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로마서 제 15 강
너희 몸을 산 제물로 드리라
말씀/ 로마서 12:1-21 요절/ 1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로마서를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11장은 교리편, 12-16장은 실천편입니다. 교리는 우리 몸의 뼈대와 같습니다. 뼈는 사람의 몸을 지탱해 줍니다. 그러나 뼈만 가지고서 사람이 살 수가 없습니다. 근육과 살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실제적인 활동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신앙이 견고하고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 올바른 교리, 올바른 지식에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그리고 머리로만 아는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실제 삶 속에 적용하여 실천되어질 때 비로소 나의 것이 됩니다. 그래야만 건강하고 균형잡힌 신앙생활을 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배우는 시간이 되길 기도합니다. (세 가지 포인트로 살펴보겠습니다)
1. 그리스도인의 복된 생활 원리(1-2)
1절과 2절 말씀은 뒤에 나오는 모든 생활 원리의 기본 원칙이 됩니다. 1절을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그러므로’ 이 말은 1장부터 11장까지 바울이 언급했던 교리 부분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다 죄인이다. 그런데 율법의 행함이나 자기 의로 구원받지 못한다. 우리의 구원은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으로 된 것이다. 하나님의 긍휼로, 일방적인 은혜로 된 것으로 우리가 단지 믿는다는 이유로 하나님의 의가 우리에게 덧입혀졌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이러 이러하게 살아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말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우리에게 권합니다. 여기서 ‘자비하심’이란 말은 히브리어 ‘라하임’에서 온 말인데, 길에 버려져 피투성이가 되어 울고 있는 아이를 측은히 여기는 마음을 말합니다(겔16:6-14). 이처럼 하나님께서 죄로 죽어가고 있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구원해 주셨는데, 이러한 하나님의 긍휼의 마음을 사도바울이 가지고서 애타는 심정으로, 간절한 마음으로 지금 우리에게 강력하게 권하고 있습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인가?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드리라’ 이 말은 제사 의식에서 사용되는 용어입니다. 레위기를 보면, 그 제사 방식과 내용이 아주 디테일하게 나와 있습니다. 성전에서 제사장이 짐승을 잡아 하나님께 드리듯이 우리 몸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라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소나 양 같은 ‘짐승’을 잡아 하나님께 드렸지만, 이제는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드리라고 합니다. 여기서 ‘몸’은 우리의 육체 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과 혼을 포함한 전인격을 말합니다. ‘제물’은 원래 반드시 죽여서 드려야 했습니다. 죽지 않은 것은 제물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기 때문’입니다(히9:22). 우리 몸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릴려면 우리는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 제물’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런 방식은 이방 제사 풍습이고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시는 바라고 하였습니다(레18:21).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우리 몸을 ‘산 제물로 드리라’ 합니다. 드려진 제물은 자기에게 전혀 권한이 없습니다. 제물을 받은 이에게 모든 권한이 있습니다. 이것을 ‘권리 양도’라고 합니다. 비록 우리 몸이 살아있기는 하지만, 마치 죽어서 하나님께 바쳐진 짐승처럼 온전히 하나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들에게 가장 복된 삶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드려지고, 또 그분이 받으시는 제물이 될 때가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나의 존재 목적입니다. 동의하십니까? 아멘. 제가 고등학교 2학년때 “왜 내가 이 땅에 태어나 존재하는가” 심각하게 고민하고 해답을 찾고자 몸부림 쳤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내린 결론이 ‘무엇인가 목적이 있겠지~’ 였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의 주로 믿고 거듭났을 때 그 목적을 찾게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내가 이 땅에서 사는 동안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나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위해 현재 살아가고 있습니까?
자, 그런데 하나님께 받으시는 제물에는 조건이 있습니다. ‘거룩한’ 제물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정결하고 깨끗하고 흠이 없는’ 제물을 드려야 합니다. 그러한 제물을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십니다. 우리는 구약 성경에서 종종 하나님께서 인간의 제사를 받으시고 ‘그 향기를 흠향하셨다’(창8:21), 또는 ‘이는 여호와 앞에서 향기로운 냄새니라’(출29:18,25,41, 레1:9,13,17)란 표현을 보게 됩니다. 이는 마치 하나님께 코가 있어서 향기로운 냄새 맡기를 좋아하시는 것 같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코가 없죠) 이러한 표현은 하나님께서 그러한 제사를 ‘얼마나 기쁘게 받으시는가?’, ‘열납하셨다’ 그런 의미를 나타냅니다. 이러한 표현이 신약 성경에도 나옵니다. 어디에 나오나요? 예수님이 희생 제물이 되었을 때 사용되었습니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엡5:2)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향기로운 제물이 되었는가를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사도 바울은 고후2:15,16절에서 자신을 포함한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말합니다.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림으로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향기로운 냄새가 되자’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현재 하나님이 흠향하시는 향기가 되고 있습니까? 행여 썩은 냄새나 악취를 풍기고 있지는 않는가? 우리 자신을 돌아봅시다.
