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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1년 요한복음 4강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요한복음 3:1-36)2021-03-28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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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요한복음 4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말씀 요한복음 3:1-36

요절 요한복음 3: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트리나폴러스 라는 사람이 쓴 꽃들에게 희망을 이란 책을 보면 최고 높은 곳에 오르고자 하는 벌레들의 경쟁이 나옵니다. 그러나 정상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런 경쟁의 대열에 있던 주인공 벌레에게 한 친구벌레가 거듭남의 진리를 가르쳐 줍니다. 거듭남의 진리를 모르면 열심히 살아도 불행합니다. 3장의 거듭남의 진리는 요한복음 1:12,13절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이시간 우리가 거듭남의 진리를 잘 배우고 인생의 진정한 승리자들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었는 데 그는 유대인의 관원이었습니다.

 

첫째,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목숨을 걸고 율법대로 살고자 했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바리새인들이 형식주의와 위선에 빠져 예수님께 질타를 받기도 했지만 니모데모는 나름 진실한 바리새인이었던 것같습니다. 그는 자기 의로 어떻게든지 하나님께 인정받고자 했습니다.

 

둘째, 니고데모는 백성중 승리자였습니다. 니고데모란 이름은 백성중 승리자란 뜻입니다. 부모님들은 니고데모가 많은 사람들가운데 뛰어난 사람이 되도록 그런 이름을 지어준 것같습니다. 이름 값을 못하는 이들도 많은데 니고데모는 이름대로 승리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유대인의 관원이란 명예와 권력을 얻었습니다. 유대인의 관원이란 당시 이스라엘 최고의 입법, 사법, 행정 통합기구인 산헤드린 공회의 의원이 된 것을 말합니다. 그는 계층 피라미드에 상위 1%에 들어간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셋째, 니고데모는 정치체제를 바꾸어 하나님 나라를 구현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유대인의 지도자로 당시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그러하였듯 다윗과 같은 정치적 메시야가 와서 다스리면 나라에 구원이 임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이런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와 말했습니다.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그는 예수님을 랍비라고 불렀는 데 랍비는 선생이란 뜻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그냥 선생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 근거는 예수님이 놀라운 표적들을 행하셨기때문입니다. 10절을 보면 사실상 니고데모도 선생입니다. 보통 선생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대표할만한 선생입니다. 이런 그도 모르는 것이 있었고 그를 가르칠 선생을 필요로 했습니다. 선생은 학생이 궁금해하는 것을 속시원하게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국어선생은 국어를, 영어선생은 영어를, 수학선생은 수학만큼은 확실히 명쾌하게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은 무엇을 확실히 가르쳐 주어야 합니까?

 

쾰른의 유다윗 선교사님은 학생시절에 철학과 교수님을 찾아 인생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아야 하는 지를 질문했습니다. 그러자 그 철학교수님은 나도 모르니 술이나 마시자고 대답했습니다. 고등학교 선생님들뿐 아니라 대학교수들도 인생의 궁극적인 질문에 속시원한 대답을 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 예수님은 어떠했습니까?

 

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놀랍게도 예수님은 니고데모가 묻지도 않았는데 대답을 내놓으셨습니다. 그것도 애매한 대답이 아니라 더할나위없이 명쾌한 대답입니다. “진실로 진실로라는 말은 틀림없다는 말이 아닙니까? 예수님이 보시는 니고데모의 궁금증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 나라를 보는 가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 나라를 보고자 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도 거듭나지 않고서는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예수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인간의 행복이 하나님의 나라를 보는 데 있으며 그 방법은 거듭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 나라의 소유자였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았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통치는 기쁨과 행복의 대명사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범죄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되므로 더 이상 하나님의 통치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

 

