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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1년 요한복음 12강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요한복음 8:21-59)2021-06-07 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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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요한복음 12강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말씀/ 요한복음 8:21-59
요절/ 요한복음 8:31,32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오늘 말씀은 진리와 자유에 관한 말씀입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이 말씀은 듣기만 해도 가슴이 설레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이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21,22절을 보십시오. “다시 이르시되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그가 말하기를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하니 그가 자결하려는가”


본문의 유대인들은 열심히 예수님을 찾아 다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행하는 놀라운 능력을 보았습니다. 병을 고치는 능력을 보았고 수많은 사람을 배불리 먹이는 능력을 보았습니다. 오늘도 그들은 이 예수님의 능력을 통해 뭔가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는 마음으로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무어라 말씀하십니까?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내가 가리니”라는 표현은 I am going away로 예수님이 무리를 영영 떠나실 것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이 말을 들은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드디어 자결을 결심하셨는가 생각했습니다.


23,2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아래에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그들은 아래에서 났고 예수님은 위에서 나셨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 속하였고 예수님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보는 이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입니다. 여름이 가까와 신록이 우거진 저 산을 보십시오. 구름을 뚫고 햇빛을 뿜는 저 푸른 하늘을 보십시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이 아름다운 세상은 참으로 창조주의 생명의 숨결이 넘쳐나는 세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들이 이 세상에 속하였으며 이 세상에서 죄 가운데 죽으리라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본문에서 예수님이 의미하신 이 세상은 무엇을 말할까요?


예수님이 말씀하신 세상은 죄와 탐욕이 지배하는 세상입니다. 창세기에서 첫 사람 아담이 범한 죄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스스로를 높여 하나님처럼 되려는 탐욕입니다. 예전에 영화로도 제작되었던 J. R. R. 톨킨의 작품 ‘반지의 제왕’이 있습니다. 내용은 사우론이라는 악한 존재가 만든 절대 반지에 관한 것입니다. 사우론은 이 절대 반지가 가진 힘을 이용하여 세상을 지배하려는 야욕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이 반지를 끼게 되면 여러가지 신비한 힘과 능력을 얻게 됩니다. 예를 들어 스스로의 모습을 감출 수 있게 됩니다. 또 사우론이 가진 힘을 빌릴 수 있게 됩니다. 주인공 프로도는 마음이 순수하여 이 절대 반지가 가진 능력을 욕심내지 않을 가장 적절한 인물로 선발되었습니다. 그에게 맡겨진 사명은 이 절대반지가 영원히 사라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 곧 절대반지가 만들어졌던 그 산을 찾아가 그 산의 용암에 반지를 던져버리는 것입니다. 골룸은 이 절대반지에 대한 무한한 욕망을 가진 자입니다. (반지를 보고 My Precious라는 하는 대사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는 절대반지를 얻기 위해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는 마지막까지 절대반지를 얻으려다 마침내 절대반지와 함께 용암에 떨어져 죽게 됩니다.


소설에서 절대반지는 스스로를 높여 하나님처럼 되려는 탐욕을 상징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그 손가락에 마귀가 끼워준 절대반지가 있습니다. 이 절대반지를 낀 인간은 반지를 벗어버리기 전에는 결코 만족함이 없습니다. 무엇을 먹어도 만족함이 없습니다. 어떤 쾌락을 누려도 만족함이 없습니다. 돈을 아무리 많이 벌어도 만족함이 없고 사람을 종부리듯 부려도 만족함이 없습니다. 그는 마치 신처럼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져야 그 때에야 비로소 만족함을 얻게 됩니다.


이런 절대반지를 낀 대표적인 인물이 아돌프 히틀러입니다. 그가 처음에 오스트리아를 합병하고 체코슬로바키아를 일부 점령하려 했을 때 유럽 열강은 1차 대전 때 잃어버렸던 영토를 회복하고 수치를 만회하려는가보다 생각했습니다. 당시 영국 수상은 어떻게든 이 히틀러와 대화를 통한 타협을 하려고 시도했습니다. 실제로 히틀러와 평화 협정을 맺고 런던 공항에서 그 협정문을 내 보이며 국민들에게 자랑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히틀러는 협정을 파기하고 체코슬로바키아 본토 전체와 연이어 폴란드를 침공했습니다. 뒤를 이어 영국 수상이 된 처칠은 처음부터 히틀러와 타협은 없다고 선을 그었습니다. 그는 국민들에게 한 연설에서 내가 여러분에게 줄 것은 땀과 눈물과 피와 희생밖에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이는 히틀러와 타협은 불가하며 그와 전쟁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결단의 선언이었습니다.


