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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3년 사도행전6강 "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말하라" (사도행전 5:17-6:7)2023-04-24 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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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사도행전 제 6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말하라

 

말씀 / 사도행전 5:17-6:7

요절 / 사도행전 5:20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하매"

 

사도행전 5장 전반부에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정결케 하기 위해 그들의 목숨을 취하셨습니다. 교회가 정결케 되자 더욱 부흥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오늘 말씀을 보면 3장에 이어 2차 박해가 일어납니다. 더 많은 사도들이 투옥됩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들을 어떻게 도우십니까? 사도들에게 어떤 방향을 주십니까? 오늘 말씀을 통하여 핍박 중에서도 생명의 말씀을 다 전하기 원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말하라

17,18절입니다. "대제사장들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 즉 사두개인의 당파가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일어나서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더니" 유대의 대제사장들은 주로 사두개파 사람들이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 즉 사두개인의 당파가 초대교회의 부흥을 보면서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시기'라는 말은 원어로 "젤루"인데 "경쟁심" 또는 "열심"으로도 번역이 되는 말입니다. 그들은 자기 종파에 대한 열심으로 경쟁심이 충만했고 시기가 가득하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열심을 하나님께 대한 열심으로 생각했습니다. 한때 사도 바울도 그랬습니다. 특심한 열심으로 기독교인들은 체포하여 감옥에 넣으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여겼습니다. (16:2) 열심이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를 섬길 때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우리가 섬기는 사람들의 구원과 영적 성숙을 위해 열심을 내어야겠습니다.

 

2,3절을 보면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사도들을 잡아 옥에 가두었습니다. 지난 1차 박해 때에는 베드로와 요한을 투옥했는데 이번에는 더 많은 사도들을 체포한 것입니다. (5:29) 교회가 성장할수록 박해가 심해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19,20절입니다. "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끌어내어 이르되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하매" 주의 사자, 곧 천사가 밤에 옥문을 열었습니다. 사도들을 끌어냈습니다. 천사는 그들에게 무엇이라 말합니까?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첫째, 천사는 그들에게 그간 고난을 받았으니 이제 안전한 곳으로 피하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당신들이 없으면 온 교회가 무너지니 자신들의 목숨을 잘 지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가서 성전에 서라고 하였습니다. 성전은 종교자도자들과 그의 추종자들이 있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이는 한 마디로 호랑이 굴로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어디 한 구석에 숨어서가 아닙니다. 도망갈 길을 만들어 놓고 종교경찰이 나타나면 신속히 피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성전 한 가운데 서서 말씀을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사도들에게 안전을 약속하지 않으신 것을 통해 배우는 바가 있습니다. 보통 이런 경우 신자들은 사도들이 아무런 해를 받지 않도록 기도합니다. ", 제발 우리 베드로 사도를 지켜주세요." "감옥에서 무사히 나오게 해 주세요" 그런데 앞의 4:29에도 보면 초대교회 성도들은 자기들의 안전을 위해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위협 가운데서도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해주시길 기도했습니다. (4:29)

 

