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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3년 종로새봄맞이 수양회 주제1강 `그가 누구이기에 ` (마가복음 4:35-41)2023-02-20 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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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종로 봄맞이 수양회 주제1  

 

그가 누구이기에  

 

말씀 / 마가복음 4:35-41 

 

요절 / 마가복음 4:41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 

 


오늘 말씀의 제목은그가 누구이기에입니다. 이 문구는 놀라움 또는 감탄을 표현하는 문구입니다. ‘그가 누구이기에’, 이 문구는에 대해서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새로운 면모를 알게 되었음을 표현합니다

 

여기 한 비유가 있습니다. 동굴 안에 사람들이 갇혀 있습니다. 이들은 쇠사슬에 묶여서 동굴 입구 쪽이 아니라, 오직 동굴 안쪽만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동굴 안쪽의 벽에 그려지는 그림자를 보았습니다. 자신들은 진정한 것을 보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동굴 밖으로 나와서 새로운 세계를 보았습니다. 동굴 밖의 태양과 아름다운 자연을 보았습니다. 동굴 안으로 돌아와서 그들이 보았던 것이 그림자임을 깨우쳐 주었습니다. 이 비유는 우리의 인식의 한계를 인정하고, 진정한 것을 찾아야 함을 가르쳐 줍니다. “진정한 것을 찾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오늘 말씀에서는 광풍이 등장합니다. 광풍 앞에서 우리는 동굴 속의 사람들처럼 광풍의 본질을 보지 못하고, 광풍의 그림자만 보고 있지는 않은 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광풍의 본질을 깨우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광풍을 잠잠케 하신 예수님을 만남으로, 광풍을 두려워 하지 아니하고 믿음의 승리를 체험하기를 기도합니다.  

 

 

1장 광풍의 갈릴리 바다 

 

 

예수님이 갈릴리 바닷가에서 큰 무리를 가르치셨습니다(4:1) 어느 듯 저녁이 되었습니다. 고개를 들어보니 갈릴리 호수의 수면 끝에 석양이 걸려 있었습니다. 석양이 ‘bye bye~!’ 하면서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마음을 잘 아셨습니다.  

 

4:35절과 36절을 보십시오! 다같이 읽겠습니다(시작): 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하시니/ 그들이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여기서 저편으로 건너가자는 것은, 갈릴리 호수를 건너 거라사인의 땅으로 가자는 것입니다. 거리는 약 10㎞ 정도 됩니다. 갈릴리라는 단어는둥글다는 의미가 있는데, 갈릴리호수 역시 둥글게 생긴 호수입니다. 호수의 면적은 약 166㎢입니다. 이는 약 오천만평으로서, 100만평인 여의도 면적의 오십배 정도이니 가히 바다라고 할 만 합니다. 갈릴리 호수는 땅이 푹 꺼진 요르단 계곡에 위치하고 있으며, 해수면보다도 약 200여미터나 낮은 곳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갈릴리 호수에 부는 바람은 서풍과 북풍이 있습니다. 지중해로부터 불어오는 서풍은 고온건조하고, 북풍은 만년설로부터 내려오는 차가운 바람으로서, 이 두 바람이 만나면 토네이도와 같은 무서운 광풍으로 변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저편으로 건너가자는 말씀을 들었을 때, 제자들은 속으로 쾌재(快哉)를 불렀습니다. “야호! 이제 그토록 그리던 휴식이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혹시라도 예수님의 마음이 바뀌실까봐 제자들은 재빨리 움직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앉아 계신 배의 닻을 풀고서는 그대로 저편으로 냅다 내달렸습니다. 저 편에서 휴식을 즐길 생각에 그들의 마음은 시원하였고, 가슴은 뻥 뚤렸습니다. 제자들의 입으로부터는 저절로 흥겨운 노래가 흘러 나왔습니다: “내 배는 살같이 바다를 지난다 산타루치아! 산타루치아! 정 든 ~ 나라에 행복아 길어라 산타루치아! 산타루치아~!”  