전쟁이 진행되면서 처칠의 판단은 옳은 것으로 판명났습니다. 히틀러는 독일 아리안 족 외에 다른 모든 민족은 열등한 민족이며 독일 민족이 세상을 지배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러한 생각을 숨기고 거짓으로 행했으며 점차 그 야욕을 드러냈습니다.


오늘날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크고 작은 차이는 있지만 누구나 절대반지를 낀 히틀러같은 면이 있습니다. 얼마 전 한 IT 기업의 임원은 자기가 맡은 프로젝트의 완성을 위해 사람을 종부리듯 하였습니다. 결국 그 중 한 직원이 마음의 상처와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또 한 군인은 부하 여군을 자신의 성적 욕망의 도구로 삼다가 이를 비호한 이들로 인해 그 여군 역시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 세상은 바로 이러한 탐욕과 욕망이 삶의 원동력이 되는 사람들, 그 손에 보이지 않는 탐욕의 절대반지를 끼고 있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어떻게 됩니까? 반드시 그 죄 가운데 죽게 됩니다. 이들이 죄사함받고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고 그를 믿는 것입니다.

25-27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말하되 네가 누구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 자니라 내가 너희에게 대하여 말하고 판단할 것이 많으나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매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 말하노라 하시되 그들은 아버지를 가리켜 말씀하신 줄을 깨닫지 못하더라”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그들은 “그러면 당신은 누구인가?” Who are you? 물었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내가 처음부터 내가 누구인지 말했고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됨으로 나는 그에게서 들은 것을 말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나를 보내신 이는 아버지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28-30절을 보십시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매 많은 사람이 믿더라”


예수님은 그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 알리라” 이 말씀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십자가에 죽으신 후에야 그때에 비로소 사람들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깨닫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또 예수님이 스스로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순종하여 그렇게 하셨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적으로 보면 그 누구보다 탁월한 능력과 재능을 갖고 태어나셨습니다. 마태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말씀을 보십시오. 산상수훈에 배어있는 예수님의 그 고매한 인격과 그 탁월한 사상을 보십시오.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는 이 산상수훈의 말씀에 매료되어 예수님을 자기 죄를 위해 죽으신 구세주로 믿지는 않았지만 예수님의 그 사상을 받아들여 실천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 결과 인도는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도 영국으로부터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또 예수님의 의사로의 능력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만약 의사로서 출세하려는 생각을 가지셨다면 역사에 길이 남을 명의로 기억되었을 것입니다. 또 예수님이 가진 그 위대한 교육자로서의 능력을 생각해 보십시오. 갈릴리 시골 촌부를 인류의 스승으로 키웠습니다. 예수님이 만약 교육자로서 인정받고자 하셨다면 가장 위대한 교육자로 기억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가 가진 그 모든 능력을 자기의 이름을 높이거나 자신의 뜻을 이루는데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모든 능력을 다 내려놓고 33세의 젊은 나이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유대인의 고소를 받은 후 로마 재판정에 넘겨져 사형판결을 받고 골고다 언덕에 사형틀인 십자가를 메고 가셨습니다. 그곳에서 손과 발에 못이 박힌 채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그 모든 과정에서 나는 죄가 없다 나는 억울하다 소리지르지 않으셨습니다. 그를 고소한 유대인들과 재판관 빌라도를 저주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이 모든 고통과 수치와 죽음의 과정을 묵묵히 감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양 옆에 십자가에 매달린 죄수들은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자기를 못박는 군병들을 향해, 또 빌어먹을 이 세상을 향해 원망의 말과 욕설, 저주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위해 용서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아버지, 저희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그들은 자기가 어떤 일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이런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 예수님을 바로 옆에서 목격한 한 죄수는 이 예수님이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간구하였습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예수님은 그의 간구를 받으시고 그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처형 과정을 전부 지켜 본 로마의 백부장은 그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상식적으로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그가 하신 모든 말씀은 물거품처럼 사라져야 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반대가 되었습니다. 그의 십자가의 죽음은 손에 절대반지를 끼고 탐욕과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마음에 천둥번개가 치는 것 같은 큰 충격과 놀라움을 주었습니다. 어떻게 저런 큰 능력을 가지고도 그 능력을 자기를 위해 하나도 사용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저렇게 죽을 수 있는가? 저 죽음의 의미는 무엇일까? 생각하게 하였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구약성경을 펴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구약성경을 읽어보니 그의 죽음은 이미 하나님이 예정하신 것이었고 그 죽음의 의미는 인간들이 받아야 할 죄의 심판을 대신해서 받은 것이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4-6)”


31,32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것과 그 때에 그들이 진정으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 깨닫게 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그들 중 일부가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문맥상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할 때 “내 말”은 십자가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관한 말씀을 믿고 영접한 사람은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다. 마하트마 간디는 예수님의 비폭력 정신, 산상수훈의 사상을 받아들이고 실천했으나 십자가에 관한 말씀은 믿고 받아들이지 않았으므로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가 되지 못합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그의 자세를 보고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가 아닙니다. 반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세상 그 무엇보다 그 어떤 것보다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나의 생명과 나의 구원이 이 십자가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진정한 제자입니다.