이 부분에서 존 칼빈은 말하기를 "복음전파자들은 자기들의 안전과 평화를 위해 기도하면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위험 자체를 무모하게 부딪치라는 말은 아닙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시기를 "이 동네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10:23) 하셨습니다. 12:17을 보면, 베드로도 감옥에서 나와 형제들을 만난 후 떠나 다른 곳으로 피신한 일이 있습니다. 우리는 직접적인 위험 앞에서는 피하여 생명을 지켜야 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나님의 중요한 선교자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생명이 오가는 큰 위협도 아닌데 지레 겁을 먹고 위축돼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전도자에 대한 박해는 언제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한번 심하게 박해를 받으면 마치 그것을 훈장 받은 것으로 생각하고 이제부터는 한 발자국 물러나 있으려고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사도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방향이 무엇입니까? 그간 감옥에 갇히기까지 고생하였으니 이제 안전한 곳에 가서 쉬라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체포될 것을 각오하고 성전에 서서 말씀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도자가 안전을 첫 번째 것으로 삼기 원하지 않으십니다. 도리어 본문 후반부에 보면, 하나님은 사도들이 다시 투옥되는 것을 허락하십니다. 사형을 받을 위기에 처하게 하십니다. 그들은 채찍질을 당하고서야 풀려납니다. 그리고 장차 요한을 제외한 모든 사도들은 죽임을 당합니다. 하나님은 사도들에게 세상에서의 안전과 보호를 주지 않으신 것입니다. 전도자가 자기의 안전을 우선하면 복음을 전하기 어려운 100가지 이유가 생깁니다. 이런 저런 이유가 전도자의 복음전파 의지를 죽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8:35) 자기 목숨을 잃기까지 말씀을 전하기 원하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다시 한 번 20절을 봅시다.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하매" 그들이 전해야 되는 말씀이 "생명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이 생명의 말씀이란 영어로 "the message of this new life"입니다. "새 생명의 말씀"입니다. 무엇이 새 생명입니까? 이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받게 되는 영적인 생명입니다. 세상에서 사람들이 갖고 있는 생명은 육신의 생명입니다. 곧 목숨입니다. 숨이 끊어지면 없어지는 생명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목숨을 전부라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의 육신의 생명이 전부가 아닙니다. 영적인 생명이 있습니다. 육신의 생명은 잠시이지만 새 생명은 영원합니다. 우리는 이 새 생명을 얻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새 생명을 어떻게 얻을 수가 있습니까? 이 부활의 새 생명을 얻는 데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만 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생명을 주는 말씀을 다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봄학기를 맞이하여 열심히 양들을 피싱합니다. 우리가 왜 그렇게 하는 것입니까? 양들의 생명을 위함입니다. 새 생명을 얻게 해주는 말씀을 전해주기 위함입니다. 실로 캠퍼스 양들이 새 생명을 얻느냐 영벌에 처하느냐가 복음을 전하는 우리들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생명을 주는 말씀을 다 말해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전해도 안 들어요!" "거절해요. 투명인간 취급해요." 그러나 우리는 말씀을 전할 뿐입니다. 사람들이 받아들이든지 안 받아들이든지 그것은 궁극적으로 그들의 책임입니다. 우리의 책임은 최선을 다해 전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에스겔 선지자에게도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말씀을 전하는데 듣지 않아 사람들이 멸망하면 이는 그들 자신들의 책임이며 에스겔은 그에 대한 책임이 없으나 말씀을 전파하지 않아서, 즉 그들이 복음을 몰라서 죽으면 그에 대한 피 값을 에스겔에게 찾겠다고 하셨습니다. (33:7-9) 우리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듣지 못하여 죽은 자들에 대한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는 엄중한 말씀인 것입니다.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이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에게도 주시는 절대적인 사명입니다. 우리의 싸움은 사탄과의 영적 전쟁입니다. 생명 구원역사는 결코 쉽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사업을 하며 남의 주머니에 있는 돈을 빼앗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물며 사탄의 손아귀에 있는 생명을 뺏어 오는 일은 얼마나 더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사탄과 치열한 싸움을 거쳐서 한 사람씩 한 사람씩 뺏어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물론 가능한 지혜롭게 복음을 전해야 하지만 지혜라는 말로 우리의 복음 전파의 사기가 꺾여서는 안 됩니다. 어떤 환경 가운데서도 '이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일은 결코 중단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도들은 주의 말씀에 순종하여 새벽에 성전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우리도 말씀에 순종하여 우리의 성전인 캠퍼스로 올라가기를 기도합니다. 그곳에 서서 이번 봄학기에 열심히 양들을 1:1 에 초청하여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말하기를 기도합니다.

