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가을 수양회 1 강
내 안에 거하라
말씀/ 요한복음 15:1-17 요절/ 요한복음 15: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예수님은 이제 곧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여전히 이기적이고 세상 소망이 강했습니다. ‘누가 더 크냐’며 경쟁하였습니다. 심지어 돈을 받고 예수님을 팔 생각까지 하는 제자도 있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예수님마저 떠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제자 공동체는 와르르 붕괴될 것이 뻔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떠난 후에도 제자들이 서로 사랑하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풍성히 맺기를 원하셨습니다. 포도나무 비유를 통해 그 방법을 가르쳐 주시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내 안에 거하라’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랑의 열매를 풍성히 맺고자 결단하는 시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1. 내 안에 거하라(1-8) 1절을 보십시오.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예수님은 자신을 참포도나무, 하나님 아버지를 농부, 그리고 제자들을 가지로 비유하십니다. 그리고 각자가 하는 일과 존재 이유에 대해 설명하십니다.
1) 농부가 하는 일
2절을 보십시오.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농부가 가지에 대해서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열매 맺지 않는 가지를 제거하는 일이요, 또 다른 하나는 열매 맺는 가지를 깨끗하게 하는 일입니다. 제거하는 것은 영어로 ‘Cut off’로 잘라내 버리는 것을 뜻하며, 깨끗하게 하는 것은 영어로 ‘Prune’으로 가지치기를 의미합니다. 둘 다 가지를 자르는 것은 같으나 그 목적이 다릅니다. 가지를 제거하는 이유는 말 그대로 더 이상 쓸모가 없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가지를 깨끗케 하는 이유는 더 좋은 열매를 맺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포도나무 가지의 존재 이유는 무엇입니까?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농부는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땀을 흘립니까? 포도농사의 경우 많은 손이 갑니다. 땅을 갈아 돌을 제거하고 거름을 줍니다. 동물들이 와서 헤치지 않도록 울타리도 두릅니다. 나무줄기가 잘 뻗어나가도록 받침대도 세워줍니다. 잎사귀에 병충해가 없도록 살충제도 뿌려줍니다. 여러 해를 이렇게 지극 정성으로 보살폈습니다. 어느덧 추수할 가을이 되었습니다. 농부는 풍성한 열매를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가지는 아무 열매도 맺지 않았습니다. 농부가 그 가지에 대해 어떻게 하겠습니까? 가차없이 잘라 버릴것입니다. 그래야만 열매 맺는 가지에게 피해가 가지 않습니다. 반면, 농부는 열매맺는 가지에 대해 어떻게 합니까? 좀 더 좋은 열매를 맺도록 하기 위해 잔가지를 잘라줍니다. 그 결과 영양분이 분산되지 않고 한 가지에 집중되어 당도 100%의 명품 포도열매가 맺힙니다.