자, 본문에서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행위를 ‘영적 예배’라고 하였습니다. 영적 예배란 장소적인 한계를 초월하여 드려지는 예배를 말합니다. 요4장에서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그림신산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맞습니까? 아니면 예루살렘에서 드리는 것이 맞습니까?” 이때 예수님께서 무엇이라 대답하셨습니까?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중략)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4:21-24) 구약 시대 제사는 장소적인 제한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성막에서, 후에는 예루살렘에서만 제사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그 몸 자체가 성령이 내주하시는 하나님의 성전이기에(고전3:16) 그가 어디에 있든지, 그 곳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드려지는 공적인 예배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삶 전체 속에서 예배가 행해져야 합니다. 우리가 매일 매일 마주하는 학교 생활, 직장 생활, 가정 생활 가운데서 내가 행하는 모든 일이, 그리고 만나는 사람을 대하는 나의 마음가짐과 태도, 언어 사용, 행동이 다 예배입니다. 이것을 ‘삶의 예배’, ‘일상의 예배’라고 합니다. 우리의 일상의 삶에서 하나님의 주권이 선포되고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는 것입니다. 로버트 멍어가 쓴 ‘내 마음은 그리스도의 집’이란 소책자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우리가 드려야 할 참된 예배가 무엇인지 잘 말해줍니다. 그것은 나의 전 인생의 주도권을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내 마음 속에 있는 거실과 안방, 침실, 공부방, 휴게 공간등 나의 삶의 전 영역을 주께 양도하는 것입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받은 우리 성도의 최고의 복된 삶입니다.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영국이 낳은 최고의 여왕입니다. 그녀가 하루는 한 가정집을 방문했습니다. 한 아주머니가 아주 반갑게 맞아주었습니다. 그러자 여왕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여인에게 물었습니다. “이제까지 이 집을 찾아온 손님 중에 가장 귀한 손님이 누구입니까?” 그러자 여인이 대답합니다. “빅토리아 여왕, 당신입니다.” 그러자 여왕이 되묻습니다. “이 집을 찾아온 가장 귀한 손님이 제가 아니라 예수님이 아닐런지요?” 여왕은 속으로 ‘예수님’이라고 대답하길 바랬던 모양입니다. 이에 여인이 의외의 대답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은요. 저의 손님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저의 주인이십니다. 그 분은 또한 이 집의 주인이십니다” 여왕은 머리를 한 대 얻어 맞은 느낌이었습니다.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나의 몸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나입니까? 예수님입니까? 예수님은 죄의 노예로 살던 우리를 자신의 살을 찢고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를 값주고 사셨습니다. 우리의 몸은 더 이상 내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시간과 물질과 재능과 젊음을 예수님께 순종하여 드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 땅에 살 날이 많은 청년들~ 제 말에 동의하십니까? 아멘. 여러분의 몸과 삶을 예수님께 드릴 때 여러분의 삶이 가장 베스트의 삶이 될 줄 믿습니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인 존비비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생의 성공은 하나님이 당신을 위해 계획하신 그 계획을 이루어 드리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이나 어떤 일에서든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최고의 삶입니다.”