 

2. 능욕 받는 일을 기뻐한 사도들

21절을 보면 종교지도자들은 공회를 소집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을 옥에서 끌고 오라고 합니다. 그런데 감옥 안에 사도들은 없었습니다. 옥은 든든히 잠겨 있고 경비병들도 그대로 서 있었는데 감옥 안에 든 사람들만 감쪽같이 사라졌습니다. 그들은 성전에 서서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을 다시 체포하였습니다. 공회 앞에 세웠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사도들에게 두 가지의 죄를 씌웠습니다. 첫째는, 그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는 공회의 결정을 따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예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자기들에게 돌린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사도들이 대답이 무엇입니까? 29절입니다.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말은 너무나 당연한 말입니다. 그렇지만 그 상황에서 이렇게 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공회원들이 어떤 사람입니까? 그들은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얼마 전에도 예수님에게 사형 언도를 내려 죽게 하였습니다. 공회원들을 거스르면 바로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사도들은 하나님께 순종하겠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들은 육신만을 죽이는 종교지도자들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죽인 후에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였습니다. (12:5) 그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어 회개함과 죄사함을 얻으라고 도전하였습니다.

 

33절을 보면 공회원들은 자기들의 죄를 책망하는 이들 앞에 크게 노했습니다. 당장 없이 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때 가말리엘이라는 존경받는 율법교사가 공회원들에게 말합니다. 사도들의 행위가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면 예전의 드다와 유다의 경우처럼 스스로 무너질 것이나 만일 하나님으로 말미암았으면 막을 수 없다고 설득하였습니다. 잘못하면 공회가 하나님을 대적하게 되니 이 일을 하나님께 맡기자는 것이었습니다. 공회원들은 그의 말을 옳게 여겼습니다. 가말리엘의 제안을 받아들인 공회는 마땅히 사도들은 잘 풀어주어야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도들을 채찍질하였습니다. 가죽으로 된 그 당시의 채찍은 한 대만 맞아도 살이 찢어지는 고통이 따랐습니다. 사도들은 채찍에 맞아 온 몸이 퉁퉁 부어올랐을 것입니다. 걸음도 제대로 못 걸었을 것입니다. 공회는 사도들에게 "다시는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풀어주었습니다.

 

이때 사도들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41절입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그들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채찍에 맞았다고 힘들어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가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원수들을 당장 멸하시도록 기도하지도 않았습니다. 온 몸이 멍들고 쑤시는데도 기뻐하였습니다. 무엇을 기뻐하였습니까?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비천한 자기들을 예수님의 제자요 동역자들로 삼아주신 것을 기뻐한 것입니다. ", 나 같은 자를 예수님의 사람으로 여겨주시고 예수님이 받으셨던 이런 취급을 동일하게 받게 하시다니! 이 은혜가 얼마나 큰가!" 하며 감격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벧전4:13,14)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고난은 영광스런 고난입니다.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의 빚을 조금이라도 갚을 수 있게 된 것이니 감사할 따름 아닙니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5:11-12)

 

우리는 주기철 목사님에 대한 일화를 잘 압니다. 그의 위대한 생애 뒤에는 그의 아내 오정모 사모의 동역이 있었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이 몇 달간 감옥살이를 하고 가석방이 되었을 때 감옥을 나온 남편에게 한 첫 마디는 이것이었습니다. "감옥에서 승리하셨나요?" 그리고 두 번째 한 말은 "다시 감옥에 갈 준비를 하세요"였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이 마지막 감옥살이를 4년 정도 하셨을 때 일본경찰은 그가 몸이 극도로 쇠약해서 돌아가실 것 같으니 오정모 사모에게 통지하여 주기철 목사님을 모시고 나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오정모 사모는 주기철 목사님을 면회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머니와 아이들은 내가 책임질 테니 목사님은 순교하세요. 목사님이 순교하셔야 한국교회가 삽니다" 해방의 새벽이 가까워질수록 일제의 탄압은 극심해졌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해방을 일 년 앞둔 44 4 21일 순교하셨습니다. 오정모 사모는 최후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한 남편을 지켜준 버팀목이었습니다. 주기철, 그는 많은 교회들이 신앙을 저버렸던 때에 하나님의 명예와 한국 교회의 자존심을 지킨 인물이었습니다. 이러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은 영적인 부흥을 갈망하는 우리 모두에게 깊은 울림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지난주에는 목포 앞 신안군 증도에서 스탭 수양회가 있었습니다. 그곳은 문준경 전도사님이 사역했던 곳입니다. 그녀는 1891 2월 태어나 17살 때인 1908 3월 결혼했지만 소박을 맞았습니다. 남편이 첩을 두고 살며 본처인 자기를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외딴 섬 증도에서 20여 년을 시부모를 모시며 살며 많은 슬픔과 고난을 겪었습니다. 36세 늦은 나이에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신안군의 1004개의 섬을 순회하며 전도하였습니다. 그 당시 여인의 몸으로 온갖 미신으로 가득 찬 섬사람들을 전도한다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온갖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고난을 기쁨으로 여겨 감당하며 증동리교회를 중심으로 진리교회와 대초리교회 등 여러 교회들을 설립했습니다. 여러 섬들을 왕래하느라 1년에 아홉 켤레나 고무신을 바꾸어 신었습니다.

