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고린도후서 제 9 강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말씀 / 고린도후서 11:16-12:10 요절 / 고린도후서 12: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바울은 기독교 이천 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도 중의 하나입니다. 그는 예수님에 대해 전혀 들어보지 못한 소아시아와 유럽을 개척하여 수많은 교회를 세웠습니다. 신약성경 27권중 13권을 썼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가 그리스도를 위해 당한 고난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엄청난 고난과 시련을 이겨내며 불멸의 업적을 이룬 것을 볼 때 바울은 참으로 불사조와 같은 분이요 강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은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강함이 어디서 나온 것일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진정으로 강한 자들이 되는 비밀을 배우길 기도합니다.
지난 강의에서 바울은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고 하였습니다. 자기 자신을 자랑하지 말고 오직 주님을 자랑하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자화자찬하는 거짓교사들을 책망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바울 자신도 부득불 자랑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고린도 성도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라고는 하지만 자기 자랑을 해야 되니 바울 스스로도 어리석게 여겨졌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말합니다. "내가 다시 말하노니 누구든지 나를 어리석은 자로 여기지 말라 만일 그러하더라도 내가 조금 자랑할 수 있도록 어리석은 자로 받으라(16)." 바울은 자기를 너무 어리석은 자로 여기지는 말아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러면서도 결국 그들이 어느 정도 자기를 어리석게 여길 것을 알지만 부득불 조금 자랑하겠다고 합니다.
19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지혜로운 자로서 어리석은 자들을 기쁘게 용납하는구나." 이 말은 '고린도 성도들아, 너희는 자기 자랑을 늘어놓는 거짓 교사들을 용납했느니 참 지혜롭기도 하구나!' 하는 풍자적인 말입니다. 거짓 교사들은 어느 정도까지 스스로를 높였습니까? 20절을 보십시오. "누가 너희를 종으로 삼거나 잡아먹거나 빼앗거나 스스로 높이거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하는도다." 그들은 사도의 권위를 주장하며 왕처럼 성도들 위에 군림했습니다. 그들을 종처럼 부렸습니다. 경제적으로 갈취했습니다. 상상하기 힘들지만 때로는 신자들의 뺨을 치며 모독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성도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21절에서 바울은 자기는 너무나 연약하여 차마 그런 짓을 할 수는 없었다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거짓교사들의 자기 자랑하는 것에 대항하여 자기도 담대히 자랑하겠다고 합니다.
22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냐 나도 그러하며." 거짓 교사들은 자기들이 히브리인이며, 이스라엘 사람이고,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자랑했습니다. '히브리인'이란 '강 건너편에서 온 사람'이라는 뜻의 ‘이브리’에서 나온 것으로, 가나안 사람들이 유브라데강을 건너 온 아브라함과 그 자손을 일컫던 말이었습니다(창14:13, 수24:3). 이 단어가 점점 이스라엘 민족의 혈통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구약 성경은 히브리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인들은 자기 민족 언어로 기록된 성경을 자랑스러워했고 그 언어에 정통하여 권위 있게 가르칠 수 있었습니다. "나는 히브리인이야, 북조선 표현으로는 백두혈통이라고! 나야말로 구약 성경을 정확히 해석하여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하며 자랑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선택받은 족속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신약시대에는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아무 차별이 없는 복음이 전파되었지만 유대인들은 여전히 아브라함의 후손, 곧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이라는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거짓 사도들은 이러한 외적인 혈통과 가문과 민족을 자랑하였습니다. 바울은 자신도 정통 히브리인이요 이스라엘 사람이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그들과 비교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23-27절은 바울이 복음 전도자로 살면서 받은 고난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바울은 거짓교사들에 비하면 비할 수 없이 극심한 고난을 받았습니다. 먼저 그는 여러 번 옥에 갇혔습니다. 바울은 이 편지(고린도후서)를 AD 55년경에 썼습니다. 사도행전 기록에 의하면 그때까지 바울은 빌립보에서 한번 투옥된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의 가이사랴나 로마에서의 투옥은 이 편지를 보낸 이후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이를 볼 때 사도행전에 기록되지 않은 바울의 투옥 사건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AD 96년에 로마의 클레멘트가 보낸 서신에는, 바울은 모두 일곱 번 투옥을 당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는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하였습니다. 24절을 보면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습니다. 당시 율법(신25:1-3)에 의하면 태형은 40대를 넘지 못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실수라도 40을 넘지 않도록 죄수에게 39대 까지만 때렸습니다. 유대 회당 앞에 기둥을 세워 그곳에 묶고, 소가죽 채찍으로 13회씩 세 번을 때렸습니다. 이러한 채찍 형벌은 매우 고통스러워 많은 사람들이 매를 맞는 동안 죽기도 했습니다. 사도행전에는 바울이 이러한 태형을 받은 기록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여기서 간증하지 않았더라면 영원히 드러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끔찍한 벌을 AD 55년 이전에 벌써 다섯 번이나 받은 것입니다.
