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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3년 사도행전8강 "전도자 빌립" (사도행전 8:1-40)2023-05-08 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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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사도행전 제 8

 

전도자 빌립         

 

말씀 / 사도행전 8:1-40

요절 / 사도행전 8:5,6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르더라" 

 

사도행전 7장의 중심인물은 스데반이고 8장은 빌립입니다. 그리고 9장은 사울, 10장은 베드로입니다. 지난 장에서 스데반은 공회에서 변증한 후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는 기독교 역사의 첫 순교자였습니다. 예루살렘공회는 그의 순교를 계기로 대대적인 박해를 시작합니다. 이에 신자들이 피하여 뿔뿔이 흩어집니다. 오늘 본문은 그 흩어진 사람들 중에 빌립 집사가 성령께 쓰임 받은 사건에 대해 말합니다. 빌립은 두 가지 역사적인 일에 쓰임 받습니다. 하나는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복음을 전하여 아프리카 선교의 물꼬를 튼 것입니다. 본문을 통하여 성령의 인도하심에 민감하게 순종하는 준비된 성경선생 빌립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사울의 박해와 흩어진 성도들

1절입니다.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스데반이 죽임 당한 그날 예루살렘 교회에 큰 박해가 있었습니다. 공회원들은 스데반이 자기들의 그리스도를 죽인 죄를 지적하고 회개를 촉구한 것에 분노하였습니다. 이에 예수 믿는 자들을 박멸하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박해로 인해 사도들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졌습니다. 성도들은 다 피하도록 하였지만 사도들은 스데반과 같이 순교할 각오로 예루살렘교회를 지키고자 남았습니다. 이러한 대대적인 박해에 앞장 선 자가 있었는데 그는 사울이라는 청년이었습니다.

 

그가 어느 정도의 열심으로 박해했습니까? 3절입니다.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잔멸하다는 말은 멧돼지가 포도원을 짓밟는 것처럼 난폭하고 잔인하게 파괴한다는 말입니다( 80:13). 사울은 기독교인들을 닥치는 대로 체포하여 투옥시켰습니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았습니다. 신자라고 알려진 각 집에 들어가 가택수색을 하여 성도들을 끌어내었습니다. 

 

그가 이와 같이 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의 잘못된 열심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원래 열심이 특심한 바리새인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지키는데 대단한 열심이 있었는데 사울은 그 중에서도 더욱 그러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의 열심은 올바른 지식에 기초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 대해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23:1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그들은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닐 정도로 열심이었습니다. 요즘 말로는 피싱하기 위해 비행기를 타고서라도 양들을 찾아간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그런 열심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열심은 하나님을 섬기는 열심이 아니었습니다. 자기들의 교세를 키우려는 열심이었던 것입니다.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한 열심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결국 엇나간 것입니다. 율법주의 신앙은 반드시 자기 의를 낳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섬기게 됩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하려다가 결국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게 됩니다.

 

우리는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배워야 합니다. 또한 영적으로 성숙한 다른 목자님들의 지적이나 책망에도 귀를 기울이며 자기를 가르치기에 힘써야합니다. 특히 성경을 공부할 때 우리는 성경이 다른 사람의 죄 문제를 말하는 것으로만 보기 쉽습니다. 나 자신은 관계없는 말이나 사건으로 생각합니다. ", 저 베드로를 좀 봐!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다니 저렇게 형편없는 사람이 있나!" ", 도마, 참 의심이 많은 사람이네!" 우리가 이렇게만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성경의 모든 기록은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 회개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늘 말씀을 겸손한 마음으로 배우는 가운데 먼저 자신을 돌아보며 올바른 지식에 기초한 특심한 열심을 소유한 종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2. 빌립의 사마리아 전도

