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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17년 누가복음 제 21 강 '다만 그의 나라를 구하라' (누가복음 12:13-34)2017-07-30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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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누가복음 제 21 강


다만 그의 나라를 구하라


말씀 / 누가복음 12:13-34

요절 / 누가복음 12:31

“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오늘 말씀은 누가복음 12장 13절부터 34절입니다. 전체를 개략적으로 보면 12장 13절부터 21절까지가 첫 파트이고, 22절부터 34절까지가 두 번째 파트입니다. 첫 파트는 ‘한 부자의 비유’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13,14절을 보면 어떤 사람이 유산 문제를 들고 예수님께 나오는데, 15절에서 예수님은 그에게 탐심을 물리치라고 하시고, 16절부터 20절까지는 그에 대한 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드십니다. 그리고 21절에서 1파트 결론으로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가 되라’고 하십니다. 두 번째 파트는 제자들의 염려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22, 23절에서 제자들에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하시고, 24절부터 28절까지 까마귀와 백합화의 예를 드십니다. 두 번째 파트의 결론적인 말씀은 31절인데, ‘다만 그의 나라를 구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전체적인 흐름입니다. 첫 파트의 키워드는 ‘탐심’이고, 둘째 파트의 키워드는 ‘염려’입니다. 이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탐심의 뿌리는 염려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항상 시대가 그러하긴 하였지만, 오늘날 특히 우리는 물질만능주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본문을 통해서 물질 문제에 대한 탐심, 생활 문제에 대한 염려를 버리고 도리어 적극적으로 그의 나라를 구하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13절을 보십시오. ‘무리 중의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무리 중에 유산 문제로 형과 다툼이 있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말합니다.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당시 랍비들은 종종 이런 문제를 맡아서 중재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다 보니 ‘아, 이분이 참 훌륭한 선생님이구나’해서 그의 유산 분쟁 문제를 들고 나온 것이었습니다. 우리나라도 요즘에 유산 분쟁 문제가 자주 나오고 있습니다. 예전에 제가 대학에 다닐 때는 이런 유산 문제가 거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저희 부모 세대는 물려줄 유산이라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6.25전쟁으로 다 파괴되고 가난하여서, 물론 일부 예외는 있었지만, 재산이라는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졸업 후 취직을 했는데, 어느 날 제 위의 선임 직원이 하는 말을 듣고 놀랐습니다. 그는 별로 열심히 일하지도 않고, 늘 택시타고 다니고, 먹고 마시고 월급 받으면 다 쓰는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그 선임이 했던 말이 있습니다. “너희들은 유산도 없니? 월급 갖고 사냐?” 저는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이런 사람이 다 있나? 유산이라는 게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는 그랬지만 요즘에는 유산 문제로 분쟁이 많습니다. 법정소송도 비일비재합니다. 본문의 이 사람도 그런 문제가 있었습니다. 율법에 명한대로 형이 3분의 2, 동생이 3분의 1을 가져야 하는데, 형이 더 가졌는지, 또는 동생이 3분의 1을 이미 받았는데 어떤 다른 이유로 더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여 요구했는데 거절당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여하튼 형이 인감도장을 갖고 있어서 그런지 어찌 방법이 없었습니다. 동생은 이 문제를 예수님께 들고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이 문제에 대해서 ‘어디, 자초지종을 한번 다 말해 보시오’하지 않으셨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우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예수님은 이 사람의 분쟁 문제 자체에 관여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유산을 조금 더 갖고 못 갖고가 중요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런 문제는 어떤 결정을 내려 주어도 당사자들은 항상 불만족하고 원망과 불평과 미움 가운데 살아갑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마음의 탐심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근본 문제를 도와주십니다. 