25절에 나오는 태장은 채찍이 아니라 몽둥이로 맞은 경우입니다. 세 번 태장으로 맞았습니다. 세 번 파선을 했습니다. 파선이란 바다에서 배가 침몰하는 것으로 곧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그 외에도 무수한 위험을 당하고, 굶주리고 목마르고 잠을 못자는 날들을 수없이 보냈습니다. 바울이 이러한 고난 받은 것을 일일이 간증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물론 거짓 교사들보다 바울이 그리스도를 위해 훨씬 더 많은 고난을 받은 것을 증언하는 점도 있지만, 이러한 수많은 위험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지금까지 그의 생명을 지키시고 복음을 전하게 하신 것 자체가 그를 사도로 삼으신 증거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9:15,16절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은 바울을 부르신 목적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실로 바울은 이 예언의 말씀대로 그리스도를 위해 말로 다할 수 없는 고난을 받은 주님의 택한 그릇입니다.
또한 바울은 내적으로도 많은 고난을 받았습니다. 28,29절을 보십시오.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아니하더냐" 교회에 어려움이 생겼다는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그는 양들에 대한 염려와 걱정으로 그의 마음이 새까맣게 타 들어갔습니다. 걱정과 근심, 불안과 괴로움으로 애간장이 끓었습니다.
30절을 보십시오.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우리 같으면 바울과 같은 고난을 받는 일이 있으면, 무용담을 말하듯이 자기 자신이 얼마나 강하고 용맹스러운가를 자랑할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신은 약한 데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이겨낸 것을 증언합니다. 그 예로 다메섹 탈출 사건을 하나 간증합니다. 32,33절을 보십시오. "다메섹에서 아레다 왕의 고관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켰으나 나는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났노라." 사도행전 9:20을 보면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후에 즉시로 다메섹 각 회당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언하였습니다. 그때 아레다 왕의 고관인 다메섹성의 통치자가 바울 체포명령을 내렸습니다. 성문을 철통같이 경비하여 바울이 빠져나갈 길이 없었습니다. 이때 바울은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다 체포되어 순교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심히 두려웠던 것 같습니다. 광주리에 들어가 몸을 숨겼습니다. 사람들이 들창문으로 광주리를 내려줌으로 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자신도 죽음을 두려워하는 연약한 인간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2:1절을 보십시오.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바울은 사도권을 변호하기 위해 부득불 자신이 겪었던 신비한 체험을 말합니다. 당시에나 지금에나 사람들은 이런 신비한 체험에 쉽게 이끌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바울이 체험한 것은 환상과 계시입니다. 환상은 무엇을 보는 것이요 계시는 보거나 듣거나 느끼거나 하는 것입니다. 모든 환상은 계시지만 모든 계시가 환상은 아닙니다. 바울에게 환상과 계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것을 "주의 환상과 계시"라고 말합니다. 거짓 사도들과 같이 자기 스스로 신비한 경험을 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직접 바울에게 주신 것들이었습니다.
