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 후서 2강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
말씀 고후 2:1-17 요절 고후 2:15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나는 누구인가?” 가을이 되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회의하는 사람들이 생깁니다. 나는 과연 어떤 존재이며 무엇을 해야 하는 존재일까요? 성도를 표현하는 말들이 많습니다. 예컨대, 예수님의 가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뜻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이 시간 ‘그리스도의 향기’로서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분명히 하고 그 정체성에 걸맞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4절 말씀은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직접 방문하지 않고 눈물의 편지를 쓴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가 왜 근심 중에 그들에게 가지 않기를 결심했습니까? 2,3절을 볼 때 그것은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근심하게 하지 않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들의 근심은 곧 목자 바울의 근심이고 슬픔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가지 않는 대신에 무엇을 했습니까? 4절을 보십시오. “내가 마음에 큰 눌림과 걱정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생각할 때 산만한 짐이 마음을 누르듯 압박을 받고 걱정을 했습니다. 그 압박과 걱정은 많은 눈물로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눈물로 편지를 썼습니다. 우리가 흔히 바울, 하면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같습니다. 바늘로 찔러도 피한방울 나올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는 눈물의 목자였습니다. 그가 에베소 교회를 섬길 때에도 겸손과 눈물로 섬겼다고 회고했습니다. 또 3년 동안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였다고도 했습니다. (행 20:20,31) 그런데 이번에 고린도 교회를 생각하면서도 많은 눈물을 흘렸다고 하니 그가 눈물의 목자요, 예수님의 사랑으로 목자 생활한 것이 분명합니다.
아, 눈물의 목자생활, 참 부럽습니다. 정말 목자가 양들을 위해 눈물을 쏟을 수 있다면 얼마나 아름답고 행복할까요? 4절을 볼 때 그가 고린도교회를 위해 많은 눈물을 흘릴 수 있었던 비결은 그들을 향한 그의 사랑이 넘쳤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할 때 눈물이 나온다는 평범하면서도 깊은 진리를 발견합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어떻게 개척했는가는 사도행전 18장에 나옵니다. 바울은 이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예수님은 그리스도라 증언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는 영어성경으로 보면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을 완전히 바쳤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대적자들의 비방과 위협이 있었는 데 바울이 낙심하지 않고 복음을 전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믿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의 마음속에는 대적자들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고 생명의 위협을 느꼈습니다. 이때 주님께서 나타나셔서 바울에게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라 하시면서 성중에 하나님의 백성이 많다며 복음전파를 독려하셨습니다. 그 말씀에 순종하여 바울은 두려운 고린도를 떠나지 않고 1년 6개월 동안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바울이 고린도를 떠나면서 고린도 옆 겐그레아게 항구에서 머리를 깎았습니다.(행 18:18) 유대인들은 서원을 해제할 때 머리를 깎습니다. 이는 고린도 사역기간이 서원기간이었음을 암시합니다. 서원을 하면 포도주를 마시지 않고 심지어 건포도도 씹지 않고 하나님의 일에 몰두합니다. 이는 고린도교회를 개척할 때 바울이 고린도교회 영혼들을 섬기는 데 자신을 온전히 바쳤다는 것을 알게 해줍니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고린도교회요 고린도교회 성도들입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깊이 사랑하는 이유는 첫째는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이 구원한 이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자신이 모든 것을 바쳐서 섬긴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치 생명을 바쳐 아기를 낳은 엄마가 그 자녀를 사랑하는 것과 같습니다. 스탭 목자 수양회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다 생일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 대부분, 아직도 어머니들이 자신의 생일을 잊지 않고 챙겨준다 하였습니다. 아버지들 가운데 자녀 생일 기억하고 챙겨주는 분들은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 자식을 배속에 넣고 10달 동안 수고했고 생명을 바치는 수고가운데 낳았기 때문에 자녀에 대한 사랑이 깊습니다. 끊을래야 끊을 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바울도 자신의 생명을 걸고 고린도교회를 출산했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습니다. 그러기에 고린도교회가 빗나가고 세속화되려 할 때 너무나 안타까워 많은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눈물의 목자생활을 한 바울을 통해 우리의 목자생활을 돌아보고 회개하게 됩니다. 저는 가족구원에 위해 간절한 마음이 있었을 때 좋아하던 운동을 끊고 3년간 새벽기도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멸망 받을 영혼을 생각하면 눈에서 눈물이 흘러 내렸습니다. 함께 기도할 때도 눈물이 나왔습니다. 하나님은 그 눈물을 받으셨는지 가족들이 구원 받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말씀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니, 놀랍게도 아직 성대캠퍼스를 위해서, 어떤 양을 위해 눈물을 흘린 적이 없습니다. 제가 정말 마음을 드려 기도하지 않아서 일 것입니다. 얼마 전부터 핸드폰보다 조금 큰 기도수첩을 마련하여 들고다니면서 기도하는 사람들의 이름을 적고 틈날 때마다 그 이름을 부르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아마 기도가 쌓이고 진심이 쌓이면 제가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하리라 믿습니다.