15절을 보십시오.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가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예수님은 이 유산 분쟁의 근본 원인이 탐심임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뿐 아니라 그들에게, 곧 거기 있는 모든 자들에게 가르치십니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삼가’란 말은 문법적으로 부사인데 ‘부디’, ‘조심하는 마음으로’라는 뜻입니다. ‘탐심을 물리치라’ 하시는데, 탐심이란 ‘더 갖고자 하는 욕심’, ‘과도한 욕심’을 말합니다. 탐심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재물에 대한 탐심, 명예에 대한 탐심, 쾌락에 대한 탐심이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재물 곧 돈에 대한 탐심을 의미합니다. 재물을 귀히 여기고 그것을 충분히 소유하고자 하는 과도한 욕구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 탐심 자체에 재물에 대한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재물을 의지하는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아, 돈만 있으면 된다. 이것이 나를 행복하게 해 주고, 이것이 나의 미래를 보장해 준다. 세상에서 이것이 최고다. 가장 중요한 것이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돈은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탐심을 갖기 쉽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대신에 재물을 믿고 섬길 때, 결국 재물을 숭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돈 신, 맘몬을 숭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골로새서 3장 5절은 ‘탐심은 우상 숭배라’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하십니다. 우리는 세상에 살면서 마음에 탐심이 들어옵니다. 왜냐면 세상의 권세 잡은 사탄이 우리 마음을 탐심으로 유혹하기 때문입니다. ‘돈이 최고야, 돈이 있으면 다 돼. 하나님을 믿지 말고 돈을 믿어’ 에덴동산에 있던 아담과 하와도 사탄이 유혹하여 타락하였습니다. 어떻게 유혹했습니까? ‘선악과? 따 먹어버려~ 그러면 너희 눈이 밝아져서 너희가 하나님과 같이 된다고!’ 이 말을 듣고, ‘와! 하나님과 같이 된다고?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을 갖는 순간에, 탐심이 하와의 마음이 확 들어왔습니다. 탐심이 들어온 마음으로 선악과를 보니, 갑자기 늘 보았던 그것이 다르게 보였습니다. 어떻게 다르게 보였습니까?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도 할 만큼 탐스러운 나무인지라.’ ‘오, 이렇게 좋은 걸 왜 아직 안 먹고 놔두었지?’ 얼른 따서 먹고 남편에게도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하십니다. 물리치라는 것은 ‘거절하라, 배척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든 탐심을 물리쳐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15절을 다시 한 번 보십시오.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않습니다. 여기서 ‘생명’은 영원한 생명을 의미합니다. 사람은 영혼의 소유자입니다. 사람의 영혼은 본래부터 영원한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은 이 세상의 육신 가운데 사는 것이 끝나면 육신과 함께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영생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영생을 얻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 영혼이, 부활의 몸을 가진 그 영혼이, 하나님과의 깊고 풍성한 사랑의 관계성 가운데 지극한 복락을 누리며 영원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한편 멸망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 영혼이 복의 근원인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완전히 단절되고 어둠과 저주와 고통 가운데 영원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영원한 생명은 소유가 넉넉한 데 달려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소유는 이 세상에서 그 영혼이 부패한 육신 가운데 살 동안, 그 영원에 비하면 찰나와 같은 짧은 기간에만, 영향을 미칠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진리에 기초한 비유를 주십니다. 16절부터 19절입니다. “또 그들에게 비유로 이르러 말하시되 한 부자가 그 밭의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아주 단순한 비유입니다. 한 부자가 있었습니다. 소출을 풍성히 얻었습니다. 부정한 방법으로 얻은 것도 아니고 남을 착취한 것도 아닙니다. 그는 열심히 일했습니다. 피를 뽑아주고 농약을 잘 뿌리고 종자를 개량해서 대풍을 이루었습니다. 이미 부자인데 더 큰 부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행복한 고민이 생겼습니다.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고민하다가 “OK! 더 큰 최신식 곳간을 짓자. 거기에 내 모든 곡식을 저장해 두고, 이참에 거기에 든든한 금고도 만들어 내 보물을 다 넣어둬야겠구나. 문을 이중 삼중으로 잠그고, 손해보험에도 다 들어둬야지”하였습니다. “하하, 역시 나는 머리가 좋아. 나는 너무 똑똑해. 이제 안심이야” 하였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자, 내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그런데 그가 하는 말을 들어 보면 좀 이상합니다. 영혼이 먹고 마십니까? 육신은 먹고 마시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나라는 존재의 주인공인 영혼은, 물질적인 것으로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그에게 하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20절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어리석은 자여!’ ‘You Fool!’ ‘이 바보야!’라는 말입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라.” 그가 왜 어리석습니까? 그는 자기 육체의 생명이 다인 줄 알았습니다. 자기의 참 주인공은 그의 영혼인데, 곡식과 재물로 그 영혼의 생명을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라’하십니다. ‘도로’ 찾는다는 게 무슨 말입니까? 영혼은 원래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영혼을 이제 다시  찾아가시겠다는 것입니다. ‘오늘 밤에 도로 찾겠다’, 무슨 말입니까? 영혼이 그의 육체에서 떠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세상에서 말하는 죽음입니다. 