 

예수님과 제자들이 타고 있는 배가 갈릴리 호수를 가로질러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였습니다: 4:37절을 보십시오! 다같이 읽겠습니다(시작):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출발할 때에는 호수가 잔잔하였고, 하늘에는 달이 방긋 웃고 있었습니다. 조용하던 그 밤에 광풍이 일어났습니다. 광풍은 헬라어로는 '라일랖스' 라고 하는데, 이는 '돌풍' 또는 '회오리 바람'을 뜻합니다. 광풍은 커다란 파도를 일으키며 배를 이리저리 뒤 흔들고, 번쩍 들어 냅다 던졌습니다. 배는 앞으로 꼬꾸라지는가 싶더니만, 다시금 뒤로 벌렁 뒤집어졌습니다. 넘실거리는 물결이 덮치더니 배를 물로 가득 채웠습니다. 물을 품은 배는 점점 무거워지고 바다 속으로 가라앉고 있었습니다

 

 

광풍을 만난 직후에는 빅마우스인 베드로가어이 형제들! 돈 워리! 걱정마! 내가 바로 이 갈릴리 호수에서 잔뼈가 굵었거든? 이 정도 광풍은 가볍게 헤쳐 나갈 수 있어!’ 하면서 뱃사람으로서의 자신감을 보였습니다. 요한도 함께 거들면서, ‘그럼 그럼! 이런 바람 정도는 쉽게 핸들링할 수 있어!’ 하면서, 돛도 내리고 배를 이리저리 능숙하게 조종하였습니다. 다른 형제들에게도어이 형제들! 겁먹지 말고, 여기 이 바가지로 물 좀 퍼내 줄래!’ 하면서 합심하여 광풍을 헤쳐나갔습니다.  

 

그러나, 이런 노력도 다시금 몰려오는 파도로 인해서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이전보다 더 크게 날뛰는 물결로 인해서 배에는 물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배는 점점 가라앉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에는 두려움이 엄습하였습니다. 갈릴리 호수 주민들로부터 평소에 들었던 물귀신이야기도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어어~! 이러다가 갈릴리 바다에서 물귀신이 될 수도 있겠구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순간 얼굴이 하얗게 변하고, 온 몸으로부터는 힘이 쫙 빠졌습니다

 

 

광풍이 휘몰아치는 세상! 갈릴리 바다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광풍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습니다. 사람도 가리지 않습니다. 그 누구에게나 닥쳐옵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사람에게 차이가 있다면 어떤 사람이 광풍을 만나보았는가, 아니면 아직은 만나보지 않았는가 뿐입니다.  

 

인생은 광풍의 연속입니다. 죽지 않는 인생이 없듯이, 광풍이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광풍은 도둑처럼 찾아옵니다. 지나 간 듯 하다가도 또 찾아옵니다. 학생들에게는 중간고사와 기말고사의 광풍이 주기적으로 찾아옵니다. 졸업을 한 후에는 취직의 광풍이 찾아옵니다. 간신히 취직을 하고 이제 살 것 같다는 희망에 부풀어 있는데, 어디선가 나타난 호랑이 상사의 광풍이 찾아옵니다. “일을 이따위로 할 것 같으면, 당장 때려치워!” 하는 불호령에 가슴이 타들어가고 잘리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의 나날이 시작됩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회사를 때려 치우고 싶지만, 먹고 살 길을 생각하니 앞이 막막합니다.  

 

마음을 졸이던 연애시절을 통과하여 결혼을 잘 했다고 생각했는데, 배우자의 시도 때도 없는잔소리 광풍도 찾아옵니다. 이제 좀 안정을 찾나 싶었는데, 반항하는 자녀의 광풍도 있습니다. 이제 자녀도 다 키우고 삶이 어느 정도 안정되는가 싶었는데, 건강검진에서 찍은 X-Ray에서 무엇인가 꺼림직한이 발견되고, 암이 의심되니 조직검사를 해보아야 한다는 건강 광풍도 찾아옵니다.  