4절을 보면 흩어진 성도들은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들은 고향이 잃고 떠돌아다니는 것을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이 모든 일에 하나님의 선한 뜻이 있음을 믿었습니다. 그런 사람들 중에 일곱 집사 중의 하나인 빌립이 있었습니다. 스데반 다음으로 그의 이름이 나왔던 것을 볼 때 스데반 집사와 가까운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스데반의 장례를 치르며 죽음이 현실임을 절감하였을 것입니다. 이런 그가 사마리아로 내려갔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과거에 앗수르 제국은 북이스라엘의 수도였던 사마리아에 살던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앗수르로, 또한 앗수르 사람들을 사마리아로 이주시켜 혼혈정책을 썼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는 가장 이방화가 된 곳이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은 BC 4세기에 그리심 산에 성전을 짓고 모세 오경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따르는 사마리아 정교를 만들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런 그들을 멸시하고 상종치 않았습니다. 당연히 그곳은 유대인들이 가기를 꺼려하는 곳이었습니다. 기독교인들에 대한 박해가 없었다면 빌립도 그곳에 갈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빌립은 그곳으로 피하게 되면서 그 모든 일을 하나님의 주권 편에서 바라보았습니다. 그는 사마리아인들에게 가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와 함께 하사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셨습니다. 빌립은 사람들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을 쫓아냈습니다. 많은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을 낫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표적과 함께 복음을 전함으로 많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믿었습니다. 영육간에 나음을 받고 자유를 얻음으로 인해 그 성에 큰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삶을 살게 된 기쁨이 넘쳤습니다. 복음이 들어가는 곳에는 기쁨이 생깁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기쁨을 추구합니다. 세상이 주는 기쁨과 쾌락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절대로 세상에서 주는 기쁨으로 만족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복음을 통해서만 참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존재,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성에서만 만족을 누릴 수 있는 영혼의 존재입니다.

 

반면에 복음이 들어가지 않은 곳의 사람들은 무엇인가에 속아서 살아갑니다. 여기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사마리아 성에도 그런 일이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 속이는 자는 시몬이었습니다. 9,10절을 보면 그는 마술사였습니다. 여기서 마술사는 트릭으로 사람들의 눈을 속이는 기술을 가진 자를 말합니다. 그는 아마 단순한 눈속임을 넘어서 귀신의 힘을 빌어 어느 정도의 영력을 발휘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여하튼 그는 마술을 행하여 사마리아 백성을 놀라게 하며 자칭 큰 자라고 했습니다. 그런 일을 오랫동안 해왔습니다. 진리의 복음이 없는 어두운 세계에서 목자 노릇을 하였습니다. 그 성에 있는 낮은 자나 높은 자나 다 그를 추종하였습니다.

 

최근에 우리나라의 JMS 교주가 얼마나 사람들을 착취하였는지 듣고 있습니다. 우리는 신천지나 그 외 여러 이단 교주들을 따르는 사람들을 볼 때 이해가 잘 안됩니다. 그러나 이는 실제입니다. 사람들은 겉으로는 똑똑한 것 같아도 잘 속습니다. 속이는 영이 있기 때문입니다. 고후4:3,4a는 말합니다.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이 세상의 신'이 있습니다. 공동번역은 '이 세상의 악신'이라고 말합니다. 악신, 악령이 존재합니다. 미혹의 영입니다. 이러한 영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고 이단의 속임수에 넘어가게 합니다. 시몬은 자기가 속임수를 쓰고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런 그가 진짜를 만났습니다. 빌립은 자기와 달랐습니다. 빌립이 행하는 표적과 큰 능력은 실제로 일어나는 능력이었습니다. 복음을 영접한 사람들의 변화는 놀라웠습니다. 그래서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다녔습니다. 그러나 시몬의 믿음은 진정한 믿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다만 빌립이 행하는 표적과 큰 능력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한편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은 사마리아 사람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습니다. 예전 같았으면 "아니, 도대체 누가 저 이방의 사마리아에 가서 그런 일을 하였는가?" 하며 비난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사도들도 이방선교에 대해 어느 정도 열린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수사도들인 베드로와 요한을 사마리아에 보내어 그 역사를 확인해 보도록 하였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에 내려가 보니 정말로 그들이 복음을 영접한 것이었습니다. 사도들은 이 놀라운 일이 평신도인 빌립에 의해 일어난 것으로 보고 폄훼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로 인정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사마리아 사람들을 보니 아직 성령을 받지는 않았습니다. 이에 그들이 성령을 받도록 안수 기도하였습니다. 초대교회 시기에는 성령을 받은 증거가 오순절 때처럼 뚜렷이 나타났습니다.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였을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성령을 받은 사건은 시몬에게는 신기한 일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돈을 줄 테니 자기가 안수하는 사람마다 성령을 받도록 해 달라고 거래를 하고자 하였습니다. 시몬은 그런 식으로 살아온 자였습니다. 그는 애굽에서 많은 돈을 주고 마술을 배웠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요즘도 수준 높은 마술은 한 가지 전수해주는데 몇 백만 원씩 한다고 합니다. 시몬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선물을 돈으로 사려고 했습니다. 영어로 시모니즘 (Simonism) 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돈으로 성직(聖職)을 사고파는 것, 성직매매를 말합니다. 타락한 시대에 그러한 일들이 종종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런 시몬을 심히 책망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그는 베드로의 책망 앞에 끝내 회개하지 않고, 로마에서 이단인 시몬교를 창설하여 교주가 되었습니다.