어떤 기사를 보니까 일본에서는 잠자다가 아침에 일어나지 않고 죽는 사람이 한 해에 수만 명이 된다고 합니다. 과로사라고 합니다. 저도 예전에 30세 밖에 안 된 미혼 청년이 아침에 일어나지 않아서 장례를 치른 적이 있습니다. 본문의 부자는 모든 곡식과 재물을 창고에 든든히 보관하고 아무 걱정 없이 지냈습니다. ‘나같이 행복한 사람이 있나’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는 그날 밤 프랑스 보르도산 최고급 와인을 마시고 푹신한 침대에 누워 잠들었는데 그만 아침에 보니 죽었습니다. 유서도 없이 갔으니 그 남은 두 아들 사이에 유산 분쟁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아마 그 동생이 지금 나와서 예수님께 이 질문을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여하튼 그 부자는 세상에서는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성실하고 근면하고 창조적이었습니다. 투자의 귀재였습니다. 재물을 많이 모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바보였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첫째, 그는 이 세상의 육신의 삶이 전부라고 생각했습니다. 둘째, 세상에서 자기의 소유를 늘여 편히 사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했습니다. 셋째, 하나님이 부르시면 언제든지 이 세상을 떠나가야 한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넷째, 찰나와 같은 이 세상만 보는 근시안적인 사고로 영원한 미래를 준비하지 못하였습니다. 


이 비유의 결론이 무엇입니까? 21절을 보십시오.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유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그는 자기만을 위해 재물을 쌓아 두었습니다. 17절부터 19절까지 반복되는 단어는 ‘나,’ ‘내’, 이것이 여섯 번 반복됩니다. ‘내가 쌓아 둘 곳이 없도다’.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 ‘내 곡식’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그는 자기만을 위해 살았습니다. 이런 삶은 어리석은 삶이요 지혜가 없는 삶입니다. 세상은 우리로 하여금 ‘나의 행복’ ‘나의 평안’ ‘나의 무병장수’ ‘나의 즐거움’을 위해 많이 쌓아두라고 유혹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영원한 생명이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알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삶을 살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대하여 부유한 삶은 어떤 삶입니까? 디모데전서 6장 17절부터 19절은 말합니다.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삶이란 소망을 하나님께 두며 선한 사업을 하고 구제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선한 사업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하나님의 복음역사, 생명을 구원하는 사업을 말합니다. 또 구제하는 삶이라는 것은 도움이 필요한 이웃을 돕는 것입니다. 우리는 열심히 일하여 소출을 많이 내야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소출을 선한 사업과 구제에 적극적으로 사용해야 되겠습니다. 이것이 어떤 삶입니까? 자기에게 지혜로운 삶이요 자기에게 최고로 좋은 삶입니다. 