바울은 성도의 거룩성, 교회의 거룩성에 대해서 문제의식이 있었습니다. 그는 성도들이 아무렇게나 살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권위적으로 지시하거나 책망하거나 면박을 주지 않고 눈물로 훈계하는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이러한 사람은 많은 사람에게서 벌 받는 것이 마땅하도다”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교회가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습니다. 이처럼 교회는 어떤 모양으로든지 죄에 대한 지적과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성도중에는 회개하지 않고 변명만 늘어놓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회개하라고 하면 교회에 은혜가 없고 율법만 가득하다 판단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회개하지 않으면 사실은 자신이 손해입니다. 회개하지 않을 때 그 인생에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사랑은 어찌하든 지 회개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기도하고, 직접적으로 조언을 하거나 눈물로 편지를 써서라도 어찌하든지 도와주어야 합니다. 회개하게 하는 것이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게 하는 진정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8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를 권하노니 사랑을 그들에게 나타내라” 어떤 사람이 회개한 후에는 사랑을 나타내야 합니다. 그런데 회개한 사람의 경우, 그의 죄를 떠올리며 그를 은근히 멀리하기 쉽습니다. 거리감을 두면서 경계의 눈으로 바라봅니다. 그러면 그가 어떻게 될 수 있습니까? 11절을 보십시오. “이는 우리로 사탄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그 계책을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 사탄은 교회공동체를 이간질하고 분열시키고자 합니다. 범죄한 후에 회개한 사람에 대해 공동체 구성원들이 거리감을 두게 되면 그 사람은 정죄의식과 자의식에 시달릴 수 있습니다. 결국 불의감에 교회를 떠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회개한 죄인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사랑을 나타내야 합니다. 한국 사람들은 표현에 약하다고 합니다. 갑돌이와 갑순이는 사랑을 표현하지 않아 서로 사랑하는 줄을 몰랐고 결국 다른 사람들과 결혼했습니다. 영적인 사람들에게도 사랑의 표현은 필요합니다. 어떤 위대한 신학자의 부인은 우울증을 앓다가 죽었습니다. 남편은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그 학자가 나중에 그 아내의 일기장을 보니 남편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아 죽고 싶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회개한 사람에 대해서도 사랑을 표현하지 않을 때 자신을 판단하고 정죄한다고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표현을 해야 합니다. 만날 때 뜨겁게 악수하고 포옹해 주고 같이 식사를 하고 교제를 나누어야 합니다. 마음을 넓게 먹고 천천히 적절한 직임을 다시 맡게 해주어야 합니다. 수술은 잘했는데 사람이 죽으면 안됩니다. 우리가 다양한 방법을 통해 회개한 사람에게 사랑을 표현함으로 사람을 살리는 공동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12-17절 말씀은 바울이 드로아에서 마게도냐로 간 이유와 주의 종이 가져야 할 아이덴티티를 보여줍니다. 바울은 제 3차 전도여행에서 에베소에서 흥왕한 성령의 역사를 섬기고 드로아에 왔습니다. 그가 왜 드로아에 왔습니까? 그것은 디도를 만나기 위해서 였습니다. 디도가 눈물의 편지를 들고 고린도에 갔는데 소식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서로 드로아에서 만나기로 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이 드로아에 갔을 때 주안에서 복음의 문이 드로아에 열렸습니다. 예컨대, 바울이 드로아 대학에 갔는데 수위아저씨와 양들이 바울을 보더니 “드로와, 드로와”라고 말했습니다. 12명의 양들이 성경공부를 해달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어떤 방향을 잡았습니까? 13절을 보십시오. “내가 내 형제 디도를 만나지 못하므로 내 심령이 편하지 못하여 그들을 작별하고 마게도냐로 갔노라”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대한 염려로 심령이 편치 못했습니다. 