 

광풍은 교회 안에서도 찾아옵니다. 사이좋게 지내던 동역자와의 갈등의 광풍도 찾아오고, 그동안 관계성을 맺었던 형제로부터이제 연락하지 마세요!” 라는 문자광풍도 불어옵니다.  

 

이런 외부로부터의 보이는 광풍 외에도 보이지 않는 나 혼자만 끙끙 앓는 광풍도 있습니다. 타인을 자꾸만 의식하는 광풍, 외모에 대한 열등감의 광풍, 마음이 왠지 모르게 불안하고 안절부절 못하는 광풍, 손을 씻고 또 씻는 강박의 광풍 등도 있습니다. 그 외에도 각종의 사고나 엄청난 손해와 같은 광풍 또는 지진이나 홍수와 같은 자연재해의 광풍도 있습니다.  

 

단 한 사람도 예외없이 광풍을 만납니다.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우리는 광풍 앞에서 절망하고 두려움의 종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제자들이 자신들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바로 그 순간 눈에 확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4:38절을 보십시오! 다같이 읽겠습니다(시작):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제자들이 파도와 사투를 벌이는 동안에도, 예수님께서는 배의 뒤쪽에서 베게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은 주무시는 예수님을 보고서는 말문이 막혔습니다. 다급한 소리로 예수님을 깨우면서 말했습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사실 이 정도의 광풍이라면, 보통 사람이 잠을 잘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말씀을 전하셔서, 대단히 피곤하셨습니다. 이런 광풍 속에서도 쿨쿨 주무셨습니다. 주무시는 예수님을 제자들은 다급한 목소리로 깨웠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선생님이여라고 불렀습니다. 아직까지 제자들에게는 예수님이 한 분의 훌륭하신 사람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면서 원망의 화살을 쏘았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죽어가고 있는데도 혼자서만 태평하게 주무시고 계시냐면서 원망하였습니다. 예수님이 광풍의 원인제공자도 아니고 더더구나 그들을 돌볼 의무를 부담하는 것도 아닌데도, 그들은 돌보아 주지 않는다고 예수님께 원망을 쏟아 놓았습니다.  

 

 

제자들의 모습을 통해서 광풍 앞에 선 우리 인간들의 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광풍 앞에서 우리 인간들은 후회와 원망을 쏟아내게 됩니다. “조금만 더 일찍이 출발을 했었더라면, 이런 광풍을 만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텐데!”, “하필이면 출발하려고 했을 때, 요한이 예수님께 질문을 자꾸만 해서 우리가 늦었잖아! 모든 것은 요한의 책임이야! 책임져!” 광풍 앞에서 광풍을 만나게 된 원인을 찾고, 서로에게 원망과 불평을 쏟는 것이 광풍 앞에 선 우리 인간들의 모습입니다.  

 

우리들의 마음 깊숙한 곳을 보면 지나간 광풍의 나날들에 있어서 안좋은 기억들과 그에 대한 원망과 불평 그리고 후회의 응어리들이 맺혀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 사람이 나를 잘못된 길로 인도했었어! 그 사람 때문에 나의 피같은 돈을 날렸어!”, “그 때 그 길이 아니라 저기 저 길을 선택했었어야 했었었는데~!”  

 

현대 세상은 과학기술의 발달로 더욱 더 많은 광풍들이 등장합니다. 인터넷 기술의 발달로 유비쿼터스가 가능해지자 보이스피싱이나 몰래카메라의 광풍도 증가합니다. 블록체인이라는 명목으로 가상화폐나 코인을 이용한 사기광풍이 기승을 부립니다. 자유로운 왕래수단을 통해서 바이러스광풍도 급속도로 유입됩니다. 광풍이 늘어날수록 사람들 사이에는 원망과 불평도 증가됩니다.  

 

현재적으로 우리에게는 어떤 광풍이 있습니까? 우리의 마음 깊숙한 곳에 있는 그 쓰라린 광풍으로 인해서 어떤 후회와 원망을 하고 있습니까?  

