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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6년 신년 1강 (요한복음13:1-38)_ 서로 사랑하라2026-01-05 0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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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신년 1강 


서로 사랑하라


말씀/ 요13:1-38절

요절/ 34절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Happy new year! 여러분들은 새해를 맞이하여 어떤 목표를 잡으셨습니까? 오늘 말씀은 세계 대표이신 란워드 목자님께서 2026년 전 세계 UBF 방향으로 잡은 말씀입니다. “서로 사랑하라” 이 말씀, 너무나도 많이 들어오지 않았습니까? 어릴 때부터, 신앙생활을 하면서, 수없이 들었던 말씀입니다. 너무 익숙해서, 어쩌면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 말이 되어버렸을지도 모릅니다. 우리 모두는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알고 있는 것과 살아내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2026년을 시작하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가장 기본적인 말씀, 그러나 가장 어려운 말씀을 우리에게 다시 주십니다. 그래서 란워드 목자님 자신도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 앞에서 두려움과 주저함을 느낀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은 다른 사람에게 전하기는 쉬워도, 자기 자신을 가장 깊이 찌르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란워드 목자님이 젊은 시절, 시카고에서 스텝 목자로 섬길 때의 일입니다. 고이사무엘 선교사님은 그에게 몇 차례 메시지를 전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메시지를 전하였는데, 들은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메시지가 참 은혜롭습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아, 하나님께서 나를 장래 유망한 리더로 쓰시겠구나.’ 그러던 어느 날, 고이사무엘 선교사님이 그를 조용히 불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란워드 목자, 메시지를 잘 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을 잘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더 많이 성장해야 합니다.” 그날 이후, 메시지를 전할 기회가 줄어들고, 대신 아주 실제적인 섬김의 훈련이 시작되었습니다. 어느 날은 시카고에 머무는 한 방문 선교사 가정을 돌보라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 가정의 어린 아들은 밤마다 침대에 소변을 보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때로는 침대뿐 아니라 바닥까지 흘러내렸습니다. 그것을 다 치워야 했던 사람은 란워드목자였습니다. 그는 그 순간을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때 저는 깨달았습니다. 사랑은 말로는 쉽지만, 실제로는 너무 어렵다는 것을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배우도록 하기 위해 우리를 낮추시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 요한복음 13장은 예수님의 생애 마지막 밤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바로 앞에 두고 계셨습니다. 제자들과 함께하는 마지막 식사 자리였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한 특별한 이벤트를 준비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냄새나는 발을 한 사람 한 사람 일일이 다 씻어주고 수건으로 깨끗이 닦아주는 일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세 가지 질문으로 따라가 보고자 합니다.

1) 예수님이 주신 ‘새 계명’의 의미가 무엇인가?

2) 우리는 어떻게 서로 사랑할 수 있는가?

3)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1. ‘새 계명’의 의미가 무엇인가?


34절 말씀을 다 함께 읽겠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예수님은 분명하게 “새 계명”이라고 하십니다. 계명은 조언이 아닙니다. 선택 사항도 아닙니다. 반드시 순종해야 할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러나 이 계명은 옛 계명과 완전히 다릅니다. 옛 언약은 “이를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눅10:28)였습니다. 완벽한 순종을 요구하는 율법이었습니다.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단 한 가지라도, 단 한번이라도 어기지 않고 100% 지킬 것을 요구합니다. 문제가 무엇입니까? 아무도 그 율법을 완벽하게 지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유일하게 율법을 완성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자신의 몸을 희생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습니다. 십자가에서 피 흘리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분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습니다. 마지막 만찬 자리에서 예수님은 이미 이 모든 것을 내다보고 계셨습니다. 마26:28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예수님의 피흘리심으로 예수님은 율법의 마침이 되셨고, 우리는 단지 예수님의 피의 은혜를 받아드리기만 하면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회복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새 계명은 우리의 결심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은혜에서 시작됩니다. 우리는 이미 사랑받았습니다. 이미 용서받았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성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스스로 할 수 없는 일을 명하시지만, 실은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명하십니다.” 


2. 우리는 어떻게 서로 사랑할 수 있는가?


