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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5년 출애굽기 10강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출애굽기 19:1-25)2025-05-25 2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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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출애굽기 10강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


말씀/ 출애굽기 19:1-25

요절/ 출애굽기 19:5,6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출애굽기를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눈다면 오늘 말씀인 시내 산 언약 사건을 정점으로 그 이전의 출애굽기사 및 광야유랑기(1-18장)와 이후의 율법수여 및 제사규례에 대한 기록(20-40장)으로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전체에서 오늘 본장의 시내 산 언약 사건은 본서의 핵심일 뿐 아니라 전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획기적인 사건이며 천지창조 후 하나님의 영광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위대한 계시에 관한 기록입니다. 오늘의 본문인 19장은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1절부터 6절까지는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이 계시되어 있습니다. 7절부터 15절까지는 언약 체결을 앞두고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성결을 요구하시는 내용입니다. 16절부터 25절까지는 하나님께서 언약을 체결하시기 위해 시내 산에 강림하신 후 모세를 부르시는 내용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키시고 언약을 체결하신 목적이 무엇인지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신약의 언약 백성인 우리가 하나님의 원대하신 뜻을 새롭게 영접하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을 떠난 지 삼 개월이 되던 날 그들이 시내 광야에 이르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히브리력 첫째달인 아빕월 15일에 라암셋을 출발하였습니다. 이후 숙곳(12:37), 에담(13:20), 엘림(15:27), 신 광야(16:2), 그리고 르비딤(17:2,3)을 지나 마침내 시내 광야에 이르렀습니다. 그들이 도착한 날은 출애굽 후 석 달째 되는 날이었데요, 이는 두 달이 꽉차고 이제 막 세번째 달에 접어들었다는 의미입니다. 시내 광야는 아카바 만과 수에즈항 사이에 위치한 광야로 이스라엘 백성이 진 쳤던 곳은 시내 산 남동쪽으로 약 8Km 정도 뻗어있는 현재의 '와디에스세바예' 지역으로 추정됩니다. 그들은 그 광야에 장막을 쳤는데 그들 앞에는 한 산이 있었습니다. 이 산은 현재 '모세의 산'이라고 불리는 '시내 산'(해발 2,291미터)이었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산에서 그를 불러 말씀하시되 너는 이같이 야곱의 집에 말하고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말하라" 모세는 시내 산에 도착하자 예전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억하였습니다.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출3:12). 이에 모세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산 위로 올라갔습니다. 산 위에서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이 같이 야곱의 집에 말하고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말하라.”(3b) 여기서 '말하고'와 '말하라'는 원어로 '아마르'와 '나가드'인데 너는 '말해야한다', 너는 '알려야한다'는 강한 명령형 동사입니다. 이제부터 모세의 사명은 여호와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백성들에게 분명히 말하여 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야곱의 집'과 '이스라엘 자손'은 같은 의미를 두 가지 칭호로 사용한 것입니다. 이와 같은 호칭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것은 조상들에게 주신 언약을 성취하시는 것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면 모세가 백성들에게 분명히 말하여 알게 해야 되는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4-6절을 보십시오.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첫째,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먼저 하나님은 자신이 애굽에 행한 일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돌아보게 하셨습니다. 지금까지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나일강이 피로 변한 사건을 시작으로 애굽의 모든 장자가 죽임을 당한 장자재앙까지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생생히 보았습니다. 또 이들은 하나님이 홍해를 가르고 애굽의 병거들을 수장시키시는 놀라운 체험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때의 생생한 기억을 상기시키시면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확신하도록 도우셨습니다. 그들이 애굽을 나와 이곳 하나님의 산인 시내 산까지 오게 된 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독수리 날개로 업어 데리고 오신 것과 같습니다. 고대 세계에서 독수리는 가장 힘이 센 나는 짐승으로 자주 묘사되었습니다. 실제로 독수리는 그 힘과 속도, 높이 나는 능력으로 인해 새들의 왕이라 불립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독수리 날개로 업어서 빠르고 확실하게 애굽의 손에서 구원하셨음을 상기시키심으로 그들이 해방된 것이 자기들의 공로나 힘 때문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 때문임을 분명히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독수리 날개 업어 인도하였다는 표현은 그들이 쉽고 편하게 이곳에 이르렀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독수리는 새끼를 훈련시키기 위해 낭떠러지에 떨어뜨리기도 하고, 또 다시 날아가 새끼를 날개 위에 실어 나르기도 합니다(신 32:10–11). 새끼 독수리 입장에서 엄마 독수리가 갑자기 자기를 둥지 밖 절벽으로 떨어뜨리면 무슨 생각을 하겠습니까? “우리 엄마 갑자기 왜 이래? 왜 날 떨어뜨려 죽이려하지~” 하지 않겠습니까? 또 엄마 독수리가 새끼에게 비행 훈련을 시키기 위해 둥지 밖으로 일부러 먹이를 둥지 밖에 위험한 곳에 두고 멀리서 지켜보고 있으면 “우리 엄마가 우리 밥 안 주고 굶겨 죽이려 한다~” 할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곳까지 오는 동안에도 백성들로 하여금 홍해를 마주치게 하시고, 단물이 없는 마라에 거하게 하시고, 또한 신 광야에서는 양식이 없는 상황에 처하게 하기도 하셨습니다. 그러한 절박한 상황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우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그대로 방치하시는 것이 아니라 때로 역경에 처하게 하심으로 믿음의 연단을 받게 하시고 강한 백성들로 성장하게 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백성들이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과 사랑을 확신하도록 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이제부터 맺는 하나님과의 언약관계가 온전히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는 가운데 맺도록 하기 위함이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언약이란 무엇인지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이란 거래가 아닙니다. 유익을 따지는 계약이 아니며, 양측의 이해관계를 조율하는 협상도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언약은, 하나님께서 죄 많은 인간에게 일방적으로 내어주신 은혜의 말씀입니다. 언약은 사람이 제안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세우시고 명하신 것입니다. 그 시작도 하나님이시며, 그 완성도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사람은 단지 그 언약의 수혜자일 뿐입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언약을 명하셨고(수 7:11), 세우셨고(레 2:9; 신 5:2), 주셨다(행 7:8)고 말씀합니다. 피조물이요 죄인인 인간의 욕망이나 주장이 전혀 배제된 채 오직 모든 것이 하나님에 의해 제시되고 집행되어지는 것이 성경언약의 특징입니다. 이는 궁극적으로 그 언약의 내용과 목적이 인간의 구원과 관련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과 이제 이러한 언약을 체결하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이 언약을 체결하기에 앞서 먼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와 사랑을 깊이 확신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둘째,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이 말씀은 온 우주에 대한 하나님의 정당한 소유권 주장이며 선포입니다. 이 시점에서 특별히 하나님이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은 여호와가 단지 이스라엘에 국한되는 그러한 지역 신이나 국가 신이 아니라는 것을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시내 산에서 모세를 처음 부르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이곳으로 오게 하셨다고 해서 하나님이 시내 산을 거처로 삼으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전래동화에 나오는 산신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 더 나아가 만물의 주인이십니다. 이와 같은 여호와께서 특별히 이스라엘을 택하여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셨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함이셨습니다.