 

 

2장 광풍의 본질: 그가 누구이기에 

 

 

원망의 파도가 높아지고 있는 이 순간,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습니까? 4:39절을 보십시오! 다같이 읽겠습니다(시작):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잠잠하라 고요하라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예수님은 제자들의 말을 들으시고 일어나셔서 바람을 꾸짖으셨습니다: “바람아! 왜 이리 까불고 날뛰니? 당장 멈추지 않을래?” 바다를 향해서도 명령하셨습니다: “잠잠하라 고요하라(Quiet! Be still!).” 그러자 바다는 “Yes Sir!” 하면서 잔잔한 상태로 돌아갔습니다. 바람은 불다가 갑자기 멈추는 경우도 있지만, 바다의 물결은 운동에너지를 지니므로 자연상태에서는 갑자기 멈추는 경우는 없고 단지 서서히 잔잔하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물결의 운동에너지를 단번에 소멸시키셨습니다.  

 

 

바람과 바다를 잔잔하게 하신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습니까? 4:40절을 보십시오! 다같이 읽겠습니다(시작):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예수님은 제자들이 무서워하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리고어찌하여(Why)” 라고 하심으로 제자들에게 무서워하는 이유를 생각해 보도록 하셨습니다.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심으로 무서워하는 이유가 믿음과 연관되어 있음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번지 점프를 해 보셨습니까? 번지 점프를 하는 사람이 무서워할까요? 아마도 무서워한다면 점프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무서워하지 않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바로 몸통과 허리를 잡아주는 튼튼한 밧줄이 있기 때문입니다. 튼튼한 밧줄을 믿기 때문에 무서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기를 원하셨습니다. 그 어떤 광풍 가운데서도 예수님께서 튼튼한 밧줄이 되셔서 안전하게 잡아주시는 것을 믿기를 원하셨습니다.  

 

 

4:41절을 보십시오! 다같이 읽겠습니다(시작):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

 

 

제자들에게 광풍에 대한 무서움은 사라졌지만, 예수님에 대한 두려움 즉 경외심이 몰려 왔습니다. 제자들에게는 예수님에 대한 관심이 확 다가왔습니다: “그가 누구이기에(Who then is this)”. 제자들은 지금까지 예수님을 한 훌륭한 선생님 내지 따를만한 스승님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광풍을 통해서 예수님의 새로운 모습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예수님 그는 누구십니까? 그는 나에게 어떤 분이 되십니까? 광풍이 세차게 불어올 때 예수님은 나에게 무엇이 되십니까?  

 

 

예수님은 바람과 바다도 순종시키시는 분이십니다. 울부짖는 바람과 날뛰는 파도를 말씀으로 잠잠케 하셨습니다. 대체 누가 바람과 바다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단 말입니까? 바람이나 바다에게 무엇을 들을 귀나 있단 말입니까? 바람과 바다는 그냥 자연의 일부일 뿐입니다. 이런 바람과 바다를 말씀으로 순종시키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한 분 창조주 뿐입니다. 바람과 바다를 순종시키신 예수님은 고로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창조주로서 온 우주만물을 창조하셨고 천지만물의 질서를 주관하십니다. 이 예수님에 대해서 골로새서 1 16절은 말씀하십니다: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모든 만물이 다 예수님에 의해서 창조되었습니다. 보이는 모든 것들과 보이지 아니하는 모든 세계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권세도 예수님의 창조의 권능 하에 있습니다.   

 

창조의 주님이신 예수님은 만물들 뿐만 아니라, 구체적으로 우리 인생들의 생명도 주관하십니다. 요한복음 11 25절과 26절에서 선포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이 되십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죽어도 다시 살게 됩니다. 예수님 안에서는 죽음조차 힘을 잃습니다. 예수님 안에는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 있지 아니합니다. 이 예수님을 믿을 때 일곱 번 넘어져도 오뚜기처럼 여덟 번 다시 일어서게 됩니다.  