답은 분명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방식으로 우리가 사랑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3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이 말씀은 조용하지만 강력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조건이 없으며, 변하지 않으며, 끝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날 밤의 분위기는 결코 평온하지 않았습니다. 사탄은 이미 가룟 유다의 마음 깊숙이 들어가 있었습니다. 배신이 준비되고 있었습니다. 마치 제자 공동체 전체를 폭파하려는 자살 폭탄 테러범과 같았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앞으로 한 제자는 예수님을 배신할 것이며, 한 제자는 부인할 것이며, 다른 모든 제자돌도 다 도망갈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십자가 죽음을 맞이할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영적 전쟁의 한복판에 서 계십니다. 보통 죽음을 앞둔 사람의 심정이 어떻습니까? 두려움과 슬픔과 근심으로 짓눌리기 쉽습니다. 자기 코가 석 자인데, 누굴 돌아볼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우리 주님은 아버지 하나님을 생각했고, 제자들을 생각하셨습니다. 1절 전반부에서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아버지 하나님께로 들어가는 문으로 인식하셨습니다. 고난과 죽음 이후에 아버지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실 것을 굳게 믿었습니다. 이렇듯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을 생각하셨습니다. 1절 후반부에서는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사람들’, 즉 제자들을 생각하셨습니다. 그들에게 자신의 변함없는 사랑을 나타내고자 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감정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감정에 기초한 사랑은 언제든지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제자들의 충성심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의 순수한 충성심조차 그들의 죄와 허물로 인해 나중에 보면 변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사랑은 다릅니다. 왜입니까? 사랑이 예수님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사랑의 근원입니다. 사도 요한이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4:8)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한 자신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내 보이셨습니까? 주님은 겉옷을 벗으셨습니다. 수건을 허리에 두르셨습니다. 대야에 물을 담았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발을 한 사람, 한 사람 다 씻어 주셨습니다. 당시 발 씻김은 가장 낮은 종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기꺼이 가장 낮은 자리가 되셨습니다.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했습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선택이며, 행동이며, 섬김입니다. 


예수님이 이제 베드로의 발 앞에 서셨습니다. “베드로, 발 내 놔~” 그러자 베드로가 완강한 어조로 말합니다. “주님, 찬물도 위아래가 있지, 제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십니다.” 이 말은 겸손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교만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사랑을 자기 방식으로 제한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단호하게 말씀합니다.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아무 관계가 없느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과의 관계는 우리가 무엇을 해 드리는가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분의 씻김을 받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더러운 죄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피는 우릴 깨끗하게 하십니다. 이 은혜가 사랑의 출발점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랑의 특징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4-7) 사랑의 첫 번째 특징으로 “오래 참음”이 나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중요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래참음은 사랑의 기초이며, 인내 없이는 사랑을 지속할 수 없습니다. 오래참음은 감정이 아니라 의지입니다. 다른 사람의 약함을 소망 가운데 감당하게 하는 내적인 힘입니다. 


UBF 한 여자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오랜 시간 돌보던 양 때문에 마음이 지치고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 양은 만성적으로 자기 중심적인 양이었습니다. 어느 주일 예배 시간, 그녀는 더 이상 사랑할 힘이 없다고 느꼈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듣는 가운데 성령께서 그녀의 마음을 터치하셨습니다. 그녀는 예배 마지막 찬송가를 피아노로 치면서 눈물로 회개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사랑이 다시 그녀의 마음을 채웠습니다. 그 후에야 그녀는 예수님처럼 그 양을 계속 사랑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은 우리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흘러들어올 때 가능합니다. 


12-17절은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사랑의 본을 보이신 이유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선생이며,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이렇게 행하셨기 때문에 너희들도 서로의 발을 씻어주라 하십니다. “이제 너희가 이것을 알았으니, 이것을 행하면 복을 받으리라”하십니다. 우리의 실제 삶 속에서 예수님처럼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가 실질적인 방법으로 섬기면 복되다고 하십니다. 한 유명한 성자는 “우리 모두는 위대한 일을 할 수 없지만, 위대한 사랑으로 작은 일들을 할 수는 있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요즈음 날씨가 많이 춥습니다.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 구걸하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는 무언가 돕고 싶어서 호주머니에 넣어 보았으나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는 고민하다가 그 걸인에게 다가갔습니다. 자기 손을 내밀면서 말하였습니다. “돕고 싶은데~ 제게 가진 돈이 없네요. 제 따뜻한 손과 마음을 드리고 싶습니다. 힘내세요.”하며 손을 꼭 붙잡아 주었습니다. 그때 걸인이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저에게 많은 사람들이 적선을 했지만 당신보다 더 큰 사랑을 준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사랑의 관심을 갖는다면 어떤 형태로든 그리스도의 사랑을 흘러가게 할 수 있습니다.  