그는 이런 체험을 말하면서 사람들이 자기를 너무 우러러 볼까봐 자신을 3인칭 화하여 말합니다. 2,3절을 보십시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그는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당시 많은 유대인들은 하늘이 삼층으로 되어 있다고 믿었습니다(왕상 8:27). 첫째 하늘은 새가 날아다니며 구름이 있는 대기권을 말하고, 둘째 하늘은 첫째 하늘을 덮고 있는 반구형의 금속판, 셋째 하늘은 금속판 너머 하나님과 천사들이 있는 곳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바울은 그 셋째 하늘(4절에서는 낙원으로 표현됨)에 이끌려 올라가 사람의 언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말을 들었습니다. 그 경험이 너무 신비해서 자기의 영혼만 거기에 갔었는지 자기의 몸도 같이 올라갔었는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이 하늘에 올라갔었다는 사실만 말하고 그 내용에 대해서, 곧 무엇을 보았는지, 구체적으로 무엇을 들었는지, 그 하늘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등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하지 않습니다. 이는 6절에서와 같이 사람들이 지나치게 곧 자기를 너무 위대하게 볼까봐 두려웠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바울이 경험한 것 같은 신비한 체험을 하면 자랑합니다. 때로 과장합니다. 하나 본 것도 둘로, 둘 본 것도 셋으로 과장하여 자랑합니다.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자기를 높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사람들이 그런 것에 관심을 갖기보다 하나님이 제시하신 구원의 길, 곧 그리스도의 복음의 말씀을 듣고 믿기를 바랐습니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신비한 것들에 관심을 갖고 그런 것을 쫓아다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비한 체험을 말씀보다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러한 자세는 매우 위험합니다. 왜냐하면 사탄 마귀도 이적을 행하고 신비스런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적 좋아하다가 마귀의 시험에 들기 쉽습니다. 미국에서 한 신자가 병이 들었습니다. 그 병을 낫고자 교회에 가서 기도도 하고 여러모로 애도 써 보았지만 낫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한번은 싸이언톨로지 모임에 참석했습니다. 싸이언톨로지는 1954년에 미국에서 생긴 신흥종교입니다. 기독교가 아닙니다. 그들은 과학 기술을 통한 정신치료를 믿고 힌두교에서 주장하는 윤회설도 믿습니다. 그 모임에서 병이 나았습니다. 실제로는 그 모임에서 낫게 해 준 것이 아니라 나을 때가 되어서 나은 것이겠죠. 그런데 그 사람은 교회를 떠나 그 모임으로 갔습니다. 그 사람은 그때까지 하나님을 섬긴 것이 아니라 자기를 섬긴 것이 드러났습니다. 자기 몸 낫는 것을 하나님을 섬기는 것보다 더 중히 여긴 것입니다. 하나님을 이용하여 자기 유익을 구하다 시험에 들어 그 영혼도 멸망하는 길로 간 것입니다.
2010년에 미국의 알렉스라는 소년이 교통사고로 죽음의 문턱에 갔다가 회복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가 자서전을 냈는데 "천국에서 돌아온 소년"이었습니다. 영화로도 개봉되었습니다. 한국에서도 번역 출판되어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책이 출판된 지 5년 후인 2015년에 그는 자기의 자서전은 모두 거짓말이라고 고백했습니다. “나는 죽지도 않았었고, 천국에 가지도 않았었고, 나는 성경을 읽어본 적도 없다. 나는 단지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싶었을 뿐이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덧붙여 말했습니다. "그 책이 잘 팔리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내게 괴로운 일이었다. 아무도 그 책의 진실성에 대해 의심을 제기되지 않는 것이 더욱 괴로웠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길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겸손히 하나님이 제시하신 방법을 따라 주님을 섬기길 기도합니다.