셋째,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하나님은 먼저 이스라엘의 말을 잘 들어주시고, 그들과의 언약을 잘 지키셨습니다. 하나님은 바로의 압제에서 부르짖는 이스라엘의 고통과 절규를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과 하신 언약을 기억하시고, 지키셨습니다. 그 결과가 현재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시내산 앞에 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처음부터 “내 백성”이라 10번이상 부르셨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는 시점도 이미 그들을 바로의 손에서 구원하신 후 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그들을 자신의 백성 삼으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스라엘과 새로운 관계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하나님을 섬겨야 할지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이 일방적인 은혜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는 있어도,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성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행위가 뒷받침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여기서 '소유'에 해당되는 단어 '세굴라'는 평범한 소유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소유물, 즉 '매우 귀중한 소유물'을 가리킵니다.(NIV-'my treasured possession') 이 단어는 나중에 왕의 보물이나(대상29:3), '금과 은'(전2:8)을 가리키기도 하였습니다. 즉, 하나님의 소유가 된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열방 중에서 하나님이 가장 귀중히 여기시는 보물과 같은 백성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특별한 존재가 된다는 것은 기쁜 일입니다. 우리는 다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이 있지 않나요? 학생들은 학교에서 교수님이나 친구들 사이에서 특별한 사람, 인싸가 되고 싶을 겁니다. 직장인들은 고객이나 직장 상사에게 특별한 직원이고 싶을 겁니다. 회사를 운영하시는 분은 내 회사가 남들보다 뭔가 특별한 회사이길 바랄 겁니다. 교회에서도, 친구들 사이에서도 특별한 사람이고 싶지 않나요? 그런데 천지를 창조하시고, 온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에게 특별한 존재가 되는 길이 있다고 성경을 말씀합니다. 그것은 내가 많은 지식을 쌓는 것도 아니고, 돈을 많이 벌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봉사 활동을 많이 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민족 중에서 특별한 보물 같은 내소유가 될거다” 말씀하십니다. 학교에서 올 A 받지 않으셔도 되고, 좋은 대학 다니고 있지 않아도 되고요, 대기업에 안 다녀도 됩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고, 그 분과의 언약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하나님께 특별한 소유, 보물 같은 존재가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이 이미 그들을 특별한 소유, 보물 같은 존재로 여기신다는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말씀하고 계시고, 언약을 맺기 원하시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이에 반응할 때, 사랑의 관계성이 열매를 맺기 때문입니다. 친구 사이에서도 그렇잖아요. 우리 베프하자. 해놓고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하고 내 말은 건성으로 듣고 나랑 한 약속은 맨날 안 지키고, 자기에게 유리한 약속 만 지키라고 강요한다면, 그런 관계는 오래가지 못할 겁니다. 반대로 굳이 베프 같은거 하자고 안 해도 내가 힘들 때 내 안색을 먼저 살피고 먼저 말 걸어주고, 나랑 한 약속은 꼭 지키는 그런 사람, 곧 나를 소중하게 여겨주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내게도 소중한 사람이 되지 않나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건 대단하고 특별한 것이 아닌 아니라 매우 상식적인 수준의 것입니다.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킨다”고 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는다는 것은 단순히 귀로 듣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삶으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언약을 지킨다는 건, 그 말씀을 소중하게 여기고, 삶에서 실천하려 애쓰는 자세를 말합니다. 이 두 가지는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진짜로 들었으면 지키게 되고, 지킬 때 비로소 진짜로 들은 것입니다. 이런 삶을 살 때, 자연스럽게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성이 깊어지고, 특별한 소유물이 됩니다.