 

1943년에 그는 신사참배를 거부해 목포경찰서에 끌려가 고문을 당했습니다. 6.25전쟁 중에는 섬 전체를 인민군이 장악하게 되었는데 목포인민위원회에 끌려갔습니다. 그는 풀려나서 증도보다 안전한 폭포에 머무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돌보고 있던 양들이 걱정이 되었습니다. 이성봉 목사 등 많은 사람들의 만류를 무릅쓰고 죽음의 위협을 알고도 증도로 돌아왔습니다. 그녀는 증도에서 공산 좌익 청년들에게 사로 잡혔고 1950 10 5일 학살당했습니다. 그녀의 영향력은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증도뿐만 아니라 미신으로 가득했던 많은 신안섬 수많은 주민들이 기독교인들이 되었습니다. 증도 일대의 주민들은 70%가 넘는 인구가 크리스천들입니다. CCC 한국 총재였던 김준곤 목사, 우리나라 성결교회 총회장이었던 이만신 목사 등 수 없이 많은 목회자들이 그녀의 제자들입니다. 그녀는 실로 핍박 뿐 아니라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은 전도자였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주기철, 오정모, 문준경 같은 선진들의 믿음을 이어 받기를 기도합니다.

 

공회에서 풀려난 사도들은 무엇을 했습니까? 42절입니다.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 사도들은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쉬지 않고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들에게는 방학이 없었습니다. 핍박이나 어려움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생명의 말씀을 모르고 죽어가는 영혼들을 생각할 때마다 가만히 앉아있을 수 없었습니다. 가슴이 뜨거워지고 목자의 심정으로 타올라서 날마다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고 전도하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바울도 같은 심정으로 전도에 힘썼습니다. 그는 젊은 종 디모데에게 명했습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딤전 4:2)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라는 말은 장소와 때를 가리지 말고 항상 복음 전파에 힘쓰라는 말입니다. 집에서나 직장에서나,  좋은 때나 어려운 때나 항상 전도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뿌린 말씀의 씨앗이 당장 열매가 맺히는 것은 아닙니다. 3개월 후에 맺힐 수도 있고 3년 후에 맺힐 수도 있습니다. 30년 후에 맺힐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떠난 후에 열매가 맺힐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우리가 전하는 말씀은 생명의 말씀입니다. 생명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에 뿌려지면 언젠가 싹이 트고 자랍니다. 때가 되면 열매를 맺습니다. ( 55:10,11) 그러므로 내가 당장 열매를 거두지 못하더라도 조금도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계속해서 복음의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열매를 이 땅에서는 우리가 볼 수도 있고 못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수고를 하나도 헛되이 여기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우리의 모든 수고를 위로해주실 것입니다.