이와같이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될 때 어떻게 됩니까? 진리를 알게 됩니다. 진리란 무엇입니까? 진리는 참된 것, 진실한 것입니다. 진리의 반대는 참되지 않은 것, 진실하지 않은 것, 거짓된 것입니다. 44절에서 예수님은 자기를 거부하는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마귀는 첫 사람 아담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은 지식과 지혜를 얻게 될 것이라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오늘날 마귀의 속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 중 하나가 보이스 피싱입니다. 보이스 피싱을 당한 사람을 보면 혼이 나간 사람처럼 2시간이고 3시간이고 전화를 끊지 못하고 그 음성이 시키는대로 합니다. 요즘은 코로나 국면을 이용하여 싼 이자로 대출을 갈아타도록 도와주겠다고 속여 돈을 뜯어냅니다. 그런데 실상은 우리가 날마다 마귀로부터 보이스 피싱을 당하고 있습니다. 마귀는 날마다 우리의 마음에 전화를 겁니다. ‘그 사람이 너한테 그런 표정을 하고 그런 말을 한 것은 너를 무시하고 있기 때문이야.’ 이 마귀의 음성을 들으면 마음에 미움과 분노가 가득하게 됩니다. 또 뭔가 의미있고 가치있는 일을 하려고 마음먹으면 또 바로 마귀로부터 전화가 옵니다. ‘우선 오늘은 쉬고 내일부터 하지 그래? 오늘만 날인가, 내일도 있잖아.’


또한 마귀는 성도가 고난당할 때 그 고난을 빌미로 보이스 피싱을 시작합니다. ‘이봐 성도 OOO 군. 하나님이 정말 당신을 사랑한다고 생각해? 하나님이 당신을 정말로 사랑한다면 왜 이런 고난이 당신의 삶 가운데 있는 것이지. 이봐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잘 생각해보라고.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 왜냐고? 그건 나도 모르지. 하나님은 그냥 당신이 싫은가 봐. 하나님은 좋아하는 사람만 좋아한다고. 당신은 그냥 하나님 맘에 안들어. 생긴 것도 맘에 안 들고 하는 짓도 맘에 안들어. 하나님은 그냥 당신이 싫어!’


미국에서 있었던 한 실화가 있습니다. 한 청년이 있었는데 그는 감옥에서 수년을 보내다가 마침내 가석방이 결정되었습니다. 감옥에서 나오기 전 그는 부인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편지의 내용은 만약 자기를 받아들이고 용서할 생각이 있다면 마을 입구에 있는 참나무에 노란 손수건을 매달아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손수건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 마을을 지나 부인을 떠나겠다고 하였습니다. 마침내 청년이 탄 버스가 마을 입구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떨리는 마음으로 참나무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그 참나무는 온통 노란 손수건으로 도배가 되어 있었습니다. 부인은 혹시 남편이 보지 못하고 지나칠까 염려되어 나무의 모든 가지마다 노란 손수건을 페인트칠하듯 달아두었습니다.


청년에게 있어서 노란 손수건은 아내의 용서와 변함없는 사랑의 증거였습니다. 이처럼 십자가는 마귀의 모든 보이스 피싱과 거짓말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진실한 사랑을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중 돌아온 탕자의 비유가 있습니다. 어느날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미리 유산을 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 유산을 받은 아들은 그날로 먼 나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술집 아가씨들과 놀며 먹고 마시고 전 재산을 탕진했습니다. 그러던 중 큰 흉년이 들어 돼지치기 알바를 하게 되었습니다. 알바를 하다가 너무 배가 고파 돼지가 먹던 음식을 뺏어 먹었습니다. 그 장면을 주인에게 들켜 크게 혼이 났습니다. 이때 둘째는 아버지 집에 돌아갈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집에서 머슴이 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저 멀리 동구밖 마을 입구에 아버지가 서 계신 것이 아닙니까! 먼 거리에서 아들을 알아본 아버지는 노구를 이끌고 전속력으로 아들을 향해 달려왔습니다. 그리고 돼지똥 냄새 나는 아들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돌아온 탕자를 맞이하기 위해 마을 입구에 서 계셨던 아버지, 아들을 향해 달려와 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춘 아버지. 이 아버지의 행동들이 둘째 아들에게는 아버지의 크신 사랑의 증거가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늘 아버지의 우리를 향한 크신 사랑, 진실한 사랑, 참 사랑을 증거하는 하나님의 결정적인 행동이요, 가장 큰 증거입니다.