이처럼 농부는 열매를 보고 가지를 판단합니다. 열매가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 가지를 제거하기도,깨끗하게 하기도 합니다. 가지의 입장에서보면, 하나는 심판이고, 하나는 사랑의 손길입니다. . 특히,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에게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당시 잎만 무성하고 아무 열매가 없는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주님의 경고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열매를 맺고 있는 가지인가요? 아니면 잎만 무성한 가지인가요? 예수님의 생명의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우리는 근본적으로 깨끗해진 가지입니다. 열매맺을 수 있는 가지가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가지를 그냥 놔 둡니까? 아닙니다. 여러 잔가지가 생겨나기에 농부는 부지런히 잔가지를 쳐냅니다. 그래야만 열매맺는 가지에 영양분이 집중되어 극상품의 포도열매를 수확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에게있어 잔가지는 무엇입니까? 세상염려와 물질에 대한 탐심, 사람의 인정과 칭찬, 교만과 이기심, 게임이나 드라마,영화 같은 잔재미등이 있습니다. 때로는 넓은 인간 관계나 가족간의 끈끈한 정이 잔 가지 될 수 있습니다. 이런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나 열매 맺는데 방해가 된다면 과감하게 쳐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말씀이라는 예리한 칼로 가지치기를 하십니다.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심령에 찔려올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회개하고 말씀에 순종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가지치기의 손길에 나를 맡겨야 합니다. 거기에는 순간적인 고통이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아! 하나님께서 나를 열매맺는 가지로 인정해 주시는구나. 나에게 좋은 열매를 맺기 원하시는구나!’ 그렇습니다. 농부의 가지치기가 가지에게는 달갑지 않으나, 가지에게 유익이 되기에 인내할 수 있습니다. 순종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으로 매 순간 우리안에 자라나는 세상의 잔가지를 잘라내고 좋은 열매맺는 가지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2) 가지가 하는 일
다음으로 가지가 해야 할 일입니다. 4절을 보십시오. 다 함께 읽겠습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가지가 해야 일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것입니다. 본래부터 나무에서 자라난 가지는 그 자체가 나무와 하나입니다. 그런데 접붙임 받은 가지는 어떻습니까? 아직 불완전 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새로운 가지가 되었습니다. 들포도 열매를 맺던 가지가 이제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접붙임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접붙임 받은 가지는 붙어 있고자 힘을 써야 합니다. 붙어 있을 때 나무로부터 충분한 영양분을 공급받고 생명력이 살아납니다.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접붙임 받은 곳이 아물고 드디어 나무와 생명의 운명을 함께 하는 온전한 하나가 됩니다. 이렇게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을 때 열매를 맺는 것처럼 제자들도 참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붙어 있어야 합니다. 만약 붙어 있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열매는 고사하고 밖에 버려져 말라 결국 불쏘시개 감이 된다고 경고하십니다(6절).
그러면 붙어 있기 위해 제자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거하라’는 말이 무려 8번이나 반복됩니다. 그 만큼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거하다’는 원어로 ‘메노’로, ‘머물다’ ‘살다’ ‘결합하다’는 뜻입니다. 혹시 수양회에 처음 참석하시는 분이 있나요? 처음에는 어색하지만 같은 숙소에 머물며 식사도 같이 하고, 서로 이야기하다 보면 조금씩 친해지는 경험이 다들 있을 것입니다. 반대로 아무리 가까운 사이도 오랫동안 보지 않게 되면 점점 잊혀져 가겠죠. 예수님과 제자들도 3년 반동안 함께 동거 동락하며 서로에 대해 알아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더 이상 그들과 함께 하지 않습니다. 며칠 뒤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하나님 나라로 가셔야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수님 안에 거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기억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성경책이 없던 당시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셨던 말씀을 떠올리고, 기도하며,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생각했을 것입니다. 둘째, 날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6:54절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나를 위해 채찍질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흘리신 예수님을 생각할 때, 예수님의 사랑이 내 안에 충만해 지고, 감사와 찬송이 흘러 넘칩니다. 이처럼 예수님 안에 거한다는 것은 말씀 안에 거하는 것이고 날마다 십자가 사랑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예수님 안에 거하고 계십니까? 제가 아는 직장 동료는 잠깐 쉴 때마다 스마트폰을 뚫어지게 보곤 합니다. 뭘 하나 봤더니 주식상황을 보고 있었습니다. 실시간으로 등락하는 주식을 보고 기분이 좋았다가 않좋았다를 반복합니다. 이렇게 주식에 거하는 분도 있지만, 요즘 트렌드는 욜로입니다. YOLO는 ‘You Only Live Once’ ‘인생은 오직 한 번 뿐이다’ 는 뜻입니다. 한번 뿐인 인생 불행한 개미보다 행복한 배짱이로 살자는 것입니다. 물질을 결혼, 육아, 내 집마련에 쓰지 않고 여행이나 학습등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쓰고,. 전세금을 빼서 세계 여행을 하거나 집은 지하 월셋방에 살면서 고급 스포츠카를 몰고 다닙니다. 이런 삶이 가끔 우리를 유혹합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참된 만족과 기쁨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요일2;15,16). 절대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고, 참된 기쁨과 만족이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 안에 거하는 자에게 어떤 기쁨과 특권이 있습니까? 7-8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할 때 다 받게 됩니다. 100퍼센트 기도응답 받습니다. 예수님안에 거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이 얼마나 놀라운 특권입니까? 또한 열매를 많이 맺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예수님의 제자로 인정받는 기쁨을 누립니다.