3. 서로 사랑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사랑은 예수님의 제자의 표식입니다. 지식도, 업적도, 능력도 아닙니다.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가장 먼저 가정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부부 관계에서,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마케도냐 강바나바,페트라 선교사 가정은 큰 시련을 겪었습니다. 강바나바 선교사님은 간 염증 수치가 높아지고 배에 복수가 찼습니다. 마게도냐의 의사들은 “빨리 한국으로 돌아가세요.”하면서 그가 곧 죽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급히 한국에 왔습니다. 공항에서 119를 불러 응급실에 갔는데, 하필 전공의들이 파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함께 온 그의 아내 페트라 선교사님은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예수는 나의 피난처”라는 찬양을 반복해서 불렀습니다. 그리고 강바나바선교사님에게 간 이식이 필요하면 자신의 간을 떼어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한국에서 치료를 받을 때 하나님께서는 고비를 넘기게 하시고 기적적으로 강바나바 선교사님의 건강을 회복시키셔서 다시 마게도냐로 돌아가게 하셨습니다. 돌아온 강바나바 선교사님을 본 마게도냐 의사들은 기적이다고 했습니다. 이후 하나님의 축복은 자녀들과 마케도니아의 젊은이들과 그리고 사업에도 흘러 넘쳤습니다. 작년에 그의 딸 안나와 마케도니아 산야 자매가 세례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현재 강바나바, 페트라 선교사님을 축복해 주셔서 마게도냐 선교사역과 물질자립을 잘 감당케 하셨습니다. 무엇보다 환란 속에서 부부 관계,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 사역자와 현지 양들과의 관계, 이 관계성에서 사랑의 친밀함이 더욱 발전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가장 큰 축복입니다. 


반대로, 사랑이 식어버린 가정은 아이들과 공동체를 낙심하게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가정 교회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고 드러나기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가정에서의 사랑은 가정 붕괴로 고통받는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살아계심을 증언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건강한 가정은 건강한 교회의 기초입니다. 


다음으로,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은 교회내 동역자들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여기 일본 도쿄UBF의 아름다운 동역 이야기는 사랑이 세대를 잇고, 미래를 준비하게 함을 보여줍니다. 정다니엘 선교사 가정과 김요한 선교사 가정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서로를 존경하며 사랑하며 함께 선교역사를 동역해 왔습니다. 그 사랑이 36년간 이어져 왔고,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그리고 각 가정의 아들과 딸이 결혼하여 사돈지간이 되었습니다. 그들 2세 가정이 또 다른 2세들을 사랑으로, 열정적으로, 신실함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일본 UBF 청년대학생들의 롤모델이 되었습니다. 일본 UBF의 밝은 미래를 보게 합니다.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본문의 배경은 예수님의 제자 공동체가 와해될 수 있는 최대 위기상황이었습니다. 한 제자는 예수님을 배반하고, 한 제자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고, 나머지는 다 도망갈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처형될 것입니다. 사단이 미소짓고 있습니다. 아주 치열한 영적 전쟁의 한복판입니다. 이 상황에서 예수님은 이 모든 상황을 역전시키고 승리를 가져다 줄 비장의 무기를 제자들에게 제시하십니다. “서로 사랑하라.” 사도 요한이 이 복음서를 썼던 A.D.90년, 교회가 본문의 상황과 동일하게 어려움에 봉착해 있는 시기였습니다. 교회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로마당국의 극심한 박해를 받고 있었습니다. 거기에다 유대교는 공식적으로 얌니야 랍비회의에서 기독교를 이단시하고, 회당예배 때 낭독하는 기도문에 이단을 저주하는 기도문을 넣어서 본격적으로 반기독교노선을 취하였습니다. 교회는 풍전등화와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사도요한은 60년 전 예수님께서 주신 말씀을 다시 기억하였습니다. 다른 복음서에 나오는 최후의 만찬식에서 거행된 ‘새 언약식’을 생략하고, 대신 예수님의 발 씻기심의 사건을 기록함으로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새 계명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사도요한은 복음서를 받아보는 당시 성도들에게 모든 문제와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는 마스터 키는 주님께서 새 계명으로 주신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에 순종함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우리 UBF도 창립된지 어언 60년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하나님의 은혜로 많이 성장하였고 발전하였습니다. 장막터를 넓혔습니다. 동시에 여기저기서 많은 문제들, 어려움들, 갈등이 생기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2026년 하나님은 우리를 다시 가장 기본으로 부르십니다. “서로 사랑하라.”하십니다. 이 사랑은 우리를 치유합니다. 관계를 회복시킵니다. 공동체를 살립니다. 세상을 향한 강력한 증거가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 사랑하는 외아들을 내어주셨습니다. 우리가 이 사랑을 내 안에 풍성히 채우길 기도합니다. 그리고 이 사랑을 가정에서, 교회에서, 세상에서 흘려보내는 한 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우리도 서로 사랑합시다.