 

3.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6:1절입니다.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 교회 공동체에서의 매일의 식량 배급에 헬라파 과부들이 더러는 누락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자 원망이 생겼습니다. 사실 만 명이 넘는 교회에서 일부분의 사람들이 구제에 빠지는 일은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문제였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계기가 되어 헬라파 유대인들과 히브리파 유대인 사이에 잠재되어 있던 갈등이 커지게 된 것이었습니다.

 

이에 사도들은 어떤 방향을 잡았습니까? 사도들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도록 하였습니다. 접대하는 일을 맡을 사람, 곧 집사의 자격을 두 가지로 제시했습니다. 첫째는,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입니다. 집사라고 일만 하는 것이니 재능과 은사만 있다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영적으로 성숙해야 합니다. 교회 일은 실무적인 일같이 보여도 모두 영적인 일들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믿음으로 섬기며 이웃을 사랑하는 영적 스피릿이 모든 일에 기본입니다. 또한 지혜가 충만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은 행정 처리 등의 실천적인 지혜가 있는 사람입니다. 둘째, 성도들에게 칭찬 듣는 사람입니다. , 평판이 좋은 사람입니다. 신앙과 인격에 있어서 모든 성도들에게 좋은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입니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고 성도들에게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면 그들에게 접대하는 일을 맡기겠다고 했습니다.

 

한편 사도들은 무엇에 힘쓰겠다고 합니까? 4절입니다.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은 떼어놓을 수가 없습니다. 기도 없이 말씀 사역을 할 수 없습니다. 사도들은 그 동안 많은 잡무로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은 것이 마땅하지 않음을 깨달았습니다. 물론 가난한 과부들을 구제하는 일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교회가 감당해야 할 중점적인 사역은 아닙니다. 사도들이 가장 힘써야 할 사명은 구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사역입니다. 사도들이 일곱 집사를 세운 목적은 구제하는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말씀사역에 전념하기 위한 것입니다. 스텝목자와 평신도 지도자들의 관계는 협동하는 관계요 상호 보완적인 관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서로의 부족함을 보충해주고 연약한 부분을 감당해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5,6절입니다.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일곱 사람의 이름은 모두 헬라식 이름입니다. 이들이 모두 헬라파 유대인들이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사도들은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안수하였습니다. 안수한 것은 그 직분을 잘 감당하도록 능력과 지혜를 주실 것을 믿고 하나님께 의탁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였을 때 어떻게 되었습니까? 7절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였습니다. 왕성했다는 말은 '퍼지다' (spread), '증가하다'(increase)는 뜻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라는 것입니다. 말씀 자체가 퍼지고 증가되었습니다. 물론 그 일에 사람을 쓰셨지만 실제적으로 퍼지고 증가한 주체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은 살아있습니다. 운동력이 있습니다. (4:12) 말씀은 잠든 영혼을 깨어 일으킵니다. 어둠 가운데 있는 자에게 빛을 비춥니다. 그들을 끌어냅니다. 거듭나게 합니다. 새 사람이 되게 합니다. 우리는 좋은 언변으로 사람을 설득하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이 살아있음을 믿고 전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 교회를 계속 자라게 하셨습니다.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졌습니다. 심지어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부흥하는 비결은 하나님의 말씀이 왕성한 데 있습니다. 바울의 두란노 서원으로 시작한 아시아 복음 역사도 하나님의 말씀이 왕성하여 세력을 얻었기 때문임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교회가 부흥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이 왕성한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를 위해서 말씀을 맡은 종들을 위해서 열심히 기도지원을 해 주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의 심령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받고 흡수하여 양분으로 섭취하는 마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마음에 심겨진 말씀은 30, 60 100배의 결실을 합니다. 우리에게 이런 은혜가 임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전하는 말씀은 생명의 말씀입니다. 받아들이고 믿는 자에게 영원한 새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안위를 생각하기보다 죽어가는 양들에 대한 절박한 마음, 긴박한 마음으로 이 생명의 말씀을 담대하게 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 우리가 고난을 받을 때 이를 큰 축복으로 여기고 기쁨으로 전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공동체 가운데 말씀이 왕성하기를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