이번 전국 학생 수양회운데 하나님의 큰신 은혜가 있었습니다. 저는 수양회 셋째 날, 하루 참석했습니다. 그때 한국대표이신 김느헤미야목자님께서 광고 시간에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간증하였는데, 제가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24년전, 한국대표이신 전요한 박사님이 안암센타 스텝으로 있던 김느헤미야 목자를 부르셨습니다. “광주센터에 어려움이 있으니 네가 가 봐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때 김느헤미야목자님은 ‘why me?’ 광주가 어려운 상황이었기에 ‘거기서 내 인생 끝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머뭇거리자 전요한박사님은 ‘던져. 네 인생을 던져’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생각했습니다. ‘내 인생이 야구공도 아닌데 던지라니~ 남의 인생을 저렇게 막 던지라고 해도 되는가? 너무 무책임한 것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못한다’고 집에 갔습니다. 그런데 집에서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르시는 것 같았습니다. 다음 날 순종하기로 하고 가방 하나 들고 광주로 내려갔습니다. 이렇게 24년간 책임목자로 하나님의 역사를 섬겼습니다. 그는 지난 24년을 돌아보며, 하나님께서 자신을 크게 축복해주셨다고 고백했습니다. 물론 많은 어려움도 있었지만 거기서 기도를 배웠고, 믿음이 영적 전쟁이란 걸을 배웠고, 한 사람을 마음에 두고 섬기는 목자 심정을 배웠다고 하였습니다. 지금까지 UBF에서 지방에서 섬기는 목자가 한국 대표가 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를 현재 한국 대표로 세우시고 성서한국과 세계선교를 힘있게 섬기도록 하십니다. 이를 볼 때 자신의 몸을 하나님께 산 제물로 드린 사람을 하나님께서 결코 망하게 하지 않으시고 축복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귀하게 쓰신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종로2부의 강가일목자가 올해 초 저에게 자신의 인생소감을 발표하였습니다. 그리고 6월까지 쉬는 기간이 있는데, 이 시간을 하나님께 드리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풀타임으로 목자훈련을 받고 캠퍼스를 섬기도록 방향을 주었습니다. (여기서 풀타임은 풀타임목자와는 다릅니다) 요즈음 젊은이들이 여유로운 시간이 생기면 그 시간을 보통 자기를 위해 쓰고자 하는데, 주님께 드리고자 하니 이 얼마나 기특합니까? 하물며 하나님은 얼마나 기뻐하실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가일목자가 이 기간 예수님과의 관계성에서 깊어지고, 한 영혼을 섬기는 목자로 성장하길 기도합니다.
거듭난 성도라면 누구나 이처럼 나의 인생이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산 제물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하지만 이것을 방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2절을 읽겠습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세상은 우리를 하나님께 드리지 못하게 막습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대표되는 세상 가치관이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우리를 멀어지게 만듭니다. 우리가 거듭나기 전에 어떠하였습니까? 이 세대를 본받았습니다. 세속적인 가치관과 세속적인 영향력 가운데 살았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망가졌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과 풍성함을 누리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이 세대를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 ‘변화를 받는 것’ 모두 수동태로 되어 있습니다. ‘내가 마음을 새롭게 해야겠다’ 이렇게 결심한다고 해서 새롭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변하고 싶다고 변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한 소년이 목사님을 찾아와서 어떻게 하면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은 “그럼, 내가 말해준대로 하겠는가?” 물었습니다.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하루 24시간 중 1시간을 내가 말한 대로 매일 행하라.” “15분은 말씀을 보고, 15분은 기도하고, 15분은 하나님에 대해 다른 사람에게 말하고, 15분은 사랑을 실천하는데 써라” 아주 간단하죠. 이 소년은 목사님이 말한대로 실천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커서 위대한 세계적인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거듭나는 것은 순간입니다. 하지만 변화되는 것은 많은 시간을 요합니다. 평생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목적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입니다. 제가 청년들에게 UBF 선배목자로서 방향을 제시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매일 일용할 양식을 먹고, 주 한편의 소감을 쓰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분명히 변화되고 훌륭한 사람으로 성장하여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받게 될 것입니다.
2. 복된 교회 생활(3-13)
그리스도인은 교회라는 공동체를 떠나 혼자 수도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교회의 일원으로서 몸의 한 부분을 맡은 지체입니다. 복된 교회 생활을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3절을 읽겠습니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여기서 말하는 ‘믿음의 분량’은 믿음의 크고, 작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서의 기능, 각자에게 하나님께서 나누어주신 각각의 은사를 말합니다. 복된 교회 생활은 그 기능대로 충성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섬기는 자는 섬기는 일로, 가르치는 자는 가르치는 일로, 위로하는 자는 위로하는 말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은사를 주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엡4;12절에서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함’이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은사들은 대등한 위치에 있습니다. 높고 낮음이 없습니다. 각자의 은사는 존중되어야 합니다. 다양성을 인정해야 합니다. 또한 한 마음, 한 뜻으로 성령의 한 그릇을 이루는 통일성을 추구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의 대부분의 다툼과 분쟁은 대개 어디서 옵니까? ‘누가 크냐’에서 나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해야 합니다. 나를 낮추고 다른 사람을 높이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고자 힘써야 합니다.