 

이 예수님은 이사야 43 1절로 2절에서 약속하십니다: “43: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43: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43:3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  

 

예수님은 우리 인생들의 창조주가 되셔서 끝까지 우리 인생들과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 인생들을 돌보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보호해 주십니다. 예수님 안에서는 하찮기 그지없는 참새 한마리도 예수님의 허락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 인생들을 위한 약속의 증거가 바로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보혈의 피로 자신의 약속에 대해서 인장을 찍으셨습니다. 그리고 부활을 통해서 자신의 약속에 대해서 한 번 더 보장하는 공정증서를 작성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보호하심에 대해서 확신할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은 광풍의 연속입니다. 예수님 안에 있더라도 광풍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문제의 핵심은 광풍을 만났을 때, 우리가 어떤 자세를 취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광풍 속에서 우리 인간들은 크게 두가지 자세 중 하나를 취합니다.  

 

하나는, 원망과 불평 그리고 후회의 자세입니다. “왜 하필이면 나에게 이런 광풍이 온단 말인가! !”, “누구 때문이야?” 그리고, 어떻게 하든지 광풍으로부터 벗어나고자 발버둥 칩니다. 그런데, 광풍은 마치 늪과 같아서 광풍으로부터 도망가려고 할수록 더욱 더 광풍 속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다른 하나는, 광풍을 직면하고 광풍의 본질을 파헤치는 자세입니다. “광풍이여 오라!” 하면서 광풍을 맞이하고 부닥치는 자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자세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광풍은 우리 인간들의 힘과 능력을 초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힘을 의지할 때는 결국 절망하고 원망하게 됩니다. 광풍을 직면하고 광풍의 본질을 파헤치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광풍조차 만드셨고 광풍조차 주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광풍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동굴의 비유에서 바깥으로부터 돌아온 사람이 전하려고 한 그것이 바로 광풍의 본질입니다.  

 

광풍의 본질이 무엇일까요? 광풍의 본질과 관련하여 한 예화(例話)가 있습니다: 애벌레인 누에는 뽕잎을 먹고 자라서 누에고치를 만들고, 그 속에서 번데기가 됩니다. 번데기로 있다가 나비로 변하게 됩니다. 한 생물학자가 누에고치를 관찰하고 있었습니다. 고치 안에서는 번데기가 나비가 되어 지금 막 나오려고 애를 쓰고 있었습니다. 누에고치 안에서 나비는 죽을 힘을 다해서 고치의 벽에 염기성 용액을 내뿜으면서 찢고자 하였습니다. 마침내 고치를 조금 찢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틈을 벌려서 밖으로 나오려고 무던히도 몸부림을 치고 있었습니다. 나비에게는 고치가 잘 찢어지지 않는 것이 생과 사를 가르는 광풍(狂風)이었습니다. 생물학자가 보기에 그 번데기 속의 나비가 너무나 가여웠습니다. 그래서 나비가 쉽게 나올 수 있도록 고치를 조금 찢어주었습니다. 나비를 광풍으로부터 피하도록 도와 준 것입니다. 그래서 드디어 나비가 나왔습니다. 나오긴 나왔는데 그런데 제대로 된 나비가 아니었습니다. 날개가 붙어 있긴 한데 펴지도 못하고, 제대로 기지도 못하였습니다. 어떻게 된 것일까요? 나비는 고치를 찢고 나오려고 몸부림을 치면서, 나비로서 꽃을 찾아다닐 기능과 조직이 발달됩니다. 뿐만 아닙니다. 날개에 힘을 얻어 하늘을 날 수 있게 됩니다. 한 마디로 그 두꺼운 고치를 찢고 나오기 위해 몸부림을 치는 과정을 통해서, 즉 광풍을 통해서 아름다운 나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물학자가 쉽게 나오도록 고치를 찢어버려서 몸부림을 치게 하는 광풍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 나비는 진정한 나비가 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독일 근대 최고의 문호(文豪)인 괴테는 말했습니다: “광풍이 있을 때마다 그것이 참된 인간이 되어 가는 과정임을 기억해야 한다. 광풍이 남기고 간 뒤를 보라! 광풍이 지나면 반드시 기쁨이 스며든다.”  