22절부터 34절은 본문의 두 번째 파트인데 첫 번째와 같은 주제입니다. 22절을 보십시오.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앞의 비유에 나오는 부자는, 부자였기 때문에 고민과 염려가 있었는데 무슨 고민이었습니까? “내가 곡식을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두 번째 비유에 나오는 제자들은 가난했기 때문에 염려가 있었습니다.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우리는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서 먹어야 하고 입어야 합니다. 이것이 부족하여 내 몸이 병들고 고통당하다가 죽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22절 끝부분을 보면 “염려하지 말라” 하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23절입니다.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니라.”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는 음식이 필요합니다. 몸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옷이 필요합니다. 당연합니다. 음식은 더 중요한 목숨을 위해 있는 것입니다. 옷은 더 중요한 몸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더 중요한 목숨과 몸을 누가 주셨습니까?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그 목숨과 몸을 유지하기 위해서 필수적인 음식과 옷을 주지 않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스마트폰을 파는 사람이 배터리를 안 끼워주겠습니까? 수박을 파는 사람이 그 무거운 수박을 들고 가는 비닐봉지나 망사 끈을 안 주겠습니까? 까마귀를 만드신 하나님이 그 까마귀가 살아갈 수 있도록 당연히 먹을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 백합화를 내신 분이 그 아름다움을 자랑하기 위해서 옷을 입히지 않으시겠느냐? 하는 것이 24절부터 28절까지의 내용입니다. 그 결론은 까마귀나 백합화보다 더 귀한 사람을 만들어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이, 사람이 살아가기에 필요한 음식과 옷을 당연히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구절을 29절에서 30절에서 다시 한 번 반복하십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 여기서 포인트는 우리 아버지 되신 하나님께서 이런 것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신다’는 것입니다. ‘아신다’, ‘주신다’ 그러므로 염려하지 말라, 근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먹을 것 입을 것 염려하지 말고 무엇을 해야 합니까? 그냥 가만히 있기만 하면 됩니까? 그런 것에 매이지 말고 우리는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고귀한 존재로서의 본분을 다해야 합니다. 그것이 31절입니다. 31절을 보십시오. “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태복음 6장 33절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되어 있고, 여기는 “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로 되어 있습니다. “다만”은 KJV에 따르면 ‘rather’, ‘도리어’라는 뜻입니다. 비슷한 뜻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먹을 것 입을 것 구하지만, 너희는 도리어, 차라리, 다만, 먼저, 오직, 그의 나라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신자들이 구해야 할 바가 무엇입니까? ‘그의 나라’입니다. 우리는 ‘나라’라고 하면 먼저 장소적 개념을 생각합니다. 이해가 됩니다. 국가 또는 나라의 3대 요소가 무엇입니까? 국민과 영토와 주권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영적인 나라로서 국민이 있습니다. 신자들이 바로 그 나라의 국민입니다. 영토가 있습니다. 영적인 영토가 있습니다. 주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권이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영토는 보이지 않는 영토, 영적인 territory입니다. 지난 화요일 아침 일용할양식 요절이 누가복음 17장 20, 21절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 라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신자들의 마음에 임하는,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입니다. 예전에 우리가 예수님을 몰랐을 때 하나님의 통치를 받지 않았습니다. 사탄의 통치를 받았습니다. 우리 안에 사탄의 나라가 이루어졌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자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되었고, 우리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각자에게 임한 것입니다. 그의 나라가 우리에게 확장된 것입니다. 따라서 그의 나라를 구하라는 것은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하나님이 왕으로 경배 받으시는 그 영적인 나라가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이루어지도록 힘쓰라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에 나오는 ‘나라가 임하시오며’와 동일한 말씀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첫째는, 나 자신의 내면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도록, 하나님이 나의 왕으로 모셔지도록 힘쓰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요, 하나님을 나의 왕으로 모셨지만, 살다 보면 죄가 다시 나를 주관할 때가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랑과 평화의 왕 예수님의 다스림보다 미움이 그 사람을 다스립니다. 분노가 그 마음을 다스립니다. 염려가 다스립니다 정욕이 그 마음을 다스리고, 탐심이 다스립니다. 그래서 마음에 기쁨을 잃고, 평강을 잃고, 생명력이 없는 삶을 삽니다. 따라서 우리는 말씀 앞에서 죄를 회개하고 새롭게 하나님을 나의 왕으로 모셔야 됩니다. 진실한 회개를 통해서 다른 왕들을 다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경배하는 삶을 사는 것, 이것이 그의 나라를 구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의 나라를 구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도와 그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도록 돕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성경을 가르치고, 기도해주고, 말씀에 순종하도록 돕고 제자양성을 하는 것입니다. 곧 목자의 삶, 성경 선생의 삶을 사는 것, 이것이 그의 나라를 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은 자신과 다른 사람의 심령에 하나님이 왕으로서 다스리도록 하는 삶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으로서의 본분이요 가장 가치 있는 삶입니다. 고귀한 삶, 보람된 삶, 참 진리의 생명의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교훈을 주시는 것은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가 가장 복된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또한 우리가 그러한 삶을 살 때 무엇을 약속하십니까? 31절 하반절입니다.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런 것들이라는 것은 목숨을 유지하기 위한 먹을 것, 입을 것뿐만 아니라, 고귀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모든 것입니다. 물질과 재능과 건강과 지혜를 다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또 다른 길이 무엇입니까? 33절을 보십시오.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둑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라”고 합니다. 우리가 열심히, 성실히 일하면 소출을 거둡니다. 소득을 얻습니다. 이것으로 무엇을 해야 됩니까?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자기의 먹을 것을 해결해야 됩니다. 누구든지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살후3:10). 자기가 일한 것으로 자기 먹을 것을 해결해야 됩니다. 둘째는, 자기 가족과 어려운 친족들을 도와야 합니다. 신자로서 이 일을 잘 감당하지 않으면 그들이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라고 말합니다(딤전5:8). 셋째는, 선한 사업 곧 하나님의 역사를 물질로 지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도 남는 것은, 하나님이 물질이 부족한 다른 사람을 도우라고 주시는 것으로 알고 구제해야 됩니다. 