넷째,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이 말씀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보배가 된 것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곧, 그들은 하나님께 대하여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 됩니다. 제사장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사람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연결자, 다리, 브릿지 같은 존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에서 그런 역할을 가장 잘 보여준 사람이 있습니다. 네, 바로 모세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백성 사이를 오가며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또 백성의 어려움을 하나님께 아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모습은 예수님을 닮았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서 완전한 중보자가 되셨습니다. 우리는 하루하루 내 삶 챙기기도 벅찹니다. 청년들은 공부, 취업, 대인관계, 우리 목자님들은 자녀, 직장, 건강 등 남 도와줄 여유 따윈 없어 보입니다. 여유가 생기더라도 우리 마음 깊은 곳엔 저마다 대인관계에서 받은 상처 때문에, 다른 사람과 가까워지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어요. SNS 친구는 많은데, 정작 속 얘기 나눌 친구 하나 없는게 현실입니다. 그런데 모세도 그랬습니다. 모세도 실패한 사람이었고,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했던 사람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모세를 처음엔 무시했고, 그는 도망자가 되어 광야로 숨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모세를 다시 부르셨고, 이때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자신이 가장 가기 싫었던 애굽으로 다시 나아갔습니다. 놀라운 건, 그렇게 중보자의 길을 걸으면서, 모세는 자기 내면의 상처와 아픔도 서서히 치유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그는 하나님과 가장 깊은 교제를 누린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중보자로 부르시는 이유는, 누군가를 돕기 위한 목적도 있지만, 먼저 우리와 깊이 만나주시기 위함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 자신을 회복시키시기 원하십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돕기 위해 먼저 치유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픔과 실패 조차도 다른 사람을 살리는 도구로 쓰십니다. 결국 가장 큰 은혜를 받는 사람은, 중보자로 쓰임받는 바로 ‘나’ 자신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처럼 우리를 만나 주시고, 우리의 생명을 소생시키시며, 더 나아가 우리를 생명을 살리는 존재로 귀하게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 각자를 제사장이요 중보자로 쓰시고자 할 때, 아멘으로 화답하는 저와 여러분 되길 기도합니다.