저의 둘째 아들 다니엘이 2주전에 군에 입대했습니다. 다니엘은 자유로운 영혼으로 지금까지 마음껏 자유롭게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5월 24일 군에 입대가 확정되었습니다. 다니엘은 군에 입대하기 전 마음껏 자유롭게 여행도 다니면서 친구들과 놀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외할아버지가 암에 걸리심으로 모든 여행을 다 취소하였습니다. 그리고 별로 놀지 못하고 군에 입대하게 되었습니다. 머리를 빡빡 깎고 군부대에 들어가는 그의 모습은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과 같았습니다. 이처럼 그는 군에 입대함으로 자유를 잃게 되었습니다.


또 직장생활하는 분들은 근무하는 동안 자유가 없습니다. 일을 잘하고 있는지 독수리같은 눈으로 지켜보고 있는 상사를 의식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면 자유가 있을까요? 예를 들어 다니엘이 군에서 전역하면 자유함이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군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대학생활하면서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지 않아도 크게 부담이 없습니다. 그러나 군을 전역하고 나면 갑자기 나이가 20대 중반이 되고 삶의 무거운 중압감이 느껴지게 됩니다. 이제 뭐를 해서 먹고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염려와 걱정이 무거운 족쇄처럼 얽어매게 됩니다.


직장을 다니는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직장을 그만두면 자유함이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굶어 죽지 않을까 하는 염려와 불안으로 인해 마치 새장에 갇힌 새같은 심정이 됩니다.


어떤 사람은 참된 자유를 얻기 위해 평생 써도 남을만큼 많은 돈을 젊은 날 벌기 원합니다. 그러나 돈을 많이 벌어도 자유함이 없습니다. 평생 돈걱정 하지 않아도 될만큼 돈이 많이 생기면 그 삶의 자리에 이전에 알지 못했던 여러 유혹들이 찾아옵니다. 아내보다 더 젊고 예쁜 이성과 즐기고 싶은 유혹, 또 미국의 어떤 거부의 실화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이상한 성도착적 유혹에 빠져 감옥에서 비참하게 삶을 마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 인생이 참 자유함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어떤 외적인 조건이나 상황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 인생이 참 자유를 느끼지 못하는 것은 죄 때문이요, 하나님의 사랑을 떠나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안에 병을 가진 사람이 우주 어디를 가든 그 병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자기 안에 죄를 가진 사람이 어떤 상황에 처하든 그는 자유함을 얻을 수 없고 죄의 노예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물을 떠난 물고기가 아무리 화려한 궁궐에 산다 해도 참 자유를 얻을 수 없고 창공을 떠난 새가 아무리 화려한 새집에 산다 해도 참 자유를 누릴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떠난 인생들은 어디를 가든 참 자유와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참 자유를 얻을 수 있는 비밀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진리입니다. 십자가 안에 모든 죄에 대한 하나님의 참된 용서가 있고, 참된 사랑이 있고 참된 자유와 행복이 있습니다.


흔히 자유는 자기 마음대로 자기 하고 싶은대로 하는 것이 자유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유가 아니라 방종입니다. 물고기가 물 밖에 나가고 싶은 욕망이요, 새가 대기를 뚫고 우주로 가고 싶은 충동입니다. 물고기가 참 자유를 오직 물 안에서만 누릴 수 있는 것처럼, 새가 참 자유를 오직 대기 안에서만 누릴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만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이 자유는 나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자유가 아닙니다. 이 자유는 사랑하는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하나님을 더 기쁘시게 하기위해 창의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자유입니다. 마치 사랑에 빠진 사람이 상대방을 기쁘게 하기 위해,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생각하고 연구하는 것을 참으로 기뻐하는 것처럼 하나님 안에서 자유를 누리를 사람은 하나님을 더욱 마음을 다해 섬기는데서 참 자유를 누립니다. 우리가 이 자유를 체험하는 자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31,32절은 십자가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을 믿은 자들에게 그 믿음을 끝까지 잘 지키도록 주신 말씀입니다. 이에 비해 33-59절은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믿지 않았거나 거부한 이들에게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은 종이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죄를 범하는 자는 죄의 종이라고 하셨습니다. 또 그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주장하지만 실상은 마귀의 자식들이며 그 증거로 예수님을 미워하고 예수님을 죽이려 한다고 하셨습니다. 진실한 아브라함의 후손은 예수님을 공경합니다. 그를 하나님이 보내신 자로 믿습니다.


결론입니다. 참된 자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참된 자유는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죄사함과 우리를 향한 사랑 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십자가 안에서 이 참된 자유를 누리는 행복을 맛보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