9-13절은 교회 생활에 있어 일반적인 권면입니다. 다른 성도를 사랑해야 합니다. 서로 우애하고 존경해야 합니다. 부지런해야 합니다. 소망 중에 즐거워해야 합니다. 기도에 항상 힘써야 합니다. 이러한 내용은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은사’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실천해야 하는 ‘윤리’의 문제입니다. 여기에서 특히 ‘사랑’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입으로 하는 사랑이 아니라 진실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 행함으로 표현되는 사랑을 강조하고 있습니다(요일3:18). 거기에는 형제 사랑과 서로 존경하는 것, 어려운 성도들에게 쓸 것을 나누어주는 것, 손 대접 등이 있습니다. 이처럼 참된 사랑은 형제의 어려움을 구체적으로 도와주며 손님 대접하기를 힘쓰는 것으로 나타납니다(히13:1,2). 우리 UBF 믿음의 선배들의 이러한 실제적인 사랑의 실천이 있었기에, 지금 나를 포함한 여기 계신 분들이 예수님을 만났고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은 점점 사랑이 식어지고 있습니다. 사랑 결핍으로 많은 사람들이 우울증에 걸리고 급기야 자살까지 합니다. 우리 종로2부 공동체가 사랑이 실천되는 공동체가 되길 바랍니다. 너무나 사랑의 온도가 뜨거워서 이 안에서 행복감을 느끼고, 또 다시 오고 싶은 그런 곳이 되길 기도합니다.
3. 복된 이웃과의 관계(14-21)
성도의 생활 중에서 이웃과의 관계, 특히 대하기 어려운 이웃과의 관계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14절을 읽겠습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여기서 ‘박해한다’ 이 말의 원어는 ‘뒤쫓다. 추격하다’는 뜻입니다. 끈질기게, 계속해서 괴롭히는 것을 말합니다. 한번, 두 번 괴롭히는 것 정도야 우리가 참을 수 있지만 계속해서, 끈질기게 따라오면서 괴롭히면 어떻습니까? 여간 참기 힘듭니다. 그럴 때에도 ‘저주하지 말고 축복하라’고 합니다. ‘축복한다’ 이 말은 하나님께 ‘이 사람을 복주십시오’ 비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수에 대해서 단지 꾹 참는다고, 인내한다고 해서 해결이 됩니까? 어느 순간 미움의 감정이 말과 행동으로 폭발하여 나타나기 쉽습니다. 우리는 그 사람을 위해서 복을 빌어야 합니다. 이것이 이웃 사랑 실천의 첫걸음입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말과 행동으로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우리 안에 부어주십니다.
또한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고 합니다(15). 그리스도인은 성육신하여 낮아져 이 땅에 오시고 창기, 세리,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희노애락을 함께 하신 예수님과 같이 이웃에 대한 공감 능력이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해야 합니다(17). 하나님은 우리에게 직접 원수 갚는 것을 금하셨습니다(19). 다윗은 이 원칙을 끝까지 고수하여 큰 복을 받았습니다. 사울을 죽일 기회가 몇 번 있었지만 자기 손으로 갚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하나님은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겠다’고 하셨고, 우리에게 행동지침을 주십니다. 20절을 읽겠습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는다’ 이 말이 무슨 의미입니까? 고대 근동지방에서는 불씨를 대단히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불씨를 꺼뜨려서 불씨를 얻으러 온 사람에게 불씨를 빌려주는 것은 큰 친절이며 친근한 이웃에게만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이처럼 원수를 먹이고 마시우게 하는 것은 원수를 친구로 삼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그 어떤 강퍅하고 완악한 심령도 녹일 수 있는 위대한 힘이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보면 우리를 박해하는 원수 같은 사람을 반드시 만납니다. 그 원수같은 사람에게 보복하지 않고 도리어 친절을 베풀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먼저 그 사랑을 주님께 받았고 이를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21절은 이웃과의 관계에서의 결론입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자, 오늘 말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베푸신 자비하심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성도답게 살아야 합니다. 그 첫걸음은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이 세상 가치관을 따르지 않아야 합니다.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날마다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다른 성도와의 관계에서, 이웃과의 관계에서 사랑이 실천되어져야 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성이 올바르게 될 때 교회 안에서와 이웃과의 수평적 관계성에서도 복된 삶을 살 수 있음을 꼭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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