거듭남이 무엇입니까? 에베소서 2:1-3절을 보면 우리는 죄와 허물로 죽은 상태였고 본질상 하나님의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거듭남은 하나님의 진노의 자녀가 예수님을 영접하여 사랑받는 자녀로 바뀌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거듭난 사람의 특징이 무엇일까요? 기쁨과 평화입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우주고아이며 하나님과 원수사이로 삽니다. 이런 그는 근본적으로 외롭고 불안하고 웬지 두려운 삶을 삽니다. 그런데 거듭나게 되면 항상 마음이 기쁘고 즐겁습니다. 마음에 평화가 넘치고 장래에 대한 확신과 비전이 넘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시고 가장 크고 확실한 사랑으로 나와 함께 하시고 나의 삶을 다스려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아빠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니 내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는 평화가 넘칠 수 밖에 없습니다. “내게 강같은 평화 넘치네~”

 

거듭남은 우리가 같은 존재이지만 다른 느낌으로 살게 합니다. 그것은 마치 벌레가 나비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같은 존재인데 벌레일 때는 움직이는 것도 힘들고 구질구질하고 자신도 싫고 다른 사람들도 나를 싫어하는 듯 보입니다. 삶은 우울하고 답답합니다. 그러나 같은 존재인데 나비가 되면 삶이 너무나 자유롭고 밝고 행복해 집니다. 이것이 바로 거듭남이 주는 [같은 사람 다른 느낌]입니다.

구약성경에 야곱은 얍복강을 건너지 못하고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20년 전에 한 행동 때문에 피의 복수를 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그는하나님께 매달리는 가운데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왕자로 거듭났습니다. 그러자 그는 같은 사람, 다른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의 심령에는 해가 돋았고 그는 에서가 조금도 무섭지 않았습니다.

 

우주고아요, 하나님의 원수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면 무서울 것이 없어집니다. 자신이 진정한 승리자임을 알기에 어떤 어려움이 와도, 좌절하지 않으며 어떤 실패에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그는 불사조와 같이 영원한 승리를 향해 나아갑니다. 다른 모든 것을 얻어도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을 얻지 못하면 그는 영원한 실패자에 불과하며, 반면에 다른 모든 것이 부족해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모든 것을 얻은 자보다 나은 사람입니다. 우리가 주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거듭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승리와 특권을 얻을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사람이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를 맛볼 수 있다고 말씀하시자, 니모데모는 그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다시 날 수 있느냐고 반문했습니다. 이미 크고 늙어버린 자신이 어떻게 어머니 뱃속으로 들어갔다 나올 수 있겠냐고 물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말씀하신 거듭남이 육체의 재탄생이 아니라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는 것이라 설명하셨습니다. 여기서 물은 성령을 설명하는 단어로 성령이 우리 존재를 깨끗케 함을 의미합니다. 루소는 사람은 두 번 태어난다고 말했습니다. 한번은 육체가 태어나는 것이고 다른 한번은 정신이 태어난다고 하였는 데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거듭남은 정신정도가 아니라 존재와 영혼이 근본적으로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노아시대 사람들은 육체가 되었습니다. 이는 그들의 영혼이 기능이 정지되어 동물과 별반 다를 바가 없게 됨을 뜻합니다. 영혼의 기능은 하나님을 인식하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거듭남은 죽은 영혼이 다시 살아나 영적 호흡을 하며 하나님과 교제를 하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육체의 재탄생이 아니라 영혼의 탄생을 말하셨으므로 거듭나야 한다는 말씀은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 아닙니다.