'제사장 나라'는 헬라어로 번역된 70인 역에서는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의미로 번역하였습니다. 즉, 이는 이스라엘이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특별히 선택된 민족으로서(4:22) 하나님과 열방 사이에 중재하는 제사장임과 동시에 열방을 다스리는 왕권을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신약에서 성도들을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벧전2:9) "제사장 나라"가 된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국가적으로 제사장 사명을 맡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그들 안에 제사장을 가질 뿐 아니라 그들 나라가 다른 나라들에 대해 제사장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사61:6) 로마는 세계에 대하여 법률과 국가체계로 이바지하였습니다. 그리스는 지식과 예술로 세계를 가르쳤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러한 것과 비교되지 않은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신앙으로 세계를 가르치고 그들을 하나님께 인도하는 것입니다. 실로 이스라엘의 최대의 공적은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얻었고 이를 온 세계에 전달하였습니다.

“너희는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거룩하다”는 말은 웬지 너무 착하거나, 죄를 전혀 안 짓는 사람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거룩함’의 뜻은 “세상과 구별된 존재”라는 뜻 입니다. ‘거룩함’의 반대말은 ‘더러움’이 아니라 ‘죄’인데, 그냥 자연적인 상태, 즉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에서 벗어나면 그게 아무리 멀쩡하고 괜찮아 보여도 죄의 영향 아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세상 속에서 자기 백성을 따로 불러내어, “너희는 나만을 섬겨라. 내 뜻을 따라 살아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출애굽기 19장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요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여기서 중요한 표현이 “내게 대하여”라는 말입니다. ‘사람들에게 착하다고 인정받아서’ 거룩한 게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위해 거룩해야 합니다. 사람들 눈에 멋져 보이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구별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원래 ‘노예’ 였습니다. 몸도 노예, 마음도 노예였습니다. 지금도 노예근성을 쉽게 못 벗어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그들을 향해 “너희는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 될 거야” 선언하십니다. 이것은 자격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어 가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다만 이것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고 언약을 지키는 삶을 지속적으로 살아갈 때 이루어 집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세우시고, 온 세상을 구원하는 도구로 사용하시려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도록 인도하셨고, 다른 민족을 하나님께로 이끌 책임도 맡기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어요. 하나님 앞에 제사장처럼 살기보다는 ‘우리는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우월감에 빠져 있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언약은 그들과 잠시 끊기게 되었고,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 언약의 길을 여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사랑과 희생이 무엇인지 보여주셨고, 복음은 다시 이스라엘에게 먼저 주어졌지만 그들은 결국 그 기회를 놓쳐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새로운 포도주를 담을 새 가죽부대, 곧 믿음으로 사는 새로운 백성을 필요로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언약을 육신의 이스라엘에게만 머무르게 하지 않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믿음으로 사는 모든 사람에게 확대하셨습니다. 우리도 믿음으로 영적인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고, 지금 이 시대의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부름받았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된 이유는 우리가 뭔가 잘해서가 아니라, 이스라엘이 불순종하였기 때문입니다. 또 예수님의 공로가 우리에게 흘어왔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11장에서 우리를 ‘돌감람나무 가지’에 비유합니다. 원래 감람나무(이스라엘)에 붙어 있던 가지도 잘라내셨으니, 우리가 교만하면 우리도 잘릴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이미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으니, 이제는 마음대로 살아도 되지 않나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 거룩하게 사는 게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기 때문에 그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고, 그 말씀을 삶에서 지켜내며, 하나님의 언약 안에 머무는 것,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부르심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도 세상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열방을 위한 중보기도자가 되어야 하고, 날마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자신을 씻으며, 성령의 도우심으로 거룩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죄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를 세계를 위한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불러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에 감사 찬양 드립니다.