구제하는 것은 어떤 것이라고 합니까? 자기를 위해 ‘낡아지지 않는 배낭’을 만드는 것입니다. 세상의 배낭은 낡아집니다. 그 속에 많이 넣었는데 나중에 보면 배낭 밑창이 뚫려서 다 흘러 버립니다. 다 없어집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의 배낭은 밑창이 뚫어지지 않습니다. 구제할 때마다 낡아지지 않는 배낭에 나의 것이 들어가 보존됩니다. 구제란 썩지 않는 보물을 자기를 위해 차곡차곡 쌓아 두는 것입니다. 저는 최근에 고린도후서 9장 9절을 암송하다가 충격을 받았습니다. “기록된 바 그가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토록 있느니라” 그의 의가 영원토록 있다! 그의 잘 한 행위가 영원히 빛난다는 것입니다. ‘아니, 물질이나 돈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데’, ‘세상 사는 동안 잠깐만 필요한 것인데’ ‘이것을 가지고 구제할 때 그의 의가 영원히 있다고? 왜 그럴까?’ 묵상을 해 보니, “아 그렇구나, 깨달았습니다.” 남에게 물질을 주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닙니다. 한번 해 보십시오. 결코 쉽지 않습니다. 이 물질을 줄 때 그 물질과 함께 그 사람의 진정한 사랑과 희생과 진심을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으로 귀한 것이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러한 것을 우리의 영원한 의로 보십니다. 이렇게 구제할 때 내 마음에도, 또 도움 받는 사람의 마음에도 아름다운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집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만들어 세상에 보내신 것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만 그의 나라를 구하도록 하심입니다. 내 자신이 회개하고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는 것, 다른 사람을 도와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도록 하는 것, 나의 소유를 팔아 구제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을 사는 자에게 하나님은 모든 필요한 것을 넉넉히 공급해 주십니다. 먹을 것 입을 것을 염려하고 구하며 세상에 부를 쌓아 놓고자 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많은 세상입니다. 이런 가운데 우리가 다만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진정으로 지혜로운 인생을 살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