낭비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말을 소금을 치듯 하여 지혜롭게 행해야 합니다. 

7-18절은 사랑하는 동역자들에 대한 바울 사도의 문안인사와 편지를 마치는 인사입니다. 
바울은 현재 옥중에 있습니다. 그러나 동역자들에 대한 깊은 관심과 애정과 사랑을 느낄 수 있슴니다. 특히 오네시모의 경우 그가 옥중에서 복음을 전함으로 회심시킨, 말하자면 옥중에서 낳은 자식이었습니다. 그는 본래 골로새의 장로였던 빌레몬의 종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마도 무언가를 훔쳐 도망을 갔습니다. 바울은 복음으로 도와 그가 영적으로 거듭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편지 곧 빌레몬서를 작성하여 그의 주인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잘 영접하도록 부탁했습니다. 이제 바울은 이 오네시모를 보내며 자기의 사정을 소상히 알려줄 것이라 하였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옥중에 갇힌 경우 자기 문제에 매이기 쉽습니다. 자기 연민에 빠지기 쉽고 여러 불평을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옥중에서도 동역자들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들의 사정을 하나하나 살피고 기도제목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 기도했고 필요한 것이 있으면 적합한 사람들에게 부탁했습니다. 

각박한 현대 사회를 살면서 우리도 각자 자기 문제에 함몰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바울을 배워 마음을 넓혀 동역자들의 애로사항과 기도제목에 관심을 가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뜨거운 성도의 교제를 나눌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삶에 있어서 너그럽고 여유가 있으며 베풀 수 있고 무엇보다 감사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또한 실제적인 삶의 영역에서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가 각자의 자리에서 가정에서 직장에서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사는 새 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