 

 

광풍의 본질은 우리가 번데기 안에 머물지 아니하고, 하늘을 나는 아름다운 나비가 되도록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들은 오직 광풍을 통해서만 한 차원 높은 세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오직 광풍을 통해서만, 우리 인생에는 인내와 절제와 온유과 같은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오직 광풍을 통해서만 정금과 같은 믿음을 소유하게 되고, 광풍을 헤쳐나가면서 삶의 놀라운 지혜와 마음의 평강을 얻게 됩니다.  

 

광풍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광풍으로부터 도피하려고 애를 쓰기 보다는, 광풍을 직면하고 광풍을 통해서 예수님을 체험하기를 기도합니다. 광풍의 본질을 꿰뚫고 광풍을 성령의 열매를 맺어가는 영적인 훈련의 도장으로 삼기를 기도합니다.    

 

 

저는 대학시절 친구의 소개로 성경을 공부하면서 인생이 술술 잘 풀리는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독일에서 박사학위도 취득하고 대학교수목자로서 아름다운 삶을 살았습니다. 본문의 제자처럼 흥겹게 갈릴리 바다를 순항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먹구름이 끼더니 큰 광풍이 몰려 왔습니다. 하루는 연구실에 있는데 요한나 동역자가 전화상으로 울면서 말했습니다. 심장내과의사가 진찰하더니 심장에 구멍이 난 것 같다고 하였다고 말했습니다. 동역자는 조금만 움직여도 호흡이 가빴고, 숨이 찼습니다. 진단결과 100만명 중에 한 명이 걸린다는 폐동맥고혈압으로 판명되었습니다. 인터넷을 살펴보니 길어야 2~3년 살 수 있다는 의료기사들을 읽게 되었습니다. 저는 홀아비가 되는구나 하면서 두려워 하였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눅 8 50절 말씀을 통해서 찾아 오셨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시고.” 말씀에 기초하여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아산중앙병원의 호흡기내과전문의 선생님을 허락하시고, 폐동맥고혈압을 잘 관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습니다. 20년이 지난 지금에도 요한나 동역자는 이전보다 더 건강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광풍은 하나로 끝나지 않고 또 몰려왔습니다. 저와 가까운 사람들이 저를 시기하여 거짓으로 옭아매려고 하였습니다. 거짓증거로 올무에 빠뜨리니 빠져나올 방법이 없는 듯 하였습니다. 제가 지금껏 쌓아올린 것들이 무너질 위기에 빠졌습니다. 사단은 광풍을 피하여 도망가도록 미혹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요 11:4절 말씀으로 광풍과 직면하도록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광풍 앞에서 제 삶의 근본에 대해서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을 향한 마음을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이키고자 노력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때에 광풍은 물러가고 제 심령에는 성령의 열매들이라고 할 수 있는 겸손과 인내와 절제와 같은 열매들이 생기기 시작하였습니다.  

 

최근에는 요한나 동역자의 치과이전이라는 광풍이 찾아왔습니다. 건물주로부터 소위 명도소송이 들어왔습니다. 그에 대항해서 소송을 하는 것이 심히 두려웠습니다. 이 때도 예수님은 시편 23:4절로 동행하여 주셨습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지난 날 광풍으로부터 인도하여 주신 주님께서 이 번 광풍에서도 인도하여 주심을 믿습니다. 다가오는 광풍 앞에서 두려워하기 보다는 영적인 훈련의 도장으로 삼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능력을 체험하면서 예수님을 보다 깊이 알아가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입니다: 인생은 광풍의 연속입니다. 예수님 안에서도 광풍은 불어옵니다. 우리가 광풍만을 바라보고 원망과 불평을 하기보다는, 그 뒤에서 일하시는 전능하신 예수님을 바라보기를 기도합니다. 광풍을 영적인 훈련의 도장으로 삼고, 광풍을 통해 예수님에 대한 살아있는 믿음을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