2. 서로 사랑하라(9-17)
지금까지 농부가 하는 일과 가지가 해야 할 일에 대해서 생각해 봤습니다. 마지막으로 참 포도나무인 예수님이 하시는 일과 구체적으로 어떤 열매를 맺어야 하는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그러면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9절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포도나무는 가지가 열매를 맺도록 물관과 체관을 통해 끊임없이 영양분을 공급합니다. 이를 위해 땅 속 깊이 뿌리를 내리고 햇볕에서 충분한 광합성을 합니다. 이렇게 모아진 영양분이 가지에게 전달되어 열매를 맺게 합니다. 예수님은 참포도나무로 가지를 위해 아낌 없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주십니다. 엄밀히 말하면 예수님은 농부의 아들로 열매를 거두는 일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스스로 아들의 특권을 버리시고 가지와 똑 같은 형체인 나무가 되셨습니다.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이렇게 가지를 살리기 위해 그리고 농부이신 하나님이 원하는 열매를 맺기 위해 친히 포도나무로 성육신 하셨습니다. 아름드리 백향목이 아닌 메마르고 볼품없는 포도나무로 낮아져 오셨습니다. 그러나 이 나무가 농부이신 하나님이 심으신 참, 진짜 포도나무입니다. 왜냐하면 가지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고, 진정한 생명과 구원의 열매를 맺게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살이 찢기시고 피를 흘리심으로 하나 밖에 없는 생명까지 내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고 영접한 자에게 구원과 영생을 얻게 하셨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예수님은 이 땅에서 말씀에 100% 순종하는 삶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어린 양처럼 순수하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뜻과 방향에 인생의 키를 맡기셨습니다.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의 사랑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확신할 때 십자가 고난과 고통 속에서도 두려움 없이 당당하게 사명을 완성하셨습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의 말씀을 삶 속에서 실천할 때 그 사랑 안에 거할 수 있습니다. 그 때 사랑의 진액이 내면에 더 풍성하게 차고 넘치게 됩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사랑이 충만해 질 때 예수님의 기쁨도 내 안에 충만해 집니다. 이 기쁨은 세상에서 맛 볼 수 없는 가장 신령하고 거룩하며 모든 어둠과 스트레스를 다 사라지게 합니다.
이처럼 참포도나무 예수님은 가지를 위해 모든 것을 주기 때문에 가지는 나무에 붙어서 끊임없이 영양분을 빨아 들여야 합니다. 마치 어린 아이가 엄마의 젖을 빨며 필요한 영양소를 먹는 것과 같습니다. 가지는 이것을 요구할 자격이 있고, 나무는 얼마든지, 언제든지 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혹시 우리 중에 시들시들하고 축 쳐진 가지들이 있습니까? 열매가 한 두개 달리다 더 이상 안 생기는 가지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 안에 거하지 않거나 거하더라도 적극적으로 영양분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구하는 자에게 주시고 두드리는 자에게 열릴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성령을 부어 주십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세상에서 생존을 위해 몸부림 치는 것이 아니라 내 영혼의 생명과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맺기 위해 필사적으로 예수님 안에 거하며 밤낮으로 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 때 십자가 사랑의 진액과 성령의 생명수가 우리 안에 차고 넘쳐 얼굴에 생기가 돌고 눈빛이 반짝거리고, 새벽을 깨워 기도하며 생명력 넘치는 삶으로 변화 됩니다. 우리를 위해 참포도나무로 오시고 그 생명을 아낌없이 내어주신 예수님께 감사 찬양드립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께 날마다 사랑과 성령을 공급받고 생명력 넘치는 삶 살기를 기도합니다.