 

25절입니다. "두 사도가 주의 말씀을 증언하여 말한 후 예루살렘으로 돌아갈새 사마리아인의 여러 마을에서 복음을 전하니라" 두 사도는 사마리아 역사를 확인한 후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면서 사마리아인의 여러 마을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마리아 교회를 도우면서 사도들의 마음 문도 활짝 열렸습니다. 일찍이 사마리아 수가성에서 한 여인을 겸손히 섬기시던 예수님의 마음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시작하신 사마리아 선교가 빌립으로 인해 본격화되고 사도들로 인해 복음이 더욱 많은 지역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3. 성령께 민감하게 순종한 빌립

26절입니다.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말하여 이르되 일어나서 남쪽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 가사는 블레셋 다섯 성읍 중 제일 남쪽에 있는 성입니다. 삼손이 성문을 뜯어내어 메고 나갔던 도성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가사까지 가는 길은 광야 길이었습니다. 그 길은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현재 사마리아에서 왕성하게 복음 역사를 섬기고 있는 빌립에게 그곳으로 가라 하십니다. 이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방향이었습니다. 그러나 빌립은 이 명령에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믿고 즉각 순종하였습니다.

 

에루살렘에서 가사까지는 약 100Km 입니다. 족히 이틀은 걸어갔을 것입니다. 그곳에 가보니 누구를 만나게 되었습니까? 27,28절입니다. "일어나 가서 보니 에티오피아 사람 곧 에티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관리인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는데 수레를 타고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더라" 에티오피아라는 말은 '검은 피부'라는 뜻입니다. 애굽 남쪽에 있는 나라로서 한 때는 애굽까지 지배한 나라였습니다( 11:11). 에티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관리인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는 왕실과 국가의 재정을 관리하는 최고 책임자로 오늘날 기재부장관이었습니다. 에티오피아는 시바 여왕이 솔로몬을 방문한 이래 유대교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내시는 그런 배경 속에서 유대교를 알게 되었고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내시였기 때문에 성전에 들어갈 수는 없었습니다( 23:1).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0Km 가 넘는 머나먼 길을 와서 예배를 드리고 고국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그가 수레를 타고 가면서 무엇을 했습니까?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고 있었습니다. 승용차를 타고 포장도로를 달리면서 책을 읽으려고 해도 힘듭니다. 그런데 수레를 타고 덜커덩거리는 비포장도로를 가면서 책을 읽는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진리의 말씀을 사모하여 수레 위에서 성경을 소리 내어 읽고 있었습니다. 이 때 성령께서 빌립에게 무슨 명령을 하셨습니까? 29,30절을 보면 빌립에게 그 수레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셨습니다. 빌립은 매우 적극적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였습니다. 빌립은 수레로 달려갔습니다. 수레 위에서 책 읽는 소리가 들리는 데 익숙한 내용, 이사야 53장이었습니다. 빌립은 그에게 물었습니다. "읽는 것을 깨닫느냐?" 빌립은 그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두려움이 없이 담대하게 다가갔습니다. 이는 성령이 충만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빌립은 또한 지혜로웠습니다. 그가 읽는 책에 대한 대화로 시작하여 자연스럽게 그와 관계성을 시도하였습니다. 전도하는 것도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도 일찍이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전도하러 보내시면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고, '뱀 같이 지혜롭게' 전도하라고 하셨습니다. 담대함과 지혜를 동시에 주문하셨습니다. 우리가 담대한데 지혜롭지 못하다면 우리의 무례함 때문에 사람들은 마음을 닫아 버립니다. 반대로 지혜로운데 담대함이 없다면 전도를 생각만하고 입도 열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담대함과 지혜로움으로 전도를 준비할 필요가 있습니다.