7절을 보십시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산에서 내려와 백성의 장로들을 불러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했습니다. 이에 백성들은 한 목소리로 응답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 (8절) 그들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이기로 결단했습니다. 모세는 이들의 대답을 다시 하나님께 아뢰었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빽빽한 구름 가운데서 모세에게 임하였습니다. 구름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면서도 임재를 드러내는 표식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을 우리 인간이 직접 대면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산 정상에서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셨고, 이 장면을 백성들이 직접 듣고 목격하게 하셨습니다. 이는 모세가 단순한 지도자가 아닌, 하나님의 대리자이며,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의 중보자라는 사실을 백성들이 믿도록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모세가 전하는 말이 자신의 사사로운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임을 백성이 알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10, 11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백성에게로 가서 오늘과 내일 그들을 성결하게 하며 그들에게 옷을 빨게 하고 / 준비하게 하여 셋째 날을 기다리게 하라 이는 셋째 날에 나 여호와가 온 백성의 목전에서 시내 산에 강림할 것임이니”

모세가 백성의 응답 곧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겠다는 결단’을 하나님께 아뢰자,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을 성결하게 하도록 명하셨습니다. 사실 하나님은 절대 주권자이시기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묻지 않으시고, 처음부터 “너희는 이렇게 해!”라고 명령 하셔도 되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동의를 구하십니다. 이는 그들에게 거절할 자유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나와 언약을 맺고, 내 말을 잘 지키면 내가 너희를 나의 보물로 삼고,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겠다. 어떻게 하겠니?”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노예처럼 다그치지 않으시고, 인격적으로 물어보시며, 대답을 기다리십니다. 오늘 이 순간 조용히 여러분의 마음을 두드리시며 언약 맺기를 기다리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분이 계시나요? 하나님의 위대하고 값진 초청에 “아멘”으로 응답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축언합니다.


모세가 백성의 말, 곧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을 다 행하겠다는 말을, 여호와께 아뢰자 하나님은 백성들을 성결케 하도록 하십니다. 그들로 하여금 이틀 동안 옷을 빨게 하고 제3일째 하나님이 시내 산에 강림하시는 날을 준비하도록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를 위하여 세속의 때를 벗어버리고 하나님께 드려질 만한 성결한 자들이 되어야 되었습니다. 모세에게 시내 산 주위에 경계를 정하고 사람들이 그 경계를 침범하여 산에 오르는 일이 없도록 하셨습니다. 호기심에 그 경계를 침범하는 자나 짐승은 반드시 죽이되 손을 대지 말고 돌로 쳐 죽이거나 화살로 쏘아 죽이도록 하셨습니다. 모세가 다시 산에서 내려와 백성에게 말하여 그들을 성결하게 하고 옷을 빨도록 하고 여인을 가까이 하지 말도록 하였습니다.


16절을 보십시오. "셋째 날 아침에 우레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매우 크게 들리니 진중에 있는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근본적으로 보이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무소 부재하신 분입니다. 그러나 시내 산에 이와 같이 우레와 번개를 동반하고 구름으로 나타나심으로 인간들에게 자신의 위엄과 영광을 가시적으로 드러내 보이십니다. 물론 그 어떠한 가시적인 것도 창조주의 위엄과 영광을 온전히 드러낼 수는 없습니다. 나팔 소리는 여호와 하나님이 친히 개입하시는 것을 위엄스럽게 선포함(계8:6,7; 9:1,3)과 동시에 이제 감추어진 뜻을 밝히 계시하실 것이라는 일종의 예고였습니다. 백성들은 얼마 전만 해도 하나님의 언약에 대하여 호언장담을 하였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여호와 하나님의 놀라운 영광과 위엄을 목격한 그들은 두려움에 사로 잡혀 떨었습니다. 아담 이후 타락한 인간은 본성적으로 죄악되어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볼 때 그 앞에 다 죽은 자처럼 비참하게 되어 떨지 않을 수 없습니다.(사6:5; 단10;8; 계1:17) 모세는 하나님을 맞으려고 백성을 거느리고 진에서 나와 산기슭에 섰습니다.(17) 