12절을 다 함께 읽겠습니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예수님은 제자들을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 그들은 자격도 조건도 안 되는 갈릴리 시골 어부였습니다. 지상 메시야 왕국 건설과 거기서 한 자리 차지하고자 하는 세상 소망이 가득한 자였습니다. 서로 누구 크냐며 시기하고 경쟁하는 이기적이고 교만한 자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친히 그들을 찾아 오셔서 죄 사함 주시고 제자 삼아 주셨습니다. 말씀으로 섬기시고 하나님 나라 산 소망을 심으셨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이 체포되시던 밤, 모두 배반하고 떠났을 때도, 베드로가 3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을 때도 변함없이 사랑하셨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생명을 주시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13-14절을 보십시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친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린다면, 그 것 만큼 아름답고 놀라운 사랑이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을 더 이상 종이 아닌 친구로 삼아 주십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친구는 어떤 사이입니까? 격 없이 편하게 속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관계입니다. 힘들 때 찾아가면 ‘얼굴이 않좋네 ! 내가 저녁 살께! 하며 반갑게 맞아 줍니다. 여러분에게 이런 친구가 있습니까? 저는 지난 믿음 목자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우리는 가족보다 더 끈끈한 형제, 자매, 친구라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외아들로 친인척이 없었지만 입관부터 발인까지 모든 장례식을 가족처럼 함께 하며 위로하고 격려하였습니다. 세상에서 찾아 볼 수 없는 믿음의 친구요 가족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 드립니다. 근본적으로 예수님은 우리의 좋은 친구입니다. 언제든지 찾아가 속 이야기를 하고, 편하게 대화할 수 있는 친구입니다. 이 번 수양회 시간을 통해 개인적으로 예수님를 벗 삼아 깊은 대화의 시간 갖기를 기도합니다.
16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은 일방적인 주권으로 제자들을 택하셨습니다. 그 목적은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떤 열매를 맺기 원하십니까? 17절을 다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열매 하면 모임 안에서 몇 사람을 남기고 제자로 세웠는가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또 자녀들이 공부를 잘하여 좋은 대학, 좋은 직장에 들어가는 것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농부이신 하나님과 참포도나무이신 예수님이 맺기 원하는 열매는 그 무엇보다 사랑의 열매입니다. 성령의 9가지 열매 중에서도 ‘사랑’이 가장 먼저 언급되고, 사도 바울도 믿음,소망,사랑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만큼 사랑이 열매의 본질이며 궁극적인 실체입니다. 특히 제자 공동체 안에서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고향도, 얼굴도, 성격도 다릅니다. 또한 이기적이고 교만하며 상처와 허물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쉽지만 이런 동역자를 사랑하는 것은 힘듭니다. 그럼에도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말과 혀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이 나를 사랑한 것처럼 동역자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변함없으시며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나의 가장 소중한 것을 내어 주는 희생과 섬김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생각할 때 한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그것은 ‘아낌없이 주는 나무’ 이야기입니다. 나무와 소년은 어릴 적 항상 즐겁게 놀며 행복한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년은 돈이 필요하다며 나무에게 돈을 요구했습니다. 나무는 자신의 사과열매를 주며 이것을 팔면 돈이 생길 거라 했습니다. 그리고 떠난 소년은 한참 후에 다시 나타났습니다. 이제는 돈이 아닌 집이 필요하다고 하였습니다. 나무는 자신의 가지를 베어 집을 짓도록 했습니다. 또 소년은 오랜 세월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소년은 나타나 삶이 피곤하고 지쳐, 멀리 여행을 떠나야 겠다며 배가 필요하고 했습니다. 나무는 변함없이 자신의 줄기를 잘라 주었습니다. 배를 타고 멀리 떠난 소년은 영영 오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꼬부랑 할아버지가 된 소년이 다시 나무에게 왔습니다. 나무는 이제 더 이상 줄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소년은 아무것도 필요없고 그저 앉아서 쉴 곳만 있으면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루터기만 남은 나무 밑둥에 털썩 주저앉은 소년과 그 모습을 바라본 나무는 그져 행복했습니다.