 

내시의 대답이 어떠합니까? 31절입니다. "대답하되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냐 하고 빌립을 청하여 수레에 올라 같이 앉으라 하니라" 그는 성경을 읽어도 무슨 뜻인지 명확하게 깨달을 수 없었습니다. 성경을 가르쳐줄 성경선생이 필요함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빌립이 "읽는 것을 깨달으십니까?"라고 물으니 그를 성경선생으로 초청하였습니다. 그는 고위직 관리이지만 성경선생으로부터 말씀을 깨달아 알고자 하는 열망이 가득하였습니다. 겸손히 배우고자 했습니다.

 

내시는 이사야 53 7,8절 부분에서, 선지자가 말하는 그 사람, 그 고난 받는 사람이 선지자 자신을 가리키는 것인지, 타인을 가리키는 것인지 질문하였습니다. 이에 빌립이 어떻게 대답했습니까? 35절입니다.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빌립은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님을 가르쳐 복음을 전했습니다. 예수님이 이사야 선지자가 말한 대로 어떻게 끌려갔으며, 어떻게 어린 양같이 잠잠했으며, 어떻게 불법 재판을 받고 십자가에 처형되셨는지 증언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를 어떻게 다시 살리셔서 주와 그리스도로 세우셨는지 복음을 전했습니다. 내시는 빌립의 설명을 들으면서 예수님이 그가 읽던 성경에 예언된 바로 그 분이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기 죄를 대신하여 주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바로 자신을 구원하러 오신 구주이심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빌립은 성경의 어느 부분에서 시작해도 예수님을 가르쳐 복음을 전하는 빼어난 성경선생이었습니다. 우리도 무슨 말씀이든지 한 말씀에서 시작하여 예수님을 가르치고 복음을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성경은 그리스도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은 오실 그리스도를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은 오신 그리스도를 증언해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무슨 일을 하셨으며, 어떻게 사셨고, 죽으셨고, 부활하셨는지, 부활하신 후에 승천하셔서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 가르치는 것이 곧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구원해 주시는 유일한 구원자이십니다. 이 예수님을 만날 때까지 사람들은 결코 죄 사함의 기쁨도 구원의 기쁨도 누릴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하나님은 성령으로 우리가 새 사람 되게 하십니다. 죄사함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믿는 그 순간부터 영원히! 이것이 기독교의 복음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복음을 통해 생명을 구원하는 역사에 빌립을 귀하게 쓰셨습니다.