바울은 새로운 양들도 귀했지만 고린도 교회와 성도들이 염려되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성령의 역사를 뒤로 하고 고린도교회 소식을 가져오는 디도를 만나기 위해 마게도냐로 갔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이 말씀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사도 바울의 삶이 그리스도안에서 항상 승리자의 삶이 되게 하심을 감사하는 내용입니다. 이 말씀은 어찌 보면 뚱딴지 같이 갑자기 등장했습니다. 이 말씀의 배경이 무엇일까요? 바울은 이곳저곳을 다니며 열심히 복음을 전했지만 대적자들로부터 공격을 받고 심지어 양들에게도 비난을 받았습니다. 특히 심혈을 기울여 섬긴 고린도 교회가 자신에게 불순종하고 배신한 것같자, 목자생활이 실패한 것이 아닌가, 패배적인 생각으로 우울해 했던 것 같습니다. 이런 그는 자신의 삶에 대해서 회의하며 초라한 생각이 들었을 수 있습니다. 특히 드로아에서 디도를 만나지 못하고 마게도냐로 가면서 그런 생각이 깊어졌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바울은 하나님이 항상 그리스도안에서 자신이 이기는 삶을 살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여기서 ‘이기는 자’는 개선장군을 뜻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삶을 백전백승의 여호수아 같은 개선장군의 승리의 행렬에 비유했습니다. 왜 그리스도안에서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에게는 실패가 없습니까? 실제로 전혀 실패가 없기 때문일까요? 항상 환대만 받기 때문일까요? 그것은 복음 전파하는 것 자체가 귀하고 복음전파 명령에 순종한 것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 성공이요 승리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의 삶이 실패처럼 보이나 하나님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날 주님의 칭찬과 상급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즉 최후승리자가 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전파자는 항상 승리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15,16절을 보십시오. “우리는 구원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바울은 자신을 비롯한 사역자들을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정의합니다. ‘그리스도의 향기’가 바로 신자의 정체성입니다. 그리스도의 향기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풍기는 존재란 뜻입니다. 사람마다 냄새가 있습니다. 담배냄새를 숨길 수 없습니다. 술냄새를 풍기며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돈냄새가 나는 사람, 정욕냄새가 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는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며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Input이 없으면 Output도 없습니다. 평소에 예수님의 향기를 흡입하는 삶을 살 때 향기가 몸에 배이고 향기를 풍기는 삶을 살 것입니다. 바울은 아주 강력하게 그리스도를 알게 하는 냄새를 풍기고 다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가는 곳마다 강력하게 그리스도의 냄새가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이런 바울의 존재에 대한 반응은 극과 극이었습니다. 구원을 받는 사람들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게 하는 냄새였습니다. 망하는 사람들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게 하는 냄새였습니다.
아니, 같은 냄새가 다르게 느껴지다니 이게 가능합니까? 당시 로마군들이 어떤 곳을 정복하고 로마로 개선할 때 승리를 상징하는 향내를 피우면서 시내를 행진하여 들어왔습니다. 시민들은 그 향내를 맡으면서 로마군이 승리한 것을 알고 환호하며 기뻐했습니다. 시민들에게 그 향내는 구원의 냄새, 생명의 냄새였습니다. 반면에 끌려온 적장과 적군들에게 이 냄새는 사망의 냄새였습니다. 왜냐하면 행진이 끝나면 적장은 사형에 처해졌고 적군들은 죽거나 노예로 전락했기 때문입니다.
청국장을 좋아하는 분들에게 청국장의 향기는 정말 구원의 냄새요 생명의 냄새입니다. 천국장입니다. 그러나 청국장을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청국장 냄새는 역겨운 냄새입니다. 홍어의 맛과 향내를 아는 사람들은 홍어를 어찌하든지 먹고자 하며 그 톡 쏘는 맛과 향내를 생명의 향기처럼 좋아합니다. 반면에 홍어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그 냄새에 코를 막고 썩은 고기인줄 알고 쓰레기통에 던져버릴 것입니다.