예수님은 본문의 나무처럼 우리에게 아낌없이 모든 것을 내어 주셨습니다.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시고 그져 우리와 함께 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기 힘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서로 무언가를 요구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각 자의 기준대로, 세상의 잣대로 남을 바라볼 때 요구하게 되고, 그 때 마음으로 하나되기가 쉽지 않습니다. 나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신 예수님처럼, 우리도 서로를 위해 아낌없이 주고, 또 기다려 주는 사랑과 인내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며 그 사랑의 힘으로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하기를 기도합니다.
저 또한 예수님의 일방적인 사랑을 받고 지금까지 세상과 모임에서 열매 맺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평신도로 물질 자립하고, 세 자녀를 키우며, 캠퍼스 목자로 사명을 감당하며 큰 열매는 아니지만 제 안에 온유와인내의 열매, 기쁨과 감사의 열매가 맺혀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랑의 열매는 참 맺기 힘든 것 같습니다. 머리로는 알지만 실제로 한 사람을 용서하고 자신을 희생하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 안에 거할 때 힘을 얻고 실천할 수있다는 것을 지난 여름 수양회 말씀을 섬기며 체험했습니다. 직장에서 저보다 한 살 많은 팀장과 오해와 갈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름 수양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말씀을 섬기며 힘을 덧입고 용기를 내어 사과하였습니다. 팀장은 짐짓 놀랐지만 저의 진심어린 사과를 받아주고 그 동안의 오해와 갈등을 풀었습니다. 이 후 팀장의 어떤 말을 들어도 마음의 상처나 짐이 되지 않았습니다. 참 자유함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모임 안에서는 사랑을 실천하지 못했습니다. 학생 제자양성이 잘 되지 않고 모임이 변화와 성장이 없는 것을 사람과 모임 탓으로 생각했습니다. 그 결과 할 일이 더 많아진 것에 대해 불평과 불만을 하였습니다. 특히, 이번 수양회 메시지를 섬기는 것과 주일 예배 영상을 섬기는 것에 대해 힘들어 했습니다. 최근 신제품 출시 후 판매가 기대만큼 올라가지 않아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아 눈도 붓고 이도 아프고 잠을 자도 개운치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말씀을 섬기며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보다 드라마나 스포츠를 보며 모든 것을 잊고자 했습니다. 그 때 주일 영상이 홈피에 올라오지 않은 것에 대해 여기 저기서 전화가 오자 짜증이 났습니다. 무엇보다 2부 안에서 일어난 갈등과 오해로 인해 제 안에 모임에 대한 사랑이 식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런 모임을 위해 내가 왜 스트레스 받으며 말씀을 섬기고 또 영상까지 해야 하는가라는 생각이 있을 때, 기쁨과 감사함으로 자신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참포도나무 되셔서 우리를 위해 아낌없이 내어주신 예수님의 사랑을 생각할 때, 이런 생각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깨닫습니다. 제가 그 동안 목자님들의 섬김과 사랑을 받으며 살아왔고, 이제는 그 사랑을 실천해야 할 때입니다. 사랑의 표현은 용서와 희생입니다. 제가 편협된 생각과 자존심을 내려놓고 모임 안에서 동역자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또 묵묵히 십자가를 감당함으로 사랑을 실천하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제 안에 사랑의 열매가 풍성히 맺히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참 포도나무이시고 우리는 가지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그 사랑 안에 거함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랑의 열매를 풍성히 맺을 수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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