 

우리는 빌립의 전도자의 자세에서 배울 점이 있습니다. 첫째, 그는 성령의 역사를 매우 민감하게 분별하고 즉각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으려면 성령의 인도하심을 알아차리는 민감성이 있어야 합니다. 신약성경이 완성된 이후에는 성령님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각 사람을 인도하십니다. 더 나아가 때로는 직접적으로 우리의 양심을 깨우치시고 세미한 영적 음성으로 우리에게 말씀하기도 하십니다. 마음에 감동을 주기도 하십니다. 이러한 세미한 주의 음성에 자기 생각을 접고 민감하게 순종할 때 효과적으로 하나님의 역사에 쓰임 받습니다. 둘째, 빌립은 스데반과 같이 탁월한 성경선생이었습니다. 그는 성경의 요점이 무엇인지 잘 알았습니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갖고 한 영혼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할 수 있었습니다.

 

36절입니다.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자 내시가 물이 있으니 세례를 베풀어 달라고 했습니다. 이제 자신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신자가 되었으니 세례를 받는데 무슨 문제가 있겠느냐고 하였습니다. 38절입니다. "이에 명하여 수레를 멈추고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세례를 베풀고" 가는 길을 멈추고 물에 내려가 빌립이 내시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세례는 공적인 신앙고백입니다. 내시가 복음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확증을 해 준 것이었습니다. 이로서 그는 최초의 아프리카 출신 크리스천이 되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그는 에티오피아에서 많은 사람들을 전도하였고 간다게 여왕까지 믿게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에티오피아는 지금까지 아프리카에서 가장 오래된 기독교 국가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마리아에서 큰 역사를 섬기던 빌립을 갑자기 광야 길로 인도하긴 것에는 뜻이 있으셨습니다. 바로 이 한 사람 에티오피아인에게 전도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진리를 갈망하는 그 내시의 간절한 기도를 받으시고 빌립을 그리로 보내신 것입니다.

 

4. 기쁘게 길을 간 에디오피아 내시

39절입니다. "둘이 물에서 올라올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간지라 내시는 기쁘게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 내시는 기쁘게 길을 갔습니다. 단순한 표현이지만 에디오피아 내시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그 마음에 기쁨이 충만히 임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그 먼 길을 몇 달을 여행하여 예루살렘에 하나님을 예배하러 왔습니다. 그에게는 구도자의 자세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내시로서 예루살렘 예배나 기도회에 참여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저 아웃사이더로 멀리서 성전을 바라보며 기도했을 것입니다. 진리에 대한 강렬한 소원으로 성경을 읽었지만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그는 무거운 마음으로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한 나라의 장관급의 위치에 오른 성공한 사람이었지만 참 기쁨과 행복이 없었습니다. 어디가 길이냐? 나의 인생을 드릴 경배 대상은 누구인가? 하며 진리를 구하였습니다.

 

이런 그가 빌립을 통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였습니다. 세례를 받고 성령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의 내면에 하늘에서 내려오는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이는 마치 야곱이 브니엘에서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만난 경험과 같습니다. 또한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님을 발견하고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고국에 돌아간 것과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의 그 누구도 구주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세상의 그 무엇을 얻고 이룬다 해도 참 기쁨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 그 영혼이 결코 만족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모신 자의 내면에는 기쁨이 넘칩니다. 외적인 환경이 문제가 아닙니다. 어디가나 하늘나라입니다.

 

저는 예전에 군에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였을 때 변화된 저의 삶을 잊지 못합니다. 부대에서 밤에 교회로 단체로 이동할 때 늘 이 찬양을 불렀습니다.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모시는 삶은 그 어디나 하늘나라입니다. 인생길이 아무리 광야 같이 황막하다고 해도 그 마음에 기쁨이 넘칩니다. 여러분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인생길을 걸어가고 계십니까?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스데반의 순교를 계기로 발생한 박해를 통해 빌립을 사마리아 선교에 쓰셨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민감하고 순종하는 그를 광야 길로 인도하사 에티오피아 내시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아프리카 선교의 문을 여셨습니다. 빌립은 성경 선생으로서 준비된 사람이었습니다. 세계선교는 하나님이 친히 이루십니다. 우리가 이 귀한 하나님의 생명구원 역사에 귀히 쓰임 받는 준비된 성경선생으로 성장하기를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