바울은 실상 삼층천 체험 외에도 여러 번 환상과 계시를 받았습니다(행9:2, 16:9, 18:9, 22:17, 23:11, 갈1:16, 2:2). 이런 그는 자만해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에게 무슨 은혜를 베푸셨습니까? 7절을 보십시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은 그에게 육체의 가시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해진 사람을 겸손케 하기 위해 가시를 주기도 하시지만, 교만해질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 그렇게 되지 않도록 미리 가시를 주기도 하십니다. 여러분 중에 자신이 신앙생활 잘 하고 있는데도 하나님이 가시를 주셨으면 “아, 내가 이대로 가면 교만해질 가능성이 있어서 미리 주신 것이구나!” 라고 생각을 하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주신 육체의 가시를 사탄의 사자(a messenger of Satan)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탄의 사자'를 공동번역과 새번역 성경에서는 '사탄의 하수인'으로 번역하였습니다. 바울에게 ‘육체의 가시’가 주어졌는데 여기서 '가시'라는 말은 '스콜로프스'로 ‘뾰족한 창’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학자들은 여러 가지 견해를 제시합니다. 갈라디아 4:15절에 보면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라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말합니다. 이를 근거로 바울이 안질이 심했다고 추측하기도 합니다. 편두통이 있었다고도 봅니다. 또는 바울이 가는 곳마다 겪은 유대인들의 방해, 그가 당한 모든 환난을 가시라고 보기도 합니다. 우리가 바울의 가시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것은 바울이 자만해지지 않도록 하나님이 주신 고통스러운 그 무엇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표현으로는, 9절에서 말하듯이 바울이 자만하여 자기를 의지하는 자가 아니라, 언제나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그리스도의 능력이 그의 삶 가운데 나타나도록 하기 위해 주신 그 무엇입니다.
8절을 보십시오.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바울은 육체의 가시가 너무 괴로워 그것이 떠나도록 세 번 주님께 간구하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제거해주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9절을 보십시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My grace is sufficient for you)가 무슨 뜻일까요? “바울아, 네게 현재 고난이 많지만, 지금까지 네게 베푼 은혜가 족하니 감사함으로 참고 지내라”는 뜻일까요?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는 말의 의미는 이어지는 구절을 생각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설명 구절이 무엇입니까?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for my power is made perfect in weakness". 바울이 약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온전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즉, 가시로 인해 바울은 하나님을 간절히 의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기도와 믿음을 받으시고 역사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결국 바울의 인간적인 능력보다 더욱 강한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고 바울은 강한 자가 되어 모든 복음의 원수들을 무찌르고 승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바울의 가시는 그로 하여금 교만하지 않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놀라운 지혜를 배웁니다. 우리는 아무 문제없는 편안한 삶을 살기 원합니다. 조금만 노력해도 학점이 잘 나오고 장학금도 받기 원합니다. 직장에서는 승진도 잘 되고 프로젝트마다 대박이 터지길 바랍니다. 캠퍼스에 올라가기만 하면 양들이 척척 붙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만일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한 삶은 우리를 나태하게 만들 것입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할 필요도 없고, 굳게 의지할 필요도 없게 될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자기 힘을 믿고 사는 자들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닙니다.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하는 것입니다. 사탄 마귀는 우주에서 하나님 다음으로 강한 제 2인자입니다. 우리 인간의 힘으로 싸우면 백전백패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의 능력으로 싸울 때만이 이 영적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이 오묘한 하나님의 지혜를 깨달은 바울은 말합니다. 9b절을 다시 한 번 보십시오.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가 약할 때 그리스도의 능력이 그에게 머물렀습니다. 모든 난관을 뚫고 나갈 수 있는 강력을 얻었습니다.