 

영혼은 성령으로 거듭납니다. 우리가 어떻게 성령의 존재를 알고 그 역사를 인식할 수 있나요? 예수님은 이제 성령을 바람에 비유하십니다. 참고로 성령과 바람은 같은 푸뉴마라는 원어를 사용합니다. 바람은 보이지 않으나 존재합니다. 특별히 바람이 불 때 우리는 훈훈함, 시원함을 느낍니다. 바람은 미미하여 그 존재를 의심케 할 때도 있지만, 때론 강력하게 불어 엄청난 변화를 만들기도 합니다. 간판을 날려버리고 가로수를 뽑아 쓰러뜨리기도 합니다. 이처럼 성령은 어떤 사람에게 미풍처럼 역사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강력한 태풍처럼 역사합니다. 분명한 것은 바람이 존재하듯 성령이 존재하며 사람들을 거듭나 새 사람이 되게 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바람은 자기 맘대로 붑니다. 사람이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도 그렇습니다. 사람이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주도합니다. 인간은 성령의 역사에 철저히 피동적입니다. 성령이 역사할 환경만 만들 뿐입니다. 그러면 성령으로 난 사람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누가 성령으로 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까요?

삶의 목적과 방향이 확실히 바뀐 사람입니다. 더 이상 자기영광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사람입니다. 이 땅보다 하늘나라 소망가운데 사는 이입니다. 걸레와 같이 더러운 자기 의와 헛된 자기 왕국을 세우려 하지 않고 참되고 영원한 하나님의 의와 그 나라를 세우고자 하는 이입니다. 이런 사람이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입니다. 벌레가 구하는 것과 나비가 구하는 것은 다릅니다. 벌레는 낮고 어두운 곳을 찾고 더러운 것을 구합니다. 그러나 나비는 밝고 높은 곳을 찾고 아름다운 꽃을 찾습니다.

 