18절을 보십시오. "시내 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그 연기가 옹기 가마 연기 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 이는 시내 산 전체가 온통 연기로 뒤덮였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불 가운데 임하셨으므로 초자연적인 연기가 나타나 시내 산을 덮었을 것입니다. 신명기 4:11절은 이에 대하여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가 마치 맹렬히 타오르는 화염같이 온 산에 충만히 퍼져있었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 강림하셨습니다. 소멸하시는 불이신(히12:29) 하나님의 위엄스러운 강림으로 온 산이 크게 진동하였습니다. 팔레스타인이나 아라비아 지역은 유사 이래로 지진이나 화산이 발생하는 곳이 아닙니다. 온 산을 크게 진동한 것은 하나님의 강림하심으로 인한 초자연적인 일이었습니다. 맹렬한 불과 연기, 산이 폭발할 것 같은 큰 진동으로 인해 사람들은 거의 죽은 자 같이 되었을 것이고 뒤로 도망치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19절을 보십시오. 나팔 소리가 점점 커졌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더욱 모세에게 가까이 오고 계심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모세는 "(그때) 내가 심히 두렵고 떨렸다"(히12:21)고 회상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두려움 가운데 말하였고 하나님은 모세에게 음성으로 답하셨습니다.(19) 20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시내 산 꼭대기로 모세를 부르시자 그가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세가 산꼭대기에 올라오자마자 다시 내려가서 백성을 경고하라고 하십니다. 백성이 밀고 들어와 여호와를 보려고 하다가 많이 죽을까 염려하신다고 하십니다. 또 제사장들에게 그 몸을 성결하게 하라고 하십니다. 그 때 모세는 “이미 여호와께서 산 주위에 경계를 세워 산을 거룩하게 하라고 명령하셨고, 제가 그것을 백성들에게 알렸으니 백성이 시내 산에 오르지는 못할 것입니다.”  말씀드렸습니다. 지금 내려가서 다시 말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모세에게 동일한 말씀을 다시 하십니다. "가라 너는 내려가서 아론과 함께 올라오고 제사장들과 백성에게는 경계를 넘어 나 여호와에게로 올라오지 못하게 하라 내가 그들을 칠까 하노라". 여기서 '치다'는 '때려 부수다', '터치고 나오다'라는 강한 의미의 동사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고의적인 침범에 대하여 자동적으로 그리고 즉각적으로 타격하시는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절대신성성을 강조하시고 애써 산꼭대기까지 올라온 모세에게 다시 내려가서 제사장들과 백성에게 엄한 경고를 하도록 명하셨습니다. 신약에 와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강조되면서 오늘날 그의 절대적인 신성성이 등한히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중보의 공로로 말미암아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감이 허락된 신약의 성도들은 이 은혜를 감당하며 하나님의 절대신성성을 약화시키지 않도록 할 책임이 있습니다. 


25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백성에게 내려가서 그들에게 알리니라" 모세는 다시 내려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하였습니다. 모세는 이와 같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하고, 또 백성들의 말을 하나님께 전하는 중보자의 역할을 감당합니다. 이는 오늘 본문 19장에서 산꼭대기를 오르고 내려오는 것이 세 번 반복이 되고(19:3/7;8/14;20/25) 앞으로 20장과 34장에 걸쳐 메센저로서 산 정상을 5회를 더 오르락내리락 합니다.(20:21; 24:3; 24:9; 24:15; 32:15; 32:30; 32:34; 34:4; 34:29) 모세는 오실 그리스도의 예표로서 중보자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였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신약시대의 제사장 나라요, 거룩한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는 스스로 이룬 자격이 아니며, 열심이나 업적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그분께서 먼저 부르셨고, 먼저 언약을 주셨으며, 먼저 피 흘려 길을 여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이 은혜를 깊이 알고, 하나님의 말씀을 날마다 배우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가 한국과 세계의 캠퍼스 지성인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쓰임받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다가오는 여름수양회 준비와 초청역사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쓰시고자 할 때, 감사와 기쁨으로 섬기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