놀랍게도 그리스도의 향기도 그렇습니다. 대한민국 기독교 미술대상을 받으신 전주 UBF의 장아브라함 목자님이 CTS TV에서 인터뷰하셨습니다. 그는 소아마비라는 어두운 운명가운데 살면서 삶이 너무 불공평하고 무의미해서 죽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죽으면 어머니가 미쳐버릴 것 같아 그 이유 하나 때문에 죽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정말 자신이 왜 사는지 알고 싶어 친구를 따라 성경 공부하러 춘천 UBF에 왔습니다. 그리고 곧 이어 있은 여름수양회에서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다” 라는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기도를 들었습니다. 그 때 그는 자신이 운명주의의 죄인이요, 허무와 정욕의 죄인으로 살아온 것이 깨달아져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회개했습니다. 후에 그는 요 9:3 절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가 수양회에서 말씀을 듣고 강당을 나와 하늘을 보는 데 그렇게 하늘이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또 그가 마신 공기는 한번도 마셔보지 못한 공기였습니다. 그는 새로운 세상의 향기로운 공기를 마음껏 흡입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에게 세상에서 가장 그윽한 생명의 향기였습니다.
반면 그리스도의 향기가 가장 거부감이 들고 역겨운 냄새인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복음전파자들을 가만히 두지 않고 조롱하고 핍박합니다.
예수님도 복음을 전할 때 박해를 받으셨습니다. 제자들에게도 박해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 하셨고 제자들도 바울도 많은 박해를 받았습니다. 복음이 박해를 받는 것은 복음자체나 복음전파자들이 잘못되어서도 아닙니다.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의 교만과 무지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전파자들은 일시적인 복음전파의 결과와 반응으로 자신의 사역을 평가할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환영도 박해도 받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무색무취의 그리스도인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박해를 받지 않는 것이 꼭 좋은 것이 아닙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를 받느냐 받지 않느냐에 따라서 사람들의 영원한 운명이 갈립니다. 평생 죽지 못해서 사느냐, 생명과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사느냐가 결정됩니다. 그러니 이 일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며 이 일을 감당하는 사람들도 결코 초라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16절 맨 끝에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라는 말씀이 있는 데 이런 그리스도의 향기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 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세상에 이 일보다 의미 있고 가치 있고 자랑스런 일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향기” 정말 참으로 자랑스런 우리의 아이덴티티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라” 한번 해보겠습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는 대통령 특사보다 더 귀하고 대단한 존재들입니다. 선교사님들은 각 나라의 그리스도의 향기, 하나님의 특사들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향기로서 무한한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각처에서 예수님을 나타내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로서의 사명과 의무가 무엇입니까?
첫째로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바울은 그리스도의 향기인 복음을 전할 때에 복음에 무엇을 섞지 않았습니다. 혼잡하게 하다는 말은 ‘질을 떨어뜨리다’, ‘상술을 쓰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복음에 자기 사상을 집어넣지 않았습니다. 인기에 영합하기 위해서 당대철학을 가미하거나 미국적 복음주의처럼 헬라적 복음을 팔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의 향기인 우리는 말씀이 말하는 순전한 그리스도만을 잘 드러내야 합니다.
둘째로 입을 열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과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딤후 4:1,2a) 복음전파가 곧 그리스도의 향기를 퍼트리는 것입니다. 복음전파를 하지 않으면 생명과 사망을 결정할 냄새자체를 맡지 못하기 때문에 아무런 일도 발생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캠퍼스와 세계 곳곳에 나아가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향기인 우리가 입을 닫고 있는 것은 큰 죄입니다. 입냄새가 나는 사람이 입을 열면 여러 사람이 다치지만 그리스도의 향기인 우리는 입을 열지 않으면 우리가 다칩니다. 아까 장아브라함 목자님의 경우는 친구가 “이 죄인” “이 죄인”이라고 하는 것이 춘천센터를 찾게 된 동기가 되었습니다. 최소한 그렇게라도 우리가 입을 열어 복음을 전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열심히 전하고 있지만 계속하여 입을 열어 복음을 전하기를 기도합니다.
셋째로 예수님을 본받는 삶을 살 때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타내게 됩니다. 저도 UBF 목자님들이 평신도들이었지만 말씀을 사랑하는 자세, 말씀대로 살고자하는 모습, 겸손, 섬김, 부부간에 서로 존중하고 사랑하는 모습에 감동을 받고 이 모임을 사랑하고 이 모임에 자부심을 가지고 헌신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닮은 삶을 살고, 향기나는 가정을 이룸으로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퍼트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리스도가 나타나기도 하고 감추어지기도 합니다. 우리가 말씀전파와 삶을 통해서 진한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타낼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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