이런 비밀을 깨달은 그의 고백이 무엇입니까? 10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 - 이런 것들은 인간적으로 볼 때 기뻐할만한 것이 아닙니다. 슬퍼할 것들입니다. 괴로워할 것들입니다. 내가 열심히 양을 치려고 하는데 독감에 걸려 꼼짝 못하게 되면 ‘하나님 왜 그러십니까?’ 하는 마음이 듭니다. 일대일 잘하던 양이 잠수를 하면, 캠퍼스 전도를 금지하는 분위기가 되면, 기숙사 경비 아저씨 얼굴이 점점 험악해지면, ‘하나님, 왜 점점 더 역사를 섬기기 힘들게 하십니까?’ 하는 마음이 듭니다. 국제수양회를 가려는데 갑자가 아르바이트가 끊기면 절망이 됩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런 때에도 기뻐하였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When I am weak, then I am strong). 바울은 "내가 아무리 강해도 나 자신을 의지하면 나는 약하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약해도 하나님을 의지하면 나는 강하다"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는 그에게 단지 머릿속의 이론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삶에서 나타난바 된 살아있는 믿음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믿음이 있었기에 자신의 연약함과 고난을 보는 관점이 달랐습니다. 고난이 올 때마다 "예스! 이것이야 말로 내가 정말로 강해질 좋은 기회야"라고 생각했습니다. 자기를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온전히 의지하였습니다. 이러한 자세에서 그의 불사조와 같은 스피릿, 활화산과 같은 용기, 불굴의 개척 정신, 곧 하나님의 능력이 나온 것이었습니다.
창세기의 요셉은 도단에서 형들에 의해 구덩이에 던져졌습니다. 그는 형들에게 자기의 생명을 구해주기를 애걸하였습니다. 하나님께 그 구덩이에서 건져주시도록 세 번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무 응답이 없으셨습니다. 그는 애굽에 종으로 팔려갔고, 그곳에서 13년간 고난을 당했습니다. 모함을 받아 왕의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습니다(시105:18). 형들에게 배반을 당해 사랑하는 아버지의 품을 떠나, 감수성이 가장 예민한 그 시기에 이방 객지에서 노예요, 죄수로 살았습니다. 그는 심히 연약해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시련 가운데 두셨지만 그를 홀로 두지 않으셨습니다. 그와 함께 하사 때마다 믿음을 주시고, 힘을 주시고, 지혜를 주셨습니다. 이러한 고난을 통해 부잣집 막내아들 같은 그를 애굽을 섬길 수 있는 능력있는 믿음의 사람으로 빚어가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도 바울에게 육체의 약함과 외적인 시련을 허락하시고는 "그래, 너 혼자 알아서 잘 감당해봐라"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그에게 필요할 때 마다 도움을 주시고 힘을 주시고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바울도 말했습니다.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로마제국의 극심한 박해를 받았습니다. 신자들은 원형경기장에서 맹수의 밥이 되었습니다. 십자가 처형을 당했습니다. 사람들은 로마제국의 박해로 인해 기독교는 지구상에서 사라질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박해를 받을수록 기독교 신앙은 더욱 강력한 힘으로 뻗어나갔습니다. 신자들이 연약했을 때 그들은 강했습니다. AD 313 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밀라노 칙령을 내려 기독교를 공인하자 사람들은 기독교는 더욱 창성하리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박해가 사라진 기독교는 급속히 몰락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세금을 면제해주고 각종 혜택을 주는 기독교로 몰려들어왔습니다. 교회는 세속화되었습니다. 생명력을 잃어버리고 정치 권력화 하였습니다. 신자들이 강해졌을 때 그들은 약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십자가 신앙입니다. 고난과 함께 가야되는 신앙입니다. 자기부인, 자기 십자가의 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십니다. 실수하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꼭 필요한 연약함과 고난을 허락하십니다. 그 허락하시는 고난은 우리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강해지도록 우리를 약하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교만하지 않게 하고 더욱 간절히 하나님을 붙들게 하도록 하시는 사랑의 끈입니다. 우리가 이를 믿고 우리의 육체의 가시 가운데도 기뻐하는 믿음을 덧입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 하나님을 굳게 의지할 때 반드시 승리하게 하십니다. 주님, 연약한 우리, 고난 많은 우리를 통해 당신의 능력을 드러내시고 영광 받으소서!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역사는 하나님이 하시는 역사입니다. 우리 힘으로 사탄 마귀를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가 자신의 약함과 고난을 기회로 삼아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며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의 삶을 통해 나타나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