사람이 성령의 역사에 철저히 피동적이란 사실이 주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성령이 나를 선택하여 나를 거듭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내가 이미 선택받은 사람, 사랑받은 사람이라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자신에 대해 충분히 자부심을 느끼고 자신을 소중히 여길 이유를 가집니다. 같은 이유로 우리는 담대히 세상을 향해 승리자의 아이덴터티를 가지고 나아갈 수 있습니다. 눈치보는 생쥐처럼 살지 않고 자신감 넘치는 사자나 호랑이처럼 살 수 있습니다. 우리 2세들이 특히 세상에 대해서 그런 마인드를 가지고 나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9-12절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는 니고데모를 섬기신 예수님을 보여줍니다. 니고데모가 두 번째 어찌라는 말을 했습니다. 앞의 어떻게는 몰라서 물어 본 것이라면 이번에 어찌는 이해의 문제가 아닌 것같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그런 것도 알지 못한다고 그의 자존심을 건드리며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문제가 예수님의 증거를 받지 않는 문제라고 하셨습니다. 받지 않는 것은 이해의 문제가 아니라 자존심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자존심 때문에 고집 피울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면 내가 무너지기 때문이며 내가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왜 자존심을 꺾고 예수님의 증언을 받아들여야 합니까? 그래야 구원을 얻고 성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존심이 밥먹여 줍니까? 한신은 살기위해 건달들의 가랑이 사이로 기어들어갔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고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면 자존심 쯤은 헌신짝처럼 버리고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배우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따지기 좋아하는 힘든 Bible Student인 니고데모를 어떻게 섬기셨습니까? 예수님은 조근조근 설명해주시고 때론 책망도 하시지만 포기하거나 관계를 끊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가 영적소원을 가지고 당신께 나온 것을 귀히 여기셨습니다. 그를 아끼시고 그에게 구원의 진리를 끝까지 다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것이 기초가 되어 7,19장을 보면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영접하고 구원받은 제자가 되었습니다. 구원은 어떻게 얻을 수 있습니까? 모세가 가짜 뱀을 들었을 때 그것을 쳐다보는 사람들은 신기하게 나았습니다. 이처럼 죄인이 아닌 분이 십자가에 높이 달리실 것이고 그분을 바라볼 때 죄의 뱀에 물려 죽어가던 영혼들이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것은 사람이 구원을 얻는 것이 근본적으로 자기 노력과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이신 예수님을 바라봄으로 얻게 됨을 가르친 것입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성경의 요절과 같은 한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요한복음 3:16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기가 쉽지 않으셨습니다. 자기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어렵습니다. 예를 들면, 부모가 자식의 모든 허물을 감당하며 섬길 수 있지만 부모를 부모로 인정하지 않고 ” “라고 하는 자녀가 있다면 그런 자녀를 사랑하긴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세상이 하나님께 대해 그렇게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인데 대부분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세상을 위해 하나님은 가장 작은 것을 주기도 쉽지 않는 데 날마다 햇빛과 비를 끊이지 않고 주시더니 드디어 그의 외아들을 주셨습니다. 그의 외아들의 목숨을 주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은 참으로 초월적이며 신적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악하고 패역한 죄인이라도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인 독생자 예수님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세상을 향한 마음은 그들이 멸망하지 않고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니느웨 언덕에 앉아 어떻게든 니느웨가 망하기를 바라는 요나의 마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골고다의 언덕에서 기도하신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자신을 인정하지 않고 대적하고 모욕하는 세상이 끝내 구원받기를 간절히 원하는 마음입니다. 이것이 니고데모를 향한 주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18절을 보십시오.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를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예수님을 믿으면 미래의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또한 현재 심판에서 구원받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미래 심판을 받을 뿐 아니라 현재 심판가운데 있는 사람입니다. 포도나무에서 분리된 가지는 그 자체가 이미 심판상태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지금 당장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사랑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죄를 짓고 어두운 숲속으로 들어가 숨었습니다. 과거에 험블한 집에 살았을 때 늦은 밤에 집에 들어가 불을 켜면 재빨리 어둠속으로 숨는 것들이 보였습니다. 우리가 어둠속에 오래 살다보면 어둠을 좋아하는 본성이 생겨버립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드러나는 빛을 부담스러워하고 피합니다. 하지만 힘들어도 빛가운데 나오는 형제자매들이 있습니다. 이는 그들 속에 진리애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성령의 인도함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찌하든지 빛가운데 나오려하는 형제자매들을 귀히 여기며 사랑하고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2-36절은 세례요한의 빛의 증언자의 자세를 다시 볼 수 있습니다(1:8). 예수님도 제자들과 함께 세례 베푸시는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우리는 동종업종에서 누가 잘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긴장합니다. 세례요한의 제자도 스승에게 가서 사람들이 다 예수님에게로 가서 세례를 받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이 무엇을 잘 할 때, 그것을 삐딱하게 보고 어떻게든지 흠을 잡으려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역사를 하나님 편에서 선하게 보고 칭송했습니다. 세례요한은 자존심도 없는 듯 제자들이 적극적으로 자신이 아무것도 아님을 증거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자신은 예수님 사역이 흥왕하고 자기사역이 쇠하여 가는 것에 대해 우울해 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기뻐한다고 말했습니다. 자기에게는 신부를 취하는 신랑을 보는 신랑친구의 기쁨이 넘친다고 말했습니다.

 

요한은 오히려 사람들이 주님의 증언을 더 많이 받지 않음을 안타까워할 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참되사 구원자를 보내시겠다는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셔서 이 땅에 오셨고 그에게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고 모든 것이 그에게 있습니다. 세례요한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더 알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예수님을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영생을 보지 못합니다. 여기서 믿는 자는 순종하고 순종하는 자가 진짜 믿는 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좋고 믿지 않아도 좋은 것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도끼가 내 머리위에 항상 머물러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보이지 않은 미국의 스텔스 폭격기들이 평양상공에 항상 머물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북한 김정은은 얼마나 무섭고 불안하겠습니까? 이것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의 실존입니다.

 

 

결론입니다. 거듭남은 본질상 하나님의 원수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우리의 신분이 바뀌어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것입니다. 거듭남 이보다 본질적인 축복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거듭난 분들은 이 놀라운 축복과 특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기를 기도합니다. 또 거듭남의 진리를 힘써 전파하며, 특히 니고데모와 같은 이들을 인내로 섬겨 그들로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직 거듭나지 못한 분들은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영